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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내가 지킨다는 뜻이야





그가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미소에서는 가진 자 특유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분명 제안을 하는 쪽은 저쪽이고, 협상의 키를 가진 쪽은 이쪽인데 남자는 급할 게 없다는 듯이 느긋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아르바이트해서 동생 뒷바라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승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온 마음을 다해서 동생을 지원하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늘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생판 모르는 남한테 들으니 속이 좀 쓰렸다.

“그건 그쪽이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는 어깨가 들썩이도록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더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유승재 선수 지금 그 상태로 두기엔 아까워서 하는 말입니다.”

미소를 머금고 있다지만, 남자의 눈빛은 단호했다. 눈꺼풀조차 허투루 깜빡이지 않을 것처럼 강렬한 시선을 가진 남자였다.

“누님인 유승현 씨가 해 주지 못해서 안타까웠던 것들, 제가 다 챙겨 줄 수 있어요. 약속합니다.”

남자가 승현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 시선이 마치 승현의 작은 표정, 사소한 몸짓 하나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어쩐지 저 남자에게 가슴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두었던 감정까지 들켜 버린 것만 같은 착각마저 일어서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분명 대타 맞선남과 마주 앉아 있었을 때는 손끝이 차가울 정도로 한기를 느꼈었는데, 지금은 훅 하고 열기가 치솟았다.

안기고 싶다.

매혹적인 남자의 외모 때문에 욕망의 기저부에서 발현된 욕정이 아니었다.

남자, 여자를 떠나서 저런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기대고 싶다는 막연한 희원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사는 게 너무 고됐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동생이 커 가는 모습에 의지하며 살아왔다. 정확히 짚어 말하자면, 승현이 마음에 걸어 놓은 빗장을 풀고 비빌 언덕은 없었다는 의미다.

막연하게나마 이런 확고한 신념을 가진 남자가 비빌 언덕이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살갑게 다가와서는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이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고 안락한 지붕 아래를 내어 줄 것 같았던 사람들이 두 남매를 차디찬 세상으로 얼마나 매몰차게 내몰았었는지, 승현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여러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배웠다.

그래서 뺨이 달아오르고, 열기가 치솟았나 보다.

아이러니하게도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해야 할 것 같은 남자에게 기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그런 약속에 한두 번 속았던 거 아니거든요.”

말을 길게 섞을 필요가 없는데, 어쩐지 이 남자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치솟았다.

대체 왜?

그가 또다시 진한 미소를 짓는다.

왜 자꾸 웃어?

“왜 자꾸 웃어요?”

마음속에 담아 뒀던 말이 평소답지 않게 툭 튀어나왔다.

“그럼, 나랑 제발 계약해 달라고 울며 매달려요?”

남자의 물음에 승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남자가 장난기 어린 말투로 되물어서 순간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완벽주의자처럼 보이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매무새, 미소 지을 때조차 자로 잰 듯 근사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입술, 치밀하게 계산된 듯한 나른한 말투와 여유로운 태도가 단번에 반전하며 장난기를 머금자 가슴이 괜히 소란스러워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공연히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키를 가진 쪽은 이쪽인데, 저쪽이 더 여유로운 이유를 이제야 불현듯 깨달았다.

저 남자는 이런 협상 테이블을 수없이 경험한 프로고, 승현은 기껏해야 아르바이트 시급이나 조절하던 협상 아마추어였다.

그러니 저 남자가 여유 만만할 수밖에.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EPL(English Premier League) 구단 중 한 곳과 입단 테스트를 하게 될 겁니다.”

어릴 적부터 축구 선수로 뛰고 있는 동생 승재는 이제 고3이다. 안타깝게도 내로라하는 대학의 러브콜도 없고, K리그 진출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EPL을 들먹이고 있다?

너무 터무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EPL이 뭔지 모르고 하는 소리는 아니죠? 에이전트 맞아요?”

남자가 처음 승현을 찾아온 것은 며칠 전이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불쑥 나타나 명함을 주고는 승재를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또 찾아오겠다는 말을 하는 남자에게서 명함을 받아 들고 집으로 간 승현은 인터넷에 남자의 이름 석 자를 쳐 보았다.



메이저리그 구단,

한지윤을 악마로 칭한다



올해도 프로 야구 이적 시장을 혼란에 빠뜨린 단 한 명의 에이전트



다저스 감독, 에이전트 한 맹비난




그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구단에서 바라보는 그는 추악한 사기꾼에 가까웠다.

또 그를 전설적인 마케터로 설명하는 기사들의 이면에는, 에이전트 한지윤이 선수를 물건 다루듯 한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정보를 종합해 보면 그는 구단에서 구단으로 선수를 비싼 값에 사고파는 장사꾼이었다. 그리고 장사꾼의 손에 동생의 인생을 내맡길 수는 없다는 게 승현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지만 이유는 들어 봐야지 싶었다. 왜 이 남자가 승재와 계약을 원하는 건지.

“왜 굳이 우리 승재하고 계약을 하고 싶다는 건데요?”

“최고의 자리에 올려놨을 때,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이는 선수는 어떤 선수일까요?”

남자의 물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의 의도가 너무도 분명해 보여서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지금 제일 밑바닥에 있는 선수죠. 유승재 선수는…….”

승현은 아주 잠시나마 남자에게 기대면 어떨까, 하고 상상했던 자신이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더 들을 필요도 없을 것 같네요. 그럼.”

지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여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성격 참 급하네.”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둔 지윤은 아까부터 주머니 속에서 끊임없이 울리고 있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발신 번호를 보니 사무실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유승재의 누나인 유승현을 쫓아다니고 있는 대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비서실장인 듯했다.

“네.”

지윤이 짧게 응대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빠른 속도로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대표님, 계속 전화 안 받으시면 어떡해요. 지금 최 선수 아버님 다치셨다고 연락 와서 비상이에요!

“병원이 어딘데?”

― 대표님 누님 계셨던 병원으로 가시라고 했어요.

“잘했어. 그쪽으로 바로 움직인다.”

내내 마이너리그 생활을 하다가 올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빛을 보기 시작한 타자의 부친이 쓰러졌다는 전화에 지윤은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고, 우리 한 대표 왔네.”

보호자 대기실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던 최 선수의 모친이 신발도 신지 못한 채로 달려와 지윤의 손을 맞잡았다.

“어머니, 아버지 괜찮으실 거래요. 제가 오면서 누나랑 통화했는데요, 지금 수술 집도하시는 의사 선생님이 예전에 저희 누나 교수님이셨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최고래요.”

지윤은 살갑게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며 최 선수의 모친을 다독였다.

“누나가 그 여자 축구 국가 대표 팀, 그 의사 맞지?”

“네, 팀 닥터요. 누나가 나중에 와서 재활하는 법이랑 그 외 주의 사항들 설명해 드린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어머니, 안심하세요. 한혜윤 박사, 진짜 똑똑한 거 아시죠?”

“그럼, 그럼. 알지. 한혜윤 박사 똑똑한 것도 알고, 우리 한 대표 듬직한 것도 알고……. 우리 최 선수한테는 말 안 했지?”

지윤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내가 진짜 우리 한 대표 믿고 산다.”

최 선수의 모친이 오른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도 가족 일 아예 모르고 지나면 서운해요. 수술 잘 끝나고 나면, 최 선수한테도 꼭 말씀하셔야 해요. 너무 늦게 말하면, 아들 도리 못 했다고 속앓이할 거예요.”

“우리 한 대표가 적당한 때에 말해 줄텨?”

최 선수의 모친은 차마 자신이 입을 떼기는 어렵다며 지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타향살이하는 아들놈이 힘들게 벌어 온 돈을 어떻게 쓰냐고 고집을 부리면서 나가더니만.”

가족 중 하나가 갑자기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벌어 오면 나머지 구성원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 한 명에게 기대고, 모든 것을 바란다.

하지만 최 선수의 부모는 달랐다. 아니, 지윤이 맡은 선수들의 가족들은 모두 달랐다. 선수가 벌어 온 물질적인 풍요에 한없이 기대고, 더 많이 바라며 괴롭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에이전트는 선수가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도 에이전트의 몫이다.

그래서 지윤은 선수를 택할 때, 선수의 가족도 유심히 살폈다. 선수가 크게 자라는 데는 가족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기도 했지만, 선수를 무참히 짓밟고 망칠 수 있는 것 또한 그들이기 때문이었다.

또 가족을 보면 선수의 가능성을 더 깊이 있게 살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유승재, 유승현 그 남매에게 끌렸는지도 모른다.

유승현, 그녀는 좀 더 특별해 보였으니까.

지윤에게서 대답이 없자, 최 선수의 모친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윤을 올려다보았다.

“아이고, 어머니. 그럼 그거 제가 말해야지, 어머니가 말씀하시려구?”

그제야 최 선수의 모친이 한숨을 폭 내쉬며 안도했다.

“우리 한 대표 이렇게 건실하고 착한데, 며느리는 언제 보나?”

지윤이 장난스럽게 최 선수 모친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엄마는, 우리 최 선수부터 장가보내고, 가야지.”

“그 신문 기사에서 한 대표 욕하는 거 신경도 쓰지 말어. 그것들이 뭘 안다고 지껄여, 지껄이길. 선수 개떡같이 아는 구단에 힘써 주고 그러는 건 우리 한 대표밖에 없는데.”

지윤은 그저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구단 대리인이 아닌 선수 대리인 입장인 에이전트는 철저히 선수를 위해 움직인다. 그러니 당연히 구단에서는 에이전트를 곱게 볼 리 없고, 선수 한 사람이 내놓는 좋은 평보다는 구단 입장에서 내놓는 기사에 공격을 받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게요. 나를 왜 그렇게들 두들겨 팬대.”

“맞고 다니지 말어. 엄마 속상해.”

다행스럽게도 최 선수 부친의 골절 접합 수술은 무사히 끝이 났고, 지윤은 최 선수의 부모를 안심시킨 뒤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병원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오른 지윤은 곧장 S고등학교 앞으로 향했다. 호텔 카페에서 보았던 차림새 그대로, 고등학교 교문 앞에 서서 동생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담한 몸을 앞뒤로 흔들 때마다 연분홍색 원피스가 하늘거렸다. 마치 작은 새가 종종거리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지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