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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또각, 또각.
이 칵테일 바는 다 좋은데 계단이 너무 높아서 문제다. 도은이 한껏 올라간 치마를 끌어내리며 투덜거렸다.
“바지나 긴 치마로 입고 올 걸 그랬나?”
하지만 지금 이 재킷엔 짧은 치마가 더 잘 어울리는 걸. 도은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같이 들어 올린 시야 사이로 검은 세단과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남성의 실루엣이 포착되었다.
안 온다더니 결국엔 왔구나. 도은이 환하게 미소를 띠며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웬일이야? 이런 옷 불편하다면서.”
1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늘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패션이었지만 꾸민 게 티 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쫙 잘빠진 슈트가 탄성을 절로 자아냈고 길쭉한 기럭지와 어울려 완전 찰떡이 따로 없었다.
스르륵.
도은이 눈을 떼지 못하자 눈앞의 남자는 마이를 벗으며 그녀의 허리에 걸쳐 주었다. 수호의 미간에 새겨진 세 개의 선이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지만, 도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짧아.”
“저기요. 이수호 씨.”
“응.”
“나 헤어지고 왔는데, 칭찬 안 해 줘?”
“…….”
“이거 은근 섭섭해지려고 하는데.”
도은의 눈빛이 노골적으로 변하더니 수호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수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음에도 기어코 도은은 단호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나 봐.”
“…….”
“나 보라고.”
수호의 고개가 돌려졌다. 호수 같이 맑고 수심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눈동자는 언제나 도은을 향했다. 그래, 감히 그 눈으로 누굴 담아내겠어. 도은이 팔에 힘을 주며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말 잘 듣네.”
“…….”
“그래, 네가 내 말 아니면 누구 말을 듣겠어.”
촉.
도은이 까치발을 더 높게 든 채로 수호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 틈새가 벌어지고 도은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더 깊게, 더 짙게, 입을 맞출 뿐이었다. 두 사람의 혀가 왔다 갔다 엮이고 숨이 차오를 그때. 먼저 입을 뗀 건 도은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양 촉촉한 입술은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수호야, 만족해?”
“……응.”
“안 들려. 더 크게 말해.”
“응, 만족해.”
도은은 수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햇볕같이 따사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은 언제나 한 사람만을 향하는 눈빛이었지만 어째선지 차가움이 가득 서린 듯했다.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수호가 눈꼬리를 축 내려트린 채로 도은을 바라봤다.
“……난 너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마음 아프더라.”
도은이 수호의 눈매를 매만지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늘 이런 모습을 보일 때면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으니.
‘너는 만족해?’
다른 것도 아니고, 너도 만족하냐는 그 의문.
‘네가 원하는 게 이거야?’
원하는 게 이거냐는 그 의문. 그에 대한 도은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아니, 나도 아파.’
그런데도 이걸 멈출 순 없었다. 내가 그동안 아팠던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그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제일 컸지만 늘 나도 그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결국 나는 오늘도 그의 옆에 있기 위해, 그리고 나를 지키기 위해, ‘악역’을 자초해야만 했다.
“나 오늘 네 집에서 자고 갈 거야.”
2. 날 사랑해?
“하아.”
쿵.
둔탁한 음과 함께 도은의 등이 벽에 부딪쳤다. 등에서부터 느껴지는 차가운 온기. 두 사람의 몸은 더 이상 거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밀착했고, 수호는 그녀를 더더욱 구석으로 몰았다. 수호가 쓰다듬던 팔은 불에 데인 듯 뜨거웠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곳은 진한 여운이 남았다.
닿으면 닿을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차 거칠어지는 그의 호흡은 미묘한 흥분감을 안겨다 주었다.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우선 옷부터 좀…….”
“그래서 싫어?”
도은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아니. 좋은데.”
“…….”
“그러는 너는, 지금 많이 급해?”
수호의 잇새로 짧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응.”
정말 급한 듯 파르르 떨려 오는 그의 목소리에 도은이 그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마치 불가항력이라도 되는 듯,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하, 뭐야. 오늘은 왜 이렇게 솔직해?”
도은의 손이 밑으로 향하자 수호가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도은의 눈에 가득 차올랐다.
“모르겠어. 나 지금…… 좀 이상해.”
이상하긴. 더 급하게. 아니, 더 간절하게 부탁해 봐.
도은이 눈꼬리가 접히며 살포시 웃었다. 저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일수록 더 괴롭히고 싶다는 걸 정녕 모르는 걸까.
이번에는 도은이 수호를 벽으로 몰고서 짧게 입을 맞추었다. 생각보다 금방 떨어진 서로의 입술은 갈 곳을 잃은 채 헤맸다. 하지만 도은은 더 원했다. 그가 망가지길, 그가 자신에게 더 매달리길.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그 사람의 밑바닥이 궁금해지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도은이 목에 두른 두 팔에 힘을 주며 심술궂게 말했다.
“왜 몰라. 분명 알 텐데.”
“도은아.”
“더 애원해 봐.”
“…….”
“내가 원하는 건 너 하나라고, 제발 나 좀 어떻게 해 달라고.”
올려진 도은의 입꼬리가 얄미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매혹적이고 섹시해 보이는 걸 보니 자신도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널, 한도은을 원해.”
새까만 눈동자에 새빨간 불길이 일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가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제발 나 좀 어떻게 해 줘. 미치겠어.”
도은이 수호의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걸쳐진 수호의 얼굴은 상당히 야해 보였다. 가득 굶주린 짐승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빛. 제일 일차원적인 본능이 튀어나와 개인적으로 마음에 쏙 드는, 가장 보기 좋은 눈빛이었다.
“말 잘 듣네.”
“……하아.”
애달픈 신음 소리를 끝으로 도은의 야릇한 목소리가 방 안의 적막을 갈랐다.
“슬슬 침대로 가자. 안아 줘.”
* * *
“하아.”
흥분으로 고조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맴돌았다. 수호가 도은의 입술을 찾아 엄지손가락을 쑥 집어넣었다. 벌려진 틈새 사이로 말랑한 혓바닥이 느껴졌다. 흥분과 쾌감이 온몸을 지배하더니 반응은 손끝에서부터 느껴졌다. 움찔거리는 몸에 의해 침대는 끼익- 하며 작은 소음을 냈고 수호는 벌려진 잇새로 달뜬 숨소리를 뱉어 냈다.
“넣을게.”
“자, 잠시…… 으응!”
이건 예고라기보단 통보에 더 가까웠다. 그의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귓가에 맴돌자 도은이 급하게 그를 저지했다. 아직은 일러도 너무 이르다. 하지만 자유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의 손은 수호의 힘에 의해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손이 붙잡힌 이상은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행동이 제한되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래에 깔려 흔들리는 게 다였다.
‘가리지 마.’
약 5년 만이었다. 강압적이면서도 간절한 그의 모습을 보아 하니 도은의 머릿속엔 문득 ‘그 일’ 이 스쳐 지나갔다. 정확히 그에게 끌려다니며 동시에 협박 아닌 협박을 했던 때.
‘이젠 폭력까지 쓰는구나.’
‘때릴 수 있으면 더 때려 봐.’
도은이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겉으로는 참을 수 없는 소리들을 내뱉었다. 그녀가 소리를 내면 낼수록 더욱 빠르게 파고드는 그 덕분에 의식이 흐려져 갔다. 눈앞이 아득해진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아, 흐읏! 아, 제발!”
힘은 힘대로 들고, 입에선 애걸복걸하는 소리가 미친 듯이 터져 나오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맥없이 흔들리는 도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상체를 들이밀던 수호가 그녀의 눈물을 핥았다. 평소 냉담한 그녀와 달리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차디찬 바람만 쌩쌩 불던 엄동설한에 꽃 한 송이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녀에게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이러한 방법밖에 없었다. 그건 예전부터 그랬다. 학교를 포함한 모든 사회생활에서 그녀는 ‘완벽함’을 추구했으니까. 어떨 때 보면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완벽했다.
‘너 한도은이랑 사귀는 거 안 힘드냐?’
‘아무리 이뻐도 난 저런 스타일은 좀 별로…….’
그런 여자의 남자 친구로 사는 것이 힘들진 않느냐고. 주변에서 많이 들려온 물음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수호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그런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우니까.’
‘내가 한도은을 아주 많이, 죽을 만큼 사랑하니까.’
그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독종이라는 말을 해 댔다. 진짜 독종은 자신이 아니라 한도은, 그녀인데. 제 앞에서 한껏 약해진 모습으로 눈물을 흘려 대는 도은을 보며 수호가 살짝 미소 지었다.
“사랑해. 내가 많이 사랑해. 도은아. 알지?”
“하아, 아. 수호야…….”
“사랑해.”
수호의 시선이 도은의 이마에 머물렀다. 살짝 도드라져 조그마한 이마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이쁘다. 도은아.”
수호가 도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짧게 머물 것 같았던 그 입술은 길고 짙게 머물러 있었다. 그와 동시에 수호의 움직임이 빨라지더니 도은의 두 손이 수호의 등을 끌어안았다. 넓은 등판에 그녀의 손톱이 깊게 파고들었다.
“하으, 윽…….”
“하아.”
도은의 몸이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 하나 남은 잎사귀마냥 파르르 떨렸다. 수호가 맞닿아 있던 입술을 떼고서 도은의 위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이제 막 정사를 끝낸 남자의 몸이 도은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도은이 감겨 오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지금 여기서 자 버리면 또 어물쩍 넘어갈 게 뻔했다. 그냥 넘어가 주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이번엔 제대로 듣고 싶었다.
“분위기 휩쓸려서 말하는 건 듣기 싫어.”
“…….”
“그러니까 제대로 말해.”
수호가 도은의 몸 위에서 떨어졌다. 다시 가벼워진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여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반대였다. 손 하나 까딱 못할 정도로 지쳤다. 아무래도 직후라 그런지 여운이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몰아붙여. 진짜 손가락 하나 안 움직여지네.’
도은이 수호를 노려보듯 주시했다. 도은의 시선 끝엔 언제나 수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무언가 많이 불안정한 모습. 막상 깊고 맑은 그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을 땐 도은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다른 건 다 해도 그 눈빛만은 제대로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도은의 시선은 항상 수호의 쇄골로 향했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사귀다 보니 터득한 방법이 수만 가지였다.
그리고 이건 그 수만 가지 방법 중 하나에 불과했다.
‘끝까지 말 안하네.’
금방 들려올 것 같았던 수호의 대답이 10분째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고작 그거 대답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 그냥 ‘사랑해.’ 한마디면 끝날 걸 질질 끌고 앉아 있다.
도은이 입을 열어 쏘아붙이려던 참이었다.
“그러는 너는.”
“…….”
“날 사랑해?”
묻는 질문에 대답이나 하지. 그는 오히려 역질문을 해 왔다. 꽤나 진지한 눈빛으로 자길 사랑하느냐 묻는다. 여기서 왠지 모를 심술이 피어올랐지만 자신이 심각한 상황에서까지 투정을 부릴 어린애는 아니었다.
“야, 이수호.”
도은의 눈빛이 냉담하게 돌변하더니 가시 돋친 말로 쏘아붙였다.
“사랑하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
“우리 사이에 사랑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나 있었겠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맞는 말이었다. 도무지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수호가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또각, 또각.
이 칵테일 바는 다 좋은데 계단이 너무 높아서 문제다. 도은이 한껏 올라간 치마를 끌어내리며 투덜거렸다.
“바지나 긴 치마로 입고 올 걸 그랬나?”
하지만 지금 이 재킷엔 짧은 치마가 더 잘 어울리는 걸. 도은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같이 들어 올린 시야 사이로 검은 세단과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남성의 실루엣이 포착되었다.
안 온다더니 결국엔 왔구나. 도은이 환하게 미소를 띠며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웬일이야? 이런 옷 불편하다면서.”
1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늘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패션이었지만 꾸민 게 티 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쫙 잘빠진 슈트가 탄성을 절로 자아냈고 길쭉한 기럭지와 어울려 완전 찰떡이 따로 없었다.
스르륵.
도은이 눈을 떼지 못하자 눈앞의 남자는 마이를 벗으며 그녀의 허리에 걸쳐 주었다. 수호의 미간에 새겨진 세 개의 선이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지만, 도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짧아.”
“저기요. 이수호 씨.”
“응.”
“나 헤어지고 왔는데, 칭찬 안 해 줘?”
“…….”
“이거 은근 섭섭해지려고 하는데.”
도은의 눈빛이 노골적으로 변하더니 수호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수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음에도 기어코 도은은 단호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나 봐.”
“…….”
“나 보라고.”
수호의 고개가 돌려졌다. 호수 같이 맑고 수심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눈동자는 언제나 도은을 향했다. 그래, 감히 그 눈으로 누굴 담아내겠어. 도은이 팔에 힘을 주며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말 잘 듣네.”
“…….”
“그래, 네가 내 말 아니면 누구 말을 듣겠어.”
촉.
도은이 까치발을 더 높게 든 채로 수호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 틈새가 벌어지고 도은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더 깊게, 더 짙게, 입을 맞출 뿐이었다. 두 사람의 혀가 왔다 갔다 엮이고 숨이 차오를 그때. 먼저 입을 뗀 건 도은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양 촉촉한 입술은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수호야, 만족해?”
“……응.”
“안 들려. 더 크게 말해.”
“응, 만족해.”
도은은 수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햇볕같이 따사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은 언제나 한 사람만을 향하는 눈빛이었지만 어째선지 차가움이 가득 서린 듯했다.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수호가 눈꼬리를 축 내려트린 채로 도은을 바라봤다.
“……난 너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마음 아프더라.”
도은이 수호의 눈매를 매만지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늘 이런 모습을 보일 때면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으니.
‘너는 만족해?’
다른 것도 아니고, 너도 만족하냐는 그 의문.
‘네가 원하는 게 이거야?’
원하는 게 이거냐는 그 의문. 그에 대한 도은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아니, 나도 아파.’
그런데도 이걸 멈출 순 없었다. 내가 그동안 아팠던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그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제일 컸지만 늘 나도 그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결국 나는 오늘도 그의 옆에 있기 위해, 그리고 나를 지키기 위해, ‘악역’을 자초해야만 했다.
“나 오늘 네 집에서 자고 갈 거야.”
2. 날 사랑해?
“하아.”
쿵.
둔탁한 음과 함께 도은의 등이 벽에 부딪쳤다. 등에서부터 느껴지는 차가운 온기. 두 사람의 몸은 더 이상 거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밀착했고, 수호는 그녀를 더더욱 구석으로 몰았다. 수호가 쓰다듬던 팔은 불에 데인 듯 뜨거웠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곳은 진한 여운이 남았다.
닿으면 닿을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차 거칠어지는 그의 호흡은 미묘한 흥분감을 안겨다 주었다.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우선 옷부터 좀…….”
“그래서 싫어?”
도은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아니. 좋은데.”
“…….”
“그러는 너는, 지금 많이 급해?”
수호의 잇새로 짧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응.”
정말 급한 듯 파르르 떨려 오는 그의 목소리에 도은이 그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마치 불가항력이라도 되는 듯,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하, 뭐야. 오늘은 왜 이렇게 솔직해?”
도은의 손이 밑으로 향하자 수호가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도은의 눈에 가득 차올랐다.
“모르겠어. 나 지금…… 좀 이상해.”
이상하긴. 더 급하게. 아니, 더 간절하게 부탁해 봐.
도은이 눈꼬리가 접히며 살포시 웃었다. 저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일수록 더 괴롭히고 싶다는 걸 정녕 모르는 걸까.
이번에는 도은이 수호를 벽으로 몰고서 짧게 입을 맞추었다. 생각보다 금방 떨어진 서로의 입술은 갈 곳을 잃은 채 헤맸다. 하지만 도은은 더 원했다. 그가 망가지길, 그가 자신에게 더 매달리길.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그 사람의 밑바닥이 궁금해지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도은이 목에 두른 두 팔에 힘을 주며 심술궂게 말했다.
“왜 몰라. 분명 알 텐데.”
“도은아.”
“더 애원해 봐.”
“…….”
“내가 원하는 건 너 하나라고, 제발 나 좀 어떻게 해 달라고.”
올려진 도은의 입꼬리가 얄미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매혹적이고 섹시해 보이는 걸 보니 자신도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널, 한도은을 원해.”
새까만 눈동자에 새빨간 불길이 일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가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제발 나 좀 어떻게 해 줘. 미치겠어.”
도은이 수호의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걸쳐진 수호의 얼굴은 상당히 야해 보였다. 가득 굶주린 짐승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빛. 제일 일차원적인 본능이 튀어나와 개인적으로 마음에 쏙 드는, 가장 보기 좋은 눈빛이었다.
“말 잘 듣네.”
“……하아.”
애달픈 신음 소리를 끝으로 도은의 야릇한 목소리가 방 안의 적막을 갈랐다.
“슬슬 침대로 가자. 안아 줘.”
“하아.”
흥분으로 고조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맴돌았다. 수호가 도은의 입술을 찾아 엄지손가락을 쑥 집어넣었다. 벌려진 틈새 사이로 말랑한 혓바닥이 느껴졌다. 흥분과 쾌감이 온몸을 지배하더니 반응은 손끝에서부터 느껴졌다. 움찔거리는 몸에 의해 침대는 끼익- 하며 작은 소음을 냈고 수호는 벌려진 잇새로 달뜬 숨소리를 뱉어 냈다.
“넣을게.”
“자, 잠시…… 으응!”
이건 예고라기보단 통보에 더 가까웠다. 그의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귓가에 맴돌자 도은이 급하게 그를 저지했다. 아직은 일러도 너무 이르다. 하지만 자유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의 손은 수호의 힘에 의해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손이 붙잡힌 이상은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행동이 제한되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래에 깔려 흔들리는 게 다였다.
‘가리지 마.’
약 5년 만이었다. 강압적이면서도 간절한 그의 모습을 보아 하니 도은의 머릿속엔 문득 ‘그 일’ 이 스쳐 지나갔다. 정확히 그에게 끌려다니며 동시에 협박 아닌 협박을 했던 때.
‘이젠 폭력까지 쓰는구나.’
‘때릴 수 있으면 더 때려 봐.’
도은이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겉으로는 참을 수 없는 소리들을 내뱉었다. 그녀가 소리를 내면 낼수록 더욱 빠르게 파고드는 그 덕분에 의식이 흐려져 갔다. 눈앞이 아득해진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아, 흐읏! 아, 제발!”
힘은 힘대로 들고, 입에선 애걸복걸하는 소리가 미친 듯이 터져 나오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맥없이 흔들리는 도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상체를 들이밀던 수호가 그녀의 눈물을 핥았다. 평소 냉담한 그녀와 달리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차디찬 바람만 쌩쌩 불던 엄동설한에 꽃 한 송이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녀에게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이러한 방법밖에 없었다. 그건 예전부터 그랬다. 학교를 포함한 모든 사회생활에서 그녀는 ‘완벽함’을 추구했으니까. 어떨 때 보면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완벽했다.
‘너 한도은이랑 사귀는 거 안 힘드냐?’
‘아무리 이뻐도 난 저런 스타일은 좀 별로…….’
그런 여자의 남자 친구로 사는 것이 힘들진 않느냐고. 주변에서 많이 들려온 물음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수호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그런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우니까.’
‘내가 한도은을 아주 많이, 죽을 만큼 사랑하니까.’
그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독종이라는 말을 해 댔다. 진짜 독종은 자신이 아니라 한도은, 그녀인데. 제 앞에서 한껏 약해진 모습으로 눈물을 흘려 대는 도은을 보며 수호가 살짝 미소 지었다.
“사랑해. 내가 많이 사랑해. 도은아. 알지?”
“하아, 아. 수호야…….”
“사랑해.”
수호의 시선이 도은의 이마에 머물렀다. 살짝 도드라져 조그마한 이마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이쁘다. 도은아.”
수호가 도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짧게 머물 것 같았던 그 입술은 길고 짙게 머물러 있었다. 그와 동시에 수호의 움직임이 빨라지더니 도은의 두 손이 수호의 등을 끌어안았다. 넓은 등판에 그녀의 손톱이 깊게 파고들었다.
“하으, 윽…….”
“하아.”
도은의 몸이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 하나 남은 잎사귀마냥 파르르 떨렸다. 수호가 맞닿아 있던 입술을 떼고서 도은의 위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이제 막 정사를 끝낸 남자의 몸이 도은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도은이 감겨 오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지금 여기서 자 버리면 또 어물쩍 넘어갈 게 뻔했다. 그냥 넘어가 주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이번엔 제대로 듣고 싶었다.
“분위기 휩쓸려서 말하는 건 듣기 싫어.”
“…….”
“그러니까 제대로 말해.”
수호가 도은의 몸 위에서 떨어졌다. 다시 가벼워진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여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반대였다. 손 하나 까딱 못할 정도로 지쳤다. 아무래도 직후라 그런지 여운이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몰아붙여. 진짜 손가락 하나 안 움직여지네.’
도은이 수호를 노려보듯 주시했다. 도은의 시선 끝엔 언제나 수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무언가 많이 불안정한 모습. 막상 깊고 맑은 그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을 땐 도은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다른 건 다 해도 그 눈빛만은 제대로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도은의 시선은 항상 수호의 쇄골로 향했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사귀다 보니 터득한 방법이 수만 가지였다.
그리고 이건 그 수만 가지 방법 중 하나에 불과했다.
‘끝까지 말 안하네.’
금방 들려올 것 같았던 수호의 대답이 10분째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고작 그거 대답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 그냥 ‘사랑해.’ 한마디면 끝날 걸 질질 끌고 앉아 있다.
도은이 입을 열어 쏘아붙이려던 참이었다.
“그러는 너는.”
“…….”
“날 사랑해?”
묻는 질문에 대답이나 하지. 그는 오히려 역질문을 해 왔다. 꽤나 진지한 눈빛으로 자길 사랑하느냐 묻는다. 여기서 왠지 모를 심술이 피어올랐지만 자신이 심각한 상황에서까지 투정을 부릴 어린애는 아니었다.
“야, 이수호.”
도은의 눈빛이 냉담하게 돌변하더니 가시 돋친 말로 쏘아붙였다.
“사랑하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
“우리 사이에 사랑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나 있었겠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맞는 말이었다. 도무지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수호가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