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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늑대의 사랑법
1화
PR 1. 늑대, 사랑을 찾다
신영은 공허한 눈으로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 속에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영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들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어가는 뭇 연인들이었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으로 보이는 한 커플이 어색하게 손을 잡고선 그가 앉아 있던 카페 앞을 지나갔고, 이어 앞선 커플보다 자연스러운 포즈의 연인들이 뒤를 따랐다. 각기 눈빛, 행동은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두 연인 모두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는 점이다. 꼭, 고목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를 연상케 하는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며 신영은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다.
현재 그가 기다리고 있는 상대들은 다름 아닌, 얼마 전 결혼을 한 그의 동생 부부였다.
―할 말이 있으니까, 회사 앞 카페로 내려와.
점심시간이 되어 갈 무렵 걸려 온 동생 규영의 전화는 어딘가 모르게 강압적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쁘다.’라고 대답하며 끊었을 신영이었지만 근래 동생의 집에서 신세를 진 것도 있어서 굳이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희수도 함께 갈 거니까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
게다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제수도 함께 온다니 뭐, 한 번쯤 너그러운 마음을 품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신영은 제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린 규영의 전화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규영이 말했던 약속 시간이 되자마자 회사 앞 카페로 내려왔다.
‘늦어.’
그러나 약속 시간인 12시를 넘긴 후 1분, 2분, 3분…… 그리고 5분이 지나자, 신영은 저도 모르게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본디, 차신영이라는 남자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연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시간 낭비’에 가까웠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하고 생각하던 신영은 그가 막 테이블 위에 놓아 둔 핸드폰으로 손을 뻗으려 할 때 들려온 ‘아주버님!’이란 소리에 반사적으로 행동을 멈추었다.
“하아, 하아…… 아주버님!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
스윽 고개를 돌린 신영의 눈에, 활짝 웃고 있는 귀염상의 아가씨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와 똑 닮은 남자가 들어왔다.
신영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신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헤헤 웃는 자신의 제수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 줬다.
“어서 오세요, 제수씨.”
신영이 뒤를 돌아보자마자 보인 여자에게 웃음을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반가움의 의사표시일 뿐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의 눈에 들어온 여자는 다름 아닌 그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사랑하는 여자였으며 차씨 집안의 귀염둥이로 자리 잡은 그의 제수였으니까.
“뭐야, 그 눈웃음은? 얼른 안 거둬? 희수가 오해하잖…… 야, 윤희수. 내가 그렇게 해실거리지 말랬지! 넌 왜 형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려!”
그랬기에 신영의 눈웃음을 지적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신영을 멍하니 바라보는 희수에게까지 타박을 하기 시작하는 규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래 이렇게 소유욕이 강한 녀석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신영은 자신을 바라보는 제수의 눈을 가리고 그녀에게 무어라 쫑알거리고 있는 동생을 직시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끙끙거리며 제 눈에서 규영의 손을 떼어 낸 희수는 히잉, 하고 입술을 삐죽거리다 규영에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아, 그게 아니라……. 아주버님이…… 워낙, 멋지시니까.”
“내가 더 멋지잖아!”
“무, 물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아주버님은…….”
“아주버님은 뭐!”
“음…… 흑! 아, 아주버니임…….”
“그만하고 앉아.”
신영은 제게 도움을 요하는 것이 분명한 눈빛을 쏘아 대는 희수의 요청을 접수하곤 눈을 가늘게 뜨며 희수를 노려보고 있는 규영에게 말했다. 규영은 신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 앉는 희수와 신영을 번갈아 쳐다보다 한숨을 푹 내쉬며 그들을 따라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신영을 응시했다.
“하여간, 안에서건 밖에서건 형 때문에 내가 미쳐 버리겠어.”
신영은 규영의 투덜거림을 듣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뭐? 왜 그러는지 몰라?”
“응?”
“제길!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도 아직까지 모르고 있는 거야?”
뜬금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신영은 도통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아 규영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규영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희수를 흘깃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내가 오늘 형을 만나자 했던 건, 형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야.”
버럭 화를 낼 것 같다가 돌연 마음을 가라앉히곤 그를 똑바로 쳐다보는 규영의 말에 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 봐.”
대체 어떤 말을 하려고 제수까지 데리고 찾아온 건지 궁금했던 터라 신영은 규영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규영은 담담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신영에게 속으로만 생각했던 말을 꺼내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 한…… 달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뭐가?”
신영이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벌떡 일어난 규영은 침을 튀겨 가며 소리를 내질렀다.
“뭐긴 뭐야! 사람이 그렇게 눈치를 줬으면 좀 알아채야지! 어떻게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 집에서 한 달 동안 멋대로 머무를 수가 있어!”
……어?
“오늘부터, 우리 집에 들어올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마! 알았어? 그 말 하려고 형 만나자고 한 거야! 윤희수! 이제 일어나!”
“네?”
“형이랑 얘기 다 끝났으니까 일어나라고!”
“아, 넵!”
신영이 얼빠진 얼굴로 앉아 있는 사이, 신영을 만나면 하리라 생각했던 마음속의 말을 모두 쏟아 낸 규영은 방금 전 도착한 아이스 카페라떼를 마시고 있는 희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쨌든 난 분명히 말했어. 이제부터 내가 허락할 때까진 절대로 우리 집에 찾아오지 마! 와도 문 안 열어 줄 거야! 아니, 오늘부터 여행갈 거니까 와도 우리 없을 거라고!”
아.
“가자, 윤희수!”
“아주버님, 저 갈…… 윽!”
규영의 손에 잡혀 질질 끌려가면서도 신영에 대한 인사를 잊지 않던 희수는 짧은 탄성 소리와 함께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신영은 난데없이 찾아와 ‘우리 집에 오지 마!’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 남동생을 떠올리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아아.”
무료한 그의 삶에 한 줄기 빛이나 다름없었던 ‘동생 집 방문하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 * *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별한 성적 취향을 가진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자의 ‘여’자도 쳐다보지 않던 규영이 어느 날 갑자기 같은 학교에 다니는 귀여운 아가씨와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땐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짜식, 다행히도 고자는 아니군.’
여자기피증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병에 걸려 뜻하지 않게 순결을 지켜 온 동생이 이미 사고까지 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 동생은 지난 28년 동안 여자와 살갗만 스쳐도 소스라치게 놀라던 과거를 멋지게 떨쳐 내곤 귀여운 아가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로, 1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달라졌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변한 건 희수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신영은 확신했다. 어찌나 변했는지, 제 신부의 곁에서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머리도 그런 거머리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더 기함할 일은, 항상 말을 건네면 ‘응’, ‘그래’ 등의 짧은 대답을 내뱉던 동생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사랑에 대해 충고를 늘어놓을 정도로 변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사랑은 좋은 거야.’
‘사랑은 위대해.’
‘사랑하면 행복해져.’
세상 모든 여자를 제 발톱의 때만도 못한 듯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동생은, 단 한 사람뿐이지만, 자신의 부인을 향해 닭털이 폴폴 날리는 사랑스런 눈빛을 쏘아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신영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동생 규영.
냉혈한이라 불리는 자신과 다를 바 없는 규영이 저리도 행복하게 웃는 모습은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일이 끝나자마자 규영의 신혼집에 들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삭막하기만 한 인생에 한 줄기의 빛을 쬐어 주기 위해.
넘치는 규영의 행복 기운을 좀 나눠 가지기 위해.
심심한 그의 삶에 활력을 넣어주기 위해…….
‘형! 어쩐 일이야?’
처음 동생 부부의 집에 들렀을 때, 규영은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형? 아, 밥 먹으러 왔구나.’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신영이 형?’
또 하루가 지나고,
‘희수야, 나 왔…… 아, 혀, 형이구나.’
일주일이 지나고,
‘또…… 왔어?’
그렇게 이 주가 지나고,
‘역시, 오늘도 왔군.’
삼 주가 지나고,
‘제길! 또 온 거야? 이제 그만 올 때도 되지 않았어!’
그리고 한 달이 지나자 규영은 신영을 점점 달갑게 여기지 않기 시작했다.
퇴근을 하자마자 제집도 아닌, 동생의 신혼집에 들러 저녁 늦게까지 놀다 가는 신영으로 인해 신혼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부부 관계도 제대로 맺을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자 속으로 참을 인(忍) 자를 써 내려가던 규영은 끝내 폭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 찾아올 시간에 형의 사랑이나 찾으란 말이야!’
진심을 가득 담은 규영의 외침에 신영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의 기운을 빼앗아 많은 업무로 인해 피폐해진 마음을 가꾸려 했더니, 타인의 사랑 기운을 빼앗지 말고 스스로 사랑을 하란다.
‘사랑?’
불과 몇 달 사이에 저와 별반 다를 바 없던 규영을 변모시켜 놓은 그 ‘사랑’을 자신도 할 수 있을까?
서른둘이 되도록 규영처럼 불타오르는 열렬한 사랑 따위는 한 적이 없던 그는 과연 자신 역시 규영과 같은, 서로 죽고 못 사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한번…… 해 볼까.’
그래서 신영은 쏟아지는 많은 업무로 인해 잠시 접어 두었던 연애 사업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PR 2. 사랑 참 어렵다
얼굴 되고, 집안 되고, 능력 되는 차신영을 따르는 여자들은 매우 많았다. 규영처럼 여자들을 꺼려하지도 않았기에 그만의 사랑 찾기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사랑을 하면 달라지겠지. 바람 한 점 없는 모래사막처럼 황량한 자신의 마음에 변화가 일길 바라며 신영은 그동안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하늘 높이 쌓아 두었던 벽을 과감하게 부숴 버렸다.
“신영 씨.”
도심의 한 고급 레스토랑.
주로 거래처 사장들을 접대하기 위해 찾아오던 이 레스토랑에, ‘비싼’ 스테이크를 좋아하는 ‘그녀’를 데리고 온 신영은 훌륭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즐기던 도중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음성을 들었다.
“응?”
‘그녀’는 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부로 만난 지 정확히 2주일째가 되는 신영의 ‘그녀’, 소라는 오늘도 어김없이 한껏 치장한 채로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몸매면 몸매, 외모면 외모. 물론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지식이 많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백치미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상대였다. 여태껏 신영이 만나 왔던 여성들 중에서 지속적인 만남을 가져도 좋다고 여길 정도였으니까.
그런 소라는 왠지 모르지만, 무언가 화가 난 듯했다.
‘왜 저러지?’
신영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소라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신영 씨 말이야. 신영 씨는…… 나랑 만나면 무슨 생각을 해?”
한참 동안 망설이던 그녀가 포크로 아이스크림이 담긴 잔을 톡톡 두드리며 묻는 말에 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게 왜 궁금하지?”
“그냥. 신영 씨 생각을 알고 싶어서. 솔직히 말해 줬음 좋겠어.”
솔직히? 진실을 요구하는 그녀의 물음에 그는 잠시 고민하다 거짓 없이 대답했다.
“별생각 안 해.”
“안 해? 그래도. 그래도 생각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신영은 소라의 추궁에 골똘히 생각하다 소리를 내뱉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일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는지 떠올리는 정도랄까.”
“…….”
“왜?”
탁!
“나, 갈래.”
……어?
소라가 원하는 대로 말을 해 주었을 뿐인데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핸드백을 집어 드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조금 당황했다. 소라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신영을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잔뜩 화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차신영.”
망할.
낮고 서늘한 그녀의 음성을 듣자마자 신영은 소라가 무슨 말을 내뱉을지 감을 잡아 버렸다.
‘헤어져.’
라고, 말할 테지.
어쩐지 몇 번 겪었던 과거가 눈앞을 스쳤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소라는 한숨을 내쉬기 직전인 신영을 향해 말했다.
“우리, 헤어져.”
그의 예상과 100% 들어맞는 그녀의 다음 말은 아마도,
‘차신영, 넌 내가 물로 보여?’
일 것이다.
“신영 씬 내가 길가에 있는 나무처럼 보여?”
아아, 틀렸네.
신영은 자신이 생각한 단어와 차이가 있는 단어를 뱉어 내는 소라의 말에 속으로 탄식을 터뜨렸다. 소라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신영은 다음 말을 떠올려 보았다.
‘난 당신의 들러리가 아니야.’
“난, 신영 씨의 들러리가 아니야.”
‘아무래도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운명의 남자가 아닌 것 같아.’
“신영 씨는 어떨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신영 씬…… 내가 계속 만나고 싶어 했던 운명적인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당신같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신영 씨처럼 무심한 남자에게…… 내 미래를 맡길 수 없어.”
‘미안하지만, 우리는 여기까진 것 같아.’
“안타깝지만, 우린…… 여기까진 것 같네.”
‘잘 지내. 바보 같은 남자.’
“안녕. 사랑을 모르는 남자.”
적중률 99%.
제 예상과 거의 빗나가지 않는 소라의 말이 무서울 정도로 신기할 지경이다.
신영은 제가 할 말을 모두 끝내고 가는 소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를 잡을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피곤하네.’
길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소라와의 지난 2주간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신영은 후우, 하고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규영에게서 그만의 사랑을 찾으라는 이야기를 들은 지 벌써 반년이 흘렀지만, 반년 동안 만나 왔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만 내뱉었다.
‘신영 씨, 우리 헤어져요.’
‘자기, 그렇게 안 봤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이제 우리 만나지 마요.’
‘그만 만나고 싶어요.’
그가 애인을 구한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육탄전을 방불케 하며 먼저 달려들던 그녀들은 신영과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를 향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그 이유도 대부분 비슷했다.
‘신영 씬 가늠하기가 어려워요. 대체 나랑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당신은 사랑을 잘 모르는 사람 같아.’
‘전 저만 바라봐 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신영 씬 날 사랑하는 게 맞나요?’
‘정말 연애해 본 사람 맞아요? 왜 이렇게 여자 맘을 몰라?’
각자 다른 단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가 지루하고 속마음을 알 수 없다’란 유사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녀들은 떠나갔다.
사랑.
그놈의 사랑을 찾기 위해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여자들과 헛된 시간을 보내 가며 부단히 애썼건만 소득은커녕 마음의 상처만 잔뜩 입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규영처럼 여자기피증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닌데 여자들과 더 이상의 관계를 맺기가 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큰일이군.’
차신영은 탄탄대로를 걸어오던 제 인생에 크나큰 위기가 닥쳤음을 직감했다. 이러다간 평생 홀로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그를 덮쳐 왔다. 규영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사랑을 찾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겐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랑유전자’가 결핍된 듯했다.
지이잉―
한동안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데이트 상대가 떠나가 버린 테이블 앞에 멍하니 앉아 있던 신영은 재킷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의 울림에 상념의 늪에서 벗어났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신영의 비서에게서 온 스케줄에 대한 메시지였다.
[이사님. 금일 오후 8시, K호텔 지하 1층 바에서 사립 XX 고등학교 제38회 졸업생 동창회가 있으십니다. 지금쯤 알려 달라 말씀하셔서 문자 보냅니다. 그럼, 즐거운 저녁 보내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약간 딱딱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문자는 반년 전, 그가 새로이 맞은 비서 승지에게서 온 문자였다. 신영은 그녀가 보낸 문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손목시계를 흘깃거렸다.
현재 시각 오후 7시 10분.
지금 신영이 있는 레스토랑과 그의 고등학교 동창회가 열린다는 K호텔까지는 30분 거리.
소라와의 데이트가 길어진다면 굳이 동창회로 갈 이유가 없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이사실을 빠져나오기 전 승지에게 부탁했던 것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심심하기도 하니까.’
규영의 집에 놀러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혼자 술을 마시는 청승맞은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담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신영은 잠시 머리를 굴리며 생각을 하다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K호텔로 향하기 위해 발을 떼려던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소라의 빈자리를 흘깃거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놈의 사랑…… 참 어렵군.”
워낙 순탄하게 살아와 세상 모든 일이 만만한 줄 알았더니 유독 한 가지만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신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화
PR 1. 늑대, 사랑을 찾다
신영은 공허한 눈으로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 속에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영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들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어가는 뭇 연인들이었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으로 보이는 한 커플이 어색하게 손을 잡고선 그가 앉아 있던 카페 앞을 지나갔고, 이어 앞선 커플보다 자연스러운 포즈의 연인들이 뒤를 따랐다. 각기 눈빛, 행동은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두 연인 모두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는 점이다. 꼭, 고목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를 연상케 하는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며 신영은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다.
현재 그가 기다리고 있는 상대들은 다름 아닌, 얼마 전 결혼을 한 그의 동생 부부였다.
―할 말이 있으니까, 회사 앞 카페로 내려와.
점심시간이 되어 갈 무렵 걸려 온 동생 규영의 전화는 어딘가 모르게 강압적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쁘다.’라고 대답하며 끊었을 신영이었지만 근래 동생의 집에서 신세를 진 것도 있어서 굳이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희수도 함께 갈 거니까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
게다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제수도 함께 온다니 뭐, 한 번쯤 너그러운 마음을 품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신영은 제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린 규영의 전화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규영이 말했던 약속 시간이 되자마자 회사 앞 카페로 내려왔다.
‘늦어.’
그러나 약속 시간인 12시를 넘긴 후 1분, 2분, 3분…… 그리고 5분이 지나자, 신영은 저도 모르게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본디, 차신영이라는 남자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연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시간 낭비’에 가까웠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하고 생각하던 신영은 그가 막 테이블 위에 놓아 둔 핸드폰으로 손을 뻗으려 할 때 들려온 ‘아주버님!’이란 소리에 반사적으로 행동을 멈추었다.
“하아, 하아…… 아주버님!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
스윽 고개를 돌린 신영의 눈에, 활짝 웃고 있는 귀염상의 아가씨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와 똑 닮은 남자가 들어왔다.
신영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신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헤헤 웃는 자신의 제수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 줬다.
“어서 오세요, 제수씨.”
신영이 뒤를 돌아보자마자 보인 여자에게 웃음을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반가움의 의사표시일 뿐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의 눈에 들어온 여자는 다름 아닌 그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사랑하는 여자였으며 차씨 집안의 귀염둥이로 자리 잡은 그의 제수였으니까.
“뭐야, 그 눈웃음은? 얼른 안 거둬? 희수가 오해하잖…… 야, 윤희수. 내가 그렇게 해실거리지 말랬지! 넌 왜 형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려!”
그랬기에 신영의 눈웃음을 지적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신영을 멍하니 바라보는 희수에게까지 타박을 하기 시작하는 규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래 이렇게 소유욕이 강한 녀석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신영은 자신을 바라보는 제수의 눈을 가리고 그녀에게 무어라 쫑알거리고 있는 동생을 직시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끙끙거리며 제 눈에서 규영의 손을 떼어 낸 희수는 히잉, 하고 입술을 삐죽거리다 규영에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아, 그게 아니라……. 아주버님이…… 워낙, 멋지시니까.”
“내가 더 멋지잖아!”
“무, 물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아주버님은…….”
“아주버님은 뭐!”
“음…… 흑! 아, 아주버니임…….”
“그만하고 앉아.”
신영은 제게 도움을 요하는 것이 분명한 눈빛을 쏘아 대는 희수의 요청을 접수하곤 눈을 가늘게 뜨며 희수를 노려보고 있는 규영에게 말했다. 규영은 신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 앉는 희수와 신영을 번갈아 쳐다보다 한숨을 푹 내쉬며 그들을 따라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신영을 응시했다.
“하여간, 안에서건 밖에서건 형 때문에 내가 미쳐 버리겠어.”
신영은 규영의 투덜거림을 듣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뭐? 왜 그러는지 몰라?”
“응?”
“제길!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도 아직까지 모르고 있는 거야?”
뜬금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신영은 도통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아 규영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규영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희수를 흘깃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내가 오늘 형을 만나자 했던 건, 형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야.”
버럭 화를 낼 것 같다가 돌연 마음을 가라앉히곤 그를 똑바로 쳐다보는 규영의 말에 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 봐.”
대체 어떤 말을 하려고 제수까지 데리고 찾아온 건지 궁금했던 터라 신영은 규영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규영은 담담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신영에게 속으로만 생각했던 말을 꺼내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 한…… 달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뭐가?”
신영이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벌떡 일어난 규영은 침을 튀겨 가며 소리를 내질렀다.
“뭐긴 뭐야! 사람이 그렇게 눈치를 줬으면 좀 알아채야지! 어떻게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 집에서 한 달 동안 멋대로 머무를 수가 있어!”
……어?
“오늘부터, 우리 집에 들어올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마! 알았어? 그 말 하려고 형 만나자고 한 거야! 윤희수! 이제 일어나!”
“네?”
“형이랑 얘기 다 끝났으니까 일어나라고!”
“아, 넵!”
신영이 얼빠진 얼굴로 앉아 있는 사이, 신영을 만나면 하리라 생각했던 마음속의 말을 모두 쏟아 낸 규영은 방금 전 도착한 아이스 카페라떼를 마시고 있는 희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쨌든 난 분명히 말했어. 이제부터 내가 허락할 때까진 절대로 우리 집에 찾아오지 마! 와도 문 안 열어 줄 거야! 아니, 오늘부터 여행갈 거니까 와도 우리 없을 거라고!”
아.
“가자, 윤희수!”
“아주버님, 저 갈…… 윽!”
규영의 손에 잡혀 질질 끌려가면서도 신영에 대한 인사를 잊지 않던 희수는 짧은 탄성 소리와 함께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신영은 난데없이 찾아와 ‘우리 집에 오지 마!’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 남동생을 떠올리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아아.”
무료한 그의 삶에 한 줄기 빛이나 다름없었던 ‘동생 집 방문하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 * *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별한 성적 취향을 가진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자의 ‘여’자도 쳐다보지 않던 규영이 어느 날 갑자기 같은 학교에 다니는 귀여운 아가씨와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땐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짜식, 다행히도 고자는 아니군.’
여자기피증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병에 걸려 뜻하지 않게 순결을 지켜 온 동생이 이미 사고까지 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 동생은 지난 28년 동안 여자와 살갗만 스쳐도 소스라치게 놀라던 과거를 멋지게 떨쳐 내곤 귀여운 아가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로, 1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달라졌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변한 건 희수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신영은 확신했다. 어찌나 변했는지, 제 신부의 곁에서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머리도 그런 거머리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더 기함할 일은, 항상 말을 건네면 ‘응’, ‘그래’ 등의 짧은 대답을 내뱉던 동생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사랑에 대해 충고를 늘어놓을 정도로 변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사랑은 좋은 거야.’
‘사랑은 위대해.’
‘사랑하면 행복해져.’
세상 모든 여자를 제 발톱의 때만도 못한 듯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동생은, 단 한 사람뿐이지만, 자신의 부인을 향해 닭털이 폴폴 날리는 사랑스런 눈빛을 쏘아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신영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동생 규영.
냉혈한이라 불리는 자신과 다를 바 없는 규영이 저리도 행복하게 웃는 모습은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일이 끝나자마자 규영의 신혼집에 들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삭막하기만 한 인생에 한 줄기의 빛을 쬐어 주기 위해.
넘치는 규영의 행복 기운을 좀 나눠 가지기 위해.
심심한 그의 삶에 활력을 넣어주기 위해…….
‘형! 어쩐 일이야?’
처음 동생 부부의 집에 들렀을 때, 규영은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형? 아, 밥 먹으러 왔구나.’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신영이 형?’
또 하루가 지나고,
‘희수야, 나 왔…… 아, 혀, 형이구나.’
일주일이 지나고,
‘또…… 왔어?’
그렇게 이 주가 지나고,
‘역시, 오늘도 왔군.’
삼 주가 지나고,
‘제길! 또 온 거야? 이제 그만 올 때도 되지 않았어!’
그리고 한 달이 지나자 규영은 신영을 점점 달갑게 여기지 않기 시작했다.
퇴근을 하자마자 제집도 아닌, 동생의 신혼집에 들러 저녁 늦게까지 놀다 가는 신영으로 인해 신혼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부부 관계도 제대로 맺을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자 속으로 참을 인(忍) 자를 써 내려가던 규영은 끝내 폭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 찾아올 시간에 형의 사랑이나 찾으란 말이야!’
진심을 가득 담은 규영의 외침에 신영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의 기운을 빼앗아 많은 업무로 인해 피폐해진 마음을 가꾸려 했더니, 타인의 사랑 기운을 빼앗지 말고 스스로 사랑을 하란다.
‘사랑?’
불과 몇 달 사이에 저와 별반 다를 바 없던 규영을 변모시켜 놓은 그 ‘사랑’을 자신도 할 수 있을까?
서른둘이 되도록 규영처럼 불타오르는 열렬한 사랑 따위는 한 적이 없던 그는 과연 자신 역시 규영과 같은, 서로 죽고 못 사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한번…… 해 볼까.’
그래서 신영은 쏟아지는 많은 업무로 인해 잠시 접어 두었던 연애 사업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PR 2. 사랑 참 어렵다
얼굴 되고, 집안 되고, 능력 되는 차신영을 따르는 여자들은 매우 많았다. 규영처럼 여자들을 꺼려하지도 않았기에 그만의 사랑 찾기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사랑을 하면 달라지겠지. 바람 한 점 없는 모래사막처럼 황량한 자신의 마음에 변화가 일길 바라며 신영은 그동안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하늘 높이 쌓아 두었던 벽을 과감하게 부숴 버렸다.
“신영 씨.”
도심의 한 고급 레스토랑.
주로 거래처 사장들을 접대하기 위해 찾아오던 이 레스토랑에, ‘비싼’ 스테이크를 좋아하는 ‘그녀’를 데리고 온 신영은 훌륭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즐기던 도중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음성을 들었다.
“응?”
‘그녀’는 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부로 만난 지 정확히 2주일째가 되는 신영의 ‘그녀’, 소라는 오늘도 어김없이 한껏 치장한 채로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몸매면 몸매, 외모면 외모. 물론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지식이 많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백치미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상대였다. 여태껏 신영이 만나 왔던 여성들 중에서 지속적인 만남을 가져도 좋다고 여길 정도였으니까.
그런 소라는 왠지 모르지만, 무언가 화가 난 듯했다.
‘왜 저러지?’
신영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소라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신영 씨 말이야. 신영 씨는…… 나랑 만나면 무슨 생각을 해?”
한참 동안 망설이던 그녀가 포크로 아이스크림이 담긴 잔을 톡톡 두드리며 묻는 말에 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게 왜 궁금하지?”
“그냥. 신영 씨 생각을 알고 싶어서. 솔직히 말해 줬음 좋겠어.”
솔직히? 진실을 요구하는 그녀의 물음에 그는 잠시 고민하다 거짓 없이 대답했다.
“별생각 안 해.”
“안 해? 그래도. 그래도 생각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신영은 소라의 추궁에 골똘히 생각하다 소리를 내뱉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일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는지 떠올리는 정도랄까.”
“…….”
“왜?”
탁!
“나, 갈래.”
……어?
소라가 원하는 대로 말을 해 주었을 뿐인데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핸드백을 집어 드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조금 당황했다. 소라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신영을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잔뜩 화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차신영.”
망할.
낮고 서늘한 그녀의 음성을 듣자마자 신영은 소라가 무슨 말을 내뱉을지 감을 잡아 버렸다.
‘헤어져.’
라고, 말할 테지.
어쩐지 몇 번 겪었던 과거가 눈앞을 스쳤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소라는 한숨을 내쉬기 직전인 신영을 향해 말했다.
“우리, 헤어져.”
그의 예상과 100% 들어맞는 그녀의 다음 말은 아마도,
‘차신영, 넌 내가 물로 보여?’
일 것이다.
“신영 씬 내가 길가에 있는 나무처럼 보여?”
아아, 틀렸네.
신영은 자신이 생각한 단어와 차이가 있는 단어를 뱉어 내는 소라의 말에 속으로 탄식을 터뜨렸다. 소라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신영은 다음 말을 떠올려 보았다.
‘난 당신의 들러리가 아니야.’
“난, 신영 씨의 들러리가 아니야.”
‘아무래도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운명의 남자가 아닌 것 같아.’
“신영 씨는 어떨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신영 씬…… 내가 계속 만나고 싶어 했던 운명적인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당신같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신영 씨처럼 무심한 남자에게…… 내 미래를 맡길 수 없어.”
‘미안하지만, 우리는 여기까진 것 같아.’
“안타깝지만, 우린…… 여기까진 것 같네.”
‘잘 지내. 바보 같은 남자.’
“안녕. 사랑을 모르는 남자.”
적중률 99%.
제 예상과 거의 빗나가지 않는 소라의 말이 무서울 정도로 신기할 지경이다.
신영은 제가 할 말을 모두 끝내고 가는 소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를 잡을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피곤하네.’
길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소라와의 지난 2주간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신영은 후우, 하고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규영에게서 그만의 사랑을 찾으라는 이야기를 들은 지 벌써 반년이 흘렀지만, 반년 동안 만나 왔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만 내뱉었다.
‘신영 씨, 우리 헤어져요.’
‘자기, 그렇게 안 봤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이제 우리 만나지 마요.’
‘그만 만나고 싶어요.’
그가 애인을 구한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육탄전을 방불케 하며 먼저 달려들던 그녀들은 신영과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를 향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그 이유도 대부분 비슷했다.
‘신영 씬 가늠하기가 어려워요. 대체 나랑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당신은 사랑을 잘 모르는 사람 같아.’
‘전 저만 바라봐 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신영 씬 날 사랑하는 게 맞나요?’
‘정말 연애해 본 사람 맞아요? 왜 이렇게 여자 맘을 몰라?’
각자 다른 단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가 지루하고 속마음을 알 수 없다’란 유사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녀들은 떠나갔다.
사랑.
그놈의 사랑을 찾기 위해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여자들과 헛된 시간을 보내 가며 부단히 애썼건만 소득은커녕 마음의 상처만 잔뜩 입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규영처럼 여자기피증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닌데 여자들과 더 이상의 관계를 맺기가 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큰일이군.’
차신영은 탄탄대로를 걸어오던 제 인생에 크나큰 위기가 닥쳤음을 직감했다. 이러다간 평생 홀로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그를 덮쳐 왔다. 규영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사랑을 찾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겐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랑유전자’가 결핍된 듯했다.
지이잉―
한동안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데이트 상대가 떠나가 버린 테이블 앞에 멍하니 앉아 있던 신영은 재킷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의 울림에 상념의 늪에서 벗어났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신영의 비서에게서 온 스케줄에 대한 메시지였다.
[이사님. 금일 오후 8시, K호텔 지하 1층 바에서 사립 XX 고등학교 제38회 졸업생 동창회가 있으십니다. 지금쯤 알려 달라 말씀하셔서 문자 보냅니다. 그럼, 즐거운 저녁 보내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약간 딱딱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문자는 반년 전, 그가 새로이 맞은 비서 승지에게서 온 문자였다. 신영은 그녀가 보낸 문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손목시계를 흘깃거렸다.
현재 시각 오후 7시 10분.
지금 신영이 있는 레스토랑과 그의 고등학교 동창회가 열린다는 K호텔까지는 30분 거리.
소라와의 데이트가 길어진다면 굳이 동창회로 갈 이유가 없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이사실을 빠져나오기 전 승지에게 부탁했던 것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심심하기도 하니까.’
규영의 집에 놀러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혼자 술을 마시는 청승맞은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담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신영은 잠시 머리를 굴리며 생각을 하다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K호텔로 향하기 위해 발을 떼려던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소라의 빈자리를 흘깃거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놈의 사랑…… 참 어렵군.”
워낙 순탄하게 살아와 세상 모든 일이 만만한 줄 알았더니 유독 한 가지만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신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