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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를 식탁 의자에 앉히고 바로 마주 앉기에 영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이리저리 움직여서 예쁜 찻잔에 차까지 끓여서 내놓고 나니, 상황이야 어떻든 그럭저럭 평화롭고 정상적인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물론 그의 패션이 시대에 조금 뒤처져 있긴 하지만. 한 천 년 정도? 옷차림만 봐서는 이 친구가 유럽 땅을 발견했다고 해도 믿겠다.
마주 앉은 탁자 위로 공기가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긴장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찻잔을 쥐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긴 했지만 긴장으로 얼어붙은 손끝에 찻잔의 온기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뜨거운 차를 입 안에 홀홀 밀어 넣고 다시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저는 태양의 숲 소속의 섬기는 자 니모입니다.”
“쿨럭! 케엑! 켁!”
갑작스러운 자기소개에 뜨거운 물로 식도를 데쳐 버리고 말았다. 내가 성대하게 기침을 하자 오히려 그가 더 놀란 모양인지 두툼한 어깨가 펄떡 튀어 오른다. 그 모습에 나는 지금 이 상황에 긴장하고 있는 것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비교적 반가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도 나 못지않게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간신히 사레들림을 수습한 나는 덕분에 조금 풀어진 상태로 그를 마주 볼 수 있었다.
“태, 태양의 숲?”
나는 약간 뒤집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보통 ‘저는’으로 시작해서 ‘다’로 끝나는 문장은 자기소개이기 마련이지만 그가 한 말 중에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예. 제가 속해 있는 곳입니다.”
“어, 음. 뭐 하는 곳인데요?”
“세계의 광영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아……. 예.”
음, 뭐랄까. 차림새를 봤을 때부터 정상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거창한 단어의 모임을 듣고 있으니 심히 표정 관리를 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의심과 환멸로 가늘어지는 눈매를 수습하며 확인차 물었다.
“저기, 혹시 뭐 귀신이나 그런 거 아니시죠? 그런데 아까 경찰도 아저씨를, 어 흠, 그쪽을 전혀 모르는 것 같고. 아니, 그게 안 보이는 것 같고.”
아저씨라는 단어가 혹시 심기를 거스를까 봐 나는 재빨리 말을 얼버무렸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은 후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귀신이 망자를 뜻하는 것이라면,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다른 세계에서 당신을 찾아 이곳으로 왔습니다.”
와― 다른 세계 나왔다. 약간 식은 차를 호로록 마시며 나는 찻잔 속으로 표정을 감췄다. 본인 입으로 귀신이 아니라고 했으니 일단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정신이 아닌 귀신과 티타임을 하고 있다는 현실은 되도록 부정하고 싶어. 그것도 외국 귀신.
그런데 과연 제정신이 아닌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제정신이 아닌 귀신과 대화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할까.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저울질하며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마구 질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귀신이 아니라면 왜 경찰이 그쪽을 못 본 거예요? 혹시 투명 인간?”
“니모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자. 상위 차원인 이곳에서는 처음 인연을 가진 자아소유영혼 하나에게 존재를 인식시키는 것이 고작입니다.”
“자아소유영혼?”
“이곳에는 없는 말입니까?”
“일단 저는 처음 듣는데요.”
으음, 종교 단체 같은 곳에서나 들을 만한 단어군. 흔하게 쓰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턱을 문지르며 조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스스로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고등적인 정신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충 추측하자면 내 신발장에서 튀어나와서 만난 생물 중 자살할 수 있을 정도의 사고력을 가진 생물 하나 정도에게만 모습이 인식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음, 만약 인간이 아닌 생물을 처음 만났다면…….
나는 바퀴벌레나 햄스터 앞에서 진지하게 협조를 요청하는 그를 상상해 보았다.
여러모로 비참했겠군. 앗, 그런데 걔네들이 자살을 하던가?
“뭐, 납득은 안 되지만 그건 그렇다고 치고,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요?”
“그렇습니다.”
“이쪽 세계 말을 상당히 잘하시네요?”
어쩐지 입 밖으로 나가는 말투가 점점 취조에 가까운 형태로 변해 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무슨 매일 아침 만화 영화와 함께 체조를 하며 눈을 뜨는 소형 기저귀 사용자도 아닌데 처음부터 끝까지 허무맹랑한 이 말을 무턱대고 믿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내 가느다란 의심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우직할 정도로 꿋꿋하게 대답했다.
“흐름의 신 숨의 가호를 입고 온 덕분입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 가호가 제 몸에 머무는 동안은 말이 통할 겁니다.”
그 말대로라면 잠시 뒤에 말이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아니면 갑자기 외계 언어를 지껄이며 내 말을 못 알아듣는 연기를 펼치겠다는 뜻이거나.
한숨을 푹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린 나는 이마를 짚은 양손 아래로 남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 남자가 하는 말은 솔직히 제대로 귀에 들어오는 게 거의 없다. 게다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진짜 알고 싶은 건 이거 딱 하나뿐이다.
“그래서, 왜 날 찾아온 거죠? 협조라는 건 또 뭐고?”
한 박자 쉬고,
“목적이 뭡니까?”
남자는 쓸데없이 단정한 얼굴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경건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듣기도 전에 어쩐지 대답을 알 것만 같았다.
“저와 함께 가서 세계를 구해 주십시오.”
그럴 줄 알았다.
“제가 왜요?”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즉각 되묻자 남자는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반갑게, ‘네, 알겠습니다. 가시죠.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우리 집 신발장에서 튀어나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서 내 삶과 하나도 관계없고 망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닌 이상한 세상을 구해 달라고 하기를 말이죠! 그러니 어서 가서 개고생을 해 봅시다!’라고 말하기를, 정확히는 저 비슷한 긍정을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당신이 가지 않으면 한 세계가 멸망합니다.”
“그래서요?”
“비극을 맞이할 수많은 사람들을 외면할 생각입니까?”
아니, 외면하기 전에 일단 마주한 적조차 없는데.
“그런데요.”
“무, 무슨 그런…….”
내 태연한 대답에 남자는 처음으로 평정을 잃고 말을 잇지 못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차마 말을 빚어내지 못하는 그 안타까운 입술을 바라보다가 나는 크게 소리 내어 한숨을 쉬고 식은 차를 단숨에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저, 기, 요. 애초에 진―짜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말을 믿지도 못하겠지만, 만약 정말정말 다른 세계에서 오셨다면 말이죠. 제에발 부탁이니까 그쪽 세상 일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결해 주실래요? 그게 아니면 그냥 운명이니 받아들이시고요. 지금 이쪽 세상도 나름 굉장히 시끄러워요. 여기는 무슨 천국이라도 되는 줄 아세요? 내일모레라도 전쟁 나고 핵 터져서 다 죽거나 전염병이 음악 차트 순위 경쟁하듯이 번갈아 가며 돌고 있다고요. 그런 마당에 알지도 못하는 세상에 내던지려고 수십 년간 내 인생을 고이 가꿔 온 거 아니거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 같은 수상한 인간을 무턱대고 따라나설 리가 없잖아요?”
기나긴 말을 마치고 나니 입이 말라서 찻잔을 다시 채웠다. 우아한 물소리가 적막을 대신하는 사이 나는 채 가라앉지 않은 흥분을 삼키며 코웃음 쳤다. 종교 단체 권유 거절 경력 10년이다 이거야.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참신하지도 않은 권유에 넘어가는 현대인이 어디 있어? 마음을 단단히 굳히고 도전적인 시선을 던지는데, 뜻밖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남자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솔직히 줄줄 말해 놓고도 그가 갑자기 커다란 자루라도 꺼내 들면서 ‘말로 하는 건 여기까지다!’ 하고 협박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순순한 태도에 끌어모았던 전의가 단숨에 식는다.
“딱히 신뢰 문제가 아니라― 너무 허무맹랑한 말을 하잖아요. 아무리 신뢰를 쌓는다고 해도 그런 소리를 믿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있던 믿음도 다 깨질 만한 소리구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좋은 사람인 건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결론에 대화도 잊을 정도로 고민에 빠진 그가 좀 측은했다. 아예 약아빠져서 사기꾼처럼 행동했다면 모르겠는데, 미묘하게 어설프고 어리숙한 모습이 경계심을 슬슬 해제시킨 것이다. 미간에 자리 잡는 옅은 주름을 관찰하던 나는 문득 그의 찻잔이 전혀 비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거나 마시고 돌아가세요.”
해야 할 일이 태산이고 몸은 천근만근이다. 불청객은 떠나 줬으면 한다는 뜻을 담아 축객령을 내리자 그의 시선이 천천히 찻잔에 닿았다. 그리고 망설이듯 두어 번 입을 여닫다가 질문했다.
“제가 이걸 마시는 게 당신의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잠시 아연하게 그를 바라보던 나는 결국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몇 번째 한숨인지.
“뭐, 안 마시는 것보다는 낫겠죠.”
“그럼 마시겠습니다.”
아, 예.
고작 다 식어 빠진 차 한 잔인데 그는 세상에 단 한 잔 남은 물을 마시는 것처럼 긴장한 손으로 찻잔을 잡았다. 손이 굉장히 커서 자그마한 찻잔이 꽤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각오를 다진 얼굴로 천천히 한 모금 입 안으로 머금고, 곧 목울대가 움직였다.
찻잔 너머로 조금 커진 눈이 곧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를 만난 후 내가 본 얼굴 중 가장 생동감 있는 모습이다. 남은 차를 단숨에 마신 그는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굉장히 KrgowTiRake, SiperoDita.”
처음으로 밝은 얼굴을 하기에 무슨 말을 하나 가만히 듣고 있었더니 중간부터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필 지금 그 ‘언어 설정’을 사용하고 싶어진 건가. 그래도 첫 단어로 봐서는 감탄하는 모양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몇 마디 더 말을 하던 그는 곧 아쉬운 얼굴로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풀어 뒀던 검과 신발을 챙기더니 끝까지 흘끔흘끔 나를 돌아보며 신발장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아니, 현관으로 나가라고. 왜 거기로 들어가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를 따라 곧바로 신발장 문을 열었지만 내가 기껏 발견한 것은 늘 보던 신발장 풍경뿐이었다. 혹시나 트릭이 있을까 신발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먼지만 실컷 먹었다. 솔직히 꿈속에서 깜짝 마술 쇼를 본 기분이다. 아, 이제 정말 모르겠다.
찝찝한 기분으로 신발장을 뒤로하며 나는 어쩐지 남자가 다시 올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을 느꼈다.
한숨.
그를 식탁 의자에 앉히고 바로 마주 앉기에 영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이리저리 움직여서 예쁜 찻잔에 차까지 끓여서 내놓고 나니, 상황이야 어떻든 그럭저럭 평화롭고 정상적인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물론 그의 패션이 시대에 조금 뒤처져 있긴 하지만. 한 천 년 정도? 옷차림만 봐서는 이 친구가 유럽 땅을 발견했다고 해도 믿겠다.
마주 앉은 탁자 위로 공기가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긴장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찻잔을 쥐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긴 했지만 긴장으로 얼어붙은 손끝에 찻잔의 온기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뜨거운 차를 입 안에 홀홀 밀어 넣고 다시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저는 태양의 숲 소속의 섬기는 자 니모입니다.”
“쿨럭! 케엑! 켁!”
갑작스러운 자기소개에 뜨거운 물로 식도를 데쳐 버리고 말았다. 내가 성대하게 기침을 하자 오히려 그가 더 놀란 모양인지 두툼한 어깨가 펄떡 튀어 오른다. 그 모습에 나는 지금 이 상황에 긴장하고 있는 것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비교적 반가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도 나 못지않게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간신히 사레들림을 수습한 나는 덕분에 조금 풀어진 상태로 그를 마주 볼 수 있었다.
“태, 태양의 숲?”
나는 약간 뒤집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보통 ‘저는’으로 시작해서 ‘다’로 끝나는 문장은 자기소개이기 마련이지만 그가 한 말 중에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예. 제가 속해 있는 곳입니다.”
“어, 음. 뭐 하는 곳인데요?”
“세계의 광영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아……. 예.”
음, 뭐랄까. 차림새를 봤을 때부터 정상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거창한 단어의 모임을 듣고 있으니 심히 표정 관리를 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의심과 환멸로 가늘어지는 눈매를 수습하며 확인차 물었다.
“저기, 혹시 뭐 귀신이나 그런 거 아니시죠? 그런데 아까 경찰도 아저씨를, 어 흠, 그쪽을 전혀 모르는 것 같고. 아니, 그게 안 보이는 것 같고.”
아저씨라는 단어가 혹시 심기를 거스를까 봐 나는 재빨리 말을 얼버무렸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은 후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귀신이 망자를 뜻하는 것이라면,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다른 세계에서 당신을 찾아 이곳으로 왔습니다.”
와― 다른 세계 나왔다. 약간 식은 차를 호로록 마시며 나는 찻잔 속으로 표정을 감췄다. 본인 입으로 귀신이 아니라고 했으니 일단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정신이 아닌 귀신과 티타임을 하고 있다는 현실은 되도록 부정하고 싶어. 그것도 외국 귀신.
그런데 과연 제정신이 아닌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제정신이 아닌 귀신과 대화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할까.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저울질하며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마구 질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귀신이 아니라면 왜 경찰이 그쪽을 못 본 거예요? 혹시 투명 인간?”
“니모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자. 상위 차원인 이곳에서는 처음 인연을 가진 자아소유영혼 하나에게 존재를 인식시키는 것이 고작입니다.”
“자아소유영혼?”
“이곳에는 없는 말입니까?”
“일단 저는 처음 듣는데요.”
으음, 종교 단체 같은 곳에서나 들을 만한 단어군. 흔하게 쓰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턱을 문지르며 조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스스로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고등적인 정신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충 추측하자면 내 신발장에서 튀어나와서 만난 생물 중 자살할 수 있을 정도의 사고력을 가진 생물 하나 정도에게만 모습이 인식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음, 만약 인간이 아닌 생물을 처음 만났다면…….
나는 바퀴벌레나 햄스터 앞에서 진지하게 협조를 요청하는 그를 상상해 보았다.
여러모로 비참했겠군. 앗, 그런데 걔네들이 자살을 하던가?
“뭐, 납득은 안 되지만 그건 그렇다고 치고,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요?”
“그렇습니다.”
“이쪽 세계 말을 상당히 잘하시네요?”
어쩐지 입 밖으로 나가는 말투가 점점 취조에 가까운 형태로 변해 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무슨 매일 아침 만화 영화와 함께 체조를 하며 눈을 뜨는 소형 기저귀 사용자도 아닌데 처음부터 끝까지 허무맹랑한 이 말을 무턱대고 믿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내 가느다란 의심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우직할 정도로 꿋꿋하게 대답했다.
“흐름의 신 숨의 가호를 입고 온 덕분입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 가호가 제 몸에 머무는 동안은 말이 통할 겁니다.”
그 말대로라면 잠시 뒤에 말이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아니면 갑자기 외계 언어를 지껄이며 내 말을 못 알아듣는 연기를 펼치겠다는 뜻이거나.
한숨을 푹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린 나는 이마를 짚은 양손 아래로 남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 남자가 하는 말은 솔직히 제대로 귀에 들어오는 게 거의 없다. 게다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진짜 알고 싶은 건 이거 딱 하나뿐이다.
“그래서, 왜 날 찾아온 거죠? 협조라는 건 또 뭐고?”
한 박자 쉬고,
“목적이 뭡니까?”
남자는 쓸데없이 단정한 얼굴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경건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듣기도 전에 어쩐지 대답을 알 것만 같았다.
“저와 함께 가서 세계를 구해 주십시오.”
그럴 줄 알았다.
“제가 왜요?”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즉각 되묻자 남자는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반갑게, ‘네, 알겠습니다. 가시죠.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우리 집 신발장에서 튀어나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서 내 삶과 하나도 관계없고 망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닌 이상한 세상을 구해 달라고 하기를 말이죠! 그러니 어서 가서 개고생을 해 봅시다!’라고 말하기를, 정확히는 저 비슷한 긍정을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당신이 가지 않으면 한 세계가 멸망합니다.”
“그래서요?”
“비극을 맞이할 수많은 사람들을 외면할 생각입니까?”
아니, 외면하기 전에 일단 마주한 적조차 없는데.
“그런데요.”
“무, 무슨 그런…….”
내 태연한 대답에 남자는 처음으로 평정을 잃고 말을 잇지 못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차마 말을 빚어내지 못하는 그 안타까운 입술을 바라보다가 나는 크게 소리 내어 한숨을 쉬고 식은 차를 단숨에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저, 기, 요. 애초에 진―짜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말을 믿지도 못하겠지만, 만약 정말정말 다른 세계에서 오셨다면 말이죠. 제에발 부탁이니까 그쪽 세상 일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결해 주실래요? 그게 아니면 그냥 운명이니 받아들이시고요. 지금 이쪽 세상도 나름 굉장히 시끄러워요. 여기는 무슨 천국이라도 되는 줄 아세요? 내일모레라도 전쟁 나고 핵 터져서 다 죽거나 전염병이 음악 차트 순위 경쟁하듯이 번갈아 가며 돌고 있다고요. 그런 마당에 알지도 못하는 세상에 내던지려고 수십 년간 내 인생을 고이 가꿔 온 거 아니거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 같은 수상한 인간을 무턱대고 따라나설 리가 없잖아요?”
기나긴 말을 마치고 나니 입이 말라서 찻잔을 다시 채웠다. 우아한 물소리가 적막을 대신하는 사이 나는 채 가라앉지 않은 흥분을 삼키며 코웃음 쳤다. 종교 단체 권유 거절 경력 10년이다 이거야.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참신하지도 않은 권유에 넘어가는 현대인이 어디 있어? 마음을 단단히 굳히고 도전적인 시선을 던지는데, 뜻밖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남자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솔직히 줄줄 말해 놓고도 그가 갑자기 커다란 자루라도 꺼내 들면서 ‘말로 하는 건 여기까지다!’ 하고 협박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순순한 태도에 끌어모았던 전의가 단숨에 식는다.
“딱히 신뢰 문제가 아니라― 너무 허무맹랑한 말을 하잖아요. 아무리 신뢰를 쌓는다고 해도 그런 소리를 믿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있던 믿음도 다 깨질 만한 소리구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좋은 사람인 건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결론에 대화도 잊을 정도로 고민에 빠진 그가 좀 측은했다. 아예 약아빠져서 사기꾼처럼 행동했다면 모르겠는데, 미묘하게 어설프고 어리숙한 모습이 경계심을 슬슬 해제시킨 것이다. 미간에 자리 잡는 옅은 주름을 관찰하던 나는 문득 그의 찻잔이 전혀 비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거나 마시고 돌아가세요.”
해야 할 일이 태산이고 몸은 천근만근이다. 불청객은 떠나 줬으면 한다는 뜻을 담아 축객령을 내리자 그의 시선이 천천히 찻잔에 닿았다. 그리고 망설이듯 두어 번 입을 여닫다가 질문했다.
“제가 이걸 마시는 게 당신의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잠시 아연하게 그를 바라보던 나는 결국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몇 번째 한숨인지.
“뭐, 안 마시는 것보다는 낫겠죠.”
“그럼 마시겠습니다.”
아, 예.
고작 다 식어 빠진 차 한 잔인데 그는 세상에 단 한 잔 남은 물을 마시는 것처럼 긴장한 손으로 찻잔을 잡았다. 손이 굉장히 커서 자그마한 찻잔이 꽤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각오를 다진 얼굴로 천천히 한 모금 입 안으로 머금고, 곧 목울대가 움직였다.
찻잔 너머로 조금 커진 눈이 곧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를 만난 후 내가 본 얼굴 중 가장 생동감 있는 모습이다. 남은 차를 단숨에 마신 그는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굉장히 KrgowTiRake, SiperoDita.”
처음으로 밝은 얼굴을 하기에 무슨 말을 하나 가만히 듣고 있었더니 중간부터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필 지금 그 ‘언어 설정’을 사용하고 싶어진 건가. 그래도 첫 단어로 봐서는 감탄하는 모양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몇 마디 더 말을 하던 그는 곧 아쉬운 얼굴로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풀어 뒀던 검과 신발을 챙기더니 끝까지 흘끔흘끔 나를 돌아보며 신발장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아니, 현관으로 나가라고. 왜 거기로 들어가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를 따라 곧바로 신발장 문을 열었지만 내가 기껏 발견한 것은 늘 보던 신발장 풍경뿐이었다. 혹시나 트릭이 있을까 신발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먼지만 실컷 먹었다. 솔직히 꿈속에서 깜짝 마술 쇼를 본 기분이다. 아, 이제 정말 모르겠다.
찝찝한 기분으로 신발장을 뒤로하며 나는 어쩐지 남자가 다시 올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을 느꼈다.
한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