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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같은 겨울
3화
“왜 얘는 오자마자 다이어트 식단이야?”
성태의 물음에 찬주는 웃음을 참기 위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뭐가 그리도 웃길까. 세경은 김밥 한 줄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주원을 바라봤다. 좀 웃기긴 했다.
“제가 이만큼만 먹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너 소식가였냐? 소도 때려잡아 먹을 것같이 큰 놈이. 아, 요즘 애들은 이렇게 관리를 해 줘야 하는 건가 보지?”
“그러니까 대표님도 관리 좀 하세요. 뱃살 때문에 발톱도 못 깎게 되면 어떡할래요?”
진지하게 그의 앞날이 걱정돼 찬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깎아 주면 되지.”
찬주와 성태는 오래된 연인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주원은 당황하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미쳤어요? 내가 발톱도 못 깎는 남자 만나려고 이제까지 결혼 안 한 줄 알아요?”
“아, 자꾸 밥 먹는데 발톱 얘기 할래?”
성태가 비빔밥을 비비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장난이 심해지면 대놓고 싸우기도 하는 사이였기에 세경은 자리를 피하려 일어섰다.
“난 아침을 많이 먹어서. 이거 먹어요.”
세경은 손도 안 댄 김밥을 주원에게 건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벌써 김밥 한 줄을 뚝딱한 뒤 젓가락을 빨고 있던 주원이 세경의 김밥을 받자마자 세 조각씩 집어서 입에 넣었다.
“얘 이제 김밥 시키면 말려. 불쌍해서 못 봐 주겠다.”
때마침 목이 막힌 주원이 캑캑거렸다. 세경은 탕비실에서 물 한 잔을 가져와 주원의 앞에 내려놓으려 했다. 급했던 주원이 세경의 손에 들린 물잔을 미리 건네받으려다 그녀의 손까지 잡아 버렸다.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노트북을 들고 회사 근처 카페로 향했다. 다행히 마지막 섭외처에서 촬영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 간단한 촬영 구성안만 써내면 급한 일은 대충 마무리되었다.
세경은 집중하며 구성안을 써 내려가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창 쪽을 바라봤다. 주원이 두 팔을 휘휘 저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쪽으로 들어가 쓸 걸 후회가 되기도 했다. 왜 피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원이 가진 밝음이나 성큼 다가오는 속도가 세경은 조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불쑥 안으로 파고든다고 해야 할까. 직장 생활을 하며 만난 사람들에게선 느껴 보지 못했던 시선이 세경은 버거웠다.
“왜 여기서 작업하세요?”
어느새 커피숍 안으로 들어온 주원이 세경의 맞은편에 앉았다.
“잘 안 풀리면 장소를 옮겨 보기도 해요.”
“아…….”
진짜라고 믿는지 주원의 입에서 도 트이는 소리가 나와 잠깐 웃음이 흐르기도 했다.
스물여덟. 사회 경험이 적으니 아직 어리숙한 게 맞았다. 잘난 척만 하는 남자와 있다가 가르치고 싶은 애송이를 마주하니 생각이 새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계속 앉아 있을 거예요? 나 좀 예민해서, 누가 보고 있으면 일 잘 못해요.”
일부러 차갑게 대하는 게 맞았다. 사회에서 일적으로 만난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탈이 없었다. 자신은 호의로 베푼 감정이 상대에게는 호감으로 느껴져 오해를 만들기도 했다.
“내가 이러는 게 부담스러우세요?”
또다시 성큼 들어왔다. 세경은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고 맞은편의 주원을 바라봤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난 그냥 대표님이 잠깐 회사 앞에서 대기하라고 하셔서 서 있다가 작가님 보고 반가워서 다가온 거예요. 길지는 않지만 몇 달 동안 같이 일할 사람인데 친해지면 좋잖아요.”
세경은 주원의 변명이 우스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갑게 선을 그으면 으레 알아채고 물러났다. 그런 것까지 가르쳐야 하나. 세경은 조금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
“주원 씨 말대로 몇 달 같이 있다가 헤어질 사람인데 뭣 하러 기어코 친해지려고 해요. 일하려고 만난 사람들이니까 각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일하고 지내면 되는 거예요.”
“아…… 무슨 말인지 아는데요, 작가님 친구 없죠?”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튀는지. 세경은 주원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애송이랑 말싸움을 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진 않았다.
“네. 없으니까, 그만 가 줄래요?”
주원은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커피숍을 나갔다고 생각하고 다시 노트북을 잡던 세경은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타자 치던 손을 멈췄다.
“왜 저 모른 척하세요?”
세경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학교에서 4년 동안 장학금 받았단다. 신방과 킹카 정도라고 보면 된다나. 성격도 싹싹하니 밝고. 부모님 손 안 빌리고 아르바이트하면서 공부하고. 학교 영상제에서 상도 다 휩쓸고 영화 만드는 동아린가 그것도 해서 바로 투입시켜도 될 것 같대. 언론 고시 준비한다는데 포기하게 만들어서 계속 여기 다녔으면 좋겠다.”
찬주는 주원이 엄청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세경은 찬구의 말에 대충 맞장구쳐 주며 완성한 촬영 구성안을 성태의 메일로 보내 놓고 컴퓨터를 껐다.
“벌써 퇴근하려고?”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어, 오늘 환영 파티 한다고 김 대표가 기다리라고 했는데?”
세경은 거기에 참석할 기분이 아니었다.
“나 빼고 세 사람이서 해요. 난 술도 잘 못 마시는데, 뭐.”
“야, 그래도 주원 씨 서운하게 빠지고 그러냐?”
“몇 달 있다가 떠날 앤데 무슨. 언니도 적당히 해.”
오늘 세경의 까칠함이 최고조인 것 같아 찬주도 더 이상 세경을 붙잡진 못했다. 방송 작가여도 글을 쓰는 사람이니 예민함이 없을 순 없었다. 또 없어서도 안 되는 직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경은 한 번씩 그것이 도를 넘을 때가 있었다. 찬주는 요즘 일을 너무 많이 시킨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성태와 상의해 막내 작가라도 한 명 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side]가 운영되는 데는 영진의 덕이 컸고, 그런 영진이 도움을 주는 건 세경 때문이었다. 세경을 놓치면 이 프로덕션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세경은 대청소를 했다. 밤낮이 자주 바뀌는 일을 하다 보니 청소는 시간 날 때 한꺼번에 할 수밖에 없었다. 베란다 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 후 청소기를 돌렸다. 잠깐 허리를 펴고 숨을 고르는데, 어디선가 벨소리가 들렸다.
주방 식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영진에게서 문자 몇 개와 부재중 통화가 들어와 있었다. 시끄러운 청소기 소음에 벨소리가 울리는지도 몰랐다. 어제 그렇게 헤어졌으니 당분간은 연락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게 영진과 세경의 거리였다.
문자는 전화하라는 내용이었다. 세경은 무시하고 다시 청소기를 켰다. 시끄러운 소리가 잡념을 잊게 만드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소파 밑까지 꼼꼼하게 훑어 내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낡은 5층짜리 아파트는 경비가 허술했다. 세경은 잠깐 긴장이 되기도 했다.
“김세경, 나야. 문 열어 봐.”
문을 두드리며 같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세경은 긴장한 자신이 우스워졌다. 청소기를 끄고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뭐 하고 있는데 전화도 안 받아?”
두 손 가득 음식 봉지를 들고 서 있던 영진이 거리낌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집 찾아오는 거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 또 까칠 모드인가 싶어 영진은 힐끗 세경을 바라봤다. 그녀는 남들보다 많이 예민한 편이었다. 그래서 여성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사귀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러한 부분이 갑갑함으로 다가왔다.
“같이 저녁 먹을 사람 없어서 온 거야. 불쌍하게 생각하고 앉아.”
영진이 제집처럼 주방 식탁 위에 사 온 음식들을 풀기 시작했다. 세경은 어느 정도 포기한 마음으로 식탁 쪽으로 다가갔다.
“방송국에서 잘렸어? 왜 이렇게 한가해?”
세경의 얄미운 말에 영진은 그냥 웃고 말았다.
“나 노력 중이야.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무슨 노력?”
“너랑 결혼하려는 노력.”
말문이 막혔다. 세경은 한참 동안 영진을 노려봤다.
“그만 봐라. 얼굴 뚫리겠다.”
“우리가 안 되는 이유를 다시 읊어 줄까? 선배는 내가 만만하지? 이혼하고 온 남자도 받아 주는 호구로 보여?”
“김세경.”
영진은 세경의 반응이 좋지 않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리도 질색할 줄은 몰랐다.
“당신이랑 결혼할 생각 없어. 떠났으면 끝이야. 윤영진이 이렇게 질척거리는 남자였어? 그럼 내가 그동안 사람을 잘못 봤네. 나 매주 선보는 거 알고 있으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이러는 거야? 내가 못 할 것 같아? 다른 남자 못 만날 거 같아?”
그 이유밖에 없었다.
“그래. 다른 남자 만나 봐. 그럼 놔줄게.”
꼭 이렇게 그녀를 자신의 소유처럼 여기는 영진이 세경은 숨 막혔다. 그녀는 절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 첫사랑을 너무 오래 한 벌이었다.
“선배가 이러는데 내가 다른 남자를 어떻게 만나? 나 시집 좀 가게 꺼져 줄래?”
“그 성격으로 잘도 시집가겠다.”
영진은 독한 한마디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경은 다시 청소할 힘을 찾지 못했다.
― 심한 건 아니지?
“네, 괜찮아요.”
영진이 사 온 음식들을 치우며 저녁을 건너뛸까 생각하고 있는데, 걱정이 되었는지 찬주가 전화를 걸어 왔다.
― 그럼, 나올래? 우리가 너희 집 앞으로 갈게. 너 아직 저녁 안 먹었을 것 아니야? 아픈데 혼자서 청승맞게 그러지 말고.
집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그러니까 영진이 집에 왔다 가기 전까지는 청소를 하고 저녁을 해결한 뒤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당돌하고 어린 한 남자를 떠올리기 싫었다.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다. 누구든 만나서 아무 이야기라도 떠들고 싶었다. 그것이 그 어린 남자일지라도.
“……그럴까요? 얼마나 걸려요? 준비하고 있을게요.”
세경이 나가겠다고 하자 오히려 찬주가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30분 안에 도착한다기에 간단히 옷을 챙겨 입었다. 준비를 다 마치고도 시간이 조금 남아서 화장대에 앉아 립스틱을 발랐다. 영진에게는 보여도 되는 맨얼굴을 그 녀석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거울을 바라보니 20대의 싱그러움이 어느새 사라져 버린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세경은 자신이 우스워 정성스럽게 바른 립스틱을 조용히 지워 버렸다.
3화
“왜 얘는 오자마자 다이어트 식단이야?”
성태의 물음에 찬주는 웃음을 참기 위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뭐가 그리도 웃길까. 세경은 김밥 한 줄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주원을 바라봤다. 좀 웃기긴 했다.
“제가 이만큼만 먹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너 소식가였냐? 소도 때려잡아 먹을 것같이 큰 놈이. 아, 요즘 애들은 이렇게 관리를 해 줘야 하는 건가 보지?”
“그러니까 대표님도 관리 좀 하세요. 뱃살 때문에 발톱도 못 깎게 되면 어떡할래요?”
진지하게 그의 앞날이 걱정돼 찬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깎아 주면 되지.”
찬주와 성태는 오래된 연인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주원은 당황하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미쳤어요? 내가 발톱도 못 깎는 남자 만나려고 이제까지 결혼 안 한 줄 알아요?”
“아, 자꾸 밥 먹는데 발톱 얘기 할래?”
성태가 비빔밥을 비비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장난이 심해지면 대놓고 싸우기도 하는 사이였기에 세경은 자리를 피하려 일어섰다.
“난 아침을 많이 먹어서. 이거 먹어요.”
세경은 손도 안 댄 김밥을 주원에게 건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벌써 김밥 한 줄을 뚝딱한 뒤 젓가락을 빨고 있던 주원이 세경의 김밥을 받자마자 세 조각씩 집어서 입에 넣었다.
“얘 이제 김밥 시키면 말려. 불쌍해서 못 봐 주겠다.”
때마침 목이 막힌 주원이 캑캑거렸다. 세경은 탕비실에서 물 한 잔을 가져와 주원의 앞에 내려놓으려 했다. 급했던 주원이 세경의 손에 들린 물잔을 미리 건네받으려다 그녀의 손까지 잡아 버렸다.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노트북을 들고 회사 근처 카페로 향했다. 다행히 마지막 섭외처에서 촬영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 간단한 촬영 구성안만 써내면 급한 일은 대충 마무리되었다.
세경은 집중하며 구성안을 써 내려가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창 쪽을 바라봤다. 주원이 두 팔을 휘휘 저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쪽으로 들어가 쓸 걸 후회가 되기도 했다. 왜 피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원이 가진 밝음이나 성큼 다가오는 속도가 세경은 조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불쑥 안으로 파고든다고 해야 할까. 직장 생활을 하며 만난 사람들에게선 느껴 보지 못했던 시선이 세경은 버거웠다.
“왜 여기서 작업하세요?”
어느새 커피숍 안으로 들어온 주원이 세경의 맞은편에 앉았다.
“잘 안 풀리면 장소를 옮겨 보기도 해요.”
“아…….”
진짜라고 믿는지 주원의 입에서 도 트이는 소리가 나와 잠깐 웃음이 흐르기도 했다.
스물여덟. 사회 경험이 적으니 아직 어리숙한 게 맞았다. 잘난 척만 하는 남자와 있다가 가르치고 싶은 애송이를 마주하니 생각이 새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계속 앉아 있을 거예요? 나 좀 예민해서, 누가 보고 있으면 일 잘 못해요.”
일부러 차갑게 대하는 게 맞았다. 사회에서 일적으로 만난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탈이 없었다. 자신은 호의로 베푼 감정이 상대에게는 호감으로 느껴져 오해를 만들기도 했다.
“내가 이러는 게 부담스러우세요?”
또다시 성큼 들어왔다. 세경은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고 맞은편의 주원을 바라봤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난 그냥 대표님이 잠깐 회사 앞에서 대기하라고 하셔서 서 있다가 작가님 보고 반가워서 다가온 거예요. 길지는 않지만 몇 달 동안 같이 일할 사람인데 친해지면 좋잖아요.”
세경은 주원의 변명이 우스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갑게 선을 그으면 으레 알아채고 물러났다. 그런 것까지 가르쳐야 하나. 세경은 조금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
“주원 씨 말대로 몇 달 같이 있다가 헤어질 사람인데 뭣 하러 기어코 친해지려고 해요. 일하려고 만난 사람들이니까 각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일하고 지내면 되는 거예요.”
“아…… 무슨 말인지 아는데요, 작가님 친구 없죠?”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튀는지. 세경은 주원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애송이랑 말싸움을 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진 않았다.
“네. 없으니까, 그만 가 줄래요?”
주원은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커피숍을 나갔다고 생각하고 다시 노트북을 잡던 세경은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타자 치던 손을 멈췄다.
“왜 저 모른 척하세요?”
세경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학교에서 4년 동안 장학금 받았단다. 신방과 킹카 정도라고 보면 된다나. 성격도 싹싹하니 밝고. 부모님 손 안 빌리고 아르바이트하면서 공부하고. 학교 영상제에서 상도 다 휩쓸고 영화 만드는 동아린가 그것도 해서 바로 투입시켜도 될 것 같대. 언론 고시 준비한다는데 포기하게 만들어서 계속 여기 다녔으면 좋겠다.”
찬주는 주원이 엄청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세경은 찬구의 말에 대충 맞장구쳐 주며 완성한 촬영 구성안을 성태의 메일로 보내 놓고 컴퓨터를 껐다.
“벌써 퇴근하려고?”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어, 오늘 환영 파티 한다고 김 대표가 기다리라고 했는데?”
세경은 거기에 참석할 기분이 아니었다.
“나 빼고 세 사람이서 해요. 난 술도 잘 못 마시는데, 뭐.”
“야, 그래도 주원 씨 서운하게 빠지고 그러냐?”
“몇 달 있다가 떠날 앤데 무슨. 언니도 적당히 해.”
오늘 세경의 까칠함이 최고조인 것 같아 찬주도 더 이상 세경을 붙잡진 못했다. 방송 작가여도 글을 쓰는 사람이니 예민함이 없을 순 없었다. 또 없어서도 안 되는 직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경은 한 번씩 그것이 도를 넘을 때가 있었다. 찬주는 요즘 일을 너무 많이 시킨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성태와 상의해 막내 작가라도 한 명 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side]가 운영되는 데는 영진의 덕이 컸고, 그런 영진이 도움을 주는 건 세경 때문이었다. 세경을 놓치면 이 프로덕션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세경은 대청소를 했다. 밤낮이 자주 바뀌는 일을 하다 보니 청소는 시간 날 때 한꺼번에 할 수밖에 없었다. 베란다 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 후 청소기를 돌렸다. 잠깐 허리를 펴고 숨을 고르는데, 어디선가 벨소리가 들렸다.
주방 식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영진에게서 문자 몇 개와 부재중 통화가 들어와 있었다. 시끄러운 청소기 소음에 벨소리가 울리는지도 몰랐다. 어제 그렇게 헤어졌으니 당분간은 연락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게 영진과 세경의 거리였다.
문자는 전화하라는 내용이었다. 세경은 무시하고 다시 청소기를 켰다. 시끄러운 소리가 잡념을 잊게 만드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소파 밑까지 꼼꼼하게 훑어 내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낡은 5층짜리 아파트는 경비가 허술했다. 세경은 잠깐 긴장이 되기도 했다.
“김세경, 나야. 문 열어 봐.”
문을 두드리며 같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세경은 긴장한 자신이 우스워졌다. 청소기를 끄고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뭐 하고 있는데 전화도 안 받아?”
두 손 가득 음식 봉지를 들고 서 있던 영진이 거리낌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집 찾아오는 거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 또 까칠 모드인가 싶어 영진은 힐끗 세경을 바라봤다. 그녀는 남들보다 많이 예민한 편이었다. 그래서 여성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사귀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러한 부분이 갑갑함으로 다가왔다.
“같이 저녁 먹을 사람 없어서 온 거야. 불쌍하게 생각하고 앉아.”
영진이 제집처럼 주방 식탁 위에 사 온 음식들을 풀기 시작했다. 세경은 어느 정도 포기한 마음으로 식탁 쪽으로 다가갔다.
“방송국에서 잘렸어? 왜 이렇게 한가해?”
세경의 얄미운 말에 영진은 그냥 웃고 말았다.
“나 노력 중이야.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무슨 노력?”
“너랑 결혼하려는 노력.”
말문이 막혔다. 세경은 한참 동안 영진을 노려봤다.
“그만 봐라. 얼굴 뚫리겠다.”
“우리가 안 되는 이유를 다시 읊어 줄까? 선배는 내가 만만하지? 이혼하고 온 남자도 받아 주는 호구로 보여?”
“김세경.”
영진은 세경의 반응이 좋지 않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리도 질색할 줄은 몰랐다.
“당신이랑 결혼할 생각 없어. 떠났으면 끝이야. 윤영진이 이렇게 질척거리는 남자였어? 그럼 내가 그동안 사람을 잘못 봤네. 나 매주 선보는 거 알고 있으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이러는 거야? 내가 못 할 것 같아? 다른 남자 못 만날 거 같아?”
그 이유밖에 없었다.
“그래. 다른 남자 만나 봐. 그럼 놔줄게.”
꼭 이렇게 그녀를 자신의 소유처럼 여기는 영진이 세경은 숨 막혔다. 그녀는 절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 첫사랑을 너무 오래 한 벌이었다.
“선배가 이러는데 내가 다른 남자를 어떻게 만나? 나 시집 좀 가게 꺼져 줄래?”
“그 성격으로 잘도 시집가겠다.”
영진은 독한 한마디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경은 다시 청소할 힘을 찾지 못했다.
― 심한 건 아니지?
“네, 괜찮아요.”
영진이 사 온 음식들을 치우며 저녁을 건너뛸까 생각하고 있는데, 걱정이 되었는지 찬주가 전화를 걸어 왔다.
― 그럼, 나올래? 우리가 너희 집 앞으로 갈게. 너 아직 저녁 안 먹었을 것 아니야? 아픈데 혼자서 청승맞게 그러지 말고.
집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그러니까 영진이 집에 왔다 가기 전까지는 청소를 하고 저녁을 해결한 뒤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당돌하고 어린 한 남자를 떠올리기 싫었다.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다. 누구든 만나서 아무 이야기라도 떠들고 싶었다. 그것이 그 어린 남자일지라도.
“……그럴까요? 얼마나 걸려요? 준비하고 있을게요.”
세경이 나가겠다고 하자 오히려 찬주가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30분 안에 도착한다기에 간단히 옷을 챙겨 입었다. 준비를 다 마치고도 시간이 조금 남아서 화장대에 앉아 립스틱을 발랐다. 영진에게는 보여도 되는 맨얼굴을 그 녀석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거울을 바라보니 20대의 싱그러움이 어느새 사라져 버린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세경은 자신이 우스워 정성스럽게 바른 립스틱을 조용히 지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