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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밑 빠진 독마냥 공허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무리 붙어 있어도, 아무리 뒤엉켜도, 우리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질 않았다.

‘왜 이럴까.’

힘이 빠져 흔들거리는 손을 도은이 덥석 붙잡았다. 시체마냥 차가운 체온이 수호의 손목을 감싸 안았다. 방금 전 자신에게 매달려 울부짖던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온도 차였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운 거지. 너무 몰아붙였나 아까. 물음표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린 수호가 말했다.

“난 잘 모르겠어. 도은아.”

“뭐가.”

“네가 날 사랑하는 건지, 동정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정 때문에 남아 있는 건지.”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지정원하고 같이 있던 게 아직까지 심통이 난 모양이구나. 솔직히 수호의 입장에선 지금 불안한 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세상에 어느 남자가 제 여자 친구가 바람 피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평범한 연인이 아닌 게 문제지.’

도은이 추운 듯 이불을 끌어 올리며 새하얀 장갑을 낀 왼손을 내밀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손바닥에 자신이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쓰여 있었다. 정확히는 왼손에. 일반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손바닥에 써져 있는 이름이 보여야 하고 자신의 손바닥에 써져 있는 이름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원래는 그게 정상이었으나 도은은 반대였다.

제 손에 써져 있는 이름은 보여도 다른 사람의 손에 써져 있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불이익이고 어떻게 보면 이익이었지만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애초에 이름에 의존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자신의 마음은 10년 전 그날부터 한 사람만을 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도은은 당당히 손바닥을 내밀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에 대해 꿇릴 게 전혀 없었다.

“뭘 그렇게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어.”

내밀어진 손바닥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수호가 미간을 좁혔다. 솔직히 이쯤 되면 척하면 척 아닌가. 답답했던 도은이 손바닥을 쥐락펴락하며 입을 열었다.

“못 믿겠으면 보라고.”

“…….”

“내 손에 써져 있는 이름.”

하얀 장갑이 씌워진 왼손.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개나 소나 다 볼 수 있는 시점에서 장갑은 필수품이나 다름없었다. 저는 몰라도 타인은 제 손에 쓰인 이름을 볼 수 있으니까. 도은은 그 사실이 매우 불편했다. 다른 사람이 제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볼 수 있다는 게. 차라리 운명의 짝이나, 좋아하는 상대한테만 보였으면 좋았을걸.

“…….”

“…….”

말은 안 했지만 솔직히 그 장갑을 벗기지 않길 바랐다. 일말을 희망을 가지고서 그가 장갑을 안 벗겼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무엇보다 내가 이수호를 믿는 만큼 그도 나를 믿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내가 아무리 바람을 펴도 겉모습만 그렇다는 걸 알아주길 바랐다. 그 누구와 바람이 나도 그 사람은 네 ‘대용품’일 뿐이라고,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라고, 알아주길 원했다.

‘이기적인 년.’

그래서 나는 천하의 나쁜 년이다. 모든 걸 직접 떠먹여 주길 원하는 이기적인 년. 먼저 말을 안 하면 상대방은 알 리가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잘 알면서도 나는 언제나 ‘내’ 생각만 했다.



3.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오로라



자욱한 담배 연기가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도은이 고개를 치켜들고서 후우, 담배 연기를 뱉어 냈다. 몽글몽글 피어오른 뿌연 연기들이 공기 중으로 샅샅이 흩어졌다. 담배를 피우면 속이 뻥 뚫릴 줄 알았건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돌덩이로 콱 막힌 듯 더더욱 답답해지는 가슴에 도은이 인상을 썼다.

지지직.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발로 지져서 끄자, 검은 재가 바닥에 눌어붙으며 흩날렸다.

‘아무 남자나 막 만나고 다니는 것도 슬슬 그만두면 안 되냐. 너 그러다가 진짜 이상한 놈 만나면 어쩌려고. 내가 진짜 너만 보면 강가에 어린애 내다 놓은 심정이라니까?’

‘내가 더 이상해서 괜찮아. 그리고 싸워도 내가 이겨. 너 내 성격 알잖아?’

약해 보이는 게 싫어서, 책임감 없어 보이지 않으려 나름 당당하게 말했었다. 솔직히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자신이 없었지만 한두 명 정도는 어찌어찌 처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지속한다는 건 아니지만. 루이 말대로 이 일도 이제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일이라기보단 혼자만의 유흥거리이지만. 뭐든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쉬웠다. 초반엔 나만 당하지 않을 거라는 복수심에 만나고 다녔으나 이젠 거의 일상에 스며든 거나 마찬가지였다.

칵테일 바, 클럽에서 남자를 꼬시는 게 도은의 일상이자 단 하나뿐인 낙이었다. 명색에 남자 친구가 있는 여자가 그러고 다닌다는 건 충분히 돌 맞을 일이었고 나아가 몰매를 맞아도 할 말이 없었지만, 그게 외로움을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신의 남자 친구에겐 절대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 그들에게선 느껴지고, 그들에게서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이 남자 친구에겐 있었다.

‘나도 잘 아는데.’

이제 와서 이 모든 것들을 멈출 순 없었다. 한 번 나쁜 년이 되기로 했으면 영원히 나쁜 년이 되어야지. 이제 와서 사근사근하게 군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그와의 관계가 틀어진 건 정확히 5년 전, 아니 그보다도 훨씬 전일 수도 있는 시점인걸. 관계를 다시 되돌릴 자신이 없었을 뿐더러 되돌릴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다.

“……이수호.”

도은이 피식 조소를 흘렸다. 고개를 치켜드니 동그란 보름달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티끌 하나 없이 반짝 빛나는 보름달은 과거의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난 가끔 그때가 그리워.’

물론 지금이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착하고 바르며 올곧았다. 그의 인생에 자신이 방해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수호는 완벽했다. 늘 멋졌고 생활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만약 그런 그에게 처음과 달라진 점을 찾는다면 자신에게 물들어 멘탈이 전체적으로 강해졌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아니, 멘탈이 강해졌다기보단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졌다는 말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수호는 그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안기라면 안기고 키스하라면 키스할 뿐이었다. 마치 사람같이 생긴 로봇이 차례차례 수순을 밟듯.

“하지만, 썩 유쾌하진 않네.”

오히려 아프다. 조금도 아니고 많이.



* * *


‘못 믿겠으면 보라고.’

‘내 손에 써져 있는 이름.’

수호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물들어 흔들렸다. 이건 분명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거다. 그녀가 원하는 답은 ‘엑스’라는 걸 예전부터 아주 잘 알고 있다. 말로는 벗겨서 보라고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했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다.

‘벗기지 마. 벗기면 안 되잖아.’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손은 새하얀 장갑을 벗기고 있었다. 새하얀 장갑이 벗겨져 달덩이같이 뽀얀 손이 드러났다.

손을 잡은 두 엄지로 보들보들한 촉감이 느껴졌다. 손등을 매만지던 수호가 내적 갈등을 했다. 이걸 뒤집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실망했다고 금방이라도 돌아설까? 아니면 허탈함에 실소를 흘릴까? 어느 반응이든 최악인 건 변하지 않았다.

“…….”

수호가 도은과 눈을 맞췄다. 하지만 도은의 눈길은 언제나 자신의 쇄골을 향했고, 제 눈을 제대로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분명 그 사실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겠지. 늘 보던 수법이라 그런지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내가 질투할 자격이 있는 걸까. 도은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물음을 속으로나마 되새겼다.

‘아니.’

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부정이었지만, 수호는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도은을 믿지 못하고, 아니 믿지 못해서. 그녀의 손등을 뒤집어엎었다.

‘한심한 새끼.’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언제나 제자리다.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제야 땅을 치며 후회한다. 그게 참 야속하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자신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었다.

“어때. 이제 좀 만족해?”

제 눈앞에 뒤집힌 그녀의 손바닥엔 아주 선명한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치 그건 영원한 글씨라는 듯 변함없이 선명했다.

[이수호]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그녀를 믿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전에 그녀와 한 약조를 생각해 냈으면 절대 뒤집지 않았을 텐데. 어차피 지금 이 말은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진심이었다.

수호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애처롭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는 오로지 도은을 향했다. 그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보이기 위한 눈빛이었다.

‘내가 아무리 바람을 펴도, 어느 남자하고 뒹굴어도, 넌 할 말 없는 거야.’

‘아니, 넌 불안해할 자격도 없어.’

‘네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불안해한다는 거야?’

도은이 속을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으로 수호를 주시했다. 그녀의 깊고 고요한 눈동자엔 시선을 피하려 애쓰는 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언제나 먼저 시선을 피하는 건 도은이었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들의 사이의 갑, 을은 항상 바뀌고 있었다.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 사이의 갑을은 항시 존재하는 법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갑이 되는 게 낫겠다 싶으면서도 막상 정신을 차려 보니 난 을이 되어 있었다.



도은의 입술이 삐뚤게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이젠 따질 기력도, 따로 화낼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오늘도 늘 하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또 불안해하네.”

“…….”

“네가 그렇게 불안해하니까 그 불안함이 단지 나 때문일까 의문이 들더라.”

브래지어를 입는 도중에도 도은의 입은 쉴 생각을 안 했다.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생각도 해 봤는데.”

도은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하얀 셔츠로 향했다. 찌그러진 캔마냥 구겨진 셔츠를 보며 도은이 제 미간을 좁혔다.

“생각해 보니 그 이유는 내가 아니라 너 때문일 수도 있겠더라고.”

“도은아.”

“어쩌면 제 발 저린 걸 수도 있지.”

“…….”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래. 내가 바람을 안 폈어도 넌 불안해했을걸?”

아직도 다 안 끝났는지, 그녀의 입술이 옴짝달싹거렸다. 그에 수호가 보기 힘들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게 자신의 유일한 도피처인 마냥. 그런 수호를 보며 도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저렇게까지 두려워하는데 무턱대고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사람의 아픈 약점을 건드릴 정도의 쓰레기는 아니었다. 도은이 짧은 스커트를 쭈욱 끌어 올리며 지퍼를 잠갔다. 요즘 날씨도 점점 추워지는데. 다음부턴 아무래도 긴 슬랙스를 입고 와야겠다.

‘잘 보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지. 이러다간 동상 걸리겠네.’

뭐 빠트린 건 없는지, 회사에서 챙겨 온 서류들은 잘 있는지, 꼼꼼히 살핀 도은은 깊게 파묻혀있던 파우치를 꺼내 들었다. 쿠션에 달린 거울을 보며 진한 색상의 립을 하나 꺼내 발랐다.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이런 몰골은 좀 너무하다 싶었다.

‘머리도 개구신이 따로 없네.’

도은이 손 빗질을 하더니 머리끈을 이용해 대충 한 갈래로 묶었다. 뒤에서 도은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수호가 입을 열었다.

“늦었는데 자고 가.”

“잠은 집에서 잘 거야.”

“가끔은 자고 갔잖아.”

“그건 기절해서 어쩔 수 없었고.”

나갈 채비를 마친 도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역시 사회인이라 그런지 체력 하나만은 강건했다.

“……!”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갑작스레 자신의 어깨를 꾹 누르는 느낌에 도은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