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놀랐잖아.”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그는 벽에 몸을 기대어 차 키를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러곤 말을 할 듯 말 듯 입을 옴짝달싹거리다 겨우 말을 끄집어냈다.

“데려다줄게.”

“됐어. 나 혼자 갈 수 있어.”

수호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축 처진 눈꼬리가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그의 차를 탈 만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색해질 바엔 차라리 혼자 가는 게 나았다. 도은이 그의 손을 내팽개치며 단호하게 말을 잘라 냈다.

“그래도 위험하잖아.”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내가 뭘 하든 관심도 없으면서.”

“도은아.”

“이렇게 신경 써 주는 척, 위선 떠는 것도 그만해.”

“…….”

“짜증 나.”

자신이 내뱉은 말에 틀린 말은 없다고 굳게 확신했다. 다 맞는 말인 걸 증명하듯 바람 상대 지정원만 봐도 그랬다. 3개월이라는 시간을 만나고 다녀도 그는 이수호를 눈치 하나 채지 못했다. 바람 핀다는 사실을 안 것도 불과 1주일 전이었다.

‘어느 방법이든 네 관심을 받기에는 턱도 없구나…….’

이렇게 봤을 때 가능성 있는 일이라곤 단 하나였다. 내게 정말 관심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것. 혹은 설상가상으로 관심을 가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아주 예전부터 그랬다. 정확히 그에게 선전 포고를 했던 그날로부터. 쭉.

‘질투하지 마. 불안해하지 마. 네가 무슨 권리로 그런 걸 해?’

‘막말로 우리가 보통 연인 사이도 아니고, 바랄 걸 바라. 이수호.’

* * *




덜컹!

방으로 들어온 도은은 침대에 대자로 엎드렸다. 푹신한 쿠션의 촉감이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가방이랑 침구 정리부터 해야 하는데. 집으로 온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도은의 입에서 나오는 건 하품이 다였다.

“하아암.”

온몸이 피로감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늘로 쿡쿡 쑤시는 듯한 통증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냥 오기 부리지 말고 자고 올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감이 밀려오기도 했지만 후회를 하기엔 이미 집에 도착한 상태였다.

도은이 눈길을 핸드폰으로 돌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3시간? 3시간 30분 정도 잘 수 있겠네.’

현재 시간은 2시 30분. 당장 다음 주에 중요한 프레젠테이션 일정이 잡혀 있다. 며칠 전부터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둬야 할 게 많은지라 최소한 6시엔 일어나야 했다. 도은이 기지개를 쭉 켜며 방전되어 가는 핸드폰에 충전기를 연결했다.

그러자 핸드폰에 번쩍 불이 들어오며 10%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도은이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겨우겨우 들어 올렸다.

도은의 성격상 잘 땐 자더라도 하려던 일은 다 끝내고 자야 했다. 이렇게 찜찜하게 끝낼 순 없지. 그녀는 수순을 밟아가듯 핸드폰의 주소록에서 수호의 이름을 찾아냈다. 문자 한 통을 전송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역시 생각해 내길 잘했어. 도은이 핸드폰을 놓으며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제 할 일을 끝마쳤다는 듯, 손에서 놓친 핸드폰이 뒤집어엎어졌다.

‘차단은 하고 자야 하는데.’

이대로 잠들면 안 되는데.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노력해 봐도 몹쓸 놈의 눈꺼풀은 잠수함마냥 끝없이 내려앉을 뿐. 다시 들어 올려지지가 않았다. 방금 전 보낸 문자의 글자들을 되새기며 도은은 깊은 잠에 빠졌다. 굳게 다물린 입과 내려앉은 눈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 오로라를 연상케 했다.

[당분간 연락 하지 마.]



4.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드네

‘손님 여러분, 저희 비행기는 곧 인천 국제공항. 인천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을 바로 해 주시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머리맡에 둔 손깍지를 풀고 안대를 벗었다. 진한 쌍꺼풀이 느끼한 인상을 줄 법도 한데, 눈매가 살짝 올라가서 그런지 날렵하고 강한 인상을 주었다. 날렵한 턱선과 콧날은 베일 듯이 날카로웠고, 도톰한 입술은 따로 뭘 안 발라도 될 것 같이 촉촉했다.

“hey, 정우.”

바로 옆자리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기다란 생머리의 여자가 황금빛 머리를 뽐내며 손 빗질을 하더니 수줍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What is the meaning of this? (이게 뭐야?)”

“Uh…… It’s my cell phone. Please Tell me, your cell phone number……. (내 핸드폰이야. 네 핸드폰 번호 좀…….)”

“No. (싫어.)”

이국적으로 생긴 여자가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서툰 한국어를 내뱉었다.

“도대차 왜?”

“도대차가 아니라 도대체. 유감스럽지만 저는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약혼녀, fiancee가 있습니다.”

누가 봐도 매력적으로 생긴 여자. 외국인의 특성답게 자기주장 강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고, 동화 속 요정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여자였다. 거기다가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몸태가 탄성을 자아냈다.

몸에 전체적으로 근육이 잘 잡혀 있는 걸 보니 타고났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운동을 한 모양새였다.

“What……? You, 너. 나한테 싱글이라며.”

약혼녀는 있지만 싱글이라.

실질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우가 어깨를 얄밉게 으쓱이고선 말했다.

“Yes, you were right. (그것도 맞는 말이야.)”

“Are you kidding me? What kind of person is this? (너 지금 나 놀리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영국 계열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여자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옆에서 욕지거리를 중얼거려도 넌 안 돼, 라고 단호히 잘라 낸 그가 착륙한 비행기 안을 빠져나왔다.

“한국도 오랜만이네.”

쓰읍, 하.

차디찬 겨울날의 바람이 온몸 사이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두 팔 벌려 고스란히 바람을 느끼던 정우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드디어 한국이다.

이제껏 고대하고 또 고대하던 한국.



* * *




띠띠띡.

새벽 5시 30분. 날카로운 알람음이 적막을 갈랐다. 늘 맞는 아침이지만 언제나 새롭고 낯선 풍경이었다. 쌀쌀하게 불어오는 바람도, 푸른 남색빛이 감도는 방 안의 분위기도. 잇새로 앓는 소리를 내던 도은이 알람을 껐다.

“으으!”

당장 다음 주에 프레젠테이션 일정이 잡혀 있는지라 일찌감치 준비를 해 둬야 했다. 그래 봤자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출근한다는 게 다였지만, 그 30분이 직장인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골든 타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쏴아아.

잠을 깨기 위해 세수를 했다. 차가운 냉수의 기운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나니 서서히 눈이 떠지는 듯했다.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이는 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눈두덩이는 붕어라도 되는 양 퉁퉁 부어 있었고, 눈가의 아이라인은 귀신 같이 번져서 끔찍했기 때문이다.

서랍 안에 있던 클렌징 폼을 꺼내 얼굴을 정성스레 씻었다. 번진 화장을 지운 뒤엔 또 새로운 화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번거로웠지만 별수 있나, 직장인에게 화장은 기본이나 마찬가지인걸.

도은이 화장대 앞에 앉아 비비 크림을 열었다. 그러자 침대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제 존재감을 알리듯 크게 울렸다.

[문자 2통, 부재중 3통]

발신자 이름에는 아주 당연하게도 이수호라는 이름이 써져 있었다. 결정적으로 어제 차단을 못 하고 뻗어 버린 게 화근이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이걸 못 했다니.’

자책을 하며 문자함에 들어가니 간결한 글자들이 도은을 반기고 있었다.

[그래.]

[화 풀리면 연락해.]

문자를 보내기 전에 전화를 세 통이나 걸어 놓고선 정작 문자로는 화가 풀리면 연락하란다. 애초에 연락을 보는 게 아니었는데.

‘난 도대체 무얼 기대했던 걸까.’

도은이 수신 차단을 누르며 머리를 질끈 묶었다. 한결 단정해진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도은은 최면 아닌 최면을 걸었다.

단단해져야 한다. 상대방이 무어라 말하든 타격을 받지 않아야 한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말자. 처음부터 기대를 걸 가치가 없는 사람이니까.

고개를 위아래로 한 번 끄덕. 흔들리는 머릿결에 시선을 두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출근하자.”



* * *




“안 대리, 전날 데이터 빨리 확인하고 설문 파일 좀 내 메일로 보내 줘요.”

“네, 부장님.”

그로부터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도은이 넘실거리는 커피를 들고서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저번 주부터 열심히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홍보 대행사의 업무를 총괄하고 지시하는 AE라는 직종. 모든 일에 완벽을 추구하는 도은에게는 아주 안성맞춤인 직업이었다.

광고주가 원하는 콘셉트라든지, 고객들이 다분히 이용하는 매체라든지, 고객의 만족도라든지, 단 하나라도 놓쳐선 안 됐다. 분석하고 또 분석해서 제품에 어울리는 광고를 찾아내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다.

딸깍, 딸깍.

마우스 커서를 두어 번 클릭하자 나타나는 오늘의 주 내용.

유명 화장품 메이커 말라썸의 신제품, 립글로스에 대한 광고였다. 어차피 매번 하는 프레젠테이션이었지만 도은은 늘 꼼꼼히 작업했다. 광고 콘셉트에 허점은 없는지, 광고주가 봤을 때 만족할 만한지, 세밀히 분석하던 도은이 커피 한잔을 들이켰다.

“헉!”

뒤에서 무언가가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놀란 도은의 시선이 등 뒤를 향했다. 그녀의 뒤엔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여유롭게 미소 짓는 이 차장이 서 있었다. 안 그래도 바쁜 이 판국에. 저렇게까지 여유로울 수가 있다니. 마음에 안 드는 듯 인상을 찌푸린 도은이 마우스 커서를 움직이며 말했다.

“이 차장은 내가 시킨 일 다 했나 봅니다.”

“네, 안 그래도 메일로 보냈으니 확인해 보세요. 부장님.”

한결같은 이 차장의 모습에 도은의 눈썹이 저도 모르게 들썩거렸다. 우선 자신의 일에 집중을 하려면 눈앞에서 이 차장부터 치워야 할 것 같았다. 시킬 일거리가 뭐 더 없나. 살펴보던 도중 도은이 옆에 놓인 서류 뭉텅이를 건넸다. 이런 잡일을 시킬 생각은 없었으나, 특별히 맡길 일도 없었다. 얼굴 위로는 사근사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 그래요? 다 했으면 이것 좀 인쇄해 줄래요? 넉넉하게 20부 정도만 인쇄해 주면 되는데.”

서류 뭉텅이를 건네받은 이 차장이 입꼬리를 샐쭉거렸다.

“네, 알겠어요. 그나저나 부장님 지금 도는 소문 모르시죠?”

“무슨 소문이요?”

여전히 시선은 프레젠테이션에 꽂아 넣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 정도면 그냥 갈 법도 한데, 눈치 없는 이 차장은 아예 짝다리까지 짚고서 잡담 아닌 잡담을 늘어놓았다. 아마 이번에도 별 쓰잘머리 없는 직원들 험담이겠지.

도움 안 되는 이야기는 아예 흘려버려야 한다는 지론의 도은이 그녀의 말을 무시하려던 참이었다. 예상과 달리 이 차장의 입에선 꽤나 흥미로운 단어가 나왔다.

“오늘 새로운 본부장님 오시는 거요. 들어 보니 엄청난 천재라고 하시던데……. 그만큼 자부심도 높아서 회의 때 태클도 엄청 잘 건대요.”

“네?”

“역시 모르셨구나. 오늘 프레젠테이션 하시려면 알아 두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린 거예요. 오늘 회의 때부터 참석하신다고 들었거든요.”

입술을 얄밉게 비틀거리던 이 차장은 서류 뭉텅이를 들고서 인쇄기 앞으로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