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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3화. 도승지의 세 가지 법칙



사랑이라는 감정을 대함에 있어 항상 누군가에게 이끌려 다니곤 했던 남자, 차신영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변화였다. 수동적으로 사랑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도 사랑에 대해 능동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규영과 희수처럼 더 늦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과도할 만큼 많은 업무량을 줄이는 것이었다.
‘당분간, 급한 일이 아니면 장 비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해결해 줘. 나는 조금 일찍 퇴근을 할까 해.’
R패션의 기획이사 자리를 맡아 온 이래로 일과 연애를 하는 사람처럼 업무에 파묻혀 지내던 신영의 급작스러운 말에 그의 유능한 비서인 도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아무리 중요한 사적인 일이 있어도 ‘업무가 우선이지.’라고 차갑게 말하던 신영이 퇴근 시간을 당겨서까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도준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신영은 도준의 의문을 해소시켜 줄 생각은 하지 않고 당부할 뿐이었다.
‘여섯 시 이후로는 급한 일이 아님 전화하지 말고. 앞으로 그 이후론 무척 바쁘게 살 테니까. 부탁해. 그럼, 먼저 퇴근할게. 혼자 갈 테니, 따라 나올 필요는 없어.’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인해 당황한 도준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신영은 과감하게 몸을 돌렸다.
‘뭐? 분가를…… 하겠다고?’
신영이 두 번째로 한 일은 지난 32년 동안 줄곧 살았던 집을, 나오는 일이었다.
신영은 자신의 동생 규영이 저보다 세 살이나 어리면서도 먼저 결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공부를 핑계로 집을 떠나 살았다는 것으로 꼽았다. 그에 걸맞게 자신 역시 본가에서 독립을 해야 서둘러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거라 여긴 신영은 빠른 행동력으로 회사 근처에 집을 구한 다음, 아버지인 차 회장에게 본가에서 나가 살겠다는 선언을 했다.
‘네. 집은 구해 놨고 짐만 옮기면 됩니다.’
차 회장은 신영의 말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놀란 제 아내가 신영을 향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왜 그런 결심을 한 건지 물어봐도 되겠냐?’
신영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저도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대체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일과 분가가 무슨 상관이 있냐란 생각이 들었지만, 확고한 신영의 의지를 꺾을 방도는 없어 보였다. 고집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센 신영은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였다.
얼마 전, 신영의 동생인 규영을 장가보낸 후 차 회장 내외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여자라곤 데려온 적이 없는 신영에 대해 걱정하던 중이었다. 규영처럼 병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닌데 무수한 소문만 뿌릴 뿐 결혼할 여자를 데려오지 않는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신영 스스로가 이렇게 의지가 있으니 조만간 소식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자 차 회장은 부인인 유민성 사장과 무언의 눈짓을 주고받은 후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두 번째 단계까지는 수월했다. 업무량을 줄이고 또 분가를 하게 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얻게 된 신영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다가오는 여자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먼저, 그의 시선이 향하는 여자들에게 다가가는 일이었다.
물론 이 일은 앞선 두 가지의 일보다 훨씬 어렵고 힘들었다.
쏟아지는 여자들의 대시를 받아 줄 줄만 알았지 먼저 다가가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던 그에겐 그런 일은, 익숙지 않았다. <차신영의 사랑 찾기>라는 이름의 야심찬 계획에서, 1단계와 2단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3단계에서 매번 실패의 쓴맛을 보았던 까닭은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근래 들어 만났던 많은 여자와 2주도 채우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던 신영은 약간의 상실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내가 매력이 없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 적도 있었지만 그의 옆자리가 비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여자들을 보자니 그것은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문제는…… 상대에 있는 건가.’
만나면 만날수록 더, 자주 보고 싶어 해야 할 상대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저만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소개팅을 해 보아도, 우연한 만남을 가져 보아도 도통 규영이 말했던 그 ‘위대한 사랑’을 나눌 상대가 눈에 띄지 않자 신영은 꽤 우울한 상태였다.
‘내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이사님.’
그러던 차에 신영은 K호텔 로비에서 자신의 부하 직원인 도승지와 마주치게 되었다.
승지는 개인적 사정으로 제 비서 자리에서 물러나는 소영의 자리를 메울 인재를 찾기 위해 도준이 고르고 고른 후보 다섯 명과 면접을 보았을 때 처음 만나게 된 여자였다.
수려한 얼굴에 단정한 말투.
면접장에서 그녀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채용을 할 만큼 승지를 마음에 들어 했다. 재밌는 여자였다. 독특하다고 느껴지는 자신의 이름을 이용하여 어필을 하는 그 자체가. 다른 이들을 굳이 볼 필요도 없다고 여길 만큼 승지는 신영을 만족시켰다. 도준과 함께 그의 밑에서 일할 새로운 비서는 그녀라고, 그의 머리가 확신에 차서 외치고 있었다.
처음엔 차신영의 비서 생활에 쉽게 적응을 하지 못하는 승지를 보며,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이 낮아진 건가― 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이내 도준만큼이나 수월하게 일처리를 하는 승지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었다.
그래. 승지는 단지, 그에게 함께 일하는 휘하의 직원이었을 뿐이다.
업무적으로 얽힌 것 외엔 아무 사이도 아닌.
그의 하루 일과를 관리하며, 가끔은 그의 시중을 들고, 같이 업무를 처리해 나가는 ‘비서’.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신영이 그녀를 뽑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도승지라는 여자는, 놀랍게도 신영이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여성상 그대로였다.
회사 직원들과는 사귀지 않는다는 저 나름의 철칙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지금까진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고, 또 승지 역시 그를 직장 상사 외의 감정으로 바라본 적은 없었기에 인지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신영이 꽤나 좋아하는 마스크를 가진 사람이었다. 수많은 비서 후보 중 그녀를 뽑은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꾸만 눈이 갔고 신경이 쓰였던 건지도.
그가 좋아하는 얼굴에 대화가 잘 통하고, 함께 있으면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 애써 당혹감을 감추려 하지만 얼핏 보이는 그 모습이 꽤나 귀엽게 느껴지는, 여자.
‘굳이 밖에서 찾아야 할 이유는 없지.’
사랑을 찾겠다는 핑계를 대며 수많은 여자를 만나고 다니면서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숨겨진 보석이 있을 줄은 몰랐다. 신영은 새삼 놀라며 어리둥절해하는 승지에게 싱긋 웃었다. 승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영을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은 살다 보면 가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에게 듣는다.
그러다 보면 정신이 잠시 몸을 탈출하는 경우도 생긴다.
지금의 도승지가…… 그러했다.
‘사랑?’
그리 좋은 인상을 가지지 못했던 제 상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사랑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처음엔 제 귀를 의심했다. 오늘 하루만 대체 얼마나 멀쩡한 귀를 의심을 하는 것인지. 하도 의심을 하다 보니 귓구멍이 막힌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았지만 그녀의 청력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음으로 그녀는 안경 한 번 끼지 않았던 제 눈을 의심했다.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모든 상황이 환상은 아닐까?
혹은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헛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을 비벼 봐도, 깜빡여 봐도, 눈앞에 신영이 있는 건 변함이 없다.
그녀의 긍정적 대답을 예상하기라도 한다는 듯 은근히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확실히 그녀가 알고 있던 R패션의 기획이사 차신영이 맞았다.
자신의 시력과 청력에 한 치의 문제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승지는 신영을 직시했다. 그러자 TV 화면을 뚫고 나온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차신영.
그는 회사 내 미혼 여성들의 마음을 전부 사로잡다 못해 그녀들의 입에 시도 때도 없이 오르내리는 사람이었다. 미래의 R패션을 이끌 차기 후계자인 데다 미혼, 거기다 빼어난 외모까지 모두 소유하고 있는 존재 자체가 빛이 나는 남자 중의 남자. 미혼 여성들이 침을 흘리며 탐을 낼 정도로 어디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그의 단점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파묻히다시피 일에 매달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은근히 자주 바뀌는 여자들에 관한 것.
때문에 이사실로 찾아오는 여자들이 늘자 여사원들은 불안해했다. 업무량까지 줄여 가며 여가 시간을 늘린 신영이 혹 결혼할 상대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걱정으로 인해.
승지 또한 그런 그녀들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는 했다. 도준에게서 신영의 퇴근 시간이 조금 빨라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이사실로 찾아오는 늘씬한 여자들이 많아졌으니까. 그러나 결코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때? 나랑 사랑할래?’
차분한 표정으로 심장을 방방 뛰게 하는 말을 태연하게 내뱉는 그의 모습을 떠올려보던 승지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사님.”
그녀는 제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신영을 향해 그제야 입술을 열었다.
“절, 좋아하세요?”
신영은 승지의 말에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를 거두었다.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곧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두루뭉술한 그의 답변에 승지는 날카로운 두 눈을 빛내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있을 것 같다니요? 그럼 절 좋아하는 게 아니란 말인가요?”
무섭게 그를 몰아붙이는 승지의 말에 그는 조금 당황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사랑할래?’라는 물음에 ‘절, 좋아하세요?’라니. 예상지 못했던 답변에 그가 의아해하는 사이 승지는 가라앉은 두 눈으로 그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 안 되겠네요.”
신영은 눈을 크게 떴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다란 정도의 마음을 가진 상대와는 사랑을 할 수 없어요, 저는. 해서, 거절하겠습니다.”
차가운 말투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신영의 두 눈이 흔들릴 만큼의. 너무나 확고해 파고들 틈이 없어 보이는 승지의 대답에 신영은 다급히 말했다.
“나는 우리의 조합이 꽤 괜찮다고 생각해. 마침 승지 씨가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니까.”
타인의 일에 끼어들기를 싫어하는 신영이 그녀를 도와주었던 건 승지를 제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곤란한 일을 겪는 걸 원치 않았던 까닭이었다.
신경이 쓰였다. 승지의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그래서 평소 하지 않던 짓까지 한 것을 보면 은연중에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승지를 향해 한 말은 그 나름의 진지한 답변이었다. 여자들에게 제대로 신경을 쓴 적이 없을 정도로 무심했던 신영이었다. 그런고로 그의 생각으론, 그의 말을 들은 승지는 분명 기뻐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마주할 뿐이다. 괜히 기분이 나빠진 신영이 입술을 꾹 깨물고 있을 때 승지가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열었다.
“부족해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사님. 저는, 이사님께 관심이 없어요. 굳이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않구요.”
“뭐?”
둔기에 맞은 것 같은 강한 충격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말은 신영의 자존심을 무척 자극하는 말이었다. 사귀다 차인 경험은 있어도 다가가는데 차인 경험은 없었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승지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이사님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취향?”
“네, 하나부터 열까지 다요.”
신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승지는 아랑곳 않았다.
“그런 이유로, 거절합니다. 분명 이사님이시라면 훨씬 좋은 여성을 만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여태껏 그렇게 해 오셨잖습니까?”
신영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말을 마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렇게 너무 똑 부러지게 말하면 기분이 상한 내가 당신을 자를 거란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나?”
승지는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그럼 신고를 해야겠죠. R패션의 고위 간부급 인사인 차 모 씨가 제 여비서를 꼬시려다 실패하곤 앙심을 품고 자르기까지 했다, 라고.”
승지는 이윽고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작게 속삭였다.
“저는, 이사님을 믿습니다.”
그녀는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영을 응시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자리에 계속 앉아 있다간 그와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도 남을 것이다. 신영의 생각이 정리되도록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예의일 듯싶어 그 좋아하는 음식을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신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승지는 할 말이 남았냐는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신영은 잠시 머뭇거렸다.
“왜…… 내가 당신의 취향이 아니라는 거지? 내게, 뭔가 부족한 점이라도 있어?”
그리고 그 말에 승지가 웃었다.

* * *

‘없어서 문제죠.’
웃는 얼굴이 생각보다, 예뻤다.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될 만큼.
신영은 홀려 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그녀가 입술을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에게 고정시켰던 눈을 쉽게 떼기가 힘들었다.
미소까지 지으며 하는 그녀의 말은 그의 심장에 와 닿는다.
‘이사님, 제겐 피해야 할 남자가 세 부류가 있습니다.’
‘피해야 할 남자?’
‘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떨릴 정도로,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잘생긴 남자들은 기피 대상 1호입니다. 꼭 생긴 것들이 얼굴값을 하거든요! 제 첫 남자 친구처럼. 이사님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니 그런 표정은 짓지 마세요.’
‘……아.’
‘두 번째로 써도 써도 끝이 없을 정도로 돈이 많은 남자도 피해야 합니다. 돈이 너무 많아도 피곤하거든요. 돈 많은 귀부인에게 한 번 혼이 난 적이 있었거든요. 그 후론 있는 집 자제와의 만남은 피합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는 승지의 얼굴에 씁쓸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잘났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남자. 그리고 능력까지 되는 남자. 이사님도 아시죠? 윤정우. 정우 씨처럼 너무 능력이 좋은 남자는 절 지치게 만들더라구요.’
‘…….’
‘그런데 이 세 가지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분이 누군지 아세요?’
신영은 답했다.
‘나란…… 말인가.’
‘안타깝게도.’
‘…….’
‘해서 이사님의 제의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저는 이사님과 좋은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 관계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좋은…… 관계라.
그녀는 이상했다. 너무 이상해 자꾸만 눈이 갔다. 은연중에 자신이 그녀를 신경 쓰고 있었다는 자각을 하고 난 후론 더더욱.
‘신경 쓰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지금까지 숱한 여자들을 사귈 때 저도 모르게 모습을 좇을 만큼 눈길이 가는 사람들은 만나 보지 못했다. 때문에 연애를 하면서도 규영이 눈을 빛내며 말하던 두근거림도 없었다. 그냥 사귀자면 사귀고, 만나자면 만나고, 밥을 먹자면 밥을 먹는…… 건조한 만남을 가졌다.
신영은 사랑에 있어서 너무도 수동적이었다.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처음엔 신영의 외모와 배경에 혹해 그와의 만남을 지속하던 여자들은 설렘이라곤 없는 나날이 이어지자 점점 지쳐 그를 떠나가기 시작했지만, 신영은 굳이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여자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해 보고 싶다 여긴 그가 처음으로 능동적인 행동을 했건만 승지는 처음부터 그의 접근을 거부했다. 그것도 딱 잘라서. 미련조차 가지지 못하게 만들었기에 자꾸만 생각이 났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승지라는 여자의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닥쳐 버렸다는 사실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그도 침울하게 만들었다.
“왜 이제 와?”
무심코 이사실 문을 열고 들어가선 제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신영은 소파 쪽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에 깊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 어머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유 사장의 모습이 들어오자 그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이다 평정을 되찾았다.
“언제 오신 겁니까.”
그는 상의를 옷걸이에 걸어 두고 유 사장이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걸어오더니 말을 건넸다. 유 사장은 왠지 어두워 보이는 얼굴의 신영을 응시하더니 입술을 열었다.
“오래 기다렸지. 한 시간쯤 됐나?”
“연락을 하지 그러셨어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럼 왜…….”
그녀는 의아한 듯 저를 바라보는 신영을 향해 미간을 팍 구기더니 말했다.
“어이, 아들. 내가 아들 얼굴 보고 싶어서 오는데 꼭 용무가 있어야 해? 너도 규영이처럼 이제 날 냉대하는 거야?”
“예?”
“집 나간 아들이 그리워 찾아온 엄마를 이렇게 냉대하다니. 흑. 엄마는 슬퍼지려고 해, 아들아.”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과장된 액션을 취하는 유 사장을 보던 신영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옆에 털썩 앉았다. 냉대라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저를 달래 주는 신영을 흘깃거리던 유 사장은 언제 눈물을 글썽였냐는 듯 얼굴을 활짝 펴곤 빙긋 웃었다.
“어때? 그 넓은 집에서 혼자 지낼 만은 해?”
업무 보고를 하기 위해 매일 사장실을 들르기는 했지만 정말 업무 보고만 하고 사라지는 신영이었던 터라 본가를 나선 이후로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다.
“예. 장 비서가 도와줘서 조금 적응이 된 것 같습니다.”
유학 시절 때 혼자 살았던 경험이 있어 적응하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렴. 알았지?”
“알겠습니다.”
유 사장은 신영의 시원스런 대답에 마음이 놓인다는 듯 안도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두 눈을 빛냈다.
“그래, 찾는다는 사랑은 잘 찾고 있어?”
그는 천천히 유 사장을 응시했다.
“마음에 드는 여자는 있니?”
“……!”
“숨기려 들지 말고 엄마한테도 좀 털어놔 봐. 혹시 알아? 엄마가 네 사랑에 도움을 줄지도 모르잖아!”
서른둘이나 된 아들의 한 번도 사랑을 해 보지 않았다는 말 때문에 밤잠도 설칠 정도였다. 밖에 내놓으면 부러움을 넘어 찬양까지 듣는 제 두 아들들은 어찌 이리도 하나같이 사랑에 서툰 건지.
겨우 하나를 처리했더니 이젠 남은 하나가 말썽이라 골치가 아프다.
하루라도 빨리. 남은 한 명의 아들도 처리를 해 버려야 마음이 안정을 찾을 것이라 여겼다. 직접 손발을 걷어붙일 마음으로, 그가 사랑을 쟁취하게끔 도우려 했던 유 사장을 향해 신영은 그저 웃었다.
“어이, 차신영. 왜 웃어?”
의미 모를 아들의 미소에 유 사장이 되묻자 신영은 말했다.
“생각보다…… 어렵네요.”
“어려워?”
“어머니.”
“응.”
“제가…… 그렇게 잘났습니까?”
“뭐?”
유 사장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태연하게 묻는 신영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누가 그러더군요. 제가 너무 잘나서 싫다고.”
“잘나서 싫다고?”
확실히 신영을 낳은 유 사장이 보기에도 제 큰아들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났긴 했다. 유 사장은 그런 아들이 너무 잘나서 자랑스러울 뿐이지만 그를 대하는 여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잘나서 싫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신영은 말을 이어 나갔다.
“이상하죠. 사업은 제 손안에 있는 것처럼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건만, 사람의 마음은 마음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특히 전…… 여자들의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신영이었지만 요 근래 들어 그는 조금 자신감을 잃었다. 규영처럼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어 사랑이라는 것에 도전하려 했지만 시도도 하기 전에 꺾여 버렸다는 사실은 그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신영아.”
유 사장은 강철보다도 단단한 큰아들이 주눅 들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태연한 얼굴로 신영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말했다.
“잘나서 싫으면, 잘나서 좋게 만들어 주면 되잖아.”
신영은 유 사장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런 말을 들은 걸 보니, 네가 눈길이 가는 여자는 있나 본데……. 고작 싫다는 말 한 번 들었다고 포기를 하면 내가 알고 있는 차신영이 아니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란 말,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유 사장의 말을 들은 신영의 눈이 크게 일렁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라.
“정말 그럴까요?”
물론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예상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승지로 인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많은 여자와 만나 왔지만 항상 그녀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던 차신영이 과연 그 철옹성 같은 여자를 함락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으니까.
당장 그녀와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머리가 아픈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유 사장의 말은 꺼져 가는 신영의 마음속 불씨를 되살리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신영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어머니를 흘깃거리다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차신영이라는 사람은 제가 마음만 먹으면 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는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여태껏 그가 해 왔던 모든 일들이 성공을 거두어 왔기에 더더욱. 사랑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는 아직 서툴긴 했지만 그건 그가 정말로 사랑을 할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에 흥미를 가지지 못했으므로 예외로 두고, 마음먹은 분야에선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냈다. 그래서 남들보다 이른 시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유 사장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신영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첫째 아들은 항상 저런 표정을 짓고 난 다음에는 그녀를 비롯해 차 회장도 놀랄 만한 일을 해내곤 했다. 아마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 둘째에 이어 이번엔 큰며느리를 볼 수 있는 건가?’
그녀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