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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의 요리법

1화

Chapter 1


남자는 갑자기 신발장에서 튀어나왔다. 얇은 나무 문을 기미도 없이 발칵 열고 돌진하듯 나타난 것이다. 그다음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신발장 앞 현관에서 숙식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주거지에서 현관이란 그저 작은 통로일 뿐인 협소한 공간이다. 거기를 광야라도 질주하듯 힘껏 내달렸으니 결과야 뻔하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남자는 성대하게 맞은편 벽에 처박혔다.

집이 약간 흔들린 것 같았다. 보고 있던 내가 다 아플 정도의 충돌이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는 그가 밀려드는 아픔을 수습하고 이쪽을 돌아보는 것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약간 벌려진 입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선, 엉거주춤한 자세가 노란 현관 센서 등에 물들어 조금 멍청해 보였다. 아마 나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남자가 걸친 치렁치렁한 망토가 스르륵 앞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계기로 우리는 간신히 일시 정지 상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멍청함까지 그만두지는 않았다. 주거지에 갑자기 불법 침입한 괴한에게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수많은 행동을 취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어, 마실래요?”

옆에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맥주 캔 중 적당한 것을 들어 앞으로 쭉― 내밀고 양쪽으로 가볍게 흔들었다. 탄산이니까 흔들면 안 된다는 깨달음은 3초 뒤에 찾아왔다. 아, 그 전에 맥주 캔은 비어 있었다. 음, 이미 마신 거였군. 아, 아마 실제 발음은 ‘뫄스일르이에오오?’에 가까웠던 것 같다. 미안해요, 침입자. 이게 최선이었어. 아, 침입자니까 미안해할 필요는 없나?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어디 아직 비지 않은 캔은 없나.

뭐, 이때 적당히 비명을 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좀 더 좋았을지도.

하지만 일주일이라는 전대미문의 장기 휴가를 맞이해 마트에서 살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술을 사다가 맛보는 짓을 하면서, 스스로를 심신 미약의 상태에 빠뜨린 지 오래된 내가 하기에는 둘 다 지나치게 멀쩡한 짓이었다. 지금 내 상태에서 가장 적절한 행동은, 빈 캔들을 쓰러뜨리면서 아직 마시지 않은 술을 찾는 정도?

어쨌든 더듬듯 캔들을 쓰러뜨리는 동안 남자는 자세를 가다듬고 구둣발로 성큼 집 안에 들어섰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구둣발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구두 굽이 마루와 마찰하는 선명한 소리는 어느새 본 목적을 잊고 술을 찾아 배회하던 내 시선을 잡아 끌기 충분했다.

그러니까, 일주일간 깨끗한 집에서 빈둥거리고 싶어서 퇴근 뒤의 지친 육신을 질질 끌면서 청소기를 돌리고 큰맘 먹고 물걸레질까지 한 거실 바닥에 신발을 신은 상태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는 것이다. 불결하고 무도하고 흉악한 가죽 구두를 보란 듯이 내세우면서.

잠깐 첨언하자면, 쓸데없이 극적으로 치닫는 술꾼의 사고에 대해 먼저 심심한 사과의 뜻을 표하고 싶을 따름이다.

“야아아―!”

인지하기도 전에 외침이 입 밖으로 뛰쳐나갔다. 술이라는 것은 몇 가지 특성이 있는데, 사람의 기분을 매우 좋게 만들거나 매우 나쁘게 만들거나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흐름을 극단적으로 만드는 것 또한 그 특성 중 하나에 해당된다.

그래서 친해지려고 술 마시고는 자기도 모르는 새 부장님 멱살도 잡고 그러는 게 아니겠어? 물론 나는 집에서 마시기 때문에 기껏해야 성능이 부실한 가전제품 따위에 푸념하는 정도로 끝날 예정이었지만, 오늘은 아니다.

아, 물론 술에 노곤노곤해진 외침은 매우 힘이 빠져서 실제론 야아하아아햐아 같은 윽박지름인지 요들송인지 모를 소리가 되고 말았다. 덕분에 그럴듯한 위협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었지.

“신발 벗어! 어딜 집에 신발을 신고 들어오려고…….”

아마 대충 이렇게 말한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스인브아알 브어서어! 정도이지 않았을까. 남자는 내 외침에 놀랐는지 조금 움찔하더니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 들어오려던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말을 못 알아들은 모양이라 나는 손가락을 들어서 남자의 신발을 가리켰다. 다행히 눈치가 빠른 편인 듯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남자의 차림을 조금 자세하게 뜯어볼 수 있었다. 과연 벗을 수 있는 형태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끈이 복잡하게 묶인 가죽 신발은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올라오는 긴 부츠였다. 부츠의 양쪽에는 각각 단검 같은 게 하나씩 매달려 있었고, 고동색 망토에는 금색과 은색, 검은색 실로 마법진 같은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특히 압권인 것은 망토 안쪽에 입고 있는 복장이었는데, 바지야 그냥 검은색의 심플한 것이었지만 윗도리는 뭘 어떻게 껴입었는지 분간도 안 될 만큼 복잡했다. 그래도 설명을 하자면, 대충 셔츠를 입고 그 위에 얇은 가죽조끼를 걸친 다음 코르셋 같은 형태의 두꺼운 벨트로 겉을 감싸고 있었다.

그 두꺼운 벨트가 일종의 ‘복갑’이라고 부르는 복부 갑옷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어쨌거나 남자의 옷차림은 보편적인 현대인의 평상복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런 걸, 코스프레라고 하던가?

‘무슨 게임에서 튀어나오셨어요?’라고 묻고 싶어지는 복장만으로도 이미 질릴 지경인데 남자가 신발을 모두 벗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남자가 쭈그리고 있는 동안 꺼져 버린 센서 등 아래, 어두컴컴한 현관에서 남자의 눈이 보란 듯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고양이처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신발장에서 안구가 발광하는 코스프레한 남자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현실감이 멀어지는 요소가 한두 개가 아니다. 기겁해서 경찰을 부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창백한 얼굴로 패닉에 빠져야 함이 마땅했지만 알코올에 절여져서 쓸데없이 친근감 넘치고 긍정적으로 변해 버린 뇌는 짧게 판단했을 뿐이다.

아, 외국인이구나.

물론 누군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아니, 아니거든!’이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 결론 덕분에 순식간에 침착성을 되찾았다. 외국인이라 신발 신고 들어오려고 한 거구나. 하긴, 서양은 신발 신고 집에 들어오는 문화였지. 그래그래, 그럴 수도 있는데 내가 막 소리치고 너무 심했던 것 같다. 나는 순순히 반성하면서 널브러져 있는 맥주 캔 중 손에 잡히는 것을 대충 들이켰다.

상대가 외국인이라고 단정 지은 후 나는 매우 너그러워졌다. 이제 길가에서 흔히 외국인을 접할 수 있다곤 해도 아직 외국인은 꽤 신기한 존재가 아니던가. 습관적으로 ‘두유 노 김치?’라고 묻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나는 만면에 손님용 미소를 머금었다. 손님이 신발장에서 튀어나왔다던가, 허리춤에 기다란 브로드 소드 같은 걸 장비하고 있다거나 하는 건 지금의 내게 있어서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중요한 건, 외국인 술친구가 생겼다는 것이다.

혼자서 먹기에는 꽤 많은 양의 음식을 준비한 덕분에 나는 굉장히 마음 씀씀이가 후해진 상태였다. 함께할 사람이 한두 명 늘어나는 것은 반가우면 반가웠지 절대 꺼려지는 일이 아니다. 호젓하게 즐기는 혼자만의 휴식도 좋지만 재밌고 흥미로운 누군가와 함께 어울리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발장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이 눈이 번쩍이는 청년은 매우 좋은 술친구였다. 이 사람이 흥미롭지 않다면 누가 흥미롭겠는가? 아, 물론 신발장이 아니라 신발에서 튀어나왔다면 더 흥미로웠겠지. 당연히 이건 술에 만취되어 모든 인류를 사랑하게 된 나의 판단이다. 제정신인 분들은 절대 따라 하지 마세요. 찡긋.

“이거어, 외국인 손님이구나. 미안미안. 들어와요, 들어와. 신발은 거기 두고. 여기 앞에 앉아요. 자자.”

내가 갑자기 살가운 태도로 자리를 권하자 벗은 신발을 들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남자가 신발을 가슴팍에 껴안았다. 어지간히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보아하니 아마 저 신발은 명품인 모양이다. 그래도 밥상 앞에 신발을 들고 오는 태도를 용서할 수는 없어서 나는 눈썹을 역 팔 자로 꺾고 손가락질했다.

“신발은 거기 두고.”

그가 어색하게 신발을 현관에 내려놓는 것을 확인한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간신히 남자 몫의 포크와 앞접시를 세팅했다. 포크와 접시가 자꾸 도망가고 방바닥이 탄력적으로 울렁거려서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던지듯 접시들을 세팅하고 반쯤 고꾸라져 앉고 나니 남자의 발이 눈앞에 보였다.

멀리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온 것을 보니 키가 무척 컸다. 대충 어렴풋이 190cm 정도는 되어 보였다. 솔직히 가늠하기는 좀 힘든데, 아마 내가 앉아 있어서 크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으음, 아니, 역시 큰 것 같다. 아닌가. 일어서서 재 보긴 힘든데. 그나저나 왜 안 앉는 거지?

“앉으시죠?”

아무래도 내 말이 조금 곤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음, 하긴 외국인들은 좌식 생활을 힘들어한다고 했던 것 같다. 혼자서 식탁에 앉아 먹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바닥에 되는대로 음식 접시를 내려놓고 뒹굴거리면서 집어 먹고 있었기 때문에 앉을 만한 의자는 없었고, 음식들을 식탁으로 옮기는 것도 귀찮다. 게다가 포크 하나 가져오기 힘든 이 몸으로는 옮기다가 쏟아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거 받고 앉아요.”

빈 캔들 사이에서 간신히 찾아낸, 알맹이가 있는 술을 집어 내밀자 얼떨결에 받아 든 남자는 매우 조심스럽게 나를 관찰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바닥에 앉는 것이 무척 어색한지 어설프게 내 가부좌를 따라 하려는 모습이 꽤 안타깝다. 그래도 식탁으로 옮기는 건 너무 귀찮아.

결국 그는 무릎을 꿇었다가, 다리를 벌렸다가, 마지막에는 조신하게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눕혀 얌전한 자세로 자리 잡았다. 나는 물론 도와주지 않고 술을 마시면서 그 웃긴 모습을 구경했다. 190이 넘는 떡대 남자가 저렇게 다소곳하게 앉는 걸 언제 또 구경할 수 있을 줄 알구?

“그나저나, 누구세요?”

내 질문에 남자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음. 하긴 좀 늦은 감이 있긴 했다. 그 전에 해야 할 질문이 있었는데 깜빡했군.

“너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웨 아유 프롬? 한국말 못 해요? 우리 영어로 말할까?”

남자는 다행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다행인 일이다. 나는 스스로 멀쩡한 영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웨―웨아아?’ 같은 구토 시동음 같은 걸 내고 있었으니까. 웨― 웨― 하다가 웨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영어로 대화하자고 했으면 사람과 개구리가 나누는 수준의 회화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내가 엉터리 화법을 써먹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남자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신기한 얼굴로 접시, 음식, 밥상 따위를 관찰했다.

그사이 나는 흐릿하게 뭉개지는 초점을 억지로 끌어모아서 그를 살펴보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인데, 그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외국인으로 보이긴 했지만 서양인 같은 이목구비는 아니었고, 굳이 말하자면 요즘 유행하는 전자남친 같은 느낌이랄까. 약간 가느다란 아몬드형 금색 눈에, 유전자가 어떻게 꼬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촘촘한 까만 속눈썹이 무척 잘 어울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나는 한참 동안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술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반쯤 풀린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리고 있으니 어쩐지 점점 나른해진다. 아니, 사실 그가 신발장에서 나타나기 한참 전부터 나는 나른해지고 있었다. 그가 튀어나온 덕분에 술이 잠깐 깬 거였지. 어릴 때 약을 잘못 먹어서 술에 영 약한 체질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휴일 전날에나 이렇게 술을 마실 수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은 휴일이네. 그러면 자도 되겠군.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