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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같은 겨울
2화
차에 타자마자 영진은 세경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창문 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반대편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세경은 대리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룸미러를 통해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두 사람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인 같지도, 그렇다고 남남 같지도 않은 둘. 그게 지금 세경과 영진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말이었다.
“성태 형, 오늘도 깨지고 갔어. 내 얼굴 봐서 넘어가 주는 것도 더 이상은 힘들어.”
자는 줄 알았던 영진이 눈을 감은 채 오늘 그녀가 들어야 할 말을 그제야 내놓았다.
“미안해. 형우가 빠져서 요즘 좀 정신없어. 며칠 밤새우느라 대표님도 힘들어서 그랬을 거야.”
“그건 그쪽 사정이지. 새로 생기는 외주가 몇 갠데. 자꾸 이러면 나까지 우스워져. 그러니까 그만 봉사하고 거기서 나와. 내가 방송국 안에 자리 알아봐 줄 테니까.”
솔직히 말해 [side]가 운영되는 건 영진의 덕이었다. 그의 연줄을 타고 제작을 맡았고, 그의 말 한마디에 단가가 정해졌다. 김성태가 사장이 아니라 윤영진이 사장이었다. 이건 세경의 생각이 아닌 찬주가 한 말이었다.
외주로 빠지니 영상만 잘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라 영업도 잘해야 했다. 고개 빳빳한 피디들을 만나 머리를 숙여야 했고, 이유 없이 불려 나가 술을 마시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그 영업에 성태가 소질이 없어 세경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단정 지었다. 일만 아니면 윤영진과 다시 얽힐 일은 없다고.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오지랖은 거기까지만 해.”
오지랖이란 말에 웃음을 터뜨린 영진이 눈을 떠 세경을 바라봤다.
“넌 날…… 어떻게 생각하냐? 학교 선배? 옛날 애인? 아니면 잘 생각은 없지만 옆에서 이용해 먹는 호구?”
영진이 마지막 말을 내뱉는 순간, 세경은 또다시 대리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신경이 쓰였다. 그녀가 그렇게 비쳐지는 게 싫었다. 이런 세상의 시선들. 벗어던지지 못한 틀 때문에 세경은 영진과 헤어졌지만, 돌아온 그를 내치지도 못했다. 그를 이용해야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래, 이것 모두 핑계일지도 몰랐다.
“수고했어요.”
대리 기사가 돈을 받고 돌아서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세경은 영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들어가.”
영진이 허무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냈다.
“기어이 가시겠다?”
“여자랑 자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불러. 선배, 우리 서로 더러운 꼴은 보이지 말자.”
헤어진 연인이 다시 얼굴을 보고 있다는 게 이미 우스운 행동이었다. 세경의 명료한 거절에 영진은 쓸쓸히 웃으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질긴 인연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 인연을 그 스스로가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는 그만하라고 브레이크를 걸면 그걸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이 여자는 그를 끌어당겼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어머니가 재혼하래. 네 얘기도 하시더라.”
담배 연기에 가려 영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세경은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고맙다고 전해 드려. 아니, 기분 나쁘다고 해야 하나?”
아직 재취 자리에 갈 정도는 아니라고 화라도 내야 하는 건가. 세경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잘 생각해 봐. 네 어머니는 내가 설득할 수 있어. 간다.”
프러포즈라면 세상에서 가장 멋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프러포즈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연애 초기에는 그녀의 앞에서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사랑을 갈구했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반응하며 별도 따 줄 것처럼 굴었다. 별도 따 주다니. 요즘 시대에는 쓰지도 않는 말이었다.
세경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버스가 끊기지 않을 때였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젊은 남자 한 명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남자. 대리 기사가 세경을 돌아보고는 짤막하게 목 인사를 건네 왔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며 같이 앉아 있을 자신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피해 택시를 타는 것도 웃겼다. 쉽게 생각하기로 하며 세경은 대리 기사와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녀가 탈 버스는 도착 시간이 15분이나 남아 있었다.
“겨울인 줄 알았는데, 다시 여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남자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세경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저거 모기 맞죠?”
광고판에 붙어 있는 모기를 남자가 손으로 가리켰다.
“어제는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더니. 이러다가 겨울에 반팔 입고 여름에 코트 입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남자는 세경이 대꾸하지 않는데도 혼잣말을 멈추지 않았다.
“몇 번 타세요?”
그러나 고개를 돌려 직접 묻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경은 자신이 타는 버스를 작은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바라본 남자의 눈동자가 너무도 검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리운전하다 보면 이렇게 모르는 장소에서 버스 타는 일이 많은데, 어쩌다 한 번씩 우리 집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를 만나면 뭐랄까. 로또라도 맞은 기분이 들어요. 아, 로또 맞아 본 적은 없지만요.”
기껏해야 졸업반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에게서는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순수함이 느껴졌다. 모두가 지나가고 지나온 시간들. 세경은 그때 그 시절을 즐기지 못했다는 걸 후회하기도 했지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르바이트하는 거예요?”
무슨 마음에서인지 세경은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취업 준비생이거든요.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혹시…… 취직된 거예요?”
세경은 저절로 묻게 되었다.
“네. 뭐, 단기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드디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됐어요.”
세경은 방송국에 입사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아르바이트가 아닌 그녀가 원하던 최초의 직장이었다. 그때의 성취감과 기쁨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잊고 살았지만, 그 마음이 남아 있어 아직도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축하해요.”
처음 보는 남자의 취업을 축하해 주는 것이 웃기기도 했지만 세경은 말을 아끼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도 했고, 어쩐지 그녀와 생각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첫 번째 축하예요. 부모님께는 아직 말씀 못 드렸거든요.”
남자와 말을 나누다 보니 10분은 금세 흘러갔다. 저 멀리 버스 한 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세경이 타야 할 버스는 아니었다. 이제 남자가 일어서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가만히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몇 번 타요?”
세경이 묻자 남자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녀가 타는 버스의 번호를 말해 주었다.
*
“스물여덟이래. 그리고…… 잘생겼대.”
잘생겼다는 말을 할 때 찬주는 세경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세경은 그러냐며 잠깐 반응해 주었다. 오늘 새로 오는 조연출이 잘생긴 것보다 다음 주 아이템 선정이 더 급했다. 데일리 프로에서 짤막한 코너를 맡은 세경은 섭외지에서 몇 번 튕기자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영진의 경고도 한몫했다.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실력으로 프로덕션이 유지돼야 그녀도 윤영진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새로 일하게 된 이주원이라고 합니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경은 마지막 희망으로 남겨 둔 섭외지에 전화를 거는 중이라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옆자리의 찬주가 일어나 조연출을 맞이하는 게 느껴졌다.
신호음이 갔지만 전화는 받지 않았다. 이번엔 진짜 안 되려나 싶었다. 아예 아이템을 다른 방향으로 틀까 생각하며 고개를 드는데 어느새 남자가 그녀의 앞에 와 있었다.
“이주원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는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아……, 김세경이에요.”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2. 까만 눈
“주원 씨는 뭐 좋아해요?”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첫 직장이라 그런지 말투에서 군인의 패기가 느껴졌다. 세경은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찬주의 제안에 아이템이 꼬여 힘들다며 시켜 먹기를 권했다. 단골 밥집의 메뉴는 다양했다. 첫 출근 한 사람에 대한 배려로 찬주는 주원에게 먼저 의사를 물었다.
“아무거나는 메뉴에 없는데?”
찬주는 긴장한 주원이 재밌는지 자꾸 놀리고 싶은 것 같았다.
“아, 그렇죠? 죄송합니다. 그럼, 세경 작가님 먹는 것과 같은 걸로 주문하겠습니다.”
세경은 컴퓨터로 아이템거리를 찾다가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주원이 싱긋, 그녀를 보고 웃었다. 어제 보여 준 미소와 똑같았다. 세경은 자꾸 맞은편 남자가 신경 쓰여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점심을 먹고서 어디 커피숍이라도 들어가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경이는 김밥 한 줄만 먹는데, 주원 씨도 콜?”
“아……, 네.”
찬주가 웃음을 참는 게 느껴졌다. 세경도 오랜만에 입가로 미소를 띠었다.
2화
차에 타자마자 영진은 세경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창문 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반대편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세경은 대리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룸미러를 통해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두 사람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인 같지도, 그렇다고 남남 같지도 않은 둘. 그게 지금 세경과 영진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말이었다.
“성태 형, 오늘도 깨지고 갔어. 내 얼굴 봐서 넘어가 주는 것도 더 이상은 힘들어.”
자는 줄 알았던 영진이 눈을 감은 채 오늘 그녀가 들어야 할 말을 그제야 내놓았다.
“미안해. 형우가 빠져서 요즘 좀 정신없어. 며칠 밤새우느라 대표님도 힘들어서 그랬을 거야.”
“그건 그쪽 사정이지. 새로 생기는 외주가 몇 갠데. 자꾸 이러면 나까지 우스워져. 그러니까 그만 봉사하고 거기서 나와. 내가 방송국 안에 자리 알아봐 줄 테니까.”
솔직히 말해 [side]가 운영되는 건 영진의 덕이었다. 그의 연줄을 타고 제작을 맡았고, 그의 말 한마디에 단가가 정해졌다. 김성태가 사장이 아니라 윤영진이 사장이었다. 이건 세경의 생각이 아닌 찬주가 한 말이었다.
외주로 빠지니 영상만 잘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라 영업도 잘해야 했다. 고개 빳빳한 피디들을 만나 머리를 숙여야 했고, 이유 없이 불려 나가 술을 마시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그 영업에 성태가 소질이 없어 세경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단정 지었다. 일만 아니면 윤영진과 다시 얽힐 일은 없다고.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오지랖은 거기까지만 해.”
오지랖이란 말에 웃음을 터뜨린 영진이 눈을 떠 세경을 바라봤다.
“넌 날…… 어떻게 생각하냐? 학교 선배? 옛날 애인? 아니면 잘 생각은 없지만 옆에서 이용해 먹는 호구?”
영진이 마지막 말을 내뱉는 순간, 세경은 또다시 대리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신경이 쓰였다. 그녀가 그렇게 비쳐지는 게 싫었다. 이런 세상의 시선들. 벗어던지지 못한 틀 때문에 세경은 영진과 헤어졌지만, 돌아온 그를 내치지도 못했다. 그를 이용해야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래, 이것 모두 핑계일지도 몰랐다.
“수고했어요.”
대리 기사가 돈을 받고 돌아서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세경은 영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들어가.”
영진이 허무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냈다.
“기어이 가시겠다?”
“여자랑 자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불러. 선배, 우리 서로 더러운 꼴은 보이지 말자.”
헤어진 연인이 다시 얼굴을 보고 있다는 게 이미 우스운 행동이었다. 세경의 명료한 거절에 영진은 쓸쓸히 웃으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질긴 인연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 인연을 그 스스로가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는 그만하라고 브레이크를 걸면 그걸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이 여자는 그를 끌어당겼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어머니가 재혼하래. 네 얘기도 하시더라.”
담배 연기에 가려 영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세경은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고맙다고 전해 드려. 아니, 기분 나쁘다고 해야 하나?”
아직 재취 자리에 갈 정도는 아니라고 화라도 내야 하는 건가. 세경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잘 생각해 봐. 네 어머니는 내가 설득할 수 있어. 간다.”
프러포즈라면 세상에서 가장 멋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프러포즈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연애 초기에는 그녀의 앞에서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사랑을 갈구했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반응하며 별도 따 줄 것처럼 굴었다. 별도 따 주다니. 요즘 시대에는 쓰지도 않는 말이었다.
세경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버스가 끊기지 않을 때였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젊은 남자 한 명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남자. 대리 기사가 세경을 돌아보고는 짤막하게 목 인사를 건네 왔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며 같이 앉아 있을 자신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피해 택시를 타는 것도 웃겼다. 쉽게 생각하기로 하며 세경은 대리 기사와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녀가 탈 버스는 도착 시간이 15분이나 남아 있었다.
“겨울인 줄 알았는데, 다시 여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남자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세경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저거 모기 맞죠?”
광고판에 붙어 있는 모기를 남자가 손으로 가리켰다.
“어제는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더니. 이러다가 겨울에 반팔 입고 여름에 코트 입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남자는 세경이 대꾸하지 않는데도 혼잣말을 멈추지 않았다.
“몇 번 타세요?”
그러나 고개를 돌려 직접 묻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경은 자신이 타는 버스를 작은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바라본 남자의 눈동자가 너무도 검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리운전하다 보면 이렇게 모르는 장소에서 버스 타는 일이 많은데, 어쩌다 한 번씩 우리 집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를 만나면 뭐랄까. 로또라도 맞은 기분이 들어요. 아, 로또 맞아 본 적은 없지만요.”
기껏해야 졸업반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에게서는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순수함이 느껴졌다. 모두가 지나가고 지나온 시간들. 세경은 그때 그 시절을 즐기지 못했다는 걸 후회하기도 했지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르바이트하는 거예요?”
무슨 마음에서인지 세경은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취업 준비생이거든요.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혹시…… 취직된 거예요?”
세경은 저절로 묻게 되었다.
“네. 뭐, 단기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드디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됐어요.”
세경은 방송국에 입사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아르바이트가 아닌 그녀가 원하던 최초의 직장이었다. 그때의 성취감과 기쁨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잊고 살았지만, 그 마음이 남아 있어 아직도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축하해요.”
처음 보는 남자의 취업을 축하해 주는 것이 웃기기도 했지만 세경은 말을 아끼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도 했고, 어쩐지 그녀와 생각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첫 번째 축하예요. 부모님께는 아직 말씀 못 드렸거든요.”
남자와 말을 나누다 보니 10분은 금세 흘러갔다. 저 멀리 버스 한 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세경이 타야 할 버스는 아니었다. 이제 남자가 일어서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가만히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몇 번 타요?”
세경이 묻자 남자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녀가 타는 버스의 번호를 말해 주었다.
“스물여덟이래. 그리고…… 잘생겼대.”
잘생겼다는 말을 할 때 찬주는 세경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세경은 그러냐며 잠깐 반응해 주었다. 오늘 새로 오는 조연출이 잘생긴 것보다 다음 주 아이템 선정이 더 급했다. 데일리 프로에서 짤막한 코너를 맡은 세경은 섭외지에서 몇 번 튕기자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영진의 경고도 한몫했다.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실력으로 프로덕션이 유지돼야 그녀도 윤영진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새로 일하게 된 이주원이라고 합니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경은 마지막 희망으로 남겨 둔 섭외지에 전화를 거는 중이라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옆자리의 찬주가 일어나 조연출을 맞이하는 게 느껴졌다.
신호음이 갔지만 전화는 받지 않았다. 이번엔 진짜 안 되려나 싶었다. 아예 아이템을 다른 방향으로 틀까 생각하며 고개를 드는데 어느새 남자가 그녀의 앞에 와 있었다.
“이주원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는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아……, 김세경이에요.”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2. 까만 눈
“주원 씨는 뭐 좋아해요?”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첫 직장이라 그런지 말투에서 군인의 패기가 느껴졌다. 세경은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찬주의 제안에 아이템이 꼬여 힘들다며 시켜 먹기를 권했다. 단골 밥집의 메뉴는 다양했다. 첫 출근 한 사람에 대한 배려로 찬주는 주원에게 먼저 의사를 물었다.
“아무거나는 메뉴에 없는데?”
찬주는 긴장한 주원이 재밌는지 자꾸 놀리고 싶은 것 같았다.
“아, 그렇죠? 죄송합니다. 그럼, 세경 작가님 먹는 것과 같은 걸로 주문하겠습니다.”
세경은 컴퓨터로 아이템거리를 찾다가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주원이 싱긋, 그녀를 보고 웃었다. 어제 보여 준 미소와 똑같았다. 세경은 자꾸 맞은편 남자가 신경 쓰여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점심을 먹고서 어디 커피숍이라도 들어가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경이는 김밥 한 줄만 먹는데, 주원 씨도 콜?”
“아……, 네.”
찬주가 웃음을 참는 게 느껴졌다. 세경도 오랜만에 입가로 미소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