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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왕의 비서, 도승지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승지’라는 이름은 나아갈 승(陞)에 뜻 지(志)자를 사용하여 ‘뜻을 품고 나아가라.’라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후, 험난하다고 일컬어지는 사회로 첫 발을 내디딘 뒤론 원래 이름의 의미보다 널리 알려진 단어를 강조하곤 했다.
‘안녕하세요, 도승지라고 합니다! 유서 깊은 도씨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구요, 이름에 걸맞게 ‘왕의 비서’가 되고 싶어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채용만 해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각종 허드렛일과 전문적인 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뽑아 주세요!’
조선 시대 승정원(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던 관아)의 으뜸가는 벼슬에, 주로 하는 일은 왕명을 전달하거나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글을 상달하는 일을 맡아 보는, 도승지(都承旨).
간단히 말하자면, 일명 ‘왕의 비서’.
뜻은 다르더라도 음은 같았기에 어릴 적 사극 드라마가 방영되는 날은 학교에서 어김없이 놀림을 당했었던 그녀는 성인이 된 지금은 스스로 자신의 별명이자 이름을 강조하며 면접 자리에서 당당하게 외쳤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난 후, 잘나고 잘나신 세 명의 오라버니들의 수발을 들고 뒤치다꺼리를 하며 자라 왔던 터라, 자신의 천직이 다름 아닌 누군가를 보좌하는 ‘비서’라는 것을 진작 깨달은 그녀는 스물여덟이 되는 지금까지 결코 적지 않은 상관들을 모셨다.
그리고 반년 전, 업계에서 제일가는 패션 회사로 소문이 나 있는 R패션의 기획이사 비서실에 합류할 수 있었다. R패션 기획이사 차신영은 R패션 차정규 회장의 뒤를 이어 회장직을 이어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알려져 있는 남자였기에 그야말로 승지는 제 이름 그대로 ‘왕의 비서’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남부럽지 않은 직장 환경에, 빵빵한 연봉까지. 그야말로 ‘꿈의 직장’에 다니게 된 승지는 오늘도 충실하게 회사 일을 수행한 다음,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Rrrr. Rrrr.
샤워를 마치고 개운하게 시원한 물을 들이켜면서 다음엔 무엇을 할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던 승지는 제 방으로 들어서자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화 올 사람이 없는데? 그녀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두었던 핸드백을 만지작거렸다.
‘아.’
핸드백 속에서 정신없이 울려 대던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이 바로 자신의 셋째 오빠, 진겸이라는 것을 깨달은 승지는 전화를 받을까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승지야!
곤란하군.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귀찮은 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다. 승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심드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왜 이렇게 간절하게 불러.”
―하하, 그랬냐?
“…… 무슨 용건이야.”
―하여간 내 동생, 아주 귀신같아. 아하하하!
진겸이 이토록 애절한 음성을 뱉어 내는 것은 그녀에게 요구할 것이 있어서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승지는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자 연신 하하, 웃으며 의미 없는 웃음만 남발하던 그녀의 셋째 오빠는 머뭇거리다 말을 이어 나갔다.
―가족 좋다는 게 뭐냐. 서로 어려울 때, 돕고 살아야지. 그래야 우리 남매의 우애도 깊어지지 않겠어?
“오빠, 잔말 말고 용건을 말하라니까?”
―그래.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너,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 그럼 이 오빠의 부탁 좀 들어다오. 내가 내일 출장을 가야 하는데 깜빡 잊고 집에서 겉옷이랑 속옷을 넣어 둔 가방을 놔두고 왔지 뭐냐. 미안한데 그 가방 들고 내가 있는 곳으로 좀 와 주라.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하는 진겸의 부탁에 전화를 끊어 버릴까 생각했다. 요즘 들어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귀가를 시켜주는 자신의 상관 덕분에 이른 퇴근을 하여 여유로운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 여겼건만, 망할 세 오라버니들 중 승지의 속을 가장 태우는 셋째 오빠 진겸이 그녀의 귀한 여가 시간을 반납하게 만들려 하고 있었다.
“공짜로는 안 돼.”
‘승지야, 제바알!’을 외치며 그녀에게 코맹맹이 소리까지 내는 진겸의 음성을 가만히 듣던 승지는 골똘히 생각하다 말했다. ‘뭐?’ 하고 놀란 진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얼마 전에 우리 회사에서 새로 나온 신상품 있지? 그거 사 줘. 그럼 갈게.”
―얌마!
“싫음 말고.”
―제길!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디 ‘공짜’가 있겠는가. 소중한 그녀의 시간을 앗아 가는 대신 받을 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말에 진겸은 낮은 욕설을 뱉어 냈다. 오빠, 욕은 나쁜 거야. 승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진겸의 결정을 기다렸다.
―알겠어.
씩씩거리던 진겸은 자신이 열세에 있다는 걸 확인했는지 한숨과 함께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승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방은 책상 위에 있다.
“응. 어디로 가면 되는데?”
퇴근을 하고 나서 바로, 집에서만 입는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던 그녀는 진겸의 방으로 향하며 물음을 던졌다. 진겸은 재빨리 말했다.
―K호텔.
……뭐?
―로비에 있을 테니까 그곳으로 와. 30분 내로. 오케이?
아…….
―도승지. 왜 대답이 없어?
“…….”
―도승지!
“알…… 겠어. 곧 갈게.”
그녀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불러대는 진겸에게 겨우 답을 한 승지는 어느새 끊어져 버린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K호텔이라면…….’
퇴근을 하기 전, 승지가 자신의 상관에게 보냈던 문자의 그곳과 일치한다. 상의부터 하의까지, 초록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머리를 하늘을 향해 질근 묶은 상태였던 그녀는 ‘다시 씻어야 하나…….’라는 고민에 빠졌었지만 이내 고개를 휙휙 저으며 진겸의 방에 있던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삼선 슬리퍼 차림으로 현관을 지나던 그녀는,
‘설마 마주치기야 하겠어? 그 남자는 원래 그런 사적인 모임엔 잘 안 가잖아.’
라고, 안일하게 중얼거리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 *
“친히 동창회에 행차할 생각을 다 하다니. 너 정말 내가 알고 있던 ‘그’ 차신영 맞냐?”
영훈은 함께 K호텔 로비로 들어가고 있으면서도 신영이 곁에 서 있다는 지금 이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길래 친구들을 볼 생각을 다해? 저밖에 모르는 매정한 놈이.”
“매정한 놈이라니.”
“맞잖아, 일 때문에 친구도 안 만나 주는 천하의 매정한 놈. 그런데 진짜 어쩐 일로 온 거야?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었어?”
왠지 거슬리는 영훈의 말을 지적할까 고민하며 고운 눈썹을 꿈틀거리던 신영은 이어 들리는 그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사람들 좀 만나 볼까 하고.”
영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신영의 말에 깜짝 놀랐는지 모임 장소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연 멈췄다. 그리고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신영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말했다.
“요즘 사업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신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영훈은 변명하듯 말했다.
“아님 일 말고는 벽을 쌓고 사는 네가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만날 까닭이 없잖아.”
신영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어 간다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영훈은 말을 이었다.
“이상하네. R패션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로 아는데……. 그럼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지?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면 주변에 큰일이 일어났다는 징조잖아.”
뭐라는 거야.
고민하기 시작하는 영훈을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지하 1층으로 가기 위해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신영은 문득 고개를 돌리다 보이는 장면에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웃음을 흘리는 그를 흘깃거리던 영훈 역시 신영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을 움직였다. 그런 영훈의 눈에 아래위로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고는 상투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
“이야, 신기한 여자네.”
영훈은 초록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여자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신영에게 말했다.
“이런 고급 호텔에 저런 차림으로 나타나다니. 어디 사는 누군지 궁금하네.”
신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뭐해? 이만 가자. 늦었…… 야! 어디 가!”
트레이닝복 여자에게 잠시 관심을 갖긴 했지만 곧 흥미가 떨어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영훈이 신영을 재촉했다.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신영이 이윽고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몇 초 후의 일이었다.
“고맙다, 승지야! 내가 꼭 그 가방, 사 줄게!”
울며 겨자 먹기로 승지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을 한 진겸은 눈물을 훔치며 엘리베이터로 올라탔다.
승지는 셋째 오빠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다.
“도……승지?”
그러던 순간, 귓가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승지의 발걸음은 저절로 멈췄다. 고급스런 호텔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초록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와서 그런지 멀리서도 눈에 띄는 승지를 발견한 한 남자가 승지를 불러 세웠기 때문이다.
그냥 무시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고개는 저도 모르게 돌아갔다.
승지는 이내 안면이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망할!’
승지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는 스물여덟 도승지의 인생 중 단 ‘세 번’ 밖에 없었던 연애사에서 불쾌한 기억을 단단히 심어 준 마지막 남자, 윤정우가 틀림없었다.
‘재수도 더럽게 없네!’
껄끄럽기만 한 정우를 하필이면 이런 옷차림에, 그것도 묘한 장소에서 마주쳐서 불쾌하기 짝이 없다.
승지는 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정우를 발견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정우는 사람 답답하게 만들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과거에 있었던 좋지 않은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 같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제기랄.
승지는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앞에 선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볼……일이 있어서 왔어.”
“볼일? 무슨 볼일?”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해.
속에만 맴도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으나 꾹 참기로 했다. 이미 끝난 사이인 그와 계속 얽히는 일은 절대로 싫었기 때문이다.
“정우 씨가 알 건 없어. 그럼, 난 이만.”
애초에 집을 나선 목표였던 진겸의 부탁을 성실히 수행했고, 자신이 내세웠던 요구 조건인 가방 역시 진겸이 출장을 다녀와서 사 주기로 약속했던 터라 깃털처럼 가벼웠던 마음이 정우와 마주침으로 인해 살짝 무거워졌다. 조금이라도 그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간 좋았던 기분마저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몸을 돌리려던 승지는, 갑자기 제 팔목을 잡아채는 그로 인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하는 짓이…….”
“나 보러 온 거지?”
‘뭐?’
“사실대로 말해, 그냥. 괜히 스토커 같은 짓 하지 말고.”
“……!”
“솔직히 내가 그리웠다고, 그렇게 말해도 괜찮아.”
이게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본인이 잘난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 남자 자체에 질려 떠난 건 승지이건만 대체 무슨 배짱으로 뻔뻔한 말을 늘어놓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승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스토커라니. 정우 씨랑 내가 끝난 지가 언젠데 그런 말을 해? 이거 놔. 나 바빠.”
어찌나 세게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있는지 그가 잡고 있는 부분이 아려 올 지경이다. 승지는 신경질적으로 정우의 손을 내리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정우가 다시 그녀의 손목을 옭아맸다.
“윤정…….”
“그럼, 내가 널 여기서 본 게 우연이란 소리야?’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그의 음성에 승지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당연히 우연이지. 우연 중에서도 아주 큰 우연이야. 그러니까 이거 놔.”
“싫어.”
“윤정우!”
조용한 호텔 로비 한가운데서 그와 다투기 시작함으로써 점점 주위의 시선이 저를 향하는 것이 느껴진다.
제길.
괜히 부끄러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려 입고 오는 건데. 단순히 진겸과 만나 가방을 건네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가 될 줄 알고 치장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승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옷차림이 그게 뭐야?”
승지는 자신의 정곡을 찔러 버리는 정우의 말에 입술을 떼지 못했다. 정우는 초록색 트레이닝복으로 깔맞춤을 하고 있는 승지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다시 만나자고 사정을 할 거였으면 조금 더 예쁘게 입고 와야지. 그래 가지고 떠난 남자를 유혹이나 하겠어?”
“내 차림이 뭐 어때서? 호텔엔 트레이닝복 입고 오면 안 돼?”
‘게다가 말은 바로 해라. 떠난 건 네가 아니라 나거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차마 내뱉지 않은 것은 그와 대화를 나눠 봤자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승지는 점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경고를 하려고 했다.
“이봐, 정…….”
“윤정우. 웬만하면, 싫다는 사람은 건드리지 마.”
……어?
단단히 착각 속에 빠져든 사람을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피곤한 일은 없었다.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어서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무렵, 그녀와 정우 사이를 가로막는 한 남자의 등장에 승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넌 뭐……!”
정우 역시 난데없는 방해에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다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눈치였다. 두 남녀를 당혹시킨 남자는 다름 아닌 승지의 상사이자 R패션의 기획이사인 그, 차신영이었다.
‘맞다, 동창회!’
분명 집을 나서기 전 신영의 동창회가 이곳, K호텔에서 열린다는 걸 떠올렸지만 갑자기 마주친 정우로 인해 까맣게 잊어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승지는 자신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신영의 차가운 눈빛에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울상을 지었다.
‘으으! 쪽팔려…….’
반년 동안 그의 밑에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왕의 비서…… 라. 나쁘지 않은 말이네요. 좋습니다, 도승지 씨. 당신을 채용하도록 하죠.’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 결과만 기다리고 있는 승지를 향해 그날의 신영은 피식 웃으며 말했었다.
‘대신 한 가지만 지켜 주었으면 합니다. 난, 격식을 따지는 사람입니다. 내 밑의 부하들이 일을 할 때는 오로지 일에만 집중을 해 주었으면 하고, 그에 걸맞은 옷차림을 갖춰 입길 원하죠. 과해서도, 덜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 내 밑에서 일을 할 땐, 옷차림에 신경을 써 주길 바랍니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귀에 쏙쏙 박히게 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승지는 지난 반년 동안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비서 차림’으로 회사로 출근했었다. 결코, 이렇게 후줄근한 초록색 트레이닝복 차림에, 상투머리까지 튼 몰골로 그의 앞에 나타난 적이 없었단 소리다!
승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누군가 했더니…… 너였군, 차신영.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마자 하는 일이 방해라니, 참 너다운 일이다. 안 그래?”
물론, 지금 이 시간은 업무 시간과는 상관없는 시간이었기에 일을 그만두어야 할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신영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 줄 것이 분명했다. 승지가 예상치 못했던 절망에 빠진 사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가 신영이라는 것을 깨달은 정우의 날이 선 말이 들려왔다.
“괜한 영웅 의식 발동하려 하지 말고, 신경 끄고 네 갈 길 가. 이건 내 일이야.”
“…….”
“얼른 동창회로 가서 네 추종자들의 시끄러운 찬양 소리나 들으란 말이…… 뭐하는 짓이야!”
호텔 로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정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영은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정우에게서 등을 돌려 승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지 씨.”
승지는 자신을 부르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에 바닥으로 향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목을 꽉 붙들고 있던 정우의 손을 강한 힘으로 떼어 내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신영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
“……!”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짧고 간결한 말이었지만 그녀를 도와주겠다는 의도는 분명해 보였다. 승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잠시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차신영. 너 그 손 안 놔?”
정우는 ‘지금 뭐하는 짓이야?’라는 얼굴로 신영과 승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신영은 여전히 승지의 손목을 잡은 손을 놓지 않고선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정우를 직시했다.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차갑고 냉랭한 눈으로 정우를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상관있다면…… 어쩔 건데?”
정우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신영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랑 이 여자,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 아니야. 그러니 신경은 네가 꺼.”
정우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럼 네 여자라도 된다는 소리야?”
“그래.”
“……뭐?”
차가운 신영의 대답에 정우의 말문이 막혔다. 신영은 조금 전보다 더욱 강한 힘을 주어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뭐하고 있어? 이리 와. 이상한 녀석한테서 잡혀 있지 말고.”
그와 동시에 승지가 그의 품으로 빨려 들어가듯 신영에게 안겨 왔다. 으윽, 하고 터져 나온 승지의 나지막한 신음 소리에 눈썹을 꿈틀거리던 정우는 저를 향해 싸늘한 두 눈을 고정시키는 신영을 노려보았다. 신영은 개의치 않고 비틀거리는 여자를 부축하더니 이내 정우에게 말했다.
“경고하는데, 두 번 다시는 내 사람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
손목이 붉어질 정도로 강한 힘을 주고 있던 정우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마치 영화 속 왕자님처럼 짠 하고 나타난 ‘그’ 덕분에 다행히 정우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왜 하필이면…….’
‘그’의 말에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과 ‘그’를 바라보던 정우가 묘하게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사 앞에서 그런 추태라니. 빌어먹을.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승지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정우와의 일로 인해 살짝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응시하더니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이곳에서 승지 씨를 볼 줄은 몰랐어.”
‘그’가 그녀의 손을 붙들고 온 곳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그’의 차였다. 타라는 말 외엔 차가 출발한 지 십 분이 지나도록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신호에 걸려 차를 잠시 멈춰 세운 후 자신을 향해 하는 말에 승지는 가슴이 저릿했다.
“그러게요. 하.하.”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지?”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그 차림으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 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승지는 ‘그’를 흘깃거리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했다.
“할 말 있으면 해.”
‘그’는 머뭇거리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입을 연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움직였다.
“내 사람이란…… 표현은 대체 왜 쓰신 거죠?”
그 당시엔 너무 놀라 말하지 못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괜한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말이었다.
“오해할 만한 말이었어요.”
‘그’는 눈을 부라리는 승지를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당신이 내 사람인 건 맞잖아.”
그러고 보니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승지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초록불로 변한 신호등을 발견하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입을 열었다.
“윤정우와는 무슨 관곈지 물어봐도 되나?”
승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꼭 말해야 하나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지만…… 조금 궁금해서.”
앞만 보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흘깃거리던 승지는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개인적, 사생활입니다. 굳이 알려 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언제나 그렇듯 승지는 ‘그’의 말에 사무적으로 대꾸하며 밖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버스 정류장을 발견했다.
“저기 앞에서 세워 주세요.”
“집까지 태워 줄게.”
“괜찮습니다. 충분히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하는 승지의 말에 ‘그’는 피식 웃었다. ‘그’는 이내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서 차를 세우더니 그녀를 바라본다. 승지는 안전벨트를 풀어 차 문을 열더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내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이사님.”
그녀의 말을 듣던 ‘그’. 그러니까 차신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속을 읽을 수 없는 미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도승지 씨.”
―Rrrr. Rrrr.
그녀를 차에서 내려주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호텔 로비에 떡하니 홀로 남은 영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시선을 거둔 사이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그녀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아쉬워 입맛을 다시던 신영은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받지 않으면 끈질기게 그를 괴롭힐 것이 분명한 영훈임을 잘 알기에 신영은 긴 손가락으로 핸드폰 액정의 통화 버튼을 살짝 눌렀다. 그러자 ‘차신영, 야, 인마!’ 하고 그의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영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 안 먹었어. 작게 말해.”
신영의 건조한 대답에 영훈은 뜻 모를 한숨을 내뱉더니 말을 이었다.
―어디야? 아까 그 여잔 또 뭐야? 윤정우랑 아는 사인 것 같던데, 너랑도 아는 사이야?
몰아치는 영훈의 목소리에 귀가 따갑다. 그는 잠시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영훈이 조금 잠잠해지자 입술을 움직였다.
“……뭐, 그렇지.”
―어떻게 아는 사인데? 설마, 애인?
혹시나 싶어 묻는 영훈의 말에 순간 멈칫했다. 애인? 이상하게 이질적으로 들리는 그 단어에 가슴이 울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신영은 이내 아니, 하고 짧게 말했다.
―그런데 왜 나선 거야? 남 일에는 관심도 안 가지던 네가, 웬일로?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훈은 그의 대답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는지 한 번 열었던 입술을 닫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너 가고 나서 윤정우 그 자식이 얼마나 분풀이를 해 댔는지 아냐? 참 보기가 민망할 정도더라.
“그래?”
―녀석도 애들 만나러 가는 길이었나 본데, 바에 들어가자마자 네 험담을 살벌하게 하더라고.
정말 분했나 보군. 왠지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는 꾹 참았다.
학창 시절부터 그만 보면 쌍심지를 켜 대던 정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항상 신영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아왔던 정우가 그만 보면 열을 올리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한 번쯤은 이겨 보고 싶었겠지.
그러나 일일이 상대해 주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정도껏 어울려 줘야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상대를 안 하려 했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윤정우로 인해 곤란해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안 올 거냐? 너 찾는 애들이 한둘이 아냐, 인마.
싸늘한 눈빛을 빛내며 차에서 내리던 승지의 모습을 떠올리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이상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 순간, 한참을 정우에 대해 떠들어 대던 영훈이 돌연 생각났는지 신영을 향해 질문을 던지자 그는 제 몸을 휘두르고 있는 기묘한 느낌 속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신영은 차 안에 앉아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안 가는 게 좋겠어. 괜히 부딪쳐서 좋을 건 없잖아.”
―윤정우랑?
“네가 잘 말해 줘. 그럼.”
―야! 차신…….
영훈의 외침을 듣지 않고 신영은 종료 버튼을 눌렀다. 통화가 끊어지자 조수석으로 핸드폰을 던진 그는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렸다.
도승지.
저를 바라볼 때마다 천적을 만난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기운을 뿌려대는 그녀는 반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가느라 회사를 그만두게 된 강소영 씨를 대신하여 그의 밑으로 들어온 신입 비서였다. 그의 휘하에 있는 다른 비서인 장도준과는 달리 업무 외의 사담을 늘어놓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하는 그녀가 자신을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은근히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내 차림이 뭐 어때서? 호텔엔 트레이닝복 입고 오면 안 돼?’
6개월 동안 지극히 사무적인 대화 말고는 그녀와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눈 적이 없었던 까닭에 원래부터 저만큼이나 무뚝뚝한 성격이거니 하고 여겼건만, 정우를 향해 소리를 쳐 대던 모습은 그가 알고 있던 승지의 모습과 괴리감이 있었다.
‘도승지…… 라.’
오른발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자마자 부르릉 소리를 내며 그의 차가 매끄럽게 도로 위를 달려 나갔다.
이로써 잠시 일었던 동창회에 대한 흥미는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승지에 대한 호기심이 슬며시 일기 시작한다. 그는 승지로 인해 괜스레 어지러워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마음의 정화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를 정화시켜 줄 이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알콩달콩한 사랑을 이어 나가고 있을 규영과 희수 이리라.
‘오지 마! 오지 말랬지!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대문 앞에 당도한 그를 보며 규영이 화를 내며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었지만 신영은 아랑곳 않고 핸들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