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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여자
1화
1. 악역을 자처해야만 했다
그날은 유독 적적한 날이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딱히 해 줄 말은 없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외로운 날.
‘아, 저기 오네.’
도은이 오렌지 빛깔 칵테일 잔을 장난스럽게 흔들어 대자 이 가게의 사장이자 마스터. 루이가 다소 날카로운 어투로 쏘아붙였다.
“뭐 또 왜. 오늘은 또 무슨 일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 우리가 무슨 일 있어야 볼 사인가.”
능글맞은 도은의 목소리에 루이가 경악했다. 무슨 애가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할 수 있는 건지.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 때쯤, 도은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뭐 오늘 끝내야 될 것도 있고 외롭기도 하고. 우리 루이 매상도 올려 줘야 하고…… 겸사겸사 왔지. 내가 여기 오는 이유야 뻔하잖아. 안 그래?”
안 그래는 무슨 안 그래. 하여간 좋을 만하면 저런다. 좋을 만하면. 빈 칵테일 잔을 채우던 루이가 고개를 설설 내저었다.
“싸가지 없긴. 시끄럽게만 하지 마라. 영업 방해되니까.”
싸가지 없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거 같은데. 당장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지금 하고 싶은 말을 뇌도 안 거치고 그대로 뱉어 낸다면 한참 동안 잔소리를 할 루이가, 그리고 그걸 들을 내가, 눈에 선했기에 지금으로선 꼬리를 내리는 게 유일한 대처법이었다.
“오늘은 조용할걸. 아마.”
“아마? 그 소리만 도대체 몇 번째냐.”
“안 세 봐서 잘 모르겠는데.”
루이의 잇새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 농담 아니야. 아무 남자나 막 만나고 다니는 것도 슬슬 그만두면 안 되냐. 너 그러다가 진짜 이상한 놈 만나면 어쩌려고. 내가 진짜 너만 보면 강가에 어린애 내다 놓은 심정이라니까?”
“또 잔소리. 내가 애야? 어차피 걔들보다 내가 더 이상해서 괜찮아.”
“…….”
“그리고 싸워도 내가 이겨. 너 내 성격 알잖아?”
하지만 도은의 당당한 말에 루이가 들고 있던 셰이커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알지. 완전 잘 알지. 한 번 문 건 절대 안 놓치는 거. 빚진 게 있으면 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받아 내는 거. 셰이커가 묵직하게 추락하더니 바닥에 부딪혀 큰 굉음을 냈다. 자유분방한 입에선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허, 참나.’
이거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싸울 작정인건가? 뭐 저렇게 당당해? 이번엔 진짜 장난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해야 하는데 저 멀리서 멀대 같은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은 그녀의 취향대로 세련되고 당당한 게 멋있었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화려하게 생긴 건지. 루이 역시 혼혈이라 만만치 않게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저 남자는 더 그랬다.
가만히 앉아 있던 도은이 칵테일 잔을 탁 소리 나게 놓고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 와.”
“여기 분위기 엄청 좋네요. 이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그녀의 현 남자 친구, 지정원은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칵테일 바 내부를 살폈다. 이 근방 제일 고급진 곳이지만 알 만한 사람들만 출입하는 곳이니 좋을 수밖에 없지. 여기에 루이가 들인 돈이 얼만데.
‘개업한다고 고생 엄청 했지. 루이가.’
도은이 달짝지근한 칵테일에 입을 맞추며 정원을 위아래로 스캔했다. 보아 하니 오랜만에 만난다고 꽤나 힘을 주고 왔나 본데. 반듯하면서도 상당히 화려한 옷이 그걸 알려 주고 있었다.
‘웬일로 귀여운 구석이 다 있네.’
여전히 얼굴 위로 웃음을 띠며 도은이 칵테일을 주문했다.
“마스터, 얘도 나랑 같은 걸로 하나 주세요.”
“네, 준비해 드릴게요.”
많이 와 본 듯 능숙한 도은의 모습에 정원의 눈빛이 하트로 물들었다. 역시 뭘 해도 멋있다니까. 그런 그의 모습이 꼭 주인 찾는 새끼 강아지와도 같아서. 도은의 눈꼬리가 곧게 휘어졌다.
‘슬슬 끝낼 때도 됐지. 얘도.’
연애든 뭐든. 인간관계에서 무조건 이기는 게임은 언제나 즐겁다. 상대방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고 쥐락펴락하는 것도, 어차피 알고 있는 결과를 한 번 더 보는 것도, 짜릿한 일이다. 도은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준비된 정원의 칵테일 잔에 제 잔을 맞췄다.
짠.
소리가 나며 두 컵이 맞물렸다.
* * *
“그게 무슨 소리예요?”
“…….”
“헤어지자니. 누나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요? 왜, 왜 하필 여기서 그런 말을 하는 건데요? 혹시 오늘 여기 부른 이유도 이러려고 부른 거예요?”
문일지십, 역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 지정원은 그래서 좋았다. 눈치가 빨라서 일일이 가르칠 필요도 없고 답답해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도은이 그의 앞에 있는 칵테일 잔을 미리 제 쪽으로 치웠다.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닌가. 무엇보다 오늘은 칵테일 샤워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빨리 일을 끝내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그게 도은의 유일한 목표였다.
“여기까지 온 이유라…….”
뜸을 들이던 도은이 말을 이었다.
“정원아, 누나는 네게 좋은 추억으로 남고 싶어.”
한참 동안 고민하기에 얼마나 대단한 소린가 했더니. 한도은이라는 여자는 여전히 예측 불허한 사람이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폭포수마냥 곧게 흐르던 눈물도 바짝바짝 말라 버렸으니.
좋은 추억?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 애초에 좋은 추억으로 남을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비참하게 헤어지는데!”
“비참하긴 뭐가 비참해. 진짜 비참한 건 문자나 전화 한 통으로 차이는 거지. 내가 널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뭐겠어?”
“…….”
“누나는 우리 정원이에게 신세계를 경험시켜 준 좋은 여자로 남고 싶어서 그래.”
신세계.
나름 진지하게 한 말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자기가 말하고도 웃긴지 도은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깨물린 입술 사이로 새빨간 핏기가 돌았다. 엄지를 뻗어 정원의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 내려 하자 강한 악력에 의해 손이 붙잡혔다.
꽉 조이는 통증에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아무리 손을 떨쳐 내려 애써 봐도 그녀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와. 무슨 애가 힘이 이렇게 쎄?’
신음 소리와 함께 도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기, 나 좀 아픈데 이것 좀 놓고 얘기하지?”
“누나, 남자 생겼죠.”
“아니…….”
“그 남자가 나보다 더 좋아요? 더 잘생겼어요? 아니면 뭐 돈이 많나?”
“…….”
“누나 이상형 한결같잖아요. 영앤리치 빅앤핸섬.”
한결같은 건 사실이다. 세상에 젊고 돈 많고, 어깨 넓고 잘생긴 남자를 누가 마다하랴.
그러나 처음에 꼬실 때 한 말을 이때 써먹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려 대던 도은이 붙잡은 손을 팽개쳤다. 떨쳐 낸 엄지에서부터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 인상을 일그러트린 도은이 단호하게 말을 받아쳤다.
“잘 아네. 그런데 네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
“생긴 게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어.”
“……네?”
“남자, 원래부터 있었다고.”
덜컹.
정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무래도 남자가 생긴 게 아닌 ‘원래’ 있었다는 소리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도은이 칵테일 잔을 두어 번 흔들거리자 넘실거리는 물결 속, 진한 화장을 한 제 얼굴이 비쳤다. 여전히 지루하다는 표정, 아무런 감흥도 없는 표정이 교차하며 얼굴 위로 떠올랐다. 늘 봐 온 광경이라 그런지 몹쓸 놈의 표정은 관리가 되질 않는다. 도은이 치렁치렁한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두 팔을 엮었다.
“마지막.”
“…….”
“마지막으로 궁금한 거 물어봐. 다 대답해 줄게.”
개수는 딱히 정해 두지 않았다. 딱 봐도 할 말이 많아 보였고 어차피 그 말들은 다 쓰잘머리 없는 질문일 테니까 대답해 주는 데 큰 정성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대충 대답해 주고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한 도은이 손목에 자리 잡힌 시계를 살폈다. 벌써 밤 10시를 향해 가는 시간. 도은이 내리깐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거의 동시에 굳게 닫힌 그의 입술이 열렸다.
“왜 헤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난 양다리도 괜찮아요. 난 그냥 누나만 있으면…….”
“너 정말 속 넓다. 내 손바닥에 네 이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 이름이 써져 있다는데도 좋아?”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요?”
“반대로, 골 들어간다고 골키퍼가 바뀌니?”
“나 말장난 할 기분 아니에요.”
“너만 그런 줄 알아? 나도 마찬가지야.”
정원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탄식을 흘렸다.
“아, 진짜…….”
단 한마디도 져 주질 않는 그녀의 모습이 이별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바로 이런 느낌일까. 처음부터 자신의 사랑이 이렇게 비참하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절대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예 그녀의 번호 자체를 알아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내 취향을 만날 줄은 몰랐는데.’
‘진짜 귀엽다 너.’
그래도 이번엔 정말 진심이었는데.
“……얘 좀 봐라?”
체면이고 뭐고 생각할 것도 없었다. 지금 당장 누군가 사랑이 밥 먹여 주냐고 묻는다면 바로 응, 이라고 대답할 만큼 간절했으니까. 하지만 대기업 간부에게도 꿇은 적 없던 무릎을 꿇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은은 늘 보던 광경인 양, 일직선으로 굳어 있던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게 다였다.
아무래도 구구절절 이야기를 다 들어 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예전부터 듣기만 하는 데엔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도은은 칵테일 잔에 입을 맞추며 귀를 기울였다.
“나 아직 누나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
“어, 그렇구나.”
“……누난 나 안 좋아해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그녀의 칵테일 잔이 다 비워질 때까지, 정원은 더 이상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색한 정적만이 그 공간을 가득 채울 뿐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주시하던 도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통 같으면 그냥 무시하고 나가 버릴 텐데, 비에 쫄딱 젖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 양심통을 쿡쿡 찔러 왔다.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도은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누나…….”
방금 전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에 정원의 눈이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도은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는 차갑고 시린 말들이었다.
“정원아, 이제 그만하자.”
“누나.”
“더 이상 연락 안 했으면 좋겠어. 계산은 내 앞으로 달아 뒀으니까 마시려면 더 마시고 들어가.”
그렇게 그녀는 떠나 버렸다. 봄날의 벚꽃처럼. 가을날의 낙엽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미련 없이 떠나가 버렸다.
1화
1. 악역을 자처해야만 했다
그날은 유독 적적한 날이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딱히 해 줄 말은 없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외로운 날.
‘아, 저기 오네.’
도은이 오렌지 빛깔 칵테일 잔을 장난스럽게 흔들어 대자 이 가게의 사장이자 마스터. 루이가 다소 날카로운 어투로 쏘아붙였다.
“뭐 또 왜. 오늘은 또 무슨 일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 우리가 무슨 일 있어야 볼 사인가.”
능글맞은 도은의 목소리에 루이가 경악했다. 무슨 애가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할 수 있는 건지.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 때쯤, 도은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뭐 오늘 끝내야 될 것도 있고 외롭기도 하고. 우리 루이 매상도 올려 줘야 하고…… 겸사겸사 왔지. 내가 여기 오는 이유야 뻔하잖아. 안 그래?”
안 그래는 무슨 안 그래. 하여간 좋을 만하면 저런다. 좋을 만하면. 빈 칵테일 잔을 채우던 루이가 고개를 설설 내저었다.
“싸가지 없긴. 시끄럽게만 하지 마라. 영업 방해되니까.”
싸가지 없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거 같은데. 당장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지금 하고 싶은 말을 뇌도 안 거치고 그대로 뱉어 낸다면 한참 동안 잔소리를 할 루이가, 그리고 그걸 들을 내가, 눈에 선했기에 지금으로선 꼬리를 내리는 게 유일한 대처법이었다.
“오늘은 조용할걸. 아마.”
“아마? 그 소리만 도대체 몇 번째냐.”
“안 세 봐서 잘 모르겠는데.”
루이의 잇새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 농담 아니야. 아무 남자나 막 만나고 다니는 것도 슬슬 그만두면 안 되냐. 너 그러다가 진짜 이상한 놈 만나면 어쩌려고. 내가 진짜 너만 보면 강가에 어린애 내다 놓은 심정이라니까?”
“또 잔소리. 내가 애야? 어차피 걔들보다 내가 더 이상해서 괜찮아.”
“…….”
“그리고 싸워도 내가 이겨. 너 내 성격 알잖아?”
하지만 도은의 당당한 말에 루이가 들고 있던 셰이커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알지. 완전 잘 알지. 한 번 문 건 절대 안 놓치는 거. 빚진 게 있으면 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받아 내는 거. 셰이커가 묵직하게 추락하더니 바닥에 부딪혀 큰 굉음을 냈다. 자유분방한 입에선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허, 참나.’
이거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싸울 작정인건가? 뭐 저렇게 당당해? 이번엔 진짜 장난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해야 하는데 저 멀리서 멀대 같은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은 그녀의 취향대로 세련되고 당당한 게 멋있었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화려하게 생긴 건지. 루이 역시 혼혈이라 만만치 않게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저 남자는 더 그랬다.
가만히 앉아 있던 도은이 칵테일 잔을 탁 소리 나게 놓고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 와.”
“여기 분위기 엄청 좋네요. 이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그녀의 현 남자 친구, 지정원은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칵테일 바 내부를 살폈다. 이 근방 제일 고급진 곳이지만 알 만한 사람들만 출입하는 곳이니 좋을 수밖에 없지. 여기에 루이가 들인 돈이 얼만데.
‘개업한다고 고생 엄청 했지. 루이가.’
도은이 달짝지근한 칵테일에 입을 맞추며 정원을 위아래로 스캔했다. 보아 하니 오랜만에 만난다고 꽤나 힘을 주고 왔나 본데. 반듯하면서도 상당히 화려한 옷이 그걸 알려 주고 있었다.
‘웬일로 귀여운 구석이 다 있네.’
여전히 얼굴 위로 웃음을 띠며 도은이 칵테일을 주문했다.
“마스터, 얘도 나랑 같은 걸로 하나 주세요.”
“네, 준비해 드릴게요.”
많이 와 본 듯 능숙한 도은의 모습에 정원의 눈빛이 하트로 물들었다. 역시 뭘 해도 멋있다니까. 그런 그의 모습이 꼭 주인 찾는 새끼 강아지와도 같아서. 도은의 눈꼬리가 곧게 휘어졌다.
‘슬슬 끝낼 때도 됐지. 얘도.’
연애든 뭐든. 인간관계에서 무조건 이기는 게임은 언제나 즐겁다. 상대방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고 쥐락펴락하는 것도, 어차피 알고 있는 결과를 한 번 더 보는 것도, 짜릿한 일이다. 도은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준비된 정원의 칵테일 잔에 제 잔을 맞췄다.
짠.
소리가 나며 두 컵이 맞물렸다.
* * *
“그게 무슨 소리예요?”
“…….”
“헤어지자니. 누나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요? 왜, 왜 하필 여기서 그런 말을 하는 건데요? 혹시 오늘 여기 부른 이유도 이러려고 부른 거예요?”
문일지십, 역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 지정원은 그래서 좋았다. 눈치가 빨라서 일일이 가르칠 필요도 없고 답답해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도은이 그의 앞에 있는 칵테일 잔을 미리 제 쪽으로 치웠다.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닌가. 무엇보다 오늘은 칵테일 샤워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빨리 일을 끝내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그게 도은의 유일한 목표였다.
“여기까지 온 이유라…….”
뜸을 들이던 도은이 말을 이었다.
“정원아, 누나는 네게 좋은 추억으로 남고 싶어.”
한참 동안 고민하기에 얼마나 대단한 소린가 했더니. 한도은이라는 여자는 여전히 예측 불허한 사람이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폭포수마냥 곧게 흐르던 눈물도 바짝바짝 말라 버렸으니.
좋은 추억?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 애초에 좋은 추억으로 남을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비참하게 헤어지는데!”
“비참하긴 뭐가 비참해. 진짜 비참한 건 문자나 전화 한 통으로 차이는 거지. 내가 널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뭐겠어?”
“…….”
“누나는 우리 정원이에게 신세계를 경험시켜 준 좋은 여자로 남고 싶어서 그래.”
신세계.
나름 진지하게 한 말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자기가 말하고도 웃긴지 도은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깨물린 입술 사이로 새빨간 핏기가 돌았다. 엄지를 뻗어 정원의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 내려 하자 강한 악력에 의해 손이 붙잡혔다.
꽉 조이는 통증에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아무리 손을 떨쳐 내려 애써 봐도 그녀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와. 무슨 애가 힘이 이렇게 쎄?’
신음 소리와 함께 도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기, 나 좀 아픈데 이것 좀 놓고 얘기하지?”
“누나, 남자 생겼죠.”
“아니…….”
“그 남자가 나보다 더 좋아요? 더 잘생겼어요? 아니면 뭐 돈이 많나?”
“…….”
“누나 이상형 한결같잖아요. 영앤리치 빅앤핸섬.”
한결같은 건 사실이다. 세상에 젊고 돈 많고, 어깨 넓고 잘생긴 남자를 누가 마다하랴.
그러나 처음에 꼬실 때 한 말을 이때 써먹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려 대던 도은이 붙잡은 손을 팽개쳤다. 떨쳐 낸 엄지에서부터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 인상을 일그러트린 도은이 단호하게 말을 받아쳤다.
“잘 아네. 그런데 네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
“생긴 게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어.”
“……네?”
“남자, 원래부터 있었다고.”
덜컹.
정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무래도 남자가 생긴 게 아닌 ‘원래’ 있었다는 소리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도은이 칵테일 잔을 두어 번 흔들거리자 넘실거리는 물결 속, 진한 화장을 한 제 얼굴이 비쳤다. 여전히 지루하다는 표정, 아무런 감흥도 없는 표정이 교차하며 얼굴 위로 떠올랐다. 늘 봐 온 광경이라 그런지 몹쓸 놈의 표정은 관리가 되질 않는다. 도은이 치렁치렁한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두 팔을 엮었다.
“마지막.”
“…….”
“마지막으로 궁금한 거 물어봐. 다 대답해 줄게.”
개수는 딱히 정해 두지 않았다. 딱 봐도 할 말이 많아 보였고 어차피 그 말들은 다 쓰잘머리 없는 질문일 테니까 대답해 주는 데 큰 정성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대충 대답해 주고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한 도은이 손목에 자리 잡힌 시계를 살폈다. 벌써 밤 10시를 향해 가는 시간. 도은이 내리깐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거의 동시에 굳게 닫힌 그의 입술이 열렸다.
“왜 헤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난 양다리도 괜찮아요. 난 그냥 누나만 있으면…….”
“너 정말 속 넓다. 내 손바닥에 네 이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 이름이 써져 있다는데도 좋아?”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요?”
“반대로, 골 들어간다고 골키퍼가 바뀌니?”
“나 말장난 할 기분 아니에요.”
“너만 그런 줄 알아? 나도 마찬가지야.”
정원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탄식을 흘렸다.
“아, 진짜…….”
단 한마디도 져 주질 않는 그녀의 모습이 이별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바로 이런 느낌일까. 처음부터 자신의 사랑이 이렇게 비참하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절대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예 그녀의 번호 자체를 알아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내 취향을 만날 줄은 몰랐는데.’
‘진짜 귀엽다 너.’
그래도 이번엔 정말 진심이었는데.
“……얘 좀 봐라?”
체면이고 뭐고 생각할 것도 없었다. 지금 당장 누군가 사랑이 밥 먹여 주냐고 묻는다면 바로 응, 이라고 대답할 만큼 간절했으니까. 하지만 대기업 간부에게도 꿇은 적 없던 무릎을 꿇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은은 늘 보던 광경인 양, 일직선으로 굳어 있던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게 다였다.
아무래도 구구절절 이야기를 다 들어 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예전부터 듣기만 하는 데엔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도은은 칵테일 잔에 입을 맞추며 귀를 기울였다.
“나 아직 누나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
“어, 그렇구나.”
“……누난 나 안 좋아해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그녀의 칵테일 잔이 다 비워질 때까지, 정원은 더 이상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색한 정적만이 그 공간을 가득 채울 뿐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주시하던 도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통 같으면 그냥 무시하고 나가 버릴 텐데, 비에 쫄딱 젖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 양심통을 쿡쿡 찔러 왔다.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도은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누나…….”
방금 전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에 정원의 눈이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도은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는 차갑고 시린 말들이었다.
“정원아, 이제 그만하자.”
“누나.”
“더 이상 연락 안 했으면 좋겠어. 계산은 내 앞으로 달아 뒀으니까 마시려면 더 마시고 들어가.”
그렇게 그녀는 떠나 버렸다. 봄날의 벚꽃처럼. 가을날의 낙엽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미련 없이 떠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