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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기 1권(6화)
第三章 시련은 안개처럼(2)
초관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차를 마실 때는 먼저 그 빛깔을 눈으로 즐기고, 그 향을 코로 음미하고, 한 모금 머금어 맛의 깊이를 아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푸른 다색으로 눈을 씻고, 은근한 다향으로 코를 호강시키고, 감미로운 다미로 혀를 축복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효로는 먼저 향을 잠시 음미하고 살짝 입술을 대 한 모금 머금었다. 알싸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지더니 감미로운 맛이 긴 여운을 남겼다. 저절로 눈을 감으며 음미하던 효로는 잠깐 아득한 느낌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너무 황홀한 맛이라 그런가?’
효로의 반응을 살피던 초관의 눈이 순간 이채를 발했지만, 이내 안색을 바로 한 초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꼭 해야 할 일이 없다. 편한 마음으로 즐겨라.”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지만, 효로의 귀에 들리는 초관의 음성이 점점 멀어져 종국에는 아스라이 먼 곳에서 들리는 환청처럼 느껴졌다. 감당할 수 없는 졸림에 의식이 점점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쨍그랑―
효로의 손에서 떨어진 다기가 박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탁자 위로 축 늘어진 효로의 모습을 보던 초관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꿈이나마 좋은 꿈 꿔라.”
쓰러진 효로의 몸을 침상으로 옮겨 반듯이 눕힌 초관이 먼저 그의 맥문(脈門)을 잡고 기운을 흘려 자세히 살폈다.
내력이 없음을 알고 있지만, 내공을 익힌 적이 있는지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이 나았다. 자신이 펼칠 대법은 내공을 익힌 적이 있는 이에게는 시행한다면 반드시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효로의 몸을 살피던 초관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공을 수련한 적은 없는 듯한데 기맥(氣脈)이 상당히 튼튼했다. 수없이 많은 실험 대상을 진맥했었지만, 기가 흐른 적이 없는 기맥이 이렇게 튼실한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효로의 단전이 아직 개방되지 않은 것을 보면 내공을 수련한 적이 없는 것은 확실하였다. 기맥과 단전의 상태가 일치하지 않는 까닭에 초관은 선뜻 대법을 실시할 수 없어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하나. 좀 더 지켜보다 시행해야 하나?’
대법을 잘못 시행하다가는 아까운 약재만 날리고 구하기 어려운 실험 대상을 잃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곧 좋은 결과를 얻어야만 하는 그로서는 시간을 두고 관찰한 여유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초관은 조금 변칙적인 방법이 머리에 떠올랐다.
‘기맥이 튼실하니 일단 약재의 효능이 발휘되는 것을 조금 늦추고 반응을 지켜보다 일정량 쌓였을 때 한꺼번에 약력을 폭발하도록 한다면, 뜻밖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본래의 대법은 조금씩 약을 지속적으로 투약하면서 점차 양을 증가시키는 방법이었다. 그 방법을 시행하려면 효로를 계속 가사상태에 빠지게 한 다음 그의 반응을 관찰하면서 약재의 종류와 양을 조절하는 등 신중하게 시행해야 하였다. 필요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일시에 투약해 실험 대상이 견딜 수 있는지 관찰하는 방법이었다. 아직 성공한 전례가 없는 방법. 곧 좋은 결과를 보고해야 하는 그로서는 쉽게 택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좋지 않은 결과를 보고한다는 것은 자신의 명(命)을 재촉하는 일이지 않는가.
좋은 결과를 보고하고 목숨을 지키고 싶었던 초관은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는 새롭게 떠오른 방식을 택하기로 하였다. 천천히 약재를 투입해 효로의 몸이 약재를 감당할 시간적 여유를 주면서 적당한 때에 약효를 일시에 터뜨리면 대법이 성공할 확률이 높으리라.
그런 방법은 기맥의 튼튼함에 그 성패가 달릴 터. 기맥이 특출하게 튼튼해 보이는 효로가 아니라면 택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일이 잘못되면 일시에 약재를 투입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이놈아, 어쩌면 네게는 기연(奇緣)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맙게 생각해라.’
비릿한 미소를 지은 초관이 바쁘게 대법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린 효로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찔해진 그가 신형을 비틀거리자 초관이 부드러운 음성을 흘렸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한잠 푹 잤으면, 이제 돌아가거라.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놀란 효로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미 짙어진 어둠이 장막처럼 두텁게 드리워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내일 늦지 말고 오너라.”
“네.”
효로는 당황하고 미안한 마음에 거듭 인사를 하고 초관의 거처를 벗어났다. 휘영청 달이 떠 있었지만, 사물이 아릿하게 다가왔고,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찬바람 쐰 탓인가 조금 정신이 맑아진 효로는 왜 자신이 의식을 잃었는지 곰곰이 생각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효로는 고개를 흔들며 홍 노파의 잔소리를 줄이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소소 누님을 못 뵈었구나. 무슨 일이지?’
걸음을 옮기면서 단소소를 떠올리던 그는 그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슬그머니 들었다. 순식간에 단소소에 대한 걱정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효로.”
싸늘한 음성이 어둠을 뚫고 예리한 비수처럼 효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춘 효로가 음성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가장의 소장주, 단소소의 오라비 단소운(端素暈).
상대를 확인한 효로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소장주님.”
먼발치서 보기만 했지 직접 마주친 것은 처음인 효로로서는 가슴이 떨렸다. 소소 누이의 오라비라는 상대의 신분이 효로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신 오라비가 나타난 것을 보면 그녀에게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불길한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섣불리 입을 열어 그녀의 근황을 물을 수도 없었던 효로는 그저 시선을 깔고 상대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감히 네놈이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느냐?”
단소운의 음성은 옷깃을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조차 한 수 접을 정도로 싸늘하고 날카로웠다.
효로는 그제야 왜 단소소의 모습을 볼 수 없었는지 짐작이 가 안도하는 한편으로 불안해졌다. 가족이니 단소소에게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싶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걱정은 사라졌으나, 이대로 계속 단소소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걱정이 떠올라 불안한 것이다.
자신의 호통에도 꿋꿋이 버티고 선 효로를 보자니 단소운은 안 그래도 고개를 내밀던 분노가 더욱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말을 밝혀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찍이 단가장주가 들었던 떠도는 소문을 차례차례 찾아 듣다 보니 직접 보지 않아도 어찌 돌아가는지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하나 중도에 소문을 쫓아가기를 멈추고 달려온 그로서는 그 소문의 시작이 글 선생인 초관이라는 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하기는 분노로 눈이 어두워진 그가 설사 알았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터였다.
그도 효로의 처지를 알았다. 마을 사람들이 동전 몇 닢으로 온갖 궂은일을 시키는 종 같은 놈. 데려온 노인이 버리고 떠나 버려 고아가 되어 버린 놈. 입성조차 허름한 효로는 거지와 다름없이 보였다. 이런 놈이 꽃 같은 누이를 감히 넘보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몸에서 흉험한 기세가 확 피어올랐다. 높은 경지를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화산의 고명한 도인에게서 사사한 정종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
뿜어진 무인의 날카로운 기세는 무공을 익히지 못한 효로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더구나 초관의 대법으로 정상이 아닌 그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심장 어림에서 극통이 확 피어났다.
“쿨럭.”
기침을 뱉은 효로가 바닥에 가슴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한순간에 치밀어 오르는 통증에 효로는 숨이 턱 막혀 왔다.
효로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심하게 기침을 하자 단소운은 그가 엄살을 피우는 거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기상인(意氣傷人). 그저 기세를 피움으로 상대를 상하게 한다는 높은 경지가 있음은 알았지만, 아직 자신에게는 꿈에 불과했다. 그의 눈에는 효로가 매질을 피하려 일부러 취한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단소운은 이를 으드득 갈면서 으르렁거렸다.
“놈! 잔꾀를 피우는 것이냐?”
버러지 같은 효로의 모습에 불같은 화가 치밀었다. 저런 놈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동생을 울게 한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수련에 쓰는 단단한 목검을 겨눈 단소운이 쏜살같이 다가오더니 맹렬하게 휘둘렀다.
퍽― 퍽― 퍽―
가슴을 찢어발기는 통증에 효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저 휘둘러지는 목검의 움직임에 따라 들썩거릴 뿐이었다.
퍼벅― 퍽―
한참 휘둘러지던 목검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차마 내공을 실어 때릴 수 없었던 단소운이 그저 근력에만 의지했던지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야멸찬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놈, 단단한 몸뚱이를 믿는 모양이구나.”
처음부터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면 엄중한 경고만 던진 채 물러날 생각이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작은 신음만 흘리는 효로가 여전히 살려 달라는 애원조차 하지 않자 자신을 능멸하는 것으로 생각한 단소운이 다시 목검을 들더니 이번에는 인정사정없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퍽― 퍽― 퍼벅―
머리가 터지고, 온몸에 퍼런 줄이 죽죽 그어졌다. 깨진 머리에서 피가 흘렀고, 선홍색 피를 입으로 토하면서도 효로는 전혀 피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 단소운의 손속이 매운 탓도 있었지만, 몽롱한 정신은 그의 동작을 굼벵이처럼 한없이 굼뜨게 만들었다.
퍽―
한동안 이어지던 모진 매질이 멈추었다. 단소운은 피를 흘리며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효로의 모습이 보기 싫어 침을 퉤 뱉고는 몸을 돌려 가 버렸다.
단소운이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꿈틀거리기만 하던 효로가 몸을 뒤집더니 힘겹게 땅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늘이 돌고, 땅이 돌고,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빙빙 돌아 어지러움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아니, 눈을 뜨려 해도 어느새 부풀어 오른 눈두덩이 너무 무거웠기에 겨우 실눈을 떠 길을 더듬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깨진 머리에서 시작한 뜨뜻한 느낌이 그의 뺨과 목덜미를 간질이며 흘러내렸지만, 손을 들어 확인할 기운도 없었다.
머리를 뚫고 지나가는 격통(激痛).
효로는 이를 악물고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몇 걸음 옮기고 잠시 쉬고, 다시 걸음을 옮기고서 잠시 호흡을 고르기를 반복하면서도 퉁퉁 부푼 그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렸다. 아릿한 정신임에도 단소운이 매질을 시작하기 전에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오르지 못할 나무.
‘그래, 누님은 어쩌면 너무 높은 곳에 있는 선녀일지도.’
눈에서 핏물인지 눈물인지 따듯한 물줄기가 흘렀다. 겨우 뜬 실눈이 뿌옇게 흐려졌고, 균형을 잃은 그의 몸이 크게 휘청했다.
연모하면 안 되는 사람인가.
‘보고 싶다.’
잊어야 하는가.
‘그래도 보고 싶다.’
눈을 감으면 보일까.
‘죽을 만큼 보고 싶다.’
달에 덧보이는 그녀의 화사한 얼굴이 흐릿하게 다가왔다. 엉망으로 변한 효로의 얼굴에 눈물로 얼룩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당장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지금 몸을 눕히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듯한 느낌에 안간힘을 다해 걸음을 옮긴 효로가 겨우 자신의 방에 도착했을 때는 효성(曉星)이 동녘에 모습을 드러내 그를 차갑게 지켜보고 있었다.
냉골 같은 방에 도착해서도 효로는 몸을 누이지 않았다. 습관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호흡에 집중했다. 기감조차 느끼지 못한 그에게 큰 효과가 있을 리 없지만,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운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지금 누우면 죽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제대로 장작을 패지 못한 효로는 결국 아침조차 얻어먹지 못해 주린 배를 안고 비칠거리며 단가장으로 향했다.
이목구비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부은 얼굴과 비칠거리는 걸음은 보는 이의 연민을 자아내기 충분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지 그에게 쏟아지는 것은 손가락질과 수군거림뿐이었다.
“저놈 얼굴이 왜 저래?”
“자네 몰랐나? 단가장 소장주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네.”
“소장주가 왜?”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았으니 화를 자초한 게지.”
“아, 소소를 말하는 모양이군.”
“그렇지.”
“언감생심 바랄 걸 바라야지. 꼴좋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