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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 위험하리만큼 매혹적인
“안녕하세요, 김지희입니다.”
을씨년스럽게 비가 내리는 토요일 점심, 호텔 I 3층에 자리한 카페에는 오늘도 역시 맞선을 보는 남녀가 마주하고 있었다.
“사진보다 미인이시네요. 이장겸입니다.”
어머, 눈부셔라!
해가 먹구름에 가려 하늘은 회색빛인데, 눈앞이 부시다.
흔히들 머리가 벗겨진 사람을 놀릴 때 눈이 부시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앞에 있는 남자가 의자에 앉으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반질반질한 정수리에 카페 조명이 반사되면서 순간 몹시 눈이 부셨다.
앞머리 숱은 많은데, 안타깝게도…….
여자는 저보다 늦게 착석한 남자를 덤덤한 미소를 지은 채로 바라봤다.
“제가 좀 늦었습니까?”
남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한숨을 훅훅 내쉬며 물었다.
“괜찮아요.”
여자는 조금 더 입꼬리를 올려 싱긋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지만, 평소 같았으면 시간 약속도 제대로 못 지키는 사람은 기본조차 안 되어 있는 거라며 잔소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이 자리는 참하고, 아리따운 맞선 상대 ‘김지희’가 되어야 하는 자리다.
“어우, 시발. 차가 드럽게 막히더라고요. 아니 그리고 뭔 놈의 호텔이 이렇게 복잡해? 여기요! 아이스아메리카노 둘!”
쌍욕으로 말문을 연 남자가 대뜸 지나가는 직원을 붙들고 커피 둘을 외쳤다.
저기요, 적어도 상대의 기호는 묻고 주문을 해야 하지 않아요?
“커피, 괜찮죠?”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남자는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커피는 원래 뜨거워야 제맛이기는 한데, 내가 오늘 속이 터져서 뜨거운 걸 못 마시겠네.”
저기요, 나는 지금 추워!
늦가을에 들어선 날씨가 서늘했다. 실내 온도는 적정한 수준이었지만, 추위를 많이 타는 여자의 손끝은 차가웠다. 그런데 여전히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는 남자에게 따뜻한 커피로 바꾸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우락부락한 주먹을 테이블 위에서 쥐었다 폈다 하며 남자가 욕지거리를 해 댔다.
“아니, 시발. 비는 왜 처오고 지랄이야. 그러니까 길이 막히지.”
어쩌고저쩌고. 기본적으로 화가 많은 남자인가 보다.
그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비가 왔고, 화가 났고, 차가 많았고, 화가 났고, 그래서 늦었고, 화가 났고.
저기, 화는 제가 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이 자리에 앉아서 화 많은 맞선남을 한 시간가량 기다렸다. 늦으면 늦는다, 연락도 없고 퇴짜를 맞은 건지, 아닌 건지 몰라서 그냥 기다린 참이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 두 시간은 앉아 있어야 일당을 받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남자가 신이 나서 욕을 해 대는 동안 ―욕하는 게 신나 보이는 건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나왔다.
기다란 유리잔에서 신경질적으로 빨대를 뽑아 든 남자가,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얼음을 와그작 씹으며 말했다.
“안 그래요?”
방금 전까지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더라?
빗길에 운전하면 위험하다고 했고, 여자는 공간지각능력이 떨어진다고 했고, 그래서 여자는 빗길에 운전하면 더 위험한데, 웬 여자가 탄 수입차가 앞에서 알짱거려 짜증이 났다고 했고……. 결국 결론은 여자는 비 오는 날 운전하지 말라는 건가?
아니면 그 여자가 자신보다 비싼 차를 타서 화가 난 건가?
뭐라 대꾸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입을 열려는 순간, 남자가 더 빨랐다.
“아니, 내 뒤로 끼어들었으면 됐잖아. 시발. 재수 없게.”
한숨이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아서 얼른 빨대를 물었다. 남자는 원래부터 이쪽 의견을 들을 생각이 없었나 보다.
아니, 애초에 여자들이 하는 말은 들어 먹을 것 같지 않았다.
전형적인 ‘맨스플레인, 내가 말할 테니까 넌 듣기만 해.’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손목에 찬 시계를 슬쩍 보니, 맞선 대행 종료 시간까지 30분 남았다. 그래, 30분만 참으면 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서로 안 맞는 것 같다며 헤어지면 그만이다.
여전히 맞선남은 남자가 운전을 더 잘한다는 이상한 우월감에 빠져서 떠들어 대는 중이었다.
“그래서 내가 클랙슨을 존나 눌렀지.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 거예요. 근데 내가 또 운전을 잘하거든? 그래서 옆으로 휙 가서 그 차 앞으로 휙 끼어들었어.”
남자의 얼굴에 통쾌함이 서렸다. 그게 그렇게 신났어요? 다시 그 여자가 운전하는 수입차 앞으로 끼어든 게?
“그리고 내가 브레이크를 확 밟아 버렸지. 좀 놀란 것 같더라고.”
남자가 뽐내듯 말하며 껄껄 웃어 댔다.
그게 자랑이냐? 이런 종류의 진상은 또 처음이다.
위협, 난폭 운전과 같은 범법을 도로 위에서 저질러 놓고도 자랑스럽게 웃어 대는 꼴에 기가 막혔다.
이제 몇 분 남았나?
다시 시계를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일어나시죠, 유승현 씨.”
손목으로 향하던 시선이 테이블 위를 훑으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옮겨 갔다. 검은색 슈트를 입은 웬 남자의 기다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며칠 새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부드럽게 구불거리는 앞머리가 드리운 반듯한 이마, 자신만만함이 묻어나는 반짝거리는 검은 눈동자, 도도해 보이기까지 하는 날카로운 콧날과 고집스럽도록 선이 분명한 붉은 입술.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생긴 남자다.
덕분에 주변 테이블에 앉은 여자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승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여긴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야 하는데, 사고가 딱 멈춰 버리면서 말문도 턱 막혀 버렸다.
“이런 시발, 남자도 있으면서 선은 왜 보러 나와? 그리고 이름이 왜 유승현이야?”
맞선남이 입에 붙은 욕을 내뱉으며 씩씩거렸다. 안타깝게도 이제 수입차 운전자는 테이블 옆에 선 남자에게 욕받이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 같다.
아, 근데 그 시발은 그쪽 입이 아니라 이쪽 입에서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승현이라 불린 여자가 한숨을 폭 내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남의 영업장까지 쫓아오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냐?
승현은 눈을 내리깐 채로 생각을 더듬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모두가 윈-윈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오빠.”
천년의 오글거림을 참으며 승현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오빠라 부르는 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정수리가 쭈뼛 서고, 소름이 돋는 듯했다.
승현은 그동안 수만 가지 아르바이트를 경험하면서 쌓아 올린 연기력을 바닥부터 끄집어 올렸다.
“우리 이미 끝난 사이라고 했잖아. 왜 이렇게 질척거리는 건데?”
맞선남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거북하다는 듯 몸을 들썩거렸지만, 테이블 옆에 선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아.”
이제껏 잠자코 있던 남자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더니,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어 버렸다?
어라?
“내가 잘할게. 정말 내가 잘할게. 응?”
아, 모르겠다. 이제.
“나 오빠한테 거짓말했어. 사실은 나 유승현이 아니라 김지희야. 우리 집에서는 오빠 같은 남자, 허락 안 해 줄 거야. 흑.”
감정이 북받친 척 얼굴을 가리며 맞선남이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려 남자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가라고요!’
그러자 남자도 소리 없이 대꾸했다.
‘같이 나가죠?’
맞선 의뢰녀 김지희의 신상은 지켜 주고 자리를 떠야 한단 말입니다, 이 대책 없는 남자야!
온갖 눈치를 줬더니, 남자가 그제야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카페 안의 시선은 전부 이쪽 테이블에 쏠려 있었다.
“잘됐네요.”
이제껏 욕을 하며 씩씩거리던 맞선남이 갑자기 세상 쿨하게 입을 열었다.
“녜?”
승현이 맞선남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이장겸 씨 오늘 맞선 안 나왔어요.”
“녜?”
당황한 나머지 다시 되묻는 순간, 승현의 머릿속에 어떤 명제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니까 지금 이 맞선 자리는 프로 맞선 대타들의 맞선 아닌 맞선 자리였나 보다.
“식사도 했고, 차도 마셨지만, 서로 맞지 않아서, 애프터 약속은 하지 않은 거로 정리하죠. 원래 이장겸 씨 쪽에서 대타 보내면서 미안한 마음에 쓰레기 짓 하고 퇴짜 맞고 오라고 했는데. 뭐 피차.”
피차 쓰레기다, 이건가?
승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커피값은 각자 내는 거로 하고.”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맞선남은 아주 깔끔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대타 맞선남이 앉았던 자리에는 졸지에 ‘오빠’가 된 남자가 앉았다.
“이것도 일종의 아르바이트?”
남자는 깍지 낀 두 손을 테이블에 얹고는 그 위에 턱을 괴며 물었다. 잘생긴 얼굴을 효율적으로 잘 이용하는 남자인 듯하다.
갑작스레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 것 같아서 승현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대꾸했다.
“뭐, 말하자면?”
남자가 짧게 묻는 바람에 승현도 말이 짧아졌다.
“내가 제시한 조건은 생각해 봤어요?”
그가 기다란 눈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물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나, 동생 팔아서 팔자 펼 생각도 없고, 승재 그렇게 보낼 생각은 더더욱 없으니까.”
갑자기 가슴속이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손에 잡힐 듯 확고한 남자의 신념에 기가 눌리는 듯도 했다.
하지만 승현은 남자의 신념을 따를 수 없었다. 그러기엔 남자는 너무 위험해 보였다.
남자의 눈동자는 유난히도 짙은 검은색이었다. 심연처럼 깊은 남자의 눈동자가 품고 있는 탐욕에 동생을 내줄 수는 없었다.
그의 눈이 품은 기운이 거북스러워 승현은 자연스레 시선을 옮겨 갔다. 날카로운 콧날을 따라 유려하게 자리한 인중 그리고 선명하고 붉은 입술선과 도톰한 아랫입술까지.
남자는 검은 눈동자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위험하리만큼 매혹적이었다.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을 안겨 준다고 해서 전설의 마케터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마켓에 내놓아야 할 물건이 제 동생이라는 것.
물건 팔듯 시장에 내놓으려고 동생을 애지중지 키운 게 아니었다.
“누가 동생 팔라고 했나, 좋은 조건으로 모셔 간다고 했지?”
남자의 말투는 지나치게 나른해서 기지개를 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