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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좋아하지만 2화
1. 추억과 현실의 조우 (2)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한현성. 나는 점점 이 난장판 속 시끄러운 술자리에서도 현성이를 향한 집중도가 높아져만 갔다. 그러면서 동시에 최대한 아는 티를 내지 않게끔 노력했다. 잠시 팔꿈치라도 스칠 때면 바스라지려는 정신을 아슬아슬하게 부여잡기 위해 심호흡으로 진정하려 했으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리 평온을 가장한들 본능처럼 현성이에게 심장이 거칠게 뛰고 만다. 차라리 집에 가든가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자리에 딱 붙어 앉아 모든 신경을 그 애에게 쏟고만 있었다. 힐끔 옆을 훔쳐보았다.
비록 못 본 지 오래됐지만 본인도 모를 버릇까지 꿰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 정도로 빠져 살았으니까.
얼굴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눌러쓰고 여돌을 찍는 척 행동하며 공식 스케줄이나 소중한 행사들을 쫓아다녔다. 이따금은 절대 못 알아보게 마스크에 안경까지 쓴 적도 있다. 가만히 안방에서 보기엔 자료가 부족했기에 자급자족하며 이어 나가는 팬질은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현성이를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없는 돈 탈탈 털어 지방까지 보러 갔었다.
혹시 알아볼까 봐 치밀하게도 변장했다. 어떨 때는 키 높이 깔창으로 키까지 속였다. 심지어 같은 날 두 번의 스케줄이 있을 때는 옷까지 갈아입었다. ……다시 하라고 해도 못 할 짓들이다.
진짜 징했네, 나.
아무튼 그렇게 오랜 시간 지켜봐 온 결과 현성이의 버릇이란 버릇은 다 꿰게 되었다. 그중 하나를 읊자면 바로 ‘적당한 미소와 말투’였다.
어려서부터 정글 같은 사회를 겪었던 탓인지 자신의 기분을 스스로 무시하고 티브이 앞에서 거슬리지 않는 말투와 미소를 자아내야만 하는 아이돌은 기본적인 훈련과 조언을 받는다. 그건 현성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아직 신인이었을 적엔 그게 잘 안 됐지만 2년 정도 지나니 현성이에게도 나름 스킬이 붙어 적당히 웃으며 맞장구치고, 욕먹지 않을 만큼의 예의 바른 말을 하는데 무리가 없어졌다.
데뷔 2주년 팬 미팅이 있던 그날도 고열로 아파서 고통스러웠을 텐데 끝까지 생글생글 웃던 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 현성이가 매니저도 없이 혼자 병원에 갔었다는 이야기엔 핸드폰을 잡고 오열했던 기억이 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인이란 타이틀이 벗겨지고 더 절박한 상황이 됐을 때, 오랜만의 티브이 프로그램 촬영이라고 대기실에서 링겔을 맞다가 찍은 영상은 아주 짧아 겨우 2분이 될까 말까 했다. 그 탓에 카메라 앞에서 울지 못했을 현성이를 대신해 내가 모니터 앞에서 철철 울었다.
그렇게 과거에 젖어 한창 상념에 빠져 있는데 옆에서 현성이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았겠네.”
“응, 응. 그래서 내가 이것도 샀는데 엄청 예쁜 거야! 봐, 예쁘지?”
“예쁘다.”
“어울려?”
“응. 어울려.”
“진짜? 헤헤.”
살짝 취기가 오른 여자애의 말투나 행동이 꽤 귀여웠다. 제 말을 받아 주는 이가 있다는 것에 무척 신이 난 것 같았다. 그와 반대로 현성이는 입꼬리를 올리곤 있었지만 슬슬 피곤한 기색이 보였다. 온 지 얼마 되진 않았어도 꽤 지친 듯해 괜히 신경이 쓰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몰래 쳐다보고 있는 중 어떻게 알았는지 현성이가 나를 돌아본다. 자연스레 눈 돌릴 타이밍을 놓쳐, 등 뒤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마주 보았다.
역시 사람들의 시선에 여전히 민감한 건가? 왜 쳐다보고 있었냐고 그러면 뭐라 하지? 친하게…… 지내자? 아, 초딩이냐.
그런데 현성이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입술에 상처 났네요.”
“……네. 그래서 약 발랐어요.”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같은 답을 내뱉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데, 현성이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 모습을 보니 불쑥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훨씬 작고 말랐던 어린 모습이.
현성이는 원래 여러모로 좀 느린 아이였다. 키도 느리게 커서 열아홉 살이 됐을 때야 175센티미터까지 자랐다. 그래서 내가 스무 살이 된 해, 오랜만에 현성이 소식 전한다며 개인 팬 페이지의 홈마가 엉엉 울면서 SNS에 올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자란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림잡아 보건대 적어도 180대 중반 이상으로 보였다.
아련한 과거를 떠올리다 다시 현성이에게 집중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딴 생각을 하다니 까딱하면 무례한 실수를 범할 뻔했다.
“저 세 학번 밑이니까 말 놓으셔도 돼요.”
현성이가 미소 지었다. 카메라 앞에서의 미소였다. 그래서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괜찮아요?”
대신 어딘가 허무한 분위기를 느껴 나도 모르게 괜찮냐고 묻고 말았다.
난 바본가? 괜찮냐니. 너무 갑작스럽잖아.
자책할 정도로 충동적인 질문이었지만 다행히 현성이가 앞서 한 말과는 대화가 자연스레 이어졌던 터라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무리 없이 넘어갔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속말이 말을 놓아도 괜찮냐는 질문으로 바뀌어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여전히 쓰린 속은 달랠 길이 없다.
그래서였을까, 욱하는 기분으로 혼자 중얼거리듯 말해 버렸다.
“안 괜찮아도 되는데.”
“네?”
혀가 포크에 찔리더니 맛이 갔나 보다. 왜 이런 소리를 했을까? 진짜 그거 마시고 취했나? 아님, 현성이한테 취했나? 꼭 내뱉고 후회한다. 소란스러운 속을 애써 감추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꼭 괜찮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요. 안 괜찮아도 된다고 생각해서요.”
현성이는 내 말을 듣고 이번엔 빠르게 눈을 한번 깜빡였다. 어쩐지 아까보다는 생기 도는 얼굴이라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이따금 기분이 괜찮을 때 보여 주던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 놓으셔도 된다는 건 진짜 괜찮아서 한 말이에요.”
무언가 더 말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는 달리 현성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화장실에 가는 듯했다. 왜 이렇게 자주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가 있는 시간이 길진 않았다. 한 번씩 다녀올 때마다 조금은 풀리는 얼굴을 보면 사람 없는 공간에서 짧게나마 휴식을 취하고 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것도 그대로네. 슬쩍 턱을 괴고 빈자리를 내려다봤다.
데뷔 직후의 현성이는 무대 위에서 긴장하면 다른 멤버들 뒤에 가서 사람들 눈을 피했었다. 그리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억지로 하는 애교나 개인기를 퍽 어려워했다. 그런 소심한 애가 무슨 무대를 하겠다고 그러냐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현성이는 무대를 정말로 좋아했었다. 비록 특출 나진 않았어도 나이치고 춤은 잘 추는 편이었고, 실제로 맡고 있는 파트에 댄스도 있었다.
이번에도 금방 돌아온 현성이는 언제 자리를 비웠냐는 듯 제 동기들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중간중간 여자애들 몰래 지친 표정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확실히 팬 사인회 때도 팬들에게 낯을 많이 가렸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나중에는 곧잘 해서 이제 익숙해졌나 보다 싶었는데, 어쩌면 그냥 참아 냈던 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 뭐 하냐?
현성이 한정 내적 설명충이 된 기분으로 스스로의 정신 상태를 점검했다. 과거에 툭 치면 줄줄 산출되던 팅클 스타의 프로필과 온갖 특징들이 뇌 속 서랍 깊은 곳에서 잠들었다가 다시 홀랑 튀어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걸 마치 복습을 하듯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당해서 헛웃음을 흘렸다. 덕질하던 버릇 어디 안 간다고, 이걸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이야.옆에서 의아해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최대한 무시하려 애썼다. 그런데 애를 써도 안 되더라.
“아이스크림 사 줄까?”
결국 이딴 말이나 하고 앉아 있다.
“술 많이 마셨지?”
현성이 주량을 내가 알 리 없다. 그냥 앞에 초록색 술병이 하나 비어 있어 대충 갖다 붙였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속도 풀 겸 같이 나가자.”
둘이서만 다녀오는 게 설레다 못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지금은 조용한 공기를 선물해 주고 싶을 뿐이었다.
“앗, 선배. 저희도 사 주세요.”
아까 내가 피 흘릴 때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여자애들이 말을 했다. 나한테 아이스크림을 얻어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현성이를 따라오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현성이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여자애들은 추우니까 안에 있어. 사다 줄게.”
적당히 돌려 말하니 까르르 웃는다. 현성이도 거기에 동참하자 좋다며 기다릴 테니 빨리 오라고 신났다. 내가 먼저 자리를 떠 문을 열었고 뒤따라 현성이가 내가 잡아 놓은 문을 보곤 재빨리 가게를 빠져나왔다.
“편의점은 비싸니까 저기 아이스크림 할인 매장으로 가자.”
“할인 매장이요?”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날카롭게 스쳤다. 앞머리가 흐트러졌다. 서늘한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슬쩍 뒤를 돌아보니, 밤, 여러 불빛들이 들어선 대학가 유흥의 거리에서 홀로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내 과거의 추억이 서 있었다. 물론 과거의 추억이라고 국한하기엔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 그냥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아직도 가장 좋아하고 있다.
얼굴을 불빛에 물들이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현성이의 모습에서 과거의 향수마저 느껴졌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해도 하지 못할 만큼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던 과거, 그 중심엔 팅클 스타 한현성이 있었다.
그토록 좋아하고 아끼던 무대 위 아이돌이 이젠 평범한 과 후배라니 기분이 묘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두근거림 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러움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티를 낼 수 없었기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좀 멀어. 괜찮아?”
“……안 괜찮아도 된다면서요.”
미소 없는 무표정이라도 기분이 나빠서 지은 게 아니란 걸 안다. 그냥 저게 이 아이의 디폴트값이다. 음, 조금 다른가? 그래. 현성이에게는 저 무표정이 편한 얼굴이었다. 이 말이 가장 적당하겠다.
“맞아. 안 괜찮아도 돼.”
먼저 걸어가는 뒤로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등 뒤로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조금 따라잡나 싶더니 현성이는 나와 나란히 걷지 않고 반 발자국 뒤를 유지하며 쫓아왔다.
“그리고 나 너 알아.”
뒤편에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잠시 멈추더니 반 발자국 더 멀어졌다. 뒤에 있는 사람에게선 말이 없었다.
사실 아까부터 고민하던 부분이다. 아는 척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과거에 너의 팬이었다고 말하면 기뻐할까, 아니면 미안해할까?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 보류해 두고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아까 부회장한테 들었어. 4수했다며?”
“네.”
“그럼 나랑 동갑이잖아.”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뒤돌아보자 무표정하지만 묘하게 시린 얼굴을 한 현성이가 한 발자국 뒤에서 천천히 걷고 있다.
“말 놔도 돼.”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바로 반말로 묻는다. 긍정의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오히려 편해.”
“아니. 입술이랑 혀.”
“응?”
다시 앞을 보려다 빠르게 치고 오는 답에 잡혀 버렸다. 그 탓에 고개만 뒤로 한 상태로 걷다가 자세가 무너질 뻔한 것을 현성이가 팔을 잡아 중심을 맞춰 주었다. 얼떨결에 벌어진 일이라 고맙단 말도 못 했다.
근데, 야. 네가 내 팔을 잡으니 조금 현실 같지가 않네.
“아…… 솔직히 아프긴 한데 참을 만해.”
“그래?”
현성이가 나한테 편하게 말을 놓다니. 꿈인가.
“응.”
“아픈 건 아픈 거잖아.”
“됐어.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보다 저기 보여? 저어기, 좀 멀리.”
검지를 뻗어 아이스크림 매장을 확인시켜 주고 다시 걸었다. 목적지를 확인했기 때문인지 현성이는 이제 내 뒤가 아니라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뭐 좋아해?”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넌 수박 맛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나는 수박 아이스크림. 저기서도 팔까?”
“팔아.”
“응?”
단호하게 말하는 내가 신기했는지 현성이가 미간 쪽 눈썹을 살짝 올리고 쳐다본다. 옆눈으로 그를 살피고 뒷말을 이었다.
“어제 내가 사 먹었거든.”
하하, 옆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으로 제대로 웃는 것 같아서 나도 조금 입꼬리가 올라갔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생채기가 난 쪽이 조금 아리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이 날씨에 먹은 거야?”
“응. 그냥 먹고 싶어서.”
지난 밤, 집을 가기 위해 정류장 쪽 아이스크림 할인 매장 앞을 지나가다 우연히 초록색과 빨간색이 섞인 아이스크림이 그려진 봉지를 보았다. 솔직히 네가 생각났었다. 그래서 그 추운 날에 차가운 수박 맛 아이스크림을 사서 입에 물었다.
“그랬구나.”
현성이는 그렇게 말하며 가게 문을 열었다. 문손잡이만 잡고 있는 폼이 먼저 들어가라고 말하는 것 같아 얼른 가게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그제야 따라 들어온다.
“애들 먹게 넉넉히 사 갈까? 누군 입이고 누군 주둥이냐, 이 소리 뻔히 나올 텐데.”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현성이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어차피 다들 취해서 모를 거야. 걔네들 것만 사다 주자.”
“그 두 사람이랑 친해? 친해 보이던데.”
“두 살 차이인데도 애들이 친근하게 대해 줘서 오히려 내가 고맙지.”
아. 안 친하구나. 특유의 돌려 말하기 화법을 실시간으로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다.
여러 가지 아이스크림을 주워 담으면서 잠시 고민했다. 역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상처에 조금 무리가 가려나?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색색의 봉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자 현성이가 무언가를 하나 건넨다.
“부드러운 걸로 먹어.”
씹히는 것 없이 부드럽기만 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었다. 떠먹는 거라 조금 비싼 편이었는데도 망설임 없이 받아들었다.
누가 줬는데 이걸 다시 빼.
“얼마예요?”
“뭐 하는 거야?”
떠먹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소중히 손에 든 사이 현성이가 카운터에 아이스크림 바구니를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면서 주머니 속 지갑에서 현찰을 꺼내 결제한다. 옆으로 가서 ‘내가 계산한다니까.’ 하고 말해도 물러서지 않고 그저 가볍게 웃는다.
“나중에 밥이나 사 줘.”
건네지는 현성이의 돈이 아까워서 속이 쓰라렸다. 내가 못 먹고 기어 다니더라도 이것저것 사 주고 싶었지만, 처음 만난 선후배 사이에 그러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손에 들고 있던 카드 지갑을 주머니 안에 욱여넣었다.
나중에 밥이나 사 달란 말 또한 진짜 밥을 사 내놓으란 뜻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어 더 입맛이 썼다.
“맛있는 걸로 사 줄게.”
그래도 그 인사치레에 가까운 말을 받았다. 호의에 가까운 마음을 거부하기보단 다 받아 주고 싶었다. 사실 오늘 아니면 또 언제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이게 현실인지조차 의문스러울 정도로 꿈같았다.
그러면서 현성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날이 온다면 오늘처럼 굳어 있지만 말고 좀 더 편한 모습으로 가장 좋아할 음식을 먹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 날이 오긴 올까 의문이 들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아이스크림을 사서 돌아오는 길은 조용했다. 꽃샘추위의 칼바람 속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현성이도 손목에 아이스크림이 든 봉지를 끼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나도 침묵만 지켰다.
나야 괜히 말실수를 하거나 현성이에 대한 내 감정이 흘러나올까 무서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지만, 얘는 왜 조용한 걸까? 마치 데뷔 초 카메라 앞에서 긴장하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 이 침묵이 편한 걸지도. 그래서 굳이 억지로 이어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십여 분을 걷자 금세 가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성인 술집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건네자마자 급한 일이 생겼다며 돌아갔다. 그리고 나 역시 멀어지는 그 애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리를 슬쩍 떠 버렸다.
***
다음 날 메신저를 열어 보니 단톡 방에선 혼자 도망쳤다며 개소리를 지껄이는 동기들이 극성이었다. 그러나 모두 무시하고 어제 있었던 일이 과연 어디까지가 꿈이고 생시였는지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정말 현성이를 본 건가? 우리 팅스?”
거지발싸개 같은 예명까지 오랜만에 입에 담아 봤다. 정수리를 베개에 갖다 박으면서 끙끙 앓았다. 사진이라도 찍어 놨어야 현실이라고 생각할 텐데, 도저히 이게 꿈이 아니란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캠퍼스 안 저 멀리서 걸어오는 한현성을 맨정신으로 발견한 뒤, 술에 취했을 때보다도 더 설치는 가슴에 도망치듯 도서관 화장실로 달려 들어가 덜덜 떨어야 했다.
어제 괜찮았던 건 순전히 술 빨이었나 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확신을 가졌다. 꿈이 아니었다. 정말로 현실이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내내 점철해 놓았던 추억을,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2. 도서관 (1)
인터넷에 접속했다.
한현성, 역시 검색해도 별게 나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팅스. 와, 진짜 옛날 자료만 있다. 그나마도 얼마 없다. 그중 몇 개는 심지어 내가 작성한 거다.
아무리 최근의 정보를 찾아보려 해 봐도 건질 만한 게 없었다. 공식 카페나 홈페이지는 폭파된 지 오래였고, 혹시나 해서 접속한 SNS 계정의 옛 친구들은 다들 최근 기록이 없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여기저기 아무 데나 누구라도 좀 답 달라는 심정으로 ‘팅스, 기억하나요?’라는 쪽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동안 받은 답은 하나도 없었다.
어딜 둘러봐도 아이돌 팅스, 블랙 스카이에 대한 게시 글은 없다. 이젠 아이돌 팅스가 아니라 정말 일반인 한현성으로 내 후배가 된 것이었다.
“어쩌지.”
계속 볼 용기도 없지만 안 볼 자신도 없다. 한번 인식하고 났더니 계속 현성이만 눈에 들어와서 환장할 노릇이었다. 심지어 평소였으면 PC방에서 죽치고 있었을 긴 공강 시간에는 괜한 설렘을 안고 과방을 찾아 조신하게 앉아 책을 보는 척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 현성이와 제대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따금 우연히 스쳐 지나갈 때라도 수많은 군중 속에서 현성이는 내 눈에 확 들어왔다. 게다가 왜 모르고 살았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의외로 자주 스쳤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현성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도 혼자네. 홀로 있는 모습에 괜한 걱정도 들었다. 애들이 나이 많다고 잘 안 놀아 주나? 그래도 여자애들이 관심을 가지긴 하는 것 같았는데……. 하긴, 이성으로 관심을 주는 애들이 아니라 친구로 대할 애들이 필요하겠지.
현성아, 파이팅!
속으로 응원하며 재빨리 강의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미리 교재는 펴 놨지만 무의미했고 그저 핸드폰으로 팅스, 현성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왜 나오지 않는 거야. 땡깡을 부려도 나오지 않는 건 나오지 않는다. 울며 겨자 먹기로 옛날 자료들만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웃기게도 절대 잊지 않을 것 같았던 사실들을 많이 잊고 살았었단 걸 깨달았다.
다시금 살펴보며 되새기는 현성이의 성향이나 습관, 인터뷰 속 조금은 날조된 프로필 등을 보며 웃었다. 모든 자료가 폭파되거나 사라지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즐겁게 그때의 감정들을 회상했다. 물론, 매번 즐겁지만은 않았었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 연예인 시절을 추억할수록, 이젠 평범한 대학생인 현성이에게 점점 더 미안해져만 갔다.
무역학과.
도저히 연예계와 관련 있어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그쪽과는 연을 끊을 모양이었는지 무역 공부에 몰두하는 현성이의 모습이 도서관에서도 종종 발견되었다. 정말 죽을 듯이 책을 파고드는 모습을 훔쳐보며 바로 뒤도 부담스러워 뒤 뒷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소리 없는 응원을 이어 갔다.
정말 파이팅. 난 널 항상 응원해.
1. 추억과 현실의 조우 (2)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한현성. 나는 점점 이 난장판 속 시끄러운 술자리에서도 현성이를 향한 집중도가 높아져만 갔다. 그러면서 동시에 최대한 아는 티를 내지 않게끔 노력했다. 잠시 팔꿈치라도 스칠 때면 바스라지려는 정신을 아슬아슬하게 부여잡기 위해 심호흡으로 진정하려 했으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리 평온을 가장한들 본능처럼 현성이에게 심장이 거칠게 뛰고 만다. 차라리 집에 가든가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자리에 딱 붙어 앉아 모든 신경을 그 애에게 쏟고만 있었다. 힐끔 옆을 훔쳐보았다.
비록 못 본 지 오래됐지만 본인도 모를 버릇까지 꿰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 정도로 빠져 살았으니까.
얼굴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눌러쓰고 여돌을 찍는 척 행동하며 공식 스케줄이나 소중한 행사들을 쫓아다녔다. 이따금은 절대 못 알아보게 마스크에 안경까지 쓴 적도 있다. 가만히 안방에서 보기엔 자료가 부족했기에 자급자족하며 이어 나가는 팬질은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현성이를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없는 돈 탈탈 털어 지방까지 보러 갔었다.
혹시 알아볼까 봐 치밀하게도 변장했다. 어떨 때는 키 높이 깔창으로 키까지 속였다. 심지어 같은 날 두 번의 스케줄이 있을 때는 옷까지 갈아입었다. ……다시 하라고 해도 못 할 짓들이다.
진짜 징했네, 나.
아무튼 그렇게 오랜 시간 지켜봐 온 결과 현성이의 버릇이란 버릇은 다 꿰게 되었다. 그중 하나를 읊자면 바로 ‘적당한 미소와 말투’였다.
어려서부터 정글 같은 사회를 겪었던 탓인지 자신의 기분을 스스로 무시하고 티브이 앞에서 거슬리지 않는 말투와 미소를 자아내야만 하는 아이돌은 기본적인 훈련과 조언을 받는다. 그건 현성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아직 신인이었을 적엔 그게 잘 안 됐지만 2년 정도 지나니 현성이에게도 나름 스킬이 붙어 적당히 웃으며 맞장구치고, 욕먹지 않을 만큼의 예의 바른 말을 하는데 무리가 없어졌다.
데뷔 2주년 팬 미팅이 있던 그날도 고열로 아파서 고통스러웠을 텐데 끝까지 생글생글 웃던 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 현성이가 매니저도 없이 혼자 병원에 갔었다는 이야기엔 핸드폰을 잡고 오열했던 기억이 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인이란 타이틀이 벗겨지고 더 절박한 상황이 됐을 때, 오랜만의 티브이 프로그램 촬영이라고 대기실에서 링겔을 맞다가 찍은 영상은 아주 짧아 겨우 2분이 될까 말까 했다. 그 탓에 카메라 앞에서 울지 못했을 현성이를 대신해 내가 모니터 앞에서 철철 울었다.
그렇게 과거에 젖어 한창 상념에 빠져 있는데 옆에서 현성이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았겠네.”
“응, 응. 그래서 내가 이것도 샀는데 엄청 예쁜 거야! 봐, 예쁘지?”
“예쁘다.”
“어울려?”
“응. 어울려.”
“진짜? 헤헤.”
살짝 취기가 오른 여자애의 말투나 행동이 꽤 귀여웠다. 제 말을 받아 주는 이가 있다는 것에 무척 신이 난 것 같았다. 그와 반대로 현성이는 입꼬리를 올리곤 있었지만 슬슬 피곤한 기색이 보였다. 온 지 얼마 되진 않았어도 꽤 지친 듯해 괜히 신경이 쓰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몰래 쳐다보고 있는 중 어떻게 알았는지 현성이가 나를 돌아본다. 자연스레 눈 돌릴 타이밍을 놓쳐, 등 뒤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마주 보았다.
역시 사람들의 시선에 여전히 민감한 건가? 왜 쳐다보고 있었냐고 그러면 뭐라 하지? 친하게…… 지내자? 아, 초딩이냐.
그런데 현성이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입술에 상처 났네요.”
“……네. 그래서 약 발랐어요.”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같은 답을 내뱉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데, 현성이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 모습을 보니 불쑥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훨씬 작고 말랐던 어린 모습이.
현성이는 원래 여러모로 좀 느린 아이였다. 키도 느리게 커서 열아홉 살이 됐을 때야 175센티미터까지 자랐다. 그래서 내가 스무 살이 된 해, 오랜만에 현성이 소식 전한다며 개인 팬 페이지의 홈마가 엉엉 울면서 SNS에 올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자란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림잡아 보건대 적어도 180대 중반 이상으로 보였다.
아련한 과거를 떠올리다 다시 현성이에게 집중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딴 생각을 하다니 까딱하면 무례한 실수를 범할 뻔했다.
“저 세 학번 밑이니까 말 놓으셔도 돼요.”
현성이가 미소 지었다. 카메라 앞에서의 미소였다. 그래서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괜찮아요?”
대신 어딘가 허무한 분위기를 느껴 나도 모르게 괜찮냐고 묻고 말았다.
난 바본가? 괜찮냐니. 너무 갑작스럽잖아.
자책할 정도로 충동적인 질문이었지만 다행히 현성이가 앞서 한 말과는 대화가 자연스레 이어졌던 터라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무리 없이 넘어갔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속말이 말을 놓아도 괜찮냐는 질문으로 바뀌어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여전히 쓰린 속은 달랠 길이 없다.
그래서였을까, 욱하는 기분으로 혼자 중얼거리듯 말해 버렸다.
“안 괜찮아도 되는데.”
“네?”
혀가 포크에 찔리더니 맛이 갔나 보다. 왜 이런 소리를 했을까? 진짜 그거 마시고 취했나? 아님, 현성이한테 취했나? 꼭 내뱉고 후회한다. 소란스러운 속을 애써 감추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꼭 괜찮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요. 안 괜찮아도 된다고 생각해서요.”
현성이는 내 말을 듣고 이번엔 빠르게 눈을 한번 깜빡였다. 어쩐지 아까보다는 생기 도는 얼굴이라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이따금 기분이 괜찮을 때 보여 주던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 놓으셔도 된다는 건 진짜 괜찮아서 한 말이에요.”
무언가 더 말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는 달리 현성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화장실에 가는 듯했다. 왜 이렇게 자주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가 있는 시간이 길진 않았다. 한 번씩 다녀올 때마다 조금은 풀리는 얼굴을 보면 사람 없는 공간에서 짧게나마 휴식을 취하고 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것도 그대로네. 슬쩍 턱을 괴고 빈자리를 내려다봤다.
데뷔 직후의 현성이는 무대 위에서 긴장하면 다른 멤버들 뒤에 가서 사람들 눈을 피했었다. 그리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억지로 하는 애교나 개인기를 퍽 어려워했다. 그런 소심한 애가 무슨 무대를 하겠다고 그러냐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현성이는 무대를 정말로 좋아했었다. 비록 특출 나진 않았어도 나이치고 춤은 잘 추는 편이었고, 실제로 맡고 있는 파트에 댄스도 있었다.
이번에도 금방 돌아온 현성이는 언제 자리를 비웠냐는 듯 제 동기들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중간중간 여자애들 몰래 지친 표정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확실히 팬 사인회 때도 팬들에게 낯을 많이 가렸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나중에는 곧잘 해서 이제 익숙해졌나 보다 싶었는데, 어쩌면 그냥 참아 냈던 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 뭐 하냐?
현성이 한정 내적 설명충이 된 기분으로 스스로의 정신 상태를 점검했다. 과거에 툭 치면 줄줄 산출되던 팅클 스타의 프로필과 온갖 특징들이 뇌 속 서랍 깊은 곳에서 잠들었다가 다시 홀랑 튀어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걸 마치 복습을 하듯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당해서 헛웃음을 흘렸다. 덕질하던 버릇 어디 안 간다고, 이걸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이야.옆에서 의아해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최대한 무시하려 애썼다. 그런데 애를 써도 안 되더라.
“아이스크림 사 줄까?”
결국 이딴 말이나 하고 앉아 있다.
“술 많이 마셨지?”
현성이 주량을 내가 알 리 없다. 그냥 앞에 초록색 술병이 하나 비어 있어 대충 갖다 붙였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속도 풀 겸 같이 나가자.”
둘이서만 다녀오는 게 설레다 못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지금은 조용한 공기를 선물해 주고 싶을 뿐이었다.
“앗, 선배. 저희도 사 주세요.”
아까 내가 피 흘릴 때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여자애들이 말을 했다. 나한테 아이스크림을 얻어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현성이를 따라오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현성이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여자애들은 추우니까 안에 있어. 사다 줄게.”
적당히 돌려 말하니 까르르 웃는다. 현성이도 거기에 동참하자 좋다며 기다릴 테니 빨리 오라고 신났다. 내가 먼저 자리를 떠 문을 열었고 뒤따라 현성이가 내가 잡아 놓은 문을 보곤 재빨리 가게를 빠져나왔다.
“편의점은 비싸니까 저기 아이스크림 할인 매장으로 가자.”
“할인 매장이요?”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날카롭게 스쳤다. 앞머리가 흐트러졌다. 서늘한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슬쩍 뒤를 돌아보니, 밤, 여러 불빛들이 들어선 대학가 유흥의 거리에서 홀로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내 과거의 추억이 서 있었다. 물론 과거의 추억이라고 국한하기엔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 그냥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아직도 가장 좋아하고 있다.
얼굴을 불빛에 물들이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현성이의 모습에서 과거의 향수마저 느껴졌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해도 하지 못할 만큼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던 과거, 그 중심엔 팅클 스타 한현성이 있었다.
그토록 좋아하고 아끼던 무대 위 아이돌이 이젠 평범한 과 후배라니 기분이 묘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두근거림 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러움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티를 낼 수 없었기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좀 멀어. 괜찮아?”
“……안 괜찮아도 된다면서요.”
미소 없는 무표정이라도 기분이 나빠서 지은 게 아니란 걸 안다. 그냥 저게 이 아이의 디폴트값이다. 음, 조금 다른가? 그래. 현성이에게는 저 무표정이 편한 얼굴이었다. 이 말이 가장 적당하겠다.
“맞아. 안 괜찮아도 돼.”
먼저 걸어가는 뒤로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등 뒤로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조금 따라잡나 싶더니 현성이는 나와 나란히 걷지 않고 반 발자국 뒤를 유지하며 쫓아왔다.
“그리고 나 너 알아.”
뒤편에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잠시 멈추더니 반 발자국 더 멀어졌다. 뒤에 있는 사람에게선 말이 없었다.
사실 아까부터 고민하던 부분이다. 아는 척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과거에 너의 팬이었다고 말하면 기뻐할까, 아니면 미안해할까?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 보류해 두고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아까 부회장한테 들었어. 4수했다며?”
“네.”
“그럼 나랑 동갑이잖아.”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뒤돌아보자 무표정하지만 묘하게 시린 얼굴을 한 현성이가 한 발자국 뒤에서 천천히 걷고 있다.
“말 놔도 돼.”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바로 반말로 묻는다. 긍정의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오히려 편해.”
“아니. 입술이랑 혀.”
“응?”
다시 앞을 보려다 빠르게 치고 오는 답에 잡혀 버렸다. 그 탓에 고개만 뒤로 한 상태로 걷다가 자세가 무너질 뻔한 것을 현성이가 팔을 잡아 중심을 맞춰 주었다. 얼떨결에 벌어진 일이라 고맙단 말도 못 했다.
근데, 야. 네가 내 팔을 잡으니 조금 현실 같지가 않네.
“아…… 솔직히 아프긴 한데 참을 만해.”
“그래?”
현성이가 나한테 편하게 말을 놓다니. 꿈인가.
“응.”
“아픈 건 아픈 거잖아.”
“됐어.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보다 저기 보여? 저어기, 좀 멀리.”
검지를 뻗어 아이스크림 매장을 확인시켜 주고 다시 걸었다. 목적지를 확인했기 때문인지 현성이는 이제 내 뒤가 아니라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뭐 좋아해?”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넌 수박 맛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나는 수박 아이스크림. 저기서도 팔까?”
“팔아.”
“응?”
단호하게 말하는 내가 신기했는지 현성이가 미간 쪽 눈썹을 살짝 올리고 쳐다본다. 옆눈으로 그를 살피고 뒷말을 이었다.
“어제 내가 사 먹었거든.”
하하, 옆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으로 제대로 웃는 것 같아서 나도 조금 입꼬리가 올라갔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생채기가 난 쪽이 조금 아리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이 날씨에 먹은 거야?”
“응. 그냥 먹고 싶어서.”
지난 밤, 집을 가기 위해 정류장 쪽 아이스크림 할인 매장 앞을 지나가다 우연히 초록색과 빨간색이 섞인 아이스크림이 그려진 봉지를 보았다. 솔직히 네가 생각났었다. 그래서 그 추운 날에 차가운 수박 맛 아이스크림을 사서 입에 물었다.
“그랬구나.”
현성이는 그렇게 말하며 가게 문을 열었다. 문손잡이만 잡고 있는 폼이 먼저 들어가라고 말하는 것 같아 얼른 가게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그제야 따라 들어온다.
“애들 먹게 넉넉히 사 갈까? 누군 입이고 누군 주둥이냐, 이 소리 뻔히 나올 텐데.”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현성이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어차피 다들 취해서 모를 거야. 걔네들 것만 사다 주자.”
“그 두 사람이랑 친해? 친해 보이던데.”
“두 살 차이인데도 애들이 친근하게 대해 줘서 오히려 내가 고맙지.”
아. 안 친하구나. 특유의 돌려 말하기 화법을 실시간으로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다.
여러 가지 아이스크림을 주워 담으면서 잠시 고민했다. 역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상처에 조금 무리가 가려나?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색색의 봉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자 현성이가 무언가를 하나 건넨다.
“부드러운 걸로 먹어.”
씹히는 것 없이 부드럽기만 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었다. 떠먹는 거라 조금 비싼 편이었는데도 망설임 없이 받아들었다.
누가 줬는데 이걸 다시 빼.
“얼마예요?”
“뭐 하는 거야?”
떠먹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소중히 손에 든 사이 현성이가 카운터에 아이스크림 바구니를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면서 주머니 속 지갑에서 현찰을 꺼내 결제한다. 옆으로 가서 ‘내가 계산한다니까.’ 하고 말해도 물러서지 않고 그저 가볍게 웃는다.
“나중에 밥이나 사 줘.”
건네지는 현성이의 돈이 아까워서 속이 쓰라렸다. 내가 못 먹고 기어 다니더라도 이것저것 사 주고 싶었지만, 처음 만난 선후배 사이에 그러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손에 들고 있던 카드 지갑을 주머니 안에 욱여넣었다.
나중에 밥이나 사 달란 말 또한 진짜 밥을 사 내놓으란 뜻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어 더 입맛이 썼다.
“맛있는 걸로 사 줄게.”
그래도 그 인사치레에 가까운 말을 받았다. 호의에 가까운 마음을 거부하기보단 다 받아 주고 싶었다. 사실 오늘 아니면 또 언제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이게 현실인지조차 의문스러울 정도로 꿈같았다.
그러면서 현성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날이 온다면 오늘처럼 굳어 있지만 말고 좀 더 편한 모습으로 가장 좋아할 음식을 먹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 날이 오긴 올까 의문이 들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아이스크림을 사서 돌아오는 길은 조용했다. 꽃샘추위의 칼바람 속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현성이도 손목에 아이스크림이 든 봉지를 끼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나도 침묵만 지켰다.
나야 괜히 말실수를 하거나 현성이에 대한 내 감정이 흘러나올까 무서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지만, 얘는 왜 조용한 걸까? 마치 데뷔 초 카메라 앞에서 긴장하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 이 침묵이 편한 걸지도. 그래서 굳이 억지로 이어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십여 분을 걷자 금세 가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성인 술집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건네자마자 급한 일이 생겼다며 돌아갔다. 그리고 나 역시 멀어지는 그 애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리를 슬쩍 떠 버렸다.
***
다음 날 메신저를 열어 보니 단톡 방에선 혼자 도망쳤다며 개소리를 지껄이는 동기들이 극성이었다. 그러나 모두 무시하고 어제 있었던 일이 과연 어디까지가 꿈이고 생시였는지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정말 현성이를 본 건가? 우리 팅스?”
거지발싸개 같은 예명까지 오랜만에 입에 담아 봤다. 정수리를 베개에 갖다 박으면서 끙끙 앓았다. 사진이라도 찍어 놨어야 현실이라고 생각할 텐데, 도저히 이게 꿈이 아니란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캠퍼스 안 저 멀리서 걸어오는 한현성을 맨정신으로 발견한 뒤, 술에 취했을 때보다도 더 설치는 가슴에 도망치듯 도서관 화장실로 달려 들어가 덜덜 떨어야 했다.
어제 괜찮았던 건 순전히 술 빨이었나 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확신을 가졌다. 꿈이 아니었다. 정말로 현실이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내내 점철해 놓았던 추억을,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2. 도서관 (1)
인터넷에 접속했다.
한현성, 역시 검색해도 별게 나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팅스. 와, 진짜 옛날 자료만 있다. 그나마도 얼마 없다. 그중 몇 개는 심지어 내가 작성한 거다.
아무리 최근의 정보를 찾아보려 해 봐도 건질 만한 게 없었다. 공식 카페나 홈페이지는 폭파된 지 오래였고, 혹시나 해서 접속한 SNS 계정의 옛 친구들은 다들 최근 기록이 없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여기저기 아무 데나 누구라도 좀 답 달라는 심정으로 ‘팅스, 기억하나요?’라는 쪽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동안 받은 답은 하나도 없었다.
어딜 둘러봐도 아이돌 팅스, 블랙 스카이에 대한 게시 글은 없다. 이젠 아이돌 팅스가 아니라 정말 일반인 한현성으로 내 후배가 된 것이었다.
“어쩌지.”
계속 볼 용기도 없지만 안 볼 자신도 없다. 한번 인식하고 났더니 계속 현성이만 눈에 들어와서 환장할 노릇이었다. 심지어 평소였으면 PC방에서 죽치고 있었을 긴 공강 시간에는 괜한 설렘을 안고 과방을 찾아 조신하게 앉아 책을 보는 척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 현성이와 제대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따금 우연히 스쳐 지나갈 때라도 수많은 군중 속에서 현성이는 내 눈에 확 들어왔다. 게다가 왜 모르고 살았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의외로 자주 스쳤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현성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도 혼자네. 홀로 있는 모습에 괜한 걱정도 들었다. 애들이 나이 많다고 잘 안 놀아 주나? 그래도 여자애들이 관심을 가지긴 하는 것 같았는데……. 하긴, 이성으로 관심을 주는 애들이 아니라 친구로 대할 애들이 필요하겠지.
현성아, 파이팅!
속으로 응원하며 재빨리 강의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미리 교재는 펴 놨지만 무의미했고 그저 핸드폰으로 팅스, 현성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왜 나오지 않는 거야. 땡깡을 부려도 나오지 않는 건 나오지 않는다. 울며 겨자 먹기로 옛날 자료들만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웃기게도 절대 잊지 않을 것 같았던 사실들을 많이 잊고 살았었단 걸 깨달았다.
다시금 살펴보며 되새기는 현성이의 성향이나 습관, 인터뷰 속 조금은 날조된 프로필 등을 보며 웃었다. 모든 자료가 폭파되거나 사라지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즐겁게 그때의 감정들을 회상했다. 물론, 매번 즐겁지만은 않았었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 연예인 시절을 추억할수록, 이젠 평범한 대학생인 현성이에게 점점 더 미안해져만 갔다.
무역학과.
도저히 연예계와 관련 있어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그쪽과는 연을 끊을 모양이었는지 무역 공부에 몰두하는 현성이의 모습이 도서관에서도 종종 발견되었다. 정말 죽을 듯이 책을 파고드는 모습을 훔쳐보며 바로 뒤도 부담스러워 뒤 뒷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소리 없는 응원을 이어 갔다.
정말 파이팅. 난 널 항상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