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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2. 등잔 밑이 어둡다.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화요일 아침.
승지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 특히 시커먼 눈 밑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왜 거기서 그 사람을 만나.’
어젯밤, 진겸의 심부름을 다녀오던 와중 우연히 만난 정우 때문인지 밤새 악몽에 시달리다 평상시보다 10분 늦게 일어나 버렸다. 맞춰 뒀던 알람도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어서 울리지 않았고,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겨우 눈꺼풀을 올렸으니 말 다했다.
눈을 뜨자마자 후다닥 씻고 출근할 준비를 하기 위해 화장대 앞에 앉아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있던 그녀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숨 막히는 눈빛을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결과적으로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과년한 여자의 손목을 맘대로 잡고 제 차에 태우질 않나, 차를 세워 달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바로 세우질 않나,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모든 걸 꿰뚫고 있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훑어 내리질 않나. 하여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녀의 상사, 차신영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바로 사회에 진출했던 터라 직장 생활의 경험이 없는 편도 아니었다. 또 세 오라비의 뒷바라지를 오랫동안 해서 그런지 사람을 다루는 일에는 꽤 자신이 넘치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처럼 신출귀몰하다 못해 도무지 속을 짐작하기 힘들어 모시기 어려운 직장 상사는 난생처음이었다.
그의 비서로 취직한 지 벌써 여섯 달이나 흘렀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의 앞에선 쉽게 웃을 수도 없을 정도로 그가 그녀에게 미치는 묘한 영향력으로 인해 승지는 긴장감의 연속 속에서 살고 있었다. 다행히 요 근래 들어선 무슨 연유 때문인지 항상 퇴근 시간보다 서너 시간은 늦게 가던 그가 칼 퇴근을 해 주어 조금 마음의 여유를 찾은 상태였지만.
달칵.
“도승지.”
“우악!”
정우를 향해 싸늘하게 일갈하며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나가던 신영의 손길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아 멍하니 오른쪽 손목을 어루만지던 승지는, 갑자기 열려 버린 방문에 마치 도둑질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큰오빠 정겸은 국자를 들고 아니꼬운 눈빛으로 승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죄졌냐? 뭘 그렇게 놀라. 나쁜 짓이라도 한 사람처럼.”
신영을 떠올리는 일이 결코 ‘나쁜 짓’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을 후벼 파는 정겸의 말에 승지는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무, 무슨 일이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까지 꿈틀거리던 여동생의 어색한 기류를 놓칠 리 없는 도정겸이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들고 있던 국자를 공중에 뱅그르르 돌리며 말했다.
“밥 다 됐다고. 출근할 시간 되지 않았어?”
승지는 얼른 화장대 위에 놓인 시계를 바라봤다. 불과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남은 상태.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자 정겸이 입술을 움직였다.
“어서 나와. 은겸이도 기다린다.”
할 말을 마친 정겸이 망설임 없이 돌아서자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승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다. 십 분 늦게 일어나서인지 집에서 나서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너무 맛있어서 절대로 안 먹을 수 없는 정겸의 아침밥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
승지는 대충 화장을 끝내곤 어젯밤 잠들기 전 미리 준비해 놓은 정장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일어났냐?”
밥솥에서 밥을 푸고 있는 정겸과는 달리 느긋한 얼굴로 X 매거진이라 적힌 잡지를 읽고 있던 둘째 오빠 은겸이 식탁 앞에 앉는 승지를 발견하곤 아침 인사를 건넸다. 승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몇 해 전. 네 남매를 남기고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유서 깊은 도씨 집안의 가장, 도정겸이 친히 차려 주는 밥상은 오늘도 호화로웠다. 잘나가는 소설가이지만 집에서 죽치고 글만 쓰고 있다 심심풀이로 배운 요리 실력을 아침마다 마음껏 뽐내는 큰 오라버니 덕분이었다.
맛깔나 보이는 쇠고기 뭇국과 하얀 쌀밥을 내려다보며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승지는 은겸의 앞에 국을 놓아주는 정겸을 향해 빙긋 웃었다.
“야, 꼬맹이. 여기 이 남자, 네 상사라는 놈 아냐?”
배시시 웃던 그녀를 향해 흐릿한 미소를 짓는 정겸을 바라보던 승지는 돌연 저를 향해 말을 던지는 둘째 오빠 은겸의 목소리에 얼굴을 돌렸다. 은겸이 들고 있던 잡지를 그녀에게 내밀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시선을 옮기던 승지의 눈에, 팔짱을 낀 상태로 거만하고도 자신감이 넘치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그녀의 상사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지금으로부터 2주 전, R패션의 계열사 중 하나인 R 출판사에서 새로 발간한 경제 매거진의 창간 기념호에 <향후 재계의 미래를 짊어질 차기 CEO>란 거창한 타이틀의 기사를 싣기 위해 한 기자가 인터뷰를 나누러 이사실로 찾아왔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네.”
은겸은 그녀에게서 잡지를 건네받고는 한참이나 신영의 얼굴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짜식, 진짜 재수 없게 생겼네.”
은겸의 ‘재수 없다’란 소리는 한 마디로 ‘부럽다’란 소리다.
어딜 나가서 ‘멋지다’란 소리를 줄기차게 들으며 삼십삼 년 동안 저 잘난 맛에 살아온 도은겸이 은근한 질투심을 가질 만큼 확실히 잡지 속 신영은 뒤에 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물론 실제로도 너무나 잘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은겸의 투기가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승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차신영.
업계에서 점점 덩치를 늘려 가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주목받는 그룹, R패션 차정규 회장의 장남. 미국 유학 시절, 뛰어난 머리 덕분에 최단기간 다니던 대학을 졸업한 수재. 한국으로 귀국한 직후 아버지인 차 회장이 운영하는 R패션의 말단 직원부터 차근차근 일을 시작한 남자. 출중한 업무 능력을 통해 어린 나이에 어느덧 ‘기획이사’ 자리를 꿰찬 미래의 후계자.
사장 자리에 그의 어머니가 앉아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회사를 운영해 나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라는 사실을 R패션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그녀 또한 눈치챌 정도다.
게다가 수려한 외모와 언변으로 회사 내의 뭇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다 못해 재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여성들의 눈을 번뜩이게 만드는 마성의 남자가 바로 그녀의 상사였다.
‘확실히…… 재수가 없긴 해.’
그녀가 모시는 직장 상사이기도 하지만 상사를 떠나 한 개인으로 그를 지켜보면 머리도 좋고, 집안도 좋고, 게다가 얼굴까지 빼어난 신영이 재수가 없어 보이기는 한다. 승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대는 은겸을 바라보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꼬맹이. 넌 행여나 이런 얼굴만 번지르르한 녀석한테 넘어갈 생각 따윈 하지 마라. 가깝다고 혹하지 말란 말이야.”
은겸이 생각에 잠긴 승지를 향해 말을 건네자 그녀가 입 속에 밥알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둘째 오빠는 신영의 얼굴이 떡하니 나와 있는 잡지를 그녀를 향해 흔들었다. 딱 봐도 바람기가 솔솔 풍기는 이런 녀석에겐 우리 귀여운 막내 동생을 넘길 수 없다 여긴 은겸의 당부 아닌 당부에 승지는 피식 웃었다.
“알잖아. 난 이런 남자 줘도 안 가져. 내가 제일 기피하는 스타일의 남자야. 이 남자, 사귀게 된다면 여러 모로…… 피곤해질 타입이지.”
R패션에 입사를 하고 기획이사 비서실로 발령 난 후, 지난 육 개월 간 그를 지켜본 결과, 아니나 다를까 신영은 그녀가 꺼려하는 남자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단 그녀가 요구하는 미래의 배우자 조건인 ‘평범’과는 거리가 먼, 특별하다 못해 특출난 사람이질 않나, 헉 소리 나는 외모 때문인지 하루를 멀다 하고 바뀌는 여자들에, 부하 직원들의 쾌적한 업무 환경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는 지독한 일벌레.
‘최악이야.’
만약 인사 발령 시기가 찾아온다면 신영의 밑이 아닌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신영에 대한 승지의 인상은 최악이었다. 물론, 프로페셔널한 그녀는 티는 내지 않았다.
“알면 다행이군. 역시 넌, 분수를 알아.”
승지의 말에 은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승지가 그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은겸은 아랑곳 않고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더니 말했다.
“꼬맹이, 넌 이 오빠 같은 자상한 남자를 만나야 해.”
뭐래.
“오빠 같은 남자도 충분히 기피 대상이거든? 저 잘난 맛에 사는 남자는 딱 싫댔지?”
“뭐?”
제 오라비이긴 하지만 어린 학생들이 꺅꺅거리는 유명한 대학 입시 인터넷 강사인 은겸 또한 제 능력과 외모를 과신하여 떵떵거리며 사는 남자임은 틀림없다. 가당찮다는 듯 콧방귀를 뀌는 그녀를 보며 은겸이 눈을 부라리자, 잠자코 수저를 움직이고 있던 정겸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국 식는다. 그만 떠들고 밥이나 먹어.”
냉기가 뚝뚝 흐르는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주눅이 든 두 사람은 실랑이를 벌이다 말고 얼굴을 푹 숙이며 수저를 놀렸다.
* * *
“일찍 오셨군요.”
R패션 기획이사의 수행비서인 장도준은 문을 박차고 들어와 자리에 앉는 신영을 따라 들어오면서 말을 건넸다.
“이상하게 잠이 안 와서. 집이 바뀌니 그런가.”
얼마 전, 모종의 이유로 본가를 나와 독립을 한 신영은 목 부근을 매만지며 미간을 좁혔다. 도준은 그런 그를 빤히 응시하다 말한다.
“잠이 잘 오는 약을 좀 알아볼까요?”
“아니, 괜찮아.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래. 곧, 익숙해지겠지.”
“……알겠습니다.”
신영은 그의 대답에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도준을 흘겨봤다.
뜬금없이 근래에 ‘데이트’라는 명목을 들어 칼같이 퇴근하는 신영으로 인해 부담이 클 만도 하건만 다행히 업무엔 큰 지장은 없었다. 보고해야 할 일이 있으면 서류로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 도준의 배려 덕분이었다.
‘기획이사’라는 직함이긴 하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름만 ‘사장’인 어머니와 일선에서 잠깐 물러나 있는 아버지인 차 회장 대신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터라 신영이 처리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 같았다. 그래서 비서가 둘씩이나 있는 것이고. 다행히 그의 두 비서들은 모두 유능한 편에 속해 상대적으로 일을 하기가 쉽다는 것이 그의 짐을 조금 덜어 주었다.
‘그렇지.’
함께 일을 한 시간이 좀 되었던지라 이젠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만으로 신영이 무엇을 불편해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차리는 유능한 비서, 장도준을 바라보던 그는 순간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얼굴에 입술을 오물거렸다.
오늘의 스케줄에 대해 불러 주려던 도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이사실로 들어오면서 살짝 본 승지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조금, 신경이 쓰였다.
도준은 신영이 그답지 않게 말을 머뭇거리자 은근히 놀란 눈빛을 띠더니 이내 태연함을 되찾고는 신영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신영은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입술을 열었다.
“그…… 도승지 씨, 말이야. 아까 안 보이던데…….”
긴장한 눈으로 신영의 말을 기다리던 도준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잠시 밖에 나갔습니다. 탕비실에 떨어진 물품이 있어서요.”
“그래?”
“도승지 씨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역시 눈치 빠른 장 비서는 신영의 맘을 꿰뚫기라도 하듯 날카로운 말을 건넨다.
“으응.”
순간 뜨끔거려 아니라고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이려던 그는 자신의 머릿속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오자 크게 당황했다.
“이사님?”
자신의 의문스러운 행동에 놀란 신영을 도준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는 이내 굳어졌던 얼굴을 펴고는 말했다.
“승지 씨가 들어오면 보자고 전해 줘.”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직속 상사인 도준이, 신영이 회사에 오면 항상 마시는 커피가 다 떨어졌다며 사러 갔다 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아직 신영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곤 어젯밤의 일도 있고 해서 마주치기가 꺼려졌던 승지는 그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회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커피 전문점으로 가 신영이 좋아하는 원두커피를 사서 돌아왔다.
“승지 씨.”
이사실에 도착하자마자 탕비실로 향하려던 승지는 저를 발견한 도준의 부름에 걸음을 멈춰 섰다.
“네?”
도준은 두 눈을 크게 뜨는 승지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사님이 승지 씰 찾아요.”
“저를요?”
승지는 깜짝 놀라 도준을 바라봤다.
“네. 승지 씨가 돌아오면 바로 보자고 하시던데. 바로 들어가면 될 거예요.”
환하게 웃고 있는 도준에게 차마 ‘싫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얼른 이사실로 들어가라는 듯 손을 움직이는 도준을 힐긋거리더니 이내 억지로 웃으며 들고 있던 봉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곤 이사실을 향해 걸음을 움직였다.
“하아.”
어젯밤의 일 때문인지 들어가기가 망설여져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문고리를 잡아 돌리기 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똑똑, 하고 닫혀 있는 이사실의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요, 라는 미성이 들려오자 승지는 세게 문고리를 아래로 내렸다.
“부……르셨습니까, 이사님.”
그의 얼굴을 본 지 여섯 달이나 지났지만 볼 때마다 껄끄럽고 거부감이 생기는 외모다. 승지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내리깔고 있던 눈을 올리는 신영의 시선이 제게 닿자 심장이 살짝 뛴다. 그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굵은 음성을 내뱉었다.
“도승지 씨.”
승지는 얼른 대답했다.
“네.”
“…….”
“…….”
그녀의 이름을 불러 놓곤 잠시 말을 멈춘 신영의 시선에 승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올 말 때문인지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다.
‘뭐야.’
그러나 이상하게도 신영은 말이 없었다. 볼일이 있어 부른 줄 알았는데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무어라 말을 하지 않는 그로 인해 속이 타들어 간다.
승지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리려 할 때 신영이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어젠, 잘 들어갔나?”
“네? 아, 네.”
“그렇군…….”
묘한 여운을 남기는 그의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묘한 느낌에 가만히 서 있던 승지는 이사님, 하고 그를 불렀다. 신영은 여전히 그녀를 향해 고정시켰던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그냥, 그게 궁금해서 불렀어요. 혼자 보낸 게 맘에 걸렸거든. 확인했으니 됐어요. 이만 나가도 좋아.”
제 할 말이 다 끝났는지 고개를 숙이는 신영을 응시하던 승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다 어느새 그녀가 서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 서류에 집중하는 신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생각을 떨쳐 냈다.
그녀와 그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이사와 비서, 상사와 부하 직원의 단순한 수직적 관계일 뿐이다. 괜히 그와 사적으로 얽혀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잘난 남자와의 연결고리는 직장에서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긴 승지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그를 향해 목례를 하고는 뒤를 돌아서며 나가려고 했다.
“참, 도승지 씨.”
막 그녀가 이사실 문 밖으로 나가려던 차에 승지의 발목을 잡아 버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말이지.
그녀를 향한 그의 목소리는 청량하게 귓가를 울렸다. 그 때문인지 가슴이 쿵쿵 뛴다. 오늘따라 제 이름이 왜 이렇게 부끄럽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승지는 자신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태연함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게 잘됐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네, 이사님.”
신영의 부름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승지의 눈에 당혹감이 서리다 금세 사라지는 모습을 보지 못한 신영은 그녀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을 말없이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점심, 먹었습니까?”
대체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쿵덕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릴까 노심초사하던 승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점심이요?”
“그래. 안 먹었으면 같이 먹어요.”
승지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 남자가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점심을 먹자고 한 것을 들은 것 같은데 확신할 수가 없다. 육 개월을 그의 밑에서 일했건만 처음 듣는 제안이었으니까. 그 흔한 환영회도 하지 않고 첫날부터 그녀를 부려 먹던 신영의 말이라고는 도통 생각할 수 없는 부드러운 음성에 혼란스럽다. 지극히 사무적인 대화밖에 나누지 않았고, 또 사소한 잡담도 나눈 적이 없었던 신영과 점심을? 아서라. 분명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점심이 될 것이다.
그와는 지금 이 상태가 딱 좋았다.
업무 외의 시간을 공유하지 않는 딱딱한 상사와 부하 직원의 사이가. 물론 어떻게 보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지난 육 개월의 경험으로 보아선 일 처리도 수월했고 나름 괜찮은 직장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었으므로 승지는 그와의 관계가 가까워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 세 번의 연애로 인해 잘난 남자들에게 불신이 생겨 버린 그녀로선 그의 제안이 달갑지 않았다.
“이사님.”
생각을 마친 승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신영을 향해 거절의 의사를 전달하려 했다.
“저는 괜…….”
“먹어.”
그러나 승지의 말은 채 끝나기도 전 그의 단호한 대답에 묻혀 버린다.
‘같이 먹는 게 어때?’도 아니고 ‘아직 안 먹었을 테니 같이 먹지.’도 아닌 ‘먹어.’는 확실히 그녀의 귀에도 반박할 여지없는 ‘명령’이었다. 그는 승지의 승낙이 떨어지지도 않았건만 자리에서 일어나 걸려 있던 상의를 걸쳐 입으며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온다. 그리곤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안 갑니까?”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승지는 거부감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지금 이 상황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지금 그녀는 근사한 한정식 집에 그녀의 상사와 단둘이 앉아 있었다. 동석하고 있던 도준이 핸드폰으로 걸려 온 전화를 받기 위해 방을 나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너무 화려해서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휘황찬란한 접시들이 나열된 밥상을 바라보며 얼굴을 굳히다 신영을 힐끔거렸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고대 신전의 조각상처럼 잘 만들어진 그의 빛나는 얼굴을 바라보니 숨이 막힐 것만 같다.
‘하아.’
아무래도 불편한 사람과 단둘이 앉아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목구멍이 꽉 막혀 버린 기분. 그래서인지 은겸이 한턱 쏘지 않는 이상은 접하기 힘들었던 눈앞의 휘황찬란한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하겠다.
승지의 타들어 가는 마음 따위는 알 리 없는 신영이 열심히 젓가락을 움직이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상사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부서지는 소리만 들을 뿐이었다. 밥을 먹는 모습마저도 눈이 부신 저 남자와 단둘이 있는 이 자리는 너무도 정신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속 시원하게 그의 머릿속을 활짝 열어 보고 싶을 정도다. 꿍꿍이를 알 수가 없어 더 골치가 아픈 그녀의 상사는 어찌 된 영문인지 돌연 승지에게 묘한 관심을 표출하고 있었다. 아마 그 원인은 어제 K호텔에서의 원치 않던 윤정우와의 치정극 때문이겠지.
‘윤정우 이 자식…… 진짜 도움이 안 돼.’
사귈 때도,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조차도 그녀의 인생에 도움이라곤 주지 않는 정우에 대한 욕설을 내뱉던 그녀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눈앞의 만찬을 내버려 두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녀를 뒤늦게 발견한 신영은 젓가락을 움직이는 행위를 중단하고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하지만 얼굴에 ‘나 완전 불편해요.’라는 글씨를 새겨 놓은 그녀의 모습이 그의 시야로 들어왔다.
“승지 씨.”
신영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상 위에 내려놓으며 입술을 열었다.
“한식을 싫어해?”
일식보다는 한식을 더 좋아할 것 같아 자주 가는 한식집에 데리고 왔건만 줄어든 그의 밥그릇과는 달리 승지의 밥그릇은 점원이 처음 가져왔을 때와 변함이 없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승지는 당황해 얼른 대꾸했다. 하지만 신영은 뚫어져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먹질 않지? 입맛에 안 맞는 건가?”
승지는 번뜩이는 그의 눈빛을 발견하곤 어색하게 웃는다.
“반찬이 너무 많아서요. 어떤 걸 먼저 먹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먹어야죠. 맛있겠네요. 잘 먹겠습니다.”
허둥거리는 꼴이 지금 그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냈다. 신영은 하하, 웃으며 불고기를 향해 젓가락을 가져가는 승지의 모습을 쳐다봤다.
‘으응?’
밥과 반찬이 코로 들어가든 입으로 들어가든, 일단 배는 고프니 먹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던 승지는 저를 향한 따가운 시선에 슬그머니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심히 동요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신영이었다.
방금 전까지 냉랭한 표정을 짓던 신영이 마치 무언가를 깨닫기라도 한 듯 저를 쳐다보고 있자 승지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이사님? 왜…… 그러시죠? 무슨 일 있으십니까?”
충격에 휩싸인 그의 눈동자는 조금 놀라웠다.
‘왜 저러는 거야?’
승지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지난 육 개월간의 근무 기간을 토대로 짐작하자면, 신영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항상 그녀의 예상을 뒤집는 말이 나왔다.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기만 하는 신영의 행동으로 인해 승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그는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너무 먼 곳에서 찾고 있었어.”
승지는 뜬금없는 그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신영은 영문을 몰라 하는 승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근심 걱정을 모두 떨쳐 낸 듯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승지가 불길한 예감에 쉽게 소리를 내뱉지 못하는 사이 그는, 말했다.
“승지 씨.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 알지?”
그 유명한 속담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신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씩 웃었다.
“난 그 말을 이제야 떠올려 버렸어.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바보 같았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승지는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끝내 입술을 움직였다.
“저…… 이사님. 지금 제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하하하하.”
그녀는 제 상사가 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려 봤지만 안타깝게도 파악하기 힘들다.
신영은 어리둥절해하는 승지를 위해 부연 설명을 해 주려고 입술을 열었다.
“승지 씨.”
그의 깊은 눈이 그녀를 향하자 쿵쿵― 하고 살짝 가슴이 뛴다.
“승지 씨는 내가 요새 왜 일찍 퇴근하는지 알아?”
뜬금없는 그의 말에 놀라 대답할 기회를 놓치자 신영이 말을 이어 나갔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랑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어.”
“네?”
사랑?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자 승지는 저도 모르게 ‘헉’ 하는 숨소리를 내뱉을 뻔했다. 그녀는 이내 당황하는 기색을 모조리 지우곤 본래의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승지는 번지르르하다 못해 후광이 비치기까지 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천하의 바람둥이 같으니!’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다니. 그럼 여태껏 그의 사무실에 걸려 왔던 여자들의 전화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가 본 여자들만 해도 족히 다섯은 넘건만 그 여자들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위험한 남자야. 가까이 해선 안 돼.’
도승지의 비상 레이더가 경보를 울려 대고 있었다. 오늘 이후로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그와의 식사 시간을 피해야 한다고 승지의 또 다른 자아가 그녀를 향해 외쳤다. 승지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신영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누가 나보고 그러더군. 사랑을 하라고. 그러면 행복해진다고.”
아아, 그러셨어요?
“그래서 그 충고를 들은 난…… 사랑을 해 보기로 했어.”
요 근래 들어 여러 여자를 만난 건 그것 때문이었구만? 빌어먹을 사랑 찾기?
“퇴근 시간이 빨라졌던 건, 바로 그 이유에서였지.”
“네에.”
어찌 됐든 상사가 하는 말이기에 그저 듣고 있을 수만은 없어 승지는 심드렁하게 호응을 했다. 신영은 승지가 어떤 행동을 하든 개의치 않겠다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쉽게는 찾을 수 없더군. 뭔가 진전이 되려 하면 자꾸 차이게 되더라고.”
그럴 테지. 딱히 진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내 연애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건가 생각도 해 봤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이봐요, 차신영 씨. 정말 모르는 겁니까? 이렇게 빤히 보이는데? 댁은 상대 여성에게 모든 마음을 주지 않잖아! 그게 문제인 거라고! 그래서 여자들이 당신을 떠나가는 거라니까? 이 남자 진짜 바보 아냐?
담담하게 말을 잇는 신영에게 소리치고 싶은 말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승지는 그의 앞에 앉아 성의 없는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이제 알아차렸어. 그동안 내가 너무 먼 곳을 보고 있던 게 아니었나― 라는 사실을.”
“아아, 네.”
신영은 좀 전보다 밝아진 톤으로 말했다.
“이제부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 가까운 사람들을 찾아봐야겠어.”
가까운 사람들? 아니 그전에, 자기 사생활과 관련된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거야?
“이사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하셔야죠.”
승지는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 그의 말에 대응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신영은 그런 승지를 향해 씩 웃었다.
“이를테면, 승지 씨 같은.”
“네.”
이미 그의 말에 흥미를 잃은 승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뭐?
“네?”
은연중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승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신영을 바라봤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당황하여 더듬거리기까지 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신영은 매혹적인 눈웃음과 함께 묻는다.
“승지 씨,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나?”
“예?”
“만약 없다면…… 나랑, 사랑하자.”
승지는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마냥 행동을 멈추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뭘…… 하자구요?”
어이없는 말을 들은 것 같아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더니 신영은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
……뭐가요?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럴 것 같다니요?
“난 사랑을 해 보고 싶어.”
저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당신이랑.”
팔딱거리던 심장이 저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어때? 나랑 사랑할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