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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예감한 건 꽤 자주 들어맞는다. 뭐, 그렇게나 끈질기게 굴었으니 예감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의 재방문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만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나 빨리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나는 최소한 하루 정도는 지나서 올 줄 알았어…….

남자가 다시 찾아온 것은 내가 한껏 쉬고 주섬주섬 난장판이 된 집 안을 정리하던 때였다. 정확히는 대충 죽을 끓여 속을 달랜 덕분에 그럭저럭 찾은 기력으로 어제의 여운을 청소하려던 무렵이다.

더러운 접시들을 겹겹이 쌓아 들고 나르던 나는 마치 현관문마냥 자연스럽게 신발장 문을 열고 나온 그와 그대로 눈이 딱 맞았다. 현관문이라도 여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신발장을 드나드는 걸 보니 그건 신발장이고, 보통 출입구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할 때가 한참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망연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출구는 바로 옆이니까 그대로 나가시면 됩니다.’라는 말이 불쑥 치솟는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우물우물 서 있던 그가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여 왔다.

“그 후 별일 없이 평안한 시간을 보내셨길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그랬는데 이제 별일이 생길 것 같네요. 눈으로 한껏 이렇게 말해 봤는데 그가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다.

시간은 저녁 7시. 손님이 오기에는 좀 늦은 시간이다. 남자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지도 네 시간 정도 지났을 뿐이다. 술독으로 반시체인 이 몸은 내내 집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별일이 있었을 리가. 어쨌든 그가 가만히 침묵을 지키며 서 있는 모습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대꾸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행입니다.”

언제까지나 엉거주춤하게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르던 접시를 들고 부엌으로 향하자 자연스럽게 남자가 뒤로 따라붙었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역시 뒤에 누군가가 따라붙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 상대가 자기 몸의 두 배쯤 되는 남자라면 더더욱. 나는 곤두서는 신경을 내리누르며 그가 내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식탁 의자에 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식탁에 다소곳이 앉아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는 그를 마주하자니 마치 아침에 있었던 일이 그대로 다시 일어나고 있는 기분이다. 시간만 조금 바꿔서. 아마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도, 혹은 내일 저녁에도, 아니면 한 달 뒤에도 같은 광경이 반복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다. 뭔가 해야 해. 그게 뭐든. 설령 하나도 먹히지 않을 설득이나 거절이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저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건데 장난이라면 슬슬 그만두시고 진짜라도 그만두세요. 장난이면 장난에 어울릴 생각 없고요, 진짜라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 받아들일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나가 주세요.”

식탁에 마주 앉는 대신 팔짱을 끼고 말하면서 나는 내심 그가 순순히 포기하고 나가 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나가 달라고 해서 나가 준다면 불청객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비장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말 자체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그의 시선이 향하는 지점이 문제였다. 그는 내가 먹다가 내버려 둔 죽 그릇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조차도 잊고 있던 그 잡탕죽은 바닥의 먹고 남은 음식들과 함께 음식물 쓰레기봉투로 여행을 떠날 운명이었다. 쓸데없이 빠른 눈치로 나는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금세 알아 버렸다.

어쩐지 두 번의 방문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신발장에서 나온다. 그리고 식탁에 앉는다. 무언가 먹으면 나의 신뢰 포인트가 오른다는 수수께끼의 논리적 절차가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내 추론을 증명하려는 듯 먹다 남은 죽 그릇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잠깐, 잠깐. 그건 먹다 남은 잔반이에요.”

나는 가까스로 죽을 마시려는 그를 제지했다. 그래도 음식을 만드는 직업을 가졌는데 누군가가 잔반을 먹는 것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이놈의 망할 직업병. 죽 그릇을 끌어당겨 개수대로 던지며 나는 한숨과 함께 그의 착각을 정정했다.

“식사를 한다고 무조건 신뢰가 생기는 건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순순히 납득하긴 했지만 그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변명처럼 덧붙였다.

“여기에는 음식을 먹으면 신뢰하는 문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극단적이군. 하지만 만약 이 사람이 정말로 다른 세계에서 와서 이쪽 문화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물론 같이 음식을 먹으면 즐겁고 호감이 생기기도 하지만 불청객이 찾아와서 냉장고를 다 털어 먹는다고 해도 애정 같은 건 생기지 않아요. 만약 그런 문화가 있었다면 우리 레스토랑의 잔반을 먹고 가는 떠돌이 고양이랑 저는 결혼 직전이었을 거예요.”

냉소적으로 말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이게 내 최대의 친절이었다. 사실 이 상황에 친절이라는 걸 발휘하는 것도 대단한 것이다. 이 사람이 경찰의 눈에 보였거나, 조금만 더 강압적이었다면 상황은 지금과 좀 달라졌겠지.

나는 다시 한숨을 쉬고 결국 의자를 끌어다가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몹시 귀찮고 수상한 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말의 부드러운 태도를 가지고 그를 상대하는 이유는 몹시 어리버리한 그의 모습이 큰 요인이었다. 지금도 음식을 먹는 것으로 호감을 살 수 없다는 걸 알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소금 쳐 놓은 배추처럼 시무룩하게 고개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라. 성가신 것도 성가시지만 그런 모습에 인간적으로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 상황이 곤란한 건 사실이다. 이 사람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경찰은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주변 사람에게 상담하는 건 더욱 곤란하다. 신발장에서 다른 세계 사람이 튀어나와서 세계를 구해 달라고 하는데 어떡하면 좋으냐 상담한다고 절교당하지는 않겠지만, 진지하게 병원을 추천해 주기는 할 것 같았다.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데 남자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고양이와 사귀십니까?”

“비유법이죠!”

좋아. 알겠다. 이 사람이 그런 척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대한 상식이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건 알겠다고. 그렇다고 그가 하는 황당한 소리를 그냥 다 믿을 수는 없지!

“뭐 좋아요. 백번 양보해서 당신 말이 진짜라고 쳐도, 제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요? 신뢰를 얻어서 제 선량한 마음에 대고 호소할 생각이라면 그만두세요. 어지간히 선량한 사람이라도 갑자기 이상한, 그러니까 신발장 안에 들어가서 세상을 구해 달라는 둥 하면 최대한 선의를 발휘한다고 해도 정신 병원에 넣어 주는 정도일걸요.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아무리 신뢰를 얻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당신이랑 갈 생각이 전혀 없어요.”

내가 다시 강경하게 거절하자 그가 뜻밖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로 명령받은 것이 있습니다.”

“명령?”

“태양의 숲 선지자들이 명하기를, 당신의 곁에서 무엇이든 도우라고 했습니다. 믿음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 뭐든 시켜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3만 9천900원짜리 수상한 사람을 0원에 드립니다. 일단 써 보시고 결정하세요!’ 같은 체험 상품도 아니고, 당신을 옆에 두면 믿게 될 거라고요? 그 선지자라는 사람들이 그랬어요?”

숨의 가호인지 뭔지를 받아서 말이 통한다고 했는데도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태도에 나는 마침내 폭발했다. 그러나 온몸으로 어처구니를 상실하며 따지면서도 당장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나가!’라고 외치지 않는 이유는 그의 눈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지자라는 자들의 헛소리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기도 했고.

“그렇습니다.”

“필요 없어요. 그냥 떠나든가, 차라리 그냥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어때요? 저는 절대로 가지 않을 거고, 설득될 생각도 없으니까.”

애초에 나에게는 그를 물리적으로 돌려보낼 방법도 없고, 그렇다고 말이 통하는 것도 아니니 이 상황에 대한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 그저 이 남자가 난폭한 짓을 하지 않는 걸 고맙게 여겨야 하나. 무력한 기분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못 박자 남자가 조금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저는 이곳에 머물며 당신을 모시라고 명받았습니다.”

“그건 그쪽 사정이고……. 잠깐, 머문다고?”

누구 마음대로? 당당하게 식객이 되겠노라 선언하는 그에게 나는 다시 소리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왔을 때보다 옷차림이 꽤 가볍다.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이나 이상한 갑주, 길쭉한 부츠 대신 천으로 된 셔츠와 바지, 허리춤에 있는 단검, 작은 주머니 정도가 차림새의 전부였다.

어디론가 멀리 갈 일도 없고, 어차피 여기서 숙식을 할 테니 아예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왔다는 건가. 물론 그 결정에 내 허락 같은 건 생각도 안 했겠지.

“아, 아, 아니, 내가 왜 여기에 머물게 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왜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말이 부탁이지, 사실 남자가 지금까지 한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거절 따위는 고려하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물론 나는 그를,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이 사람을 집에 머물게 해 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요.”

손을 들어 현관문을 가리키자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나 망설임 없는 움직임에 말한 내 쪽이 당황할 정도다. 정말로 나가는 건가? 그렇게나 실랑이했는데, 그냥 나가라고 하면 해결되는 문제였던 거야? 마치 문을 필사적으로 밀다가 ‘당기시오’라는 글씨를 발견한 것 같은 허무함이었다.

부탁드린다든가, 머물게 해 달라든가 하며 귀찮게 굴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 외로 담백한 태도였다. 정말 떠나는 건가 해서 뒤따라 나갔더니 그는 현관 앞에서 문고리를 잡고 당황하고 있었다. 아마 도어록 여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드디어 집을 나가 준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뻐서 나는 냉큼 뛰어가 문을 열어 주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훅 끼쳐 들어왔다. 남자의 옷깃이 조금 팔락거린다. 문득 그가 입고 있는 얇은 옷차림이 신경 쓰였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추우면 적당히 어디론가 떠나겠지. 지금은 쓸데없는 친절이 나설 때가 아니다. 지금이 아니면 남자를 집에서 쫓아낼 수 없을 거라는 위기감이 나를 매정하게 만들었다.

그는 문밖의 차가운 공기에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확실히 보일러가 돌아가는 실내와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긴 하지. 그러나 다행히 떠나지 않겠다든가, 추우니 다시 들어가겠다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집을 나서며 그가 잠깐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가 집을 나간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문을 닫고 잠가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본 것은 내 쪽으로 살짝 돌아가던 그의 턱이 전부였다.

나갔다. 드디어.

하루 종일 나를 불편하게 만들던 불청객을 마침내 쫓아냈다는 안도감에 길게 숨을 뱉었다. 하지만 어쩐지 실감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