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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좋아하지만 3화
2. 도서관 (2)
중간고사 기간에는 밤새서 공부하는 현성이를 따라 교재를 바리바리 싸 들고 도서관을 향했다. 아무래도 시험 기간이라 사람이 한가득이었다. 그래도 자정이 지나감에 따라 자리가 많이 비었으나 여전히 현성이는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는 척 몰래 봤더니 무역 영어였다.
저걸 왜 벌써 신입생이 공부하는지 이해가지 않았지만, 가끔 교수에 따라 앞당겨 배우는 경우도 있었기에 납득하기로 했다. 어쩌면 가장 빡세기로 소문난 임 교수님 수업을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1학년 2학기 때 임 교수님의 무역학개론 수업을 듣다가 얼결에 무역 실무까지 손을 댄 적이 있었다. 뭐, 결과는 당연하게도 처참했다. 초짜들을 데려다 놓고 이론 기초를 알려 줘도 수박 겉핥기만 했을 놈들에게 실무 계약서를 작성하게 시켰으니 학점이 초토화일 수밖에. 웃긴 건 정규 커리큘럼 강의 계획서에 있던 게 아니었는데도 그게 30%나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어느 날 갑자기 ‘너네 이것도 해 봐야 하는데. 일단 경험 삼아 해 보자.’라고 운을 떼더니 ‘여러분, 무역은 이론도 중요하지면 역시 실무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고 불안한 말을 내뱉고, ‘자, 다음 주까지 여러분들은 제가 알려 준 것을 토대로 실무 계약서를 만들어 오세요.’라고 해서 모두들 얼마나 경악했었는지.
그나마 상대 평가여서 다행이었다. 어차피 모두가 제대로 못 했으니까.
열람실 앞 음료수 자판기 앞에 서서 검지로 종류를 훑었다. 없네. 그럼 옆 자판기에 있나? 캔 홍차가 어디 있지. 아. 여기 있다. 복도 한편에 자리한 자판기에서 붉은색이 도는 캔 음료를 선택해 꺼냈다. 물론, 내가 마실 건 아니었다.
현성이는 탄산이나 커피를 즐기지 않았다. 실제로 팬클럽에서 선물을 보낼 때 현성이의 금지 품목 중 하나가 탄산이었다. 탄산을 싫어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못 먹는 건지까지는 몰랐지만, 이따금 무언가를 마실 때면 꼭 이 음료였다.
자리로 돌아와 포스트잇에 최대한 바르고 예쁜 글씨로 응원의 말을 적기 시작했다.
[공부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멋있습니다. 건강 챙기면서 힘내세요. 쉬는 시간엔 스트레칭!]
캔 겉면에 맺힌 물방울을 옷으로 닦아 내고 포스트잇을 붙였다.
마침 현성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자리를 비웠다. 눈치를 보다 주위를 둘러보니 서 있는 사람도 없고 다들 자기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틈에 지나가는 척 무심하게 책상 위에 음료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벌렁벌렁한 심장으로 아무도 눈치 못 챘길 바랐다.
나중에 대학교 커뮤니티에 ‘도서관에서 어떤 남자가 남자한테 음료수 주더라.’ 따위의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얼마 뒤 현성이가 돌아왔다. 현성이는 자리에 앉기 전 빨간 음료 캔을 눈치채고 들어 올려 포스트잇에 적힌 글을 읽는 듯하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재빨리 눈을 깔고 공부하는 척 펜을 끄적였다. 그러다 어쩌고 있을지 궁금해져서 슬그머니 게처럼 눈을 들자 뒷모습이 보였다.
마시려나?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는데, 현성이는 마시긴커녕 음료를 책상 한구석에 밀어 놓고 쳐다도 보지 않은 채 공부만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약간 김새는 느낌과 더불어 ‘그럼 그렇지, 뭐.’ 하는 마음이 들었다. 누가 줬는지도 모르는 것을 마시기가 조금 꺼려질 수 있지. 그래, 그렇지. 뭐, 그럴 수도 있지. 안 마시는 것도 현성이 마음이고.
그럴 수 있어. 응……. 으응.
“…….”
펜을 괜히 손가락 위에서 굴려 본다. 아닌 척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조금 실망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괜한 기대를 갖지 말아야 하는데 시원하게 마셔 줄 거라 기대해 버렸다.
조금 뒤, 시무룩해진 채 공부를 하는 척을 하며 손가락으로 펜을 굴리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현성이를 스쳐 밖을 나가려는 중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를 곁눈질하고 말았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애가 보였다.
조용한 열람실 속에서 내 뒤를 따라 걷는 발자국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잔뜩 긴장해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유리문에 나와 내 뒤쪽에 서 있는 커다란 인영이 비쳤다.
그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현성이다.
문을 열고 상대가 나오길 뒤돌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가 열람실 안이 아닌 복도에서 들릴 때 손을 놓고 화장실로 곧장 직행했다.
하지만 평소처럼 곧바로 볼일을 보지는 못했다. 난 자연스럽게 소변기 앞으로 갔다가 입술을 꾹 물고 좌변기 칸으로 들어갔다. 현성이도 만약 화장실이 급해 나온 것이었다면 소변기 앞에서 어색한 재회를 하게 될 텐데 아직 내겐 그 정도의 용기가 없었다.
칸에서 어찌저찌 일을 보고 긴장하면서 나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뭘 기대한 건지……. 아니, 기대랄 것도 없었지만.
멋쩍게 손을 씻고 밖을 나가니 거짓말처럼 열람실 앞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현성이가 보였다. 조금은 어둑한 복도 휴게실 앞, 간단한 스트레칭과 함께 목을 돌리던 현성이가 내 쪽을 바라본 건 순식간이었다.
“…….”
놀라 굳은 와중에도 손에선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아.”
날 발견한 현성이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먼저 알은체하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손바닥이 보이게 들어 올려 흔드는 게 ‘안녕?’의 정석이라 얼결에 따라 손을 흔들었다. 입이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혀도 굳어선 원래 자리가 어디였는지 까먹어 버렸다. 보통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던가? 아니, 안쪽에 있었나? ……좀 더 바깥을 향해 있었나?
어디다 둬도 어색하기만 한 혀의 위치에 고민을 하고 있는데 뒷말이 이어진다.
“……하세요?”
어느새 그가 살짝 웃고 있었다.
“말 놔도 된다니까.”
“혹시나 술 취해서 한 말인가 싶어서.”
무려 한 달 만의 대화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편안한 분위기여서 어깨에 들어간 힘이 쑥 빠졌다.
“나 그날 안 취했었어.”
“그래?”
거리가 조금 멀다고 느꼈는지 현성이가 내 옆으로 다가온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얬다가 여전히 내 손에서 물방울이 느리게 뚝뚝 떨어지는 걸 느끼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잠시 손에 묻은 물기를 정리하는데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마주쳐 오는 눈은 피로감과 동시에 웃음기가 들어 있었다.
“날 봤으면 이왕이면 말로 인사해 줘.”
“……?”
“이게 뭐야.”
편하게 입은 후드 티 앞주머니에서 불쑥 캔이 튀어나온다. 빨간 홍차 캔. 내가 남몰래 건넨 빨간 빛깔의 캔 음료였다.
슬쩍 캔을 손에 쥐어 보여 준 그가 당황해 굳어 버린 내 옆 벽에 등을 기대더니 캔 뚜껑을 땄다. 시원한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열람실 안을 확인하다 다시 날 향해 웃었다.
“시끄러울까 봐 안에선 못 마셨어.”
내게 변명 같은 말을 늘어놓고는 음료를 한 입에 털어 넣는다.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야. 어떻게 알았어?”
“뭐…….”
나는 가장 뻔한 답을 내놓았다.
“나도 좋아하거든.”
“그렇구나.”
현성이는 그렇게 말한 뒤 빈 캔을 휴지통에 넣었다.
“재밌네.”
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댔다. 뭐 하나 싶어 옆을 보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그냥 만지고만 있었다.
“그런데 내가 준 거란 건 어떻게 안 거야?”
사실 아까부터 이게 가장 신경이 쓰였다. 최대한 몰래 줬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혼란스럽다.
“밖에서 봤어. 여기서.”
“…….”
고개를 돌려 열람실을 바라보자 어둑한 복도에 비해 환하게 비치는 열람실 안쪽이 보였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비록 현성이가 앉은 자리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 앞에서 서성대고 있었을 나는 제대로 보였을 거란 걸.
“……봤구나.”
“응.”
귓불이 홧홧했다. 민망함에 얼굴이라도 가리고 싶은 걸 참고 최대한 표정을 굳혔다.
“괜히 네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모르는 사람이 그러는 게 더 부담스럽지.”
그 말을 끝으로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더니 시선을 내린다. 마주치고 있던 눈동자가 밑으로 내려왔다.
“다 나았네.”
입술을 보고 한 말이었다.
“응.”
“다행이다.”
편안하고 낮은 목소리가 현성이 같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팅스의 목소리를 들었던 게 그가 열아홉 살 때였다.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스물세 살이 된 현성이의 목소리는 앳된 티가 남아 있던 그때와 달리 더 깊고 남자다워져 있었다.
귀가 간지럽다.
잠시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기분 탓인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술자리로 돌아올 때와 다르게 약간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뭐라도 말해서 침묵을 깨고 싶은 정적이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급하게 내뱉은 말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현성이가 그 말을 듣고 웃었으니까.
“너야말로 내 건강 챙겨 줘서 고마워.”
아까 쓴 포스트잇 이야기였다.
“귀엽더라.”
“…….”
생각지도 못한 뒷말에 굳어 있자 현성이가 힐끗 쳐다보곤 아, 하는 소리를 낸다.
“남자한테는 조금 그런가? 미안. 약간 말버릇이야.”
말버릇인 건 알고 있어서 놀랍지 않았다. 그냥 그 대상이 내가 된 게 신기했다.
무대나 예능에 다 같이 나올 때면 현성이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 막내를 향해 언제나 귀엽다고 말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형들에게도 귀엽다고 말했다.
어쩌면 아이돌 이미지 메이킹에서 이뤄진 콘셉트 중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입버릇이 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자체 예능에서 리더에게 ‘뭐가 그렇게 다 귀엽냐, 어?’ 하는 말을 들었던 적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럴 수도 있지.”
나름 농담이라고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귀여워해도 돼.”
근데 괜히 붙였나 보다. 또 침묵이 이어지고 말았다.
복도에 서늘한 기운만 맴돌았다. 한참 말없이 핸드폰만 만지던 현성이가 다른 열람실에서 나온 신입생 동기와 인사할 때까지 이상한 침묵 속에서 나는 호흡이 멎어 가고 있었다. 정말 ‘왜 내 입은 뇌를 거치지 않고 내뱉고 보는 걸까’부터 시작해서 오만 생각이 다 들던 순간이었다.
“앗. 선배님, 안녕하세요.”
“응. 신입생 환영회 후 처음이다.”
여자애는 줄곧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는지 무척 피곤해 보였다. 더 이상 어색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세수하러 간다는 후배를 붙잡고 좀 더 시간을 끌다가 정말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발견한 뒤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히 오래 붙든 것 같아 슬쩍 주머니 속 지폐 낱장을 확인했다.
“이리 와. 뭐 하나 마셔.”
“와, 진짜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짱짱!”
데리고 와서 원하는 걸 고르게 한 뒤 자판기에서 탄산을 하나 뽑아 건넸다. 행복한 표정으로 좋아하며 사라지는 게 귀여워서 피식 웃었더니 옆에서 옷자락을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무심코 돌아봤다가 잘생긴 얼굴이 코앞에 있어 깜짝 놀랐다.
“나도 잘 마셨어.”
“……어?”
“고마워. 깜빡하고 인사를 못 했네.”
그러더니 슬쩍 눈을 내리깔고 콧잔등을 긁적인다. 감사 인사를 받자고 준 게 아니었던지라 나 역시 감사를 못 받았단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어차피 현성이 입으로 들어가는 거 뭐가 됐든 주고 싶어서 준 거지 감사해 달라고 준 게 아니었던 터라 인사 따위 없어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랬나? 신경 안 써.”
하지만 이런 나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이 드러나지 않은 대답은 말을 한 내가 듣기에도 민망할 만큼 냉정하게 들렸다. 현성이가 입을 다물고 쳐다만 보기에 급히 변명했다.
“어차피 인사 받으려고 준 게 아니라서…… 그냥, 네가 잘 마셨으면 그걸로 됐어.”
겨우 핑계처럼 한마디 더 하고 나서야 다시 분위기가 부드럽게 변했다. 제대로 말한 거 맞겠지? 다행히 현성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현성이만 줄곧 보다가 지금의 현성이를 제대로 마주하니 새삼 많이 컸다는 게 느껴졌다. 이목구비는 여전히 그대로지만, 조금 더 각지고 어른스러워진 얼굴형이나 빠진 젖살, 건장해진 몸, 큰 키, 그리고 굵어진 목소리가 신기했다.
차라리 지금이면 더 인기 많을 텐데. 아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때도 잘생겼었어. 예뻤어. 귀여웠다고. 순둥순둥한 게 얼마나 매력쟁이였는데.
“넌 언제 시험이야?”
현성이의 질문에 현실로 멱살이 잡혀 돌아왔다.
“이틀 뒤에 하나 있고 그 뒤로 줄줄이. 넌?”
“난 내일부터. 계속 도서관 올 거야?”
“넌?”
“나야, 뭐. 와야지.”
현성이가 온다면 나도 그럴 테지.
“나도 계속 와.”
“그럼 같이 저녁 먹자.”
하지만 몰래 보려고 오는 거지 같이 밥을 먹는 건 상상도 못 했었는데. 내가 무슨 덕이라도 쌓았나? 그래 봐야 쌓은 덕이라곤 덕질뿐일 텐데.
“혼자 먹는 게 편해?”
응? 왜 내가 친구랑 안 있고 혼자 먹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물론 현성이를 우연히 발견하면 친구들을 버리고 혼자 쫒아 다니다가 구석에서 몰래 끼니를 때운 적이 몇 번 있긴 했다. 하지만 들키지 않게 잘 숨어 있었으니 그걸 봤을 리는 없고.
“나 내일은 친구랑 먹을 예정이라.”
“그래?”
현성이랑 단둘이 밥 먹다가 체할까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친구를 팔았다. 이렇게 된 거 내일은 누구라도 한 명 붙잡고 같이 밥을 먹어야겠다. 그러자 불현듯 얘를 쫓아다니느라 몇 번이나 뒷전으로 밀려나야 했던 친구 놈들의 어이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구나…….”
그런데 약간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이 못내 눈에 밟혔다.
“그럼 이틀 뒤에 먹자.”
조금 쳐진 눈가나 실망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내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현성이 눈에 생기가 다시 돋는 걸 보고 나니 괜히 내일 친구랑 밥 먹기로 거짓말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까 같이 먹자고 할 때 그냥 그러자고 할 걸 그랬다.
그저 밥 먹자는 말에 기뻐하는 표정을 짓는 게 괜히 마음에 걸렸다. 혹시 현성이는 외로웠던 게 아닐까? 머릿속으로 혼자 행동하던 현성이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일도 같이 먹을래? 친구는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또 내뱉고 보는 거다. 하지만 현성이는 이번 제안에는 오히려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나중에 너 혼자면 불러 줘.”
그러고는 이제 슬슬 시간 됐다며 시각을 확인한 뒤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손에는 검은색 핸드폰을 쥐고 있는 상태였다. 그 흔한 케이스조차 씌우지 않은 핸드폰은 나름 최신형이었다.
저거 바닥에 떨어뜨리면 위험할 텐데 젤리 케이스라도 껴 놔야 하는 거 아닌가? 핸드폰만 뚫어지게 보는데 갑자기 확대라도 한 것처럼 굉장히 디테일한 부분까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렇게 집중력이 높았나? 갑자기 왜 이렇게 잘 보이지? 근데 핸드폰이 생각보다 많이…… 크네?
“……!”
“번호 좀.”
그제야 뒤늦게 현성이의 전화기가 실제로 가깝게 위치해 있는 걸 알았다. 현성이는 내게 핸드폰을 내밀고 번호를 달라고 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던 걸 들킨 것 같아 낯 뜨거운 얼굴로 얼른 번호를 찍어 돌려주었다.
“모레 연락할게.”
“응.”
“전화 가? 내 번호야.”
저장해 둬, 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번호를 머릿속에 저장했다. 이런 기억력이 평소에도 존재한다면 좋을 텐데. 지금 당장 눈 감고 읊으라고 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숫자의 나열을 핸드폰 주소록에 저장했다. 이름은 잠시 고민하다 그냥 한현성이라고 저장해 두었다.
“내 성 알고 있었네?”
……!
순간 무척 당황했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고 둘러댔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알았어.”
바보 같은 변명이나 지껄이며 고개를 숙인 상태로 휴대폰 주소록을 확인하는 척했다.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전공 책에 적혀 있는 거 봤나 보구나.”
“어.”
재빠른 대답에 현성이가 웃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제 들어가자 말했다. 그러면서 열람실 문을 열어 잡은 채 나를 먼저 들여보내 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문을 잡아 주는 건 아무래도 습관인 듯했다. 저번에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이랬었다.
자리로 돌아가 앉으려는데 내 쪽을 돌아보는 현성이의 얼굴과 마주쳤다. 현성이는 살짝 웃고는 다시 공부를 하려는 듯 자세를 잡으며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난 자리에 힘이 풀려 털썩 쓰러지듯 의자에 착석했다. 그리고 앉자마자 다시 핸드폰을 꺼내 아까 주고받은 번호를 확인했다.
미친 거 아니냐? 이 정도면 계를 탄 수준이 아니라……. 아니, 아니지. 현성이 이제 아이돌 아니지. 아니면 뭐. 이렇게 좋은데.
“…….”
콧김만 흥흥대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문자를 보냈다. 최대한 이 고양된 감정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내 이름은 나하늘이야. 이 이름으로 저장하면 돼.]
드디어 제대로 된 성명 교환을 했다. 정말로 우리 둘 사이에 인연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현성이가 나를 진짜로 알게 됐다고. 이게 말이 되냐? 진짜 믿을 수가 없다.
[알았어. 고마워. 그렇게 저장할게.]
귀여워.
겉으로는 무표정을 가장했지만 속으로는 난리 브루스를 추고 있었다.
한현성, 귀엽다! 내 이름 물어보는 것도 까먹고 번호만 가져갔냐!
수신자 없는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소리치듯 내적 비명을 지르며 자연스레 책을 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이 붕 떠 있는데 머릿속에 글자가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다. 경제학원론 속 온갖 용어들이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도저히 공부할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안 되겠다. 내일 해야지.
이래서 고등학교 때도 성적이 개판이었는데 또 시작이다. 이상하게 한번 빠지면 영 헤어 나오질 못한다.
불시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시작된 그 순간을 떠올려본다.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가도 아니고, 그냥 인터넷 활동을 하다가도 아니었다. 무려 첫 번째 팬 사인회 현장에서였다. 이모 집에 놀러갔다가 사촌 누나와 함께 잠시 들렀던 유명 몰에서 한 신인 아이돌의 공개 팬 사인회 를 보았는데, 그게 팅스가 속한 그룹이었다.
뭐 아무튼 그건 넘어가고 아까 현성이가 내 옷깃 잡은 거 누구 본 사람 없냐? 소매 잡아당긴 거 진짜 귀여웠는데. 본 사람 있으면 나랑 대화 좀 하자. 얼마나 귀여웠는지에 대해서 누구라도 좋으니 같이 대화하고 싶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혀, 현성일까?
두 손으로 공손하게 핸드폰을 켰는데, 뜻밖에도 SNS 답장이었다.
[스스 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언젠가 인터넷으로 말을 나눈 게 다였지만, 그래도 기억해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여기저기 쪽지를 흩뿌렸다지만 설마하니 규모는 작아도 알차게 운영하던 팅스 개인 팬 페이지 홈마에게서 답이 올 줄은 몰랐다. 특히 팅클벨 님은 몇 없는 팅스 팬들 사이에서도 어마어마한 애정을 보여 주었던 고마운 팬이었다.
[팅클벨 님, 반가워요.]
답장을 보내며 벅찬 가슴을 가라앉히질 못하고 길게 숨을 내쉬다가 옆 사람의 헛기침을 듣고 겨우 소리를 참았다. 메신저에 금방 답을 준 덕에 상대도 빨리 반응을 해 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팅스 기억하냐는 글 읽고 놀랐어요. 당연히 기억하죠.]
말하고 싶다. 진짜 말하고 싶다. 하지만 말해도 되는 걸까?
한참을 망설인 끝에 휴대폰 화면을 터치했다. 한 사람에게라도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떠벌려야 실감 날 것 같았다.
[팅스가 지금 우리 학교 다녀요. 대학교요! 진짜…… 너무 귀여워요ㅜㅜㅜㅜ]
[헐…… 대박. 축하드려요! 이게 무슨 계야. 팅스 많이 컸죠?]
[네. 그때 팅클벨 님이 올려 주신 사진보다도 더 컸어요. 186~7은 될 거 같아요.]
[미쳤다, 진짜……. 우리 애기, 나보다 20은 더 크네. 정말 애기였는데.]
2. 도서관 (2)
중간고사 기간에는 밤새서 공부하는 현성이를 따라 교재를 바리바리 싸 들고 도서관을 향했다. 아무래도 시험 기간이라 사람이 한가득이었다. 그래도 자정이 지나감에 따라 자리가 많이 비었으나 여전히 현성이는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는 척 몰래 봤더니 무역 영어였다.
저걸 왜 벌써 신입생이 공부하는지 이해가지 않았지만, 가끔 교수에 따라 앞당겨 배우는 경우도 있었기에 납득하기로 했다. 어쩌면 가장 빡세기로 소문난 임 교수님 수업을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1학년 2학기 때 임 교수님의 무역학개론 수업을 듣다가 얼결에 무역 실무까지 손을 댄 적이 있었다. 뭐, 결과는 당연하게도 처참했다. 초짜들을 데려다 놓고 이론 기초를 알려 줘도 수박 겉핥기만 했을 놈들에게 실무 계약서를 작성하게 시켰으니 학점이 초토화일 수밖에. 웃긴 건 정규 커리큘럼 강의 계획서에 있던 게 아니었는데도 그게 30%나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어느 날 갑자기 ‘너네 이것도 해 봐야 하는데. 일단 경험 삼아 해 보자.’라고 운을 떼더니 ‘여러분, 무역은 이론도 중요하지면 역시 실무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고 불안한 말을 내뱉고, ‘자, 다음 주까지 여러분들은 제가 알려 준 것을 토대로 실무 계약서를 만들어 오세요.’라고 해서 모두들 얼마나 경악했었는지.
그나마 상대 평가여서 다행이었다. 어차피 모두가 제대로 못 했으니까.
열람실 앞 음료수 자판기 앞에 서서 검지로 종류를 훑었다. 없네. 그럼 옆 자판기에 있나? 캔 홍차가 어디 있지. 아. 여기 있다. 복도 한편에 자리한 자판기에서 붉은색이 도는 캔 음료를 선택해 꺼냈다. 물론, 내가 마실 건 아니었다.
현성이는 탄산이나 커피를 즐기지 않았다. 실제로 팬클럽에서 선물을 보낼 때 현성이의 금지 품목 중 하나가 탄산이었다. 탄산을 싫어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못 먹는 건지까지는 몰랐지만, 이따금 무언가를 마실 때면 꼭 이 음료였다.
자리로 돌아와 포스트잇에 최대한 바르고 예쁜 글씨로 응원의 말을 적기 시작했다.
[공부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멋있습니다. 건강 챙기면서 힘내세요. 쉬는 시간엔 스트레칭!]
캔 겉면에 맺힌 물방울을 옷으로 닦아 내고 포스트잇을 붙였다.
마침 현성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자리를 비웠다. 눈치를 보다 주위를 둘러보니 서 있는 사람도 없고 다들 자기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틈에 지나가는 척 무심하게 책상 위에 음료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벌렁벌렁한 심장으로 아무도 눈치 못 챘길 바랐다.
나중에 대학교 커뮤니티에 ‘도서관에서 어떤 남자가 남자한테 음료수 주더라.’ 따위의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얼마 뒤 현성이가 돌아왔다. 현성이는 자리에 앉기 전 빨간 음료 캔을 눈치채고 들어 올려 포스트잇에 적힌 글을 읽는 듯하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재빨리 눈을 깔고 공부하는 척 펜을 끄적였다. 그러다 어쩌고 있을지 궁금해져서 슬그머니 게처럼 눈을 들자 뒷모습이 보였다.
마시려나?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는데, 현성이는 마시긴커녕 음료를 책상 한구석에 밀어 놓고 쳐다도 보지 않은 채 공부만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약간 김새는 느낌과 더불어 ‘그럼 그렇지, 뭐.’ 하는 마음이 들었다. 누가 줬는지도 모르는 것을 마시기가 조금 꺼려질 수 있지. 그래, 그렇지. 뭐, 그럴 수도 있지. 안 마시는 것도 현성이 마음이고.
그럴 수 있어. 응……. 으응.
“…….”
펜을 괜히 손가락 위에서 굴려 본다. 아닌 척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조금 실망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괜한 기대를 갖지 말아야 하는데 시원하게 마셔 줄 거라 기대해 버렸다.
조금 뒤, 시무룩해진 채 공부를 하는 척을 하며 손가락으로 펜을 굴리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현성이를 스쳐 밖을 나가려는 중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를 곁눈질하고 말았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애가 보였다.
조용한 열람실 속에서 내 뒤를 따라 걷는 발자국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잔뜩 긴장해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유리문에 나와 내 뒤쪽에 서 있는 커다란 인영이 비쳤다.
그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현성이다.
문을 열고 상대가 나오길 뒤돌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가 열람실 안이 아닌 복도에서 들릴 때 손을 놓고 화장실로 곧장 직행했다.
하지만 평소처럼 곧바로 볼일을 보지는 못했다. 난 자연스럽게 소변기 앞으로 갔다가 입술을 꾹 물고 좌변기 칸으로 들어갔다. 현성이도 만약 화장실이 급해 나온 것이었다면 소변기 앞에서 어색한 재회를 하게 될 텐데 아직 내겐 그 정도의 용기가 없었다.
칸에서 어찌저찌 일을 보고 긴장하면서 나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뭘 기대한 건지……. 아니, 기대랄 것도 없었지만.
멋쩍게 손을 씻고 밖을 나가니 거짓말처럼 열람실 앞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현성이가 보였다. 조금은 어둑한 복도 휴게실 앞, 간단한 스트레칭과 함께 목을 돌리던 현성이가 내 쪽을 바라본 건 순식간이었다.
“…….”
놀라 굳은 와중에도 손에선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아.”
날 발견한 현성이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먼저 알은체하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손바닥이 보이게 들어 올려 흔드는 게 ‘안녕?’의 정석이라 얼결에 따라 손을 흔들었다. 입이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혀도 굳어선 원래 자리가 어디였는지 까먹어 버렸다. 보통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던가? 아니, 안쪽에 있었나? ……좀 더 바깥을 향해 있었나?
어디다 둬도 어색하기만 한 혀의 위치에 고민을 하고 있는데 뒷말이 이어진다.
“……하세요?”
어느새 그가 살짝 웃고 있었다.
“말 놔도 된다니까.”
“혹시나 술 취해서 한 말인가 싶어서.”
무려 한 달 만의 대화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편안한 분위기여서 어깨에 들어간 힘이 쑥 빠졌다.
“나 그날 안 취했었어.”
“그래?”
거리가 조금 멀다고 느꼈는지 현성이가 내 옆으로 다가온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얬다가 여전히 내 손에서 물방울이 느리게 뚝뚝 떨어지는 걸 느끼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잠시 손에 묻은 물기를 정리하는데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마주쳐 오는 눈은 피로감과 동시에 웃음기가 들어 있었다.
“날 봤으면 이왕이면 말로 인사해 줘.”
“……?”
“이게 뭐야.”
편하게 입은 후드 티 앞주머니에서 불쑥 캔이 튀어나온다. 빨간 홍차 캔. 내가 남몰래 건넨 빨간 빛깔의 캔 음료였다.
슬쩍 캔을 손에 쥐어 보여 준 그가 당황해 굳어 버린 내 옆 벽에 등을 기대더니 캔 뚜껑을 땄다. 시원한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열람실 안을 확인하다 다시 날 향해 웃었다.
“시끄러울까 봐 안에선 못 마셨어.”
내게 변명 같은 말을 늘어놓고는 음료를 한 입에 털어 넣는다.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야. 어떻게 알았어?”
“뭐…….”
나는 가장 뻔한 답을 내놓았다.
“나도 좋아하거든.”
“그렇구나.”
현성이는 그렇게 말한 뒤 빈 캔을 휴지통에 넣었다.
“재밌네.”
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댔다. 뭐 하나 싶어 옆을 보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그냥 만지고만 있었다.
“그런데 내가 준 거란 건 어떻게 안 거야?”
사실 아까부터 이게 가장 신경이 쓰였다. 최대한 몰래 줬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혼란스럽다.
“밖에서 봤어. 여기서.”
“…….”
고개를 돌려 열람실을 바라보자 어둑한 복도에 비해 환하게 비치는 열람실 안쪽이 보였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비록 현성이가 앉은 자리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 앞에서 서성대고 있었을 나는 제대로 보였을 거란 걸.
“……봤구나.”
“응.”
귓불이 홧홧했다. 민망함에 얼굴이라도 가리고 싶은 걸 참고 최대한 표정을 굳혔다.
“괜히 네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모르는 사람이 그러는 게 더 부담스럽지.”
그 말을 끝으로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더니 시선을 내린다. 마주치고 있던 눈동자가 밑으로 내려왔다.
“다 나았네.”
입술을 보고 한 말이었다.
“응.”
“다행이다.”
편안하고 낮은 목소리가 현성이 같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팅스의 목소리를 들었던 게 그가 열아홉 살 때였다.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스물세 살이 된 현성이의 목소리는 앳된 티가 남아 있던 그때와 달리 더 깊고 남자다워져 있었다.
귀가 간지럽다.
잠시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기분 탓인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술자리로 돌아올 때와 다르게 약간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뭐라도 말해서 침묵을 깨고 싶은 정적이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급하게 내뱉은 말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현성이가 그 말을 듣고 웃었으니까.
“너야말로 내 건강 챙겨 줘서 고마워.”
아까 쓴 포스트잇 이야기였다.
“귀엽더라.”
“…….”
생각지도 못한 뒷말에 굳어 있자 현성이가 힐끗 쳐다보곤 아, 하는 소리를 낸다.
“남자한테는 조금 그런가? 미안. 약간 말버릇이야.”
말버릇인 건 알고 있어서 놀랍지 않았다. 그냥 그 대상이 내가 된 게 신기했다.
무대나 예능에 다 같이 나올 때면 현성이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 막내를 향해 언제나 귀엽다고 말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형들에게도 귀엽다고 말했다.
어쩌면 아이돌 이미지 메이킹에서 이뤄진 콘셉트 중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입버릇이 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자체 예능에서 리더에게 ‘뭐가 그렇게 다 귀엽냐, 어?’ 하는 말을 들었던 적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럴 수도 있지.”
나름 농담이라고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귀여워해도 돼.”
근데 괜히 붙였나 보다. 또 침묵이 이어지고 말았다.
복도에 서늘한 기운만 맴돌았다. 한참 말없이 핸드폰만 만지던 현성이가 다른 열람실에서 나온 신입생 동기와 인사할 때까지 이상한 침묵 속에서 나는 호흡이 멎어 가고 있었다. 정말 ‘왜 내 입은 뇌를 거치지 않고 내뱉고 보는 걸까’부터 시작해서 오만 생각이 다 들던 순간이었다.
“앗. 선배님, 안녕하세요.”
“응. 신입생 환영회 후 처음이다.”
여자애는 줄곧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는지 무척 피곤해 보였다. 더 이상 어색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세수하러 간다는 후배를 붙잡고 좀 더 시간을 끌다가 정말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발견한 뒤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히 오래 붙든 것 같아 슬쩍 주머니 속 지폐 낱장을 확인했다.
“이리 와. 뭐 하나 마셔.”
“와, 진짜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짱짱!”
데리고 와서 원하는 걸 고르게 한 뒤 자판기에서 탄산을 하나 뽑아 건넸다. 행복한 표정으로 좋아하며 사라지는 게 귀여워서 피식 웃었더니 옆에서 옷자락을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무심코 돌아봤다가 잘생긴 얼굴이 코앞에 있어 깜짝 놀랐다.
“나도 잘 마셨어.”
“……어?”
“고마워. 깜빡하고 인사를 못 했네.”
그러더니 슬쩍 눈을 내리깔고 콧잔등을 긁적인다. 감사 인사를 받자고 준 게 아니었던지라 나 역시 감사를 못 받았단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어차피 현성이 입으로 들어가는 거 뭐가 됐든 주고 싶어서 준 거지 감사해 달라고 준 게 아니었던 터라 인사 따위 없어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랬나? 신경 안 써.”
하지만 이런 나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이 드러나지 않은 대답은 말을 한 내가 듣기에도 민망할 만큼 냉정하게 들렸다. 현성이가 입을 다물고 쳐다만 보기에 급히 변명했다.
“어차피 인사 받으려고 준 게 아니라서…… 그냥, 네가 잘 마셨으면 그걸로 됐어.”
겨우 핑계처럼 한마디 더 하고 나서야 다시 분위기가 부드럽게 변했다. 제대로 말한 거 맞겠지? 다행히 현성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현성이만 줄곧 보다가 지금의 현성이를 제대로 마주하니 새삼 많이 컸다는 게 느껴졌다. 이목구비는 여전히 그대로지만, 조금 더 각지고 어른스러워진 얼굴형이나 빠진 젖살, 건장해진 몸, 큰 키, 그리고 굵어진 목소리가 신기했다.
차라리 지금이면 더 인기 많을 텐데. 아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때도 잘생겼었어. 예뻤어. 귀여웠다고. 순둥순둥한 게 얼마나 매력쟁이였는데.
“넌 언제 시험이야?”
현성이의 질문에 현실로 멱살이 잡혀 돌아왔다.
“이틀 뒤에 하나 있고 그 뒤로 줄줄이. 넌?”
“난 내일부터. 계속 도서관 올 거야?”
“넌?”
“나야, 뭐. 와야지.”
현성이가 온다면 나도 그럴 테지.
“나도 계속 와.”
“그럼 같이 저녁 먹자.”
하지만 몰래 보려고 오는 거지 같이 밥을 먹는 건 상상도 못 했었는데. 내가 무슨 덕이라도 쌓았나? 그래 봐야 쌓은 덕이라곤 덕질뿐일 텐데.
“혼자 먹는 게 편해?”
응? 왜 내가 친구랑 안 있고 혼자 먹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물론 현성이를 우연히 발견하면 친구들을 버리고 혼자 쫒아 다니다가 구석에서 몰래 끼니를 때운 적이 몇 번 있긴 했다. 하지만 들키지 않게 잘 숨어 있었으니 그걸 봤을 리는 없고.
“나 내일은 친구랑 먹을 예정이라.”
“그래?”
현성이랑 단둘이 밥 먹다가 체할까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친구를 팔았다. 이렇게 된 거 내일은 누구라도 한 명 붙잡고 같이 밥을 먹어야겠다. 그러자 불현듯 얘를 쫓아다니느라 몇 번이나 뒷전으로 밀려나야 했던 친구 놈들의 어이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구나…….”
그런데 약간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이 못내 눈에 밟혔다.
“그럼 이틀 뒤에 먹자.”
조금 쳐진 눈가나 실망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내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현성이 눈에 생기가 다시 돋는 걸 보고 나니 괜히 내일 친구랑 밥 먹기로 거짓말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까 같이 먹자고 할 때 그냥 그러자고 할 걸 그랬다.
그저 밥 먹자는 말에 기뻐하는 표정을 짓는 게 괜히 마음에 걸렸다. 혹시 현성이는 외로웠던 게 아닐까? 머릿속으로 혼자 행동하던 현성이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일도 같이 먹을래? 친구는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또 내뱉고 보는 거다. 하지만 현성이는 이번 제안에는 오히려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나중에 너 혼자면 불러 줘.”
그러고는 이제 슬슬 시간 됐다며 시각을 확인한 뒤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손에는 검은색 핸드폰을 쥐고 있는 상태였다. 그 흔한 케이스조차 씌우지 않은 핸드폰은 나름 최신형이었다.
저거 바닥에 떨어뜨리면 위험할 텐데 젤리 케이스라도 껴 놔야 하는 거 아닌가? 핸드폰만 뚫어지게 보는데 갑자기 확대라도 한 것처럼 굉장히 디테일한 부분까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렇게 집중력이 높았나? 갑자기 왜 이렇게 잘 보이지? 근데 핸드폰이 생각보다 많이…… 크네?
“……!”
“번호 좀.”
그제야 뒤늦게 현성이의 전화기가 실제로 가깝게 위치해 있는 걸 알았다. 현성이는 내게 핸드폰을 내밀고 번호를 달라고 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던 걸 들킨 것 같아 낯 뜨거운 얼굴로 얼른 번호를 찍어 돌려주었다.
“모레 연락할게.”
“응.”
“전화 가? 내 번호야.”
저장해 둬, 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번호를 머릿속에 저장했다. 이런 기억력이 평소에도 존재한다면 좋을 텐데. 지금 당장 눈 감고 읊으라고 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숫자의 나열을 핸드폰 주소록에 저장했다. 이름은 잠시 고민하다 그냥 한현성이라고 저장해 두었다.
“내 성 알고 있었네?”
……!
순간 무척 당황했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고 둘러댔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알았어.”
바보 같은 변명이나 지껄이며 고개를 숙인 상태로 휴대폰 주소록을 확인하는 척했다.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전공 책에 적혀 있는 거 봤나 보구나.”
“어.”
재빠른 대답에 현성이가 웃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제 들어가자 말했다. 그러면서 열람실 문을 열어 잡은 채 나를 먼저 들여보내 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문을 잡아 주는 건 아무래도 습관인 듯했다. 저번에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이랬었다.
자리로 돌아가 앉으려는데 내 쪽을 돌아보는 현성이의 얼굴과 마주쳤다. 현성이는 살짝 웃고는 다시 공부를 하려는 듯 자세를 잡으며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난 자리에 힘이 풀려 털썩 쓰러지듯 의자에 착석했다. 그리고 앉자마자 다시 핸드폰을 꺼내 아까 주고받은 번호를 확인했다.
미친 거 아니냐? 이 정도면 계를 탄 수준이 아니라……. 아니, 아니지. 현성이 이제 아이돌 아니지. 아니면 뭐. 이렇게 좋은데.
“…….”
콧김만 흥흥대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문자를 보냈다. 최대한 이 고양된 감정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내 이름은 나하늘이야. 이 이름으로 저장하면 돼.]
드디어 제대로 된 성명 교환을 했다. 정말로 우리 둘 사이에 인연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현성이가 나를 진짜로 알게 됐다고. 이게 말이 되냐? 진짜 믿을 수가 없다.
[알았어. 고마워. 그렇게 저장할게.]
귀여워.
겉으로는 무표정을 가장했지만 속으로는 난리 브루스를 추고 있었다.
한현성, 귀엽다! 내 이름 물어보는 것도 까먹고 번호만 가져갔냐!
수신자 없는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소리치듯 내적 비명을 지르며 자연스레 책을 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이 붕 떠 있는데 머릿속에 글자가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다. 경제학원론 속 온갖 용어들이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도저히 공부할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안 되겠다. 내일 해야지.
이래서 고등학교 때도 성적이 개판이었는데 또 시작이다. 이상하게 한번 빠지면 영 헤어 나오질 못한다.
불시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시작된 그 순간을 떠올려본다.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가도 아니고, 그냥 인터넷 활동을 하다가도 아니었다. 무려 첫 번째 팬 사인회 현장에서였다. 이모 집에 놀러갔다가 사촌 누나와 함께 잠시 들렀던 유명 몰에서 한 신인 아이돌의 공개 팬 사인회 를 보았는데, 그게 팅스가 속한 그룹이었다.
뭐 아무튼 그건 넘어가고 아까 현성이가 내 옷깃 잡은 거 누구 본 사람 없냐? 소매 잡아당긴 거 진짜 귀여웠는데. 본 사람 있으면 나랑 대화 좀 하자. 얼마나 귀여웠는지에 대해서 누구라도 좋으니 같이 대화하고 싶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혀, 현성일까?
두 손으로 공손하게 핸드폰을 켰는데, 뜻밖에도 SNS 답장이었다.
[스스 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언젠가 인터넷으로 말을 나눈 게 다였지만, 그래도 기억해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여기저기 쪽지를 흩뿌렸다지만 설마하니 규모는 작아도 알차게 운영하던 팅스 개인 팬 페이지 홈마에게서 답이 올 줄은 몰랐다. 특히 팅클벨 님은 몇 없는 팅스 팬들 사이에서도 어마어마한 애정을 보여 주었던 고마운 팬이었다.
[팅클벨 님, 반가워요.]
답장을 보내며 벅찬 가슴을 가라앉히질 못하고 길게 숨을 내쉬다가 옆 사람의 헛기침을 듣고 겨우 소리를 참았다. 메신저에 금방 답을 준 덕에 상대도 빨리 반응을 해 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팅스 기억하냐는 글 읽고 놀랐어요. 당연히 기억하죠.]
말하고 싶다. 진짜 말하고 싶다. 하지만 말해도 되는 걸까?
한참을 망설인 끝에 휴대폰 화면을 터치했다. 한 사람에게라도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떠벌려야 실감 날 것 같았다.
[팅스가 지금 우리 학교 다녀요. 대학교요! 진짜…… 너무 귀여워요ㅜㅜㅜㅜ]
[헐…… 대박. 축하드려요! 이게 무슨 계야. 팅스 많이 컸죠?]
[네. 그때 팅클벨 님이 올려 주신 사진보다도 더 컸어요. 186~7은 될 거 같아요.]
[미쳤다, 진짜……. 우리 애기, 나보다 20은 더 크네. 정말 애기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