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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같은 겨울
1화
프롤로그
또 시작이네,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 녀석이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며칠째지? 세경은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할 뿐이었다.
“사랑이 원래 이래? 나한테 왜 이렇게 잔인하냐고.”
그러는 너는 나한테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구냐고 말하지는 못했다. 다큐 시상식의 축하 파티는 결국 한 남자의 가슴 아픈 이별에 대한 곡소리로 변질되어 갔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다고, 얼른 다른 사람 만나. 한 피디, 내가 좋은 사람 소개해 줘?”
이번 프로젝트 참여 팀 중 유일하게 입상대에 오른 카메라 감독이 형우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굵직한 다큐를 여러 개 찍어 경력이 화려한 그는 프로덕션의 감독 섭외 1순위였다. 평소 친분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세경과 형우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하고 다른 프로덕션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입상. 참 잘한 선택이라고 이제야 말해 줄 수 있었다.
“있어도 못 만나요.”
형우의 대답은 단호했다.
“왜?”
“아직 다 못 잊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나요?”
그래서 이번 다큐를 말아먹었냐고 말하려다 세경은 그만두었다. 이것 역시 이제 와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아이고, 이렇게 일편단심인 전 남친을 봤나. 김 작가, 한 피디 원래 이렇게 로맨티스트였어?”
맞은편의 감독이 세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로맨티스트는 모르겠고, 일보다 사랑인 건 맞아요.”
“누나!”
인정은 하지만 놀리기까지 해야 하냐며 녀석이 눈을 부릅떴다. 세경은 사악하게 웃어 주고는 조용히 가방을 챙겼다. 자리가 무르익어 가는 걸 보니 슬슬 2차로 넘어갈 분위기였다.
“시비 걸어 놓고, 어딜 가?”
“자막 쓰러.”
세경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자막을 쓸 수 있는 시간을 계산했다.
“하여튼 일중독.”
“나라도 정신 차려야지.”
“아, 누나!”
“너도 적당히 하고 들어가. 내일 또 촬영이라며. 대표님한테 엉덩이 맞아 가며 혼나지 말고.”
“아, 좀만 더 있다 가. 내 후배 놈이 온다네. 잘생겼어.”
그게 그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세경은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못 봐서 아주 아쉽네. 간다.”
세경은 주변 사람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호프집 문을 열고 나오다가 한 남자와 부딪쳤지만 짤막한 목 인사만 건네고 발길을 재촉했다. 부딪친 남자가 돌아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 것을 세경은 알지 못했다.
1. 여름 같은 겨울
편의점에 들어서자마자 선 굵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르르 쾅쾅 번개까지 치는데 한여름 같았다. 지구가 아프다더니 계절도 감을 잃은 듯했다. 겨울 코트를 입고 나온 게 머쓱할 정도였다. 이러다 겨울에도 반팔을 입게 되는 건 아닐지, 세경은 무서운 미래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물 더 많이 부어?”
“네, 꽉 차게요.”
찬주의 물음에 세경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삼각김밥을 뜯었다. 손님이 없어 잠깐 졸고 있던 알바생이 소나기 소리에 문을 열고 나가 바깥의 진열품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편의점 안은 어느새 라면 냄새로 가득 찼다.
“살 안 찌는 사람은 다 이유가 있다더니, 싱겁게 먹을 거면 라면을 왜 먹어?”
그게 불만이라서 묻는 건 아닐 것이다. 먹는 건 늘 똑같아 보이는데 세경은 점점 더 살이 빠지고 찬주는 점점 더 살이 붙으니 억울해서 건네는 푸념이라고 생각했다. 세경은 웃음으로 답하며 뜯어 놓은 삼각김밥을 찬주에게 건넸다.
“형우가 아무래도 두세 달 정도 못 나올 것 같다네.”
삼각김밥 한쪽 귀퉁이를 야무지게 베어 먹으며 찬주가 근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간병인 못 구한 거예요?”
“간병인 쓰는 거, 그것도 다 돈이잖아. 결혼한 것도 아니고. 저 말고는 없잖아, 그 자식 집에.”
어머니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프로덕션에서 편집과 조연출 일을 하던 형우가 기약 없는 휴가를 내게 됐고, 그 빈자리를 메워 줄 대타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영상 제작 프로덕션 [side]의 대표이자 메인 연출인 성태가 모든 일을 다 소화할 수는 없었다. 방송국에 납품하는 일이야 밤을 새서라도 쳐 내면 되겠지만 기한이 있는 단발성 홍보 영상까지 제작하기엔 무리였다. 그렇다고 들어온 일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외주 업체의 경우 모든 일이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그게 곧 돈으로 연결되었다.
“프리라도 쓰면 어때요? 경력 좀 있는 사람으로.”
“나도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는 중인데, 잠깐 동안 할 사람이 없네. 그렇다고 페이를 많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질적인 경영을 담당하고 있는 찬주가 요즘 들어 식욕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 때문인 듯했다. 삼각김밥 한 개를 다 먹은 그녀는 라면을 먹기 시작하는 세경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언니는 안 먹어요?”
“난 먹으면 다 살이야. 너 먹어.”
“뺏어 먹기 없어요.”
세경은 진지하게 말한 뒤 후루룩 라면 한 입을 먹고선 창밖을 바라봤다. 소나기는 어느새 그친 것 같았다. 알바생이 짜증 섞인 얼굴로 안에 들여놓은 물건들을 다시 밖으로 내어놓기 시작했다.
“주말에 선본 건 어떻게 됐어?”
세경은 한 입을 남겨 놓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내가 무슨 말 할지 다 알잖아요.”
“너도 참…….”
서른둘.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였다. 세경보다 세 살 많은 찬주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부러운 나이일지도 모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다를 수 있었다.
“진짜 전혀 생각이 없는 거야?”
“언니가 하면 그때 생각해 볼게요.”
세경은 남은 라면을 수거 통에 버리고 자리를 정리했다.
“나랑 네가 같아? 너 혹시……, 아니다.”
찬주는 괜한 소리를 했다가는 서로 기분만 나빠질 것이라 생각하고 입을 닫았다.
“영진 선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에요. 넘겨짚지 마요.”
세경은 찬주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해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벌써 3시네. 이제 내레이션만 쓰면 끝이네요. 얼른 들어가요.”
소나기가 그친 새벽은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
정신없이 잠만 잔 듯했다. 세경은 일어나자마자 시계를 확인했다. 밤 9시였다. 새벽에 내레이션을 마무리하고 자막까지 뽑고 난 후 집으로 돌아와 기절했다. 오늘 하루는 푹 쉬라며 부담을 덜어 준 찬주의 문자 덕분에 다음 주 아이템 걱정은 잊었다.
걱정한다고 해서 없던 아이템이 솟는 게 아니란 걸 7년 차 작가가 되니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자료 조사를 겸할 막내 작가를 쓰자고 말하는 걸 회사도 어려우니 하는 데까지는 그녀가 쳐 내 보겠다고 객기를 부린 게 화근이었다. 의욕만 앞선 채 몸은 점점 병들어 가고 있으니, 누가 누구를 탓할까 싶었다.
주방으로 들어서자 배고픔이 몰려왔다. 새벽에 작은 컵라면 하나 먹은 게 다였다. 위가 아우성을 칠 만도 했다.
제대로 밥을 해 먹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간단히 중국 음식이나 시켜 먹자 생각하며 핸드폰을 찾았다. 잠들어 있을 때 걸려 왔는지 부재중 전화 2통이 찍혀 있었다. 영진에게서 온 것이었다. 시간은 두 시간 전과 10분 전. 이 시간에 전화를 했다는 건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리였다.
세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 세경아.
그의 들뜬 목소리에서 취기가 느껴졌다.
“자느라 못 받았어.”
― 그래. 성태 형이 그러더라. 여기 방송국 근처 횟집인데, 지금 올래?
선배의 술버릇은 집에 있는 사람을 불러내는 거였다.
“무슨 일이야?”
잠도 부족했고 배도 고팠다. 네 술주정을 받아 줄 의사가 없다고 잘라 말해 보지만 영진은 그런 세경이 무슨 말에 반응하는지 너무 잘 알았다.
―
‘side] 일도 있고. 못 나올 것 같아?
미련이 남은 듯 구는 그에게 이제 우리 사이엔 일 문제밖에 남지 않았다고 못 박자 그는 그때부터 일을 핑계로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모두 그녀가 자초한 일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30분 정도 걸려.”
― 그래, 조심해서 와.
시끌시끌한 소음이 사라지자 집 안이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세경은 배가 고프다는 것도 잊고 간단하게 세수만 한 뒤 겉옷을 껴입었다. 립스틱이라도 바를까 하다가 관뒀다. 화장을 하고 예의를 차릴 사이도 아니었다.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남자였다.
“왔어?”
선배는 조금 비틀거렸지만 만취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럼, 저흰 먼저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안면이 있는 가수 매니저가 세경에게도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고 사라졌다.
지상파 방송국의 메인 피디인 영진은 꽤 영향력 있는 실세로 통했다. 그가 맡은 프로그램들이 줄줄이 시청률 대박을 쳤고, 굵직한 상도 여러 번 받았다. 악플에 시달리던 연예인도 그를 만나면 저절로 이미지 세탁이 되니 엔터테인먼트 사장과 매니저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건 당연했다. 오늘도 그 대접의 연장선상인 것 같았다.
“대리 불렀으니까 차에 가 있자.”
무슨 의도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세경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뜻이야?”
“뭐?”
세경이 날카롭게 나오자 영진의 눈도 차가워졌다.
“밥도 못 먹고 나왔어.”
“그럼 우리 집에 가서 먹어, 그 밥.”
“선배.”
또다시 지겨운 감정싸움이었다.
“[side] 이야기는 가면서 할 테니까.”
그는 1년 전에 이혼한 남자였다. 그녀와 5년을 사귀고 헤어진 뒤, 두 달 만난 여자와 결혼하더니 세 달 만에 이혼을 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옆으로 돌아왔다.
일로 엮여 있으니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다시 사귀자는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끝나 버린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깨닫고 있었다. 그저 한 번씩 술에 취해 짙은 눈빛으로 다른 무언가를 원할 때면 그녀가 차갑게 잘라 내 주면 그만인 사이였다.
“혹시…… 대리 부르셨어요?”
젊은 남자가 그들 곁으로 다가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 네. 빨리 오셨네요. 차는 저기에 있어요.”
영진이 세경의 손을 낚아채듯 붙잡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 대리 기사가 보는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진 않았다. 세경은 그가 하는 대로 순순히 놔두었다. 그의 감정적인 행동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지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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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시작이네,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 녀석이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며칠째지? 세경은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할 뿐이었다.
“사랑이 원래 이래? 나한테 왜 이렇게 잔인하냐고.”
그러는 너는 나한테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구냐고 말하지는 못했다. 다큐 시상식의 축하 파티는 결국 한 남자의 가슴 아픈 이별에 대한 곡소리로 변질되어 갔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다고, 얼른 다른 사람 만나. 한 피디, 내가 좋은 사람 소개해 줘?”
이번 프로젝트 참여 팀 중 유일하게 입상대에 오른 카메라 감독이 형우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굵직한 다큐를 여러 개 찍어 경력이 화려한 그는 프로덕션의 감독 섭외 1순위였다. 평소 친분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세경과 형우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하고 다른 프로덕션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입상. 참 잘한 선택이라고 이제야 말해 줄 수 있었다.
“있어도 못 만나요.”
형우의 대답은 단호했다.
“왜?”
“아직 다 못 잊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나요?”
그래서 이번 다큐를 말아먹었냐고 말하려다 세경은 그만두었다. 이것 역시 이제 와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아이고, 이렇게 일편단심인 전 남친을 봤나. 김 작가, 한 피디 원래 이렇게 로맨티스트였어?”
맞은편의 감독이 세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로맨티스트는 모르겠고, 일보다 사랑인 건 맞아요.”
“누나!”
인정은 하지만 놀리기까지 해야 하냐며 녀석이 눈을 부릅떴다. 세경은 사악하게 웃어 주고는 조용히 가방을 챙겼다. 자리가 무르익어 가는 걸 보니 슬슬 2차로 넘어갈 분위기였다.
“시비 걸어 놓고, 어딜 가?”
“자막 쓰러.”
세경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자막을 쓸 수 있는 시간을 계산했다.
“하여튼 일중독.”
“나라도 정신 차려야지.”
“아, 누나!”
“너도 적당히 하고 들어가. 내일 또 촬영이라며. 대표님한테 엉덩이 맞아 가며 혼나지 말고.”
“아, 좀만 더 있다 가. 내 후배 놈이 온다네. 잘생겼어.”
그게 그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세경은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못 봐서 아주 아쉽네. 간다.”
세경은 주변 사람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호프집 문을 열고 나오다가 한 남자와 부딪쳤지만 짤막한 목 인사만 건네고 발길을 재촉했다. 부딪친 남자가 돌아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 것을 세경은 알지 못했다.
1. 여름 같은 겨울
편의점에 들어서자마자 선 굵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르르 쾅쾅 번개까지 치는데 한여름 같았다. 지구가 아프다더니 계절도 감을 잃은 듯했다. 겨울 코트를 입고 나온 게 머쓱할 정도였다. 이러다 겨울에도 반팔을 입게 되는 건 아닐지, 세경은 무서운 미래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물 더 많이 부어?”
“네, 꽉 차게요.”
찬주의 물음에 세경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삼각김밥을 뜯었다. 손님이 없어 잠깐 졸고 있던 알바생이 소나기 소리에 문을 열고 나가 바깥의 진열품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편의점 안은 어느새 라면 냄새로 가득 찼다.
“살 안 찌는 사람은 다 이유가 있다더니, 싱겁게 먹을 거면 라면을 왜 먹어?”
그게 불만이라서 묻는 건 아닐 것이다. 먹는 건 늘 똑같아 보이는데 세경은 점점 더 살이 빠지고 찬주는 점점 더 살이 붙으니 억울해서 건네는 푸념이라고 생각했다. 세경은 웃음으로 답하며 뜯어 놓은 삼각김밥을 찬주에게 건넸다.
“형우가 아무래도 두세 달 정도 못 나올 것 같다네.”
삼각김밥 한쪽 귀퉁이를 야무지게 베어 먹으며 찬주가 근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간병인 못 구한 거예요?”
“간병인 쓰는 거, 그것도 다 돈이잖아. 결혼한 것도 아니고. 저 말고는 없잖아, 그 자식 집에.”
어머니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프로덕션에서 편집과 조연출 일을 하던 형우가 기약 없는 휴가를 내게 됐고, 그 빈자리를 메워 줄 대타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영상 제작 프로덕션 [side]의 대표이자 메인 연출인 성태가 모든 일을 다 소화할 수는 없었다. 방송국에 납품하는 일이야 밤을 새서라도 쳐 내면 되겠지만 기한이 있는 단발성 홍보 영상까지 제작하기엔 무리였다. 그렇다고 들어온 일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외주 업체의 경우 모든 일이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그게 곧 돈으로 연결되었다.
“프리라도 쓰면 어때요? 경력 좀 있는 사람으로.”
“나도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는 중인데, 잠깐 동안 할 사람이 없네. 그렇다고 페이를 많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질적인 경영을 담당하고 있는 찬주가 요즘 들어 식욕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 때문인 듯했다. 삼각김밥 한 개를 다 먹은 그녀는 라면을 먹기 시작하는 세경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언니는 안 먹어요?”
“난 먹으면 다 살이야. 너 먹어.”
“뺏어 먹기 없어요.”
세경은 진지하게 말한 뒤 후루룩 라면 한 입을 먹고선 창밖을 바라봤다. 소나기는 어느새 그친 것 같았다. 알바생이 짜증 섞인 얼굴로 안에 들여놓은 물건들을 다시 밖으로 내어놓기 시작했다.
“주말에 선본 건 어떻게 됐어?”
세경은 한 입을 남겨 놓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내가 무슨 말 할지 다 알잖아요.”
“너도 참…….”
서른둘.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였다. 세경보다 세 살 많은 찬주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부러운 나이일지도 모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다를 수 있었다.
“진짜 전혀 생각이 없는 거야?”
“언니가 하면 그때 생각해 볼게요.”
세경은 남은 라면을 수거 통에 버리고 자리를 정리했다.
“나랑 네가 같아? 너 혹시……, 아니다.”
찬주는 괜한 소리를 했다가는 서로 기분만 나빠질 것이라 생각하고 입을 닫았다.
“영진 선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에요. 넘겨짚지 마요.”
세경은 찬주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해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벌써 3시네. 이제 내레이션만 쓰면 끝이네요. 얼른 들어가요.”
소나기가 그친 새벽은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정신없이 잠만 잔 듯했다. 세경은 일어나자마자 시계를 확인했다. 밤 9시였다. 새벽에 내레이션을 마무리하고 자막까지 뽑고 난 후 집으로 돌아와 기절했다. 오늘 하루는 푹 쉬라며 부담을 덜어 준 찬주의 문자 덕분에 다음 주 아이템 걱정은 잊었다.
걱정한다고 해서 없던 아이템이 솟는 게 아니란 걸 7년 차 작가가 되니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자료 조사를 겸할 막내 작가를 쓰자고 말하는 걸 회사도 어려우니 하는 데까지는 그녀가 쳐 내 보겠다고 객기를 부린 게 화근이었다. 의욕만 앞선 채 몸은 점점 병들어 가고 있으니, 누가 누구를 탓할까 싶었다.
주방으로 들어서자 배고픔이 몰려왔다. 새벽에 작은 컵라면 하나 먹은 게 다였다. 위가 아우성을 칠 만도 했다.
제대로 밥을 해 먹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간단히 중국 음식이나 시켜 먹자 생각하며 핸드폰을 찾았다. 잠들어 있을 때 걸려 왔는지 부재중 전화 2통이 찍혀 있었다. 영진에게서 온 것이었다. 시간은 두 시간 전과 10분 전. 이 시간에 전화를 했다는 건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리였다.
세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 세경아.
그의 들뜬 목소리에서 취기가 느껴졌다.
“자느라 못 받았어.”
― 그래. 성태 형이 그러더라. 여기 방송국 근처 횟집인데, 지금 올래?
선배의 술버릇은 집에 있는 사람을 불러내는 거였다.
“무슨 일이야?”
잠도 부족했고 배도 고팠다. 네 술주정을 받아 줄 의사가 없다고 잘라 말해 보지만 영진은 그런 세경이 무슨 말에 반응하는지 너무 잘 알았다.
―
‘side] 일도 있고. 못 나올 것 같아?
미련이 남은 듯 구는 그에게 이제 우리 사이엔 일 문제밖에 남지 않았다고 못 박자 그는 그때부터 일을 핑계로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모두 그녀가 자초한 일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30분 정도 걸려.”
― 그래, 조심해서 와.
시끌시끌한 소음이 사라지자 집 안이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세경은 배가 고프다는 것도 잊고 간단하게 세수만 한 뒤 겉옷을 껴입었다. 립스틱이라도 바를까 하다가 관뒀다. 화장을 하고 예의를 차릴 사이도 아니었다.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남자였다.
“왔어?”
선배는 조금 비틀거렸지만 만취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럼, 저흰 먼저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안면이 있는 가수 매니저가 세경에게도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고 사라졌다.
지상파 방송국의 메인 피디인 영진은 꽤 영향력 있는 실세로 통했다. 그가 맡은 프로그램들이 줄줄이 시청률 대박을 쳤고, 굵직한 상도 여러 번 받았다. 악플에 시달리던 연예인도 그를 만나면 저절로 이미지 세탁이 되니 엔터테인먼트 사장과 매니저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건 당연했다. 오늘도 그 대접의 연장선상인 것 같았다.
“대리 불렀으니까 차에 가 있자.”
무슨 의도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세경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뜻이야?”
“뭐?”
세경이 날카롭게 나오자 영진의 눈도 차가워졌다.
“밥도 못 먹고 나왔어.”
“그럼 우리 집에 가서 먹어, 그 밥.”
“선배.”
또다시 지겨운 감정싸움이었다.
“[side] 이야기는 가면서 할 테니까.”
그는 1년 전에 이혼한 남자였다. 그녀와 5년을 사귀고 헤어진 뒤, 두 달 만난 여자와 결혼하더니 세 달 만에 이혼을 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옆으로 돌아왔다.
일로 엮여 있으니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다시 사귀자는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끝나 버린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깨닫고 있었다. 그저 한 번씩 술에 취해 짙은 눈빛으로 다른 무언가를 원할 때면 그녀가 차갑게 잘라 내 주면 그만인 사이였다.
“혹시…… 대리 부르셨어요?”
젊은 남자가 그들 곁으로 다가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 네. 빨리 오셨네요. 차는 저기에 있어요.”
영진이 세경의 손을 낚아채듯 붙잡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 대리 기사가 보는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진 않았다. 세경은 그가 하는 대로 순순히 놔두었다. 그의 감정적인 행동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지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