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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신발장의 한쪽 문이 잘못 맞물린 것처럼 툭 튀어나왔다.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고, 내쉬던 안도의 숨은 딸꾹질로 변했다. 잘못, 잘못 맞물렸겠지. 문이 고장이 났나? 하, 하하.
억지로라도 웃으려던 여유는 신발장 사이로 손가락이 비집고 나오는 순간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믿을 수 없다. 신발장이 비어 있는 걸 눈으로 확인한 게 방금이다. 10분 전도 아니고, 1분 전도 아니고, 고작해야 십몇 초.
당황을 넘어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사이에도 내 눈은 점점 더 열리는 신발장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꿈에서 봤던 그 남자가 신발장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내가 GPS를 켜고 긴급 신고 버튼을 눌러 경찰을 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솔직히 이 순간 나의 대처 능력은 자화자찬해도 충분하다고 본다. 잘했다, 잘했어.
어쨌든.
어두컴컴한 현관에 우뚝 서 있는 남자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새삼 저런 사람을 친근하게 만들어 준 술의 위력에는 감탄할 따름이다. 나는 어제 분명 치사량의 술을 마셨음이 틀림없다. 생존 욕구 같은 것은 개나 준 것 같으니 말이다.
언제, 어떻게 숨어든 걸까? 신발장에는 어떻게 들어가 있었지? 안에 숨을 만한 곳이 있었나?
이해 불가능한 부분이 많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최대한 저 강도를 자극하지 않고 경찰이 올 때까지 시간 끌기, 그리고 경찰이 문을 열 수 있게 도와주기.
나는 최대한 천천히 남자와의 간격을 벌리며 뒷걸음질 쳤다. 다행히 남자는 나를 잡으려고 하거나 뛰어 들어오거나 하는 대신 그저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워서 그런지 얼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눈은 확실하게 나를 포착한 채 움직이고 있다.
이런 범죄 상황을 맞닥뜨리면 보통 범인과 인간적인 대화를 통해서 긴장을 풀어 주라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사는 ‘너 강도냐?’ 또는 ‘당장 나가!’ 같은 자극 성분 200퍼센트의 말뿐이다. 솔직히 저 둘 중 어떤 말을 하더라도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지게 될 뿐이겠지.
그 외에는 ‘와, 그거 진짜 칼이에요?’ 아니면, ‘어디서 사셨어요? 그 칼.’ 같은 바보 같은 말밖에 안 떠오른다. 그런 말을 진짜 입에 담는다면 ‘물론 진짜 칼이란다! 이렇게 널 베고 있지 않니! 크하하.’ 하고 웃으면서 갑자기 달려들어 난도질하는 핏빛 결말뿐이겠지. 이상하다. 장밋빛이랑 색은 똑같은데 왜 이렇게 슬픈 결말인지.
남자와 대치한 상태로 천천히 뒷걸음질 치던 나는 문득 오른쪽에 안방 문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굳이 남자와 이러고 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문을 부수고 들어올 수도 있지만, 갑자기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서, ‘푹푹’이라든가 ‘크하하! 웃고 단숨에 푹푹’ 하는 무자비한 결말은 피할 수 있겠지. 적어도.
남자는 여전히 현관에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든지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가 정신병자라서 일반적인 강도와 다르게 행동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그가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니, 당연하지! 가죽 갑옷에 서양식 브로드 소드를 차고 신발장에서 깜짝쇼를 하며 등장하는 강도인데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잖아?
어쨌든 다행히 남자는 내가 안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 때까지 얌전히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잔상이 남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신속하게 방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허겁지겁 화장대를 끌어다가 방문을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단 방 안으로 들어온 덕분에 경찰이 올 때까지 시간 끌기는 어떻게든 해결됐고, 이제 경찰이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도와주는 일만 남았다. 그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는데, 출동했다는 경찰에게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 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 후 5분 남짓 지났을까. 남자가 문을 부수고 들어올까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현관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이어진 후 기다리던 목소리가 나를 불러 온다.
“계십니까? 경찰입니다. 신고받고 출동했는데요. 아무도 안 계십니까?”
경찰들의 말을 들어 보면 강도는 어딘가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또는 숨었거나. 어쨌든 나는 이제 안전했다.
“여기 방 안에 있어요!”
“무사하십니까?”
“네! 지금 나갈게요!”
허겁지겁 화장대를 치우고 방문을 열고 나간 나는 눈앞의 광경에 굳어졌다. 한 조로 보이는 두 명의 경찰이 경계 어린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현관에 서 있는, 우두커니 서 있는 강도.
“저, 저기.”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굳은 얼굴로 손가락질하자 경찰 두 명이 현관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밖에 없는데요.
나는 슬슬 이 상황이 현실적인 문제에서 초자연적인 문제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게 몰래카메라가 아니라면 말이다. 만약 몰래카메라라면 반드시 고소해서 위자료를 뜯어내고 말겠다.
“현관에 강도 있잖아요. 저기에! 허리에 중세 시대 검 같은 것 차고 서 있잖아요!”
발을 동동 구를 것 같은 내 표정 때문인지 경찰은 다시 한 번 현관을 바라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두 경찰은 서로를 바라보고 갸웃거리더니 곧 바닥에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술병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다음에는 알겠다는 시선으로 혀를 차며 나를 쳐다봤다.
“만취 상태인 것 같은데요.”
“아뇨, 아뇨, 아뇨! 저 멀쩡해요. 저기, 진짜 안 보이세요? 저기 있는데!”
아연해져서 다급하게 말해 봤지만 경찰은 정말로 아무것도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아가씨, 요즘 이런 거 벌금 엄청 세거든요? 한 번만 더 이런 허위 신고 하면 진짜 체포합니다. 이런 허위 신고 때문에 진짜 큰일 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한껏 으름장을 놓은 경찰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서 집을 나가 버렸다. 여전히 현관에 서 있는 남자를, 바로 옆에서 스쳐 지나가면서도 전혀 알아챌 기미가 없는 모습에 나는 그저 망연자실 나가는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희 가니까 현관 비밀번호 바꾸세요.”
무심한 듯 친절한 한마디를 던진 경찰은 그대로 현관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 뒤로 적막과 나, 그리고 경찰 눈에 안 보이는 그 남자만 남고 만 것이다.
진짜? 이거 진짜로 현실인가?
패닉에 빠진 사이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경찰들의 눈에는 전혀 안 보이는 것 같은 남자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뭘 하나 가만히 지켜봤더니, 신발 끈을 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어제 신발 벗고 들어오라고 호통쳤던 것 같은 기억이 난다. 결국 그 일은 꿈이 아니었군. 아니, 어쩌면 지금 여기까지가 통째로 꿈일지도 모르지. 솔직히 몰래카메라였으면 좋겠지만, 이런 종류의 몰래카메라는 대부분 짜고 찍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PD들은 모두 정신적 피해 보상비로 전 재산을 탕진해 버렸겠지.
혹시나 싶어 재빨리 허벅지를 꼬집어 봤지만 역시 꿈은 아니었다. 마지막 남은 가설은, 내가 경찰들의 말대로 환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 마신 술 중에 나에게 환각제로 작용하는 성분이 들어 있어서 지금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고 있는 걸지도. 음, 그럴듯하군. 한 2할 정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가능성은, 솔직히 너무 허무맹랑해서 가능성으로 꼽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지만,
남자가 귀신이라는 거다.
그런데 귀신이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영 아닌데.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심령 현상 비스무리한 것도 체험한 적이 없고, 아예 믿지도 않는다. 어쨌든 온통 가설뿐인 이 상황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 남자가 뭐든 간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반쯤 체념하는 동안 남자는 신발을 거의 다 벗고 방 안으로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가 막 현관을 넘으려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펴서 내밀며 남자를 제지했다.
“자, 자, 잠깐잠깐, 잠깐! 당신 누구야! 아니지, 여기는 왜 왔어? ……요.”
뒤늦게 떠올라 존대로 바꾸긴 했지만 솔직히 들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정체를 캐묻던 나는 곧 말을 바꾸었다. 정체 따위 들어서 뭘 하랴. 지금 상황에서 한가하게 자기소개나 하고 있게 생겼는가.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남자의 목적이다. 원한이든, 나의 놀란 리액션을 촬영하는 거든 어쨌든 목적을 알고 싶었다.
“어떤 일에 협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뜻밖에도 남자의 어조는 정중했다. 약간 울리는 기분까지 드는 묵직한 목소리는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감탄할 만큼 근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조나 태도가 아무리 정중하다고 해도 무장한 사람이 비무장인 사람을 상대로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건 언제나 협박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협조……?”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허리춤을 흘끔거리자 내 시선을 따라 자신의 칼자루를 확인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칼집을 풀어 현관 한쪽에 내려놓았다. 철컹하고 묵직한 소리가 나서 나는 그 검이 알루미늄 호일로 감싼 가짜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니, 겉으로 봐도 진짜로 보이긴 한다만.
“위협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내 경계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의도인지 되도록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있긴 했지만, 원래 말투가 상냥한 편은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엉거주춤 서 있는 내가 꽤 곤혹스러운 모양인지 당황한 표정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잘 놀다가 다음 날 갑자기 ‘누구세요?’라는 말을 들은 사람 같다고 할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문득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술 때문에 기억이 없긴 하지만 나는 그와 어제 꽤 깊은 친분을 나누었던 건 아닐까? 그의 반응도 그렇고, 개꿈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결국 그 꿈은 어제의 기억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가 신발장에서 튀어나온 후, 그리고 이후로 내가 갑자기 곯아떨어진 그 사이에 비록 기억에는 없지만 절친이라도 먹었을지도. 만약 그랬다면 어제 그는 거의 심신 미약 상태인 나에게 별다른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아주 꺼림칙하지만 그를 집 안으로 들이기로 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잘 쓰지 않아서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 식탁 쪽으로 그를 안내하며 치솟는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응, 그렇지. 집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사람을 더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 엄청 위험하지. 게다가 체구가 꽤 큰 편이라 그런지 등 뒤로 꽤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는데도 존재감이 무시무시할 정도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외의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경찰을 불러도 소용없음, 무력이 압도적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임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하나뿐이지. 도발해서 죽기, 이야기 들어 주면서 눈치라도 보기인데 전자는 순식간에 배드엔딩이야. 아니, 데드엔딩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신발장의 한쪽 문이 잘못 맞물린 것처럼 툭 튀어나왔다.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고, 내쉬던 안도의 숨은 딸꾹질로 변했다. 잘못, 잘못 맞물렸겠지. 문이 고장이 났나? 하, 하하.
억지로라도 웃으려던 여유는 신발장 사이로 손가락이 비집고 나오는 순간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믿을 수 없다. 신발장이 비어 있는 걸 눈으로 확인한 게 방금이다. 10분 전도 아니고, 1분 전도 아니고, 고작해야 십몇 초.
당황을 넘어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사이에도 내 눈은 점점 더 열리는 신발장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꿈에서 봤던 그 남자가 신발장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내가 GPS를 켜고 긴급 신고 버튼을 눌러 경찰을 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솔직히 이 순간 나의 대처 능력은 자화자찬해도 충분하다고 본다. 잘했다, 잘했어.
어쨌든.
어두컴컴한 현관에 우뚝 서 있는 남자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새삼 저런 사람을 친근하게 만들어 준 술의 위력에는 감탄할 따름이다. 나는 어제 분명 치사량의 술을 마셨음이 틀림없다. 생존 욕구 같은 것은 개나 준 것 같으니 말이다.
언제, 어떻게 숨어든 걸까? 신발장에는 어떻게 들어가 있었지? 안에 숨을 만한 곳이 있었나?
이해 불가능한 부분이 많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최대한 저 강도를 자극하지 않고 경찰이 올 때까지 시간 끌기, 그리고 경찰이 문을 열 수 있게 도와주기.
나는 최대한 천천히 남자와의 간격을 벌리며 뒷걸음질 쳤다. 다행히 남자는 나를 잡으려고 하거나 뛰어 들어오거나 하는 대신 그저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워서 그런지 얼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눈은 확실하게 나를 포착한 채 움직이고 있다.
이런 범죄 상황을 맞닥뜨리면 보통 범인과 인간적인 대화를 통해서 긴장을 풀어 주라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사는 ‘너 강도냐?’ 또는 ‘당장 나가!’ 같은 자극 성분 200퍼센트의 말뿐이다. 솔직히 저 둘 중 어떤 말을 하더라도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지게 될 뿐이겠지.
그 외에는 ‘와, 그거 진짜 칼이에요?’ 아니면, ‘어디서 사셨어요? 그 칼.’ 같은 바보 같은 말밖에 안 떠오른다. 그런 말을 진짜 입에 담는다면 ‘물론 진짜 칼이란다! 이렇게 널 베고 있지 않니! 크하하.’ 하고 웃으면서 갑자기 달려들어 난도질하는 핏빛 결말뿐이겠지. 이상하다. 장밋빛이랑 색은 똑같은데 왜 이렇게 슬픈 결말인지.
남자와 대치한 상태로 천천히 뒷걸음질 치던 나는 문득 오른쪽에 안방 문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굳이 남자와 이러고 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문을 부수고 들어올 수도 있지만, 갑자기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서, ‘푹푹’이라든가 ‘크하하! 웃고 단숨에 푹푹’ 하는 무자비한 결말은 피할 수 있겠지. 적어도.
남자는 여전히 현관에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든지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가 정신병자라서 일반적인 강도와 다르게 행동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그가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니, 당연하지! 가죽 갑옷에 서양식 브로드 소드를 차고 신발장에서 깜짝쇼를 하며 등장하는 강도인데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잖아?
어쨌든 다행히 남자는 내가 안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 때까지 얌전히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잔상이 남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신속하게 방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허겁지겁 화장대를 끌어다가 방문을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단 방 안으로 들어온 덕분에 경찰이 올 때까지 시간 끌기는 어떻게든 해결됐고, 이제 경찰이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도와주는 일만 남았다. 그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는데, 출동했다는 경찰에게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 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 후 5분 남짓 지났을까. 남자가 문을 부수고 들어올까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현관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이어진 후 기다리던 목소리가 나를 불러 온다.
“계십니까? 경찰입니다. 신고받고 출동했는데요. 아무도 안 계십니까?”
경찰들의 말을 들어 보면 강도는 어딘가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또는 숨었거나. 어쨌든 나는 이제 안전했다.
“여기 방 안에 있어요!”
“무사하십니까?”
“네! 지금 나갈게요!”
허겁지겁 화장대를 치우고 방문을 열고 나간 나는 눈앞의 광경에 굳어졌다. 한 조로 보이는 두 명의 경찰이 경계 어린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현관에 서 있는, 우두커니 서 있는 강도.
“저, 저기.”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굳은 얼굴로 손가락질하자 경찰 두 명이 현관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밖에 없는데요.
나는 슬슬 이 상황이 현실적인 문제에서 초자연적인 문제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게 몰래카메라가 아니라면 말이다. 만약 몰래카메라라면 반드시 고소해서 위자료를 뜯어내고 말겠다.
“현관에 강도 있잖아요. 저기에! 허리에 중세 시대 검 같은 것 차고 서 있잖아요!”
발을 동동 구를 것 같은 내 표정 때문인지 경찰은 다시 한 번 현관을 바라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두 경찰은 서로를 바라보고 갸웃거리더니 곧 바닥에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술병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다음에는 알겠다는 시선으로 혀를 차며 나를 쳐다봤다.
“만취 상태인 것 같은데요.”
“아뇨, 아뇨, 아뇨! 저 멀쩡해요. 저기, 진짜 안 보이세요? 저기 있는데!”
아연해져서 다급하게 말해 봤지만 경찰은 정말로 아무것도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아가씨, 요즘 이런 거 벌금 엄청 세거든요? 한 번만 더 이런 허위 신고 하면 진짜 체포합니다. 이런 허위 신고 때문에 진짜 큰일 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한껏 으름장을 놓은 경찰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서 집을 나가 버렸다. 여전히 현관에 서 있는 남자를, 바로 옆에서 스쳐 지나가면서도 전혀 알아챌 기미가 없는 모습에 나는 그저 망연자실 나가는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희 가니까 현관 비밀번호 바꾸세요.”
무심한 듯 친절한 한마디를 던진 경찰은 그대로 현관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 뒤로 적막과 나, 그리고 경찰 눈에 안 보이는 그 남자만 남고 만 것이다.
진짜? 이거 진짜로 현실인가?
패닉에 빠진 사이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경찰들의 눈에는 전혀 안 보이는 것 같은 남자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뭘 하나 가만히 지켜봤더니, 신발 끈을 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어제 신발 벗고 들어오라고 호통쳤던 것 같은 기억이 난다. 결국 그 일은 꿈이 아니었군. 아니, 어쩌면 지금 여기까지가 통째로 꿈일지도 모르지. 솔직히 몰래카메라였으면 좋겠지만, 이런 종류의 몰래카메라는 대부분 짜고 찍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PD들은 모두 정신적 피해 보상비로 전 재산을 탕진해 버렸겠지.
혹시나 싶어 재빨리 허벅지를 꼬집어 봤지만 역시 꿈은 아니었다. 마지막 남은 가설은, 내가 경찰들의 말대로 환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 마신 술 중에 나에게 환각제로 작용하는 성분이 들어 있어서 지금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고 있는 걸지도. 음, 그럴듯하군. 한 2할 정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가능성은, 솔직히 너무 허무맹랑해서 가능성으로 꼽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지만,
남자가 귀신이라는 거다.
그런데 귀신이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영 아닌데.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심령 현상 비스무리한 것도 체험한 적이 없고, 아예 믿지도 않는다. 어쨌든 온통 가설뿐인 이 상황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 남자가 뭐든 간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반쯤 체념하는 동안 남자는 신발을 거의 다 벗고 방 안으로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가 막 현관을 넘으려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펴서 내밀며 남자를 제지했다.
“자, 자, 잠깐잠깐, 잠깐! 당신 누구야! 아니지, 여기는 왜 왔어? ……요.”
뒤늦게 떠올라 존대로 바꾸긴 했지만 솔직히 들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정체를 캐묻던 나는 곧 말을 바꾸었다. 정체 따위 들어서 뭘 하랴. 지금 상황에서 한가하게 자기소개나 하고 있게 생겼는가.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남자의 목적이다. 원한이든, 나의 놀란 리액션을 촬영하는 거든 어쨌든 목적을 알고 싶었다.
“어떤 일에 협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뜻밖에도 남자의 어조는 정중했다. 약간 울리는 기분까지 드는 묵직한 목소리는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감탄할 만큼 근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조나 태도가 아무리 정중하다고 해도 무장한 사람이 비무장인 사람을 상대로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건 언제나 협박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협조……?”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허리춤을 흘끔거리자 내 시선을 따라 자신의 칼자루를 확인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칼집을 풀어 현관 한쪽에 내려놓았다. 철컹하고 묵직한 소리가 나서 나는 그 검이 알루미늄 호일로 감싼 가짜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니, 겉으로 봐도 진짜로 보이긴 한다만.
“위협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내 경계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의도인지 되도록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있긴 했지만, 원래 말투가 상냥한 편은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엉거주춤 서 있는 내가 꽤 곤혹스러운 모양인지 당황한 표정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잘 놀다가 다음 날 갑자기 ‘누구세요?’라는 말을 들은 사람 같다고 할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문득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술 때문에 기억이 없긴 하지만 나는 그와 어제 꽤 깊은 친분을 나누었던 건 아닐까? 그의 반응도 그렇고, 개꿈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결국 그 꿈은 어제의 기억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가 신발장에서 튀어나온 후, 그리고 이후로 내가 갑자기 곯아떨어진 그 사이에 비록 기억에는 없지만 절친이라도 먹었을지도. 만약 그랬다면 어제 그는 거의 심신 미약 상태인 나에게 별다른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아주 꺼림칙하지만 그를 집 안으로 들이기로 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잘 쓰지 않아서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 식탁 쪽으로 그를 안내하며 치솟는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응, 그렇지. 집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사람을 더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 엄청 위험하지. 게다가 체구가 꽤 큰 편이라 그런지 등 뒤로 꽤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는데도 존재감이 무시무시할 정도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외의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경찰을 불러도 소용없음, 무력이 압도적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임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하나뿐이지. 도발해서 죽기, 이야기 들어 주면서 눈치라도 보기인데 전자는 순식간에 배드엔딩이야. 아니, 데드엔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