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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차신영이라는 남자에게 ‘나랑 사랑할래?’라는 말을 들었지만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단칼에 거절해 버린 용감한 여자, 도승지는 약간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R패션 로비로 들어섰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거절해 버린 자신에 대해 별생각을 하지 않고 퇴근길에 직접 신영에게 인사까지 건넬 정도로 당당했던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단잠을 취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다음 날인, 오늘이었다.
‘헉!’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갑자기 어제 점심때의 일이 생각나기 시작하더니 퇴근할 때 인사를 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어색한 표정을 짓던 신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승지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워낙 충격적인 말을 들어 잠시 주제를 망각하고 있었건만 다음 날이 되어서야 이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감이 왔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사님. 저는 이사님께 관심이 없어요.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않구요.’
어제 점심, 그녀는 냉랭한 얼굴 사이로 살짝 수줍음이 드러난 말을 꺼내던 신영을 향해 말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사님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네, 하나부터 열까지 다요.’
라는 망언까지, 내뱉고야 말았다.
‘나…… 진짜 어떻게 된 거 아냐?’
가슴이 콩닥콩닥 뛰다 못해 터질 것만 같다.
결근을 할까도 생각해 볼 만큼 그녀는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갔어. 나갔다고. 미쳤어!’
아무리 사랑이라는 것에 예민한 그녀지만 상사인 신영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너무 딱 잘라 거절한 것이 마음에 걸려 아침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깨작거리며 억지로 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는 승지를 바라보며 정겸이 크게 당황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승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했다.
‘어떻게 구한 직장인데…… 설마 진짜 자르는 건 아니겠지?’
물론 신영이 그녀를 단번에 자르지는 않겠지만 자신을 거절한 그녀에게 앙심을 품지 않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R패션으로 들어오기 위해 힘들게 면접 준비를 했던 그 당시를 떠올린 승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출근을 하기 위해 그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던 사원들이 승지를 흘깃거렸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아.”
아무래도 단칼에 거절하는 게 아니었다. 일단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하고 서서히 거절하는 편이 더 나았다.
이사실이 있는 20층이 가까워질수록 등 위에 돌덩이가 하나씩 추가되는 기분이다. 어제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는지…….
<20층입니다.>
어느새 승지 홀로 남아 버린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그녀는 활짝 열린 문을 흘깃거렸다. 이윽고 승지는 오늘따라 무겁기만 한 발걸음을 뗐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그녀의 일터인 이사실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앞이 새까맣게 변한다. 꾹 닫힌 이사실의 문고리를 몇 번이고 잡아당길까 말까 고민하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승지는 손을 뻗었다.
‘설마 자르겠어!’
사랑하자란 제의를 거절했다고 유능한 비서를 자르지는 않을 거다. ‘그래, 그럴 거다!’란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던 승지는 문을 열어 이사실 안으로 들어섰다.
굳게 닫힌 신영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 때 아침이라면 활짝 열었을 그의 방이 닫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려던 승지는 고개를 돌리다 자신이 온지도 모르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도준을 발견하곤 그에게 다가갔다.
‘뭐지?’
도준은 펜을 들어 A4 용지에 글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승지는 도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러나 도준은 여전히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었다. 승지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 아, 승지 씨 왔군요!”
그제야 도준은 승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 도준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승지가 말했다.
“예. 조금 늦었죠? 죄송해요.”
“아니에요. 아직 출근 시간 전이잖아.”
“후후, 그래도 다음번엔 선배님보다 일찍 올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죠?”
누군가 이사실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집중하며 열심히 펜을 움직이던 도준을 응시하며 승지가 물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난감해 보이는 얼굴로 책상 위에 있던 A4 용지를 들며 도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대체 이게 뭔지 정말. 아침에 이사님이 주시더라구요. 백문백답이라고 하던데…… 갑자기 이걸 왜 쓰라고 하신 건지.”
승지는 멍하니 두 눈만 깜빡였다.
‘백문백답?’
눈을 동그랗게 뜨는 승지를 흘깃거리던 도준은 손뼉을 탁 치더니 말을 이었다.
“참, 승지 씨도 써야 하니 이사님께 가 보세요.”
“저도요?”
“네. 승지 씨 오면 바로 보자고 하셨거든요. 이사님은 안에 계십니다.”
“…….”
“승지 씨?”
“아, 네.”
안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백문백답이라니. 어이없는 상황에 넋을 놓고 있는 승지를 바라보며 도준이 재촉하자, 그녀는 도준의 책상 맞은편에 있는 제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곤 굳게 닫혀 있는 신영의 방 앞에 섰다.
“이사님, 도승집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신영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는 시간을 좀 벌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음을 놓고 있었건만 이렇게 떠밀리듯 그를 만나러 들어가야 하니 승지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문을 두드리고 나서 열었다.
“아, 왔어?”
문을 열자마자 고개를 드는 신영을 향해 좋은 아침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어제 고백하자마자 바로 차인 남자라곤 생각되지 않는 태연한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신영을 보자 집에서부터 회사로 들어설 때까지 가슴 졸인 제 모습이 왠지 바보스러워 승지는 멍하니 서 있었다.
“절 보자고 하셨다구요?”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하던 신영은 책상 위에 얹어져 있던 두툼한 서류를 승지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받아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승지는 도준의 책상 위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서류의 정체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뭐죠?”
도준에게 이미 들었으므로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으나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러자 신영은 대답했다.
“백문백답.”
역시나. 승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든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래도 내가 휘하의 직원들에게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아서 말이야. 사과하는 의미로 지금이라도 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목소리가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30분 내로 다 써서 내게 제출하도록.”
그동안 그가 시키는 일은 충실히 수행해 냈던 유능한 비서 도승지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지금 저 남자가 장난을 치는 것일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도 멀쩡해 보인다.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신영의 얼굴은 태연하다 못해 평온했다.
“아, 그렇지.”
신영은 멀뚱히 서 있는 승지에게서 시선을 돌리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책상을 뒤척였다. 그리고 또다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혹 궁금해할까 싶어 내 것도 만들었어.”
직장에서 왜 <백문백답>을 작성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상사가 시키는 일이니 일단 하기는 할 것이다.
“아, 그건 필요 없…….”
그러나 상사의 백문백답까지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승지가 정중히 사양하려 하자 신영은 그녀의 말을 툭 자르며 말을 이었다.
“다 외웠는지 퇴근하기 전에 확인해 볼 거니까 외우도록 해.”
시작은, 평범했다.
1. 이름은?
― 차신영
2. 나이는?
― 서른둘
3. 성별은?
― 남
4. 혈액형은?
― B
5. 키와 몸무게는?
― 187, 70
6. 집 주소는?
―XX시 XX구 XX동 XX 클래스 A 동 1909호
7. 하는 일은?
― R패션 기획이사
8. 미혼인가, 기혼인가?
― 미혼
9. 좋아하는 음식은?
― 가리지 않음
10. 싫어하는 음식은?
― 없음
11. 좋아하는 연예인?
― 없음
12. 싫어하는 연예인?
― 없음
13. 잘하는 요리?
― 웬만한 건 다 함
14. 첫사랑?
― 기억나지 않음
중간도, 그리 튀지는 않았다.
30. 노래방 18번곡은?
― 노래방? 없음
31. 여가 시간 즐겨 하는 일은?
― 독서
32. 좋아하는 스포츠는?
― 없음
33. 좋아하는 영화 장르?
― 안 봄
34. 좋아하는 계절?
― 겨울
35. 자신이 생각하는 단점?
― 딱히 없지만 아직 사랑을 해 보지 못한 것
36. 자신이 생각하는 장점?
― 너무 많아서 나열하기 힘듦
37. 얼굴에서 가장 자신 있는 부위는?
― 자신 없다고 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38. 얼굴에서 가장 자신 없는 부위는?
― 없음
그러나 마지막을 향할수록, 승지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90. 기억에 남는 책은?
― 그대, 지금은 사랑할 때
91. 좋아하는 구절/명언은?
― 사랑하지 못하는 자, 메마른 자
92. 지금 고민은?
― 사랑을 하고 싶은데 그게 어려움
93.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당신이 생각한 해결책은?
― 사랑하기
94. 지금 가장 부러운 사람은?
― 사랑하는 사람을 가진 사람
95.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은?
― 사랑
96.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 사랑
97. 현재 사랑하는 중인가?
― 계획은 세워 뒀음
98. 사랑을 믿나?
― 믿음
99.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은?
― 우리, 사랑하자
100.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은?
― 진짜 나랑 사랑 안 할래?
‘시위야.’
시위.
이건…… 시위가 분명하다.
차신영이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속이 좁은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부하 직원과의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 만들었다는 그의 백문백답을 억지로 외우게 된 도승지는 초반부와는 달리 후반부를 달릴수록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그의 대답을 보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업무 시간 내내 틈틈이 신영의 백문백답을 외우느라 쩔쩔매던 그녀와는 달리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을 하고 있는 도준을 봐서는 그의 백문백답을 외우는 건 승지만의 일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여겼다. 어제의 일로 신영이 그녀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싫습니다.’
거절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하긴 했지만 그런 그녀를 향해 예상했다는 듯 답하던 신영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명령이야.’
확고한 의지를 표하는 그의 차가운 답변에 금세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던 승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백문백답을 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흘러 퇴근 시간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승지 씨, 이사님이 부르셔.”
회의를 마치고 나온 도준이 부들부들 떨며 신영의 백문백답을 외우던 승지를 향해 말하자 승지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요?”
“얼른 오라고 하시네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제자리에 앉는 도준을 흘깃거리던 승지는 울상을 지었다.
‘아직 다 못 외웠는데…….’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던 후반부를 제외하고 초반부는 다 외우지 못하던 상태였다. 승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하늘은 내게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인가! 그의 곁에는 왜 사랑할 수 있는 여자가 없는 것인가! 쉽게 식을 것이라 생각했던 관심이 예상 외로 길게 늘어지자 골머리가 아팠다.
“이사님.”
승지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호흡을 가다듬더니 문을 열었다. 신영은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다 외웠어?”
반들반들한 그의 얼굴을 보자니 괜스레 화가 났다. 자신은 이렇게 마음을 졸이고 있건만 그는 저리도 여유롭다니. 게다가 상사의 명령이라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올바르지 못한 처사다. 그녀는 일을 하러 이곳에 온 것이지 신영의 연애 대상이 되기 위해 취직을 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승지는 좀 더 강경하게 나갈 필요성을 느끼며 그를 불렀다.
“……이사님. 지금, 제게 화풀이를 하시는 겁니까?”
신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지 씨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승지는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외쳤다.
“아님 뭡니까? 왜 저한테만 이걸 외우라고 시키신 거죠? 그리고 100번 답은 황당하네요! 이사님,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이사님은 제 취향이 아니라니까요?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떽떽거리는 승지를 바라보던 신영은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정말 알면 알수록 재밌는 여자다. 껍질을 벗기면 벗길수록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양파 같은 여자. 그는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는 승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도승지 씨.”
“네!”
“그래서, 다 외웠다는 소리야 아님 아직 외우지 못했다는 소리야?”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르려던 승지는 순간 당황했다.
“오늘따라 일이 많아서 다는 못 외웠…….”
신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외우지, 못했다?”
승지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 갑자기 왜 상황이 역전이 된 거지?
그녀가 등 뒤로 땀을 흘리는 사이, 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웃옷을 걸쳐 입으며 중얼거렸다.
“난 업무 시간을 쪼개 가며 당신의 백문백답은 다 외웠는데, 도승지 씨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도록 아직 못 외웠다 이거지.”
승지는 크게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저, 저는…….”
“상사의 명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다니 정말 실망스러워, 도승지 씨. 유능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군.”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신영을 보던 승지는 순간 울컥한 얼굴로 그를 마주 봤다.
“이사님!”
신영은 밖으로 나가려다 승지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일 아침까진 외우겠습니다.”
“그래?”
“네.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전부 외워 오도록 하지요.”
그러자 신영이 빙긋 웃었다.
“그럼 그렇게 해. 기대할게.”
그는 승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바라보던 승지는 주먹을 꽉 쥐며 의지를 다지다 입을 쩍 벌렸다.
‘이, 이게 아닌데…….’
* * *
다음 날.
도승지는 밤을 지새우면서까지 차신영의 백문백답을 모조리 외웠다.
외우는 것을 잘하지 못하기에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연습장에 필기까지 하며 열심히 외웠다. 정겸을 비롯한 그녀의 오빠들은 승지의 기이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야식까지 챙겨 줬다.
좋아하는 음식이며 차종, 노래, 취미, 특기, 그리고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사랑이라는 사실 등등을 억지로 외웠기에 차신영이란 남자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된 기분이었지만,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남자의 일면을 알아 가는 건 그녀가 원치 않았던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이것도 업무의 일종이라고 몇 번이고 마음을 가다듬고 난 후에야 조금은 초연해졌다.
노력 끝에 백문백답을 토씨 하나 안 빠뜨리고 외우게 된 승지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앉은 그에게 얼른 외웠는지 확인해 보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신영은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뭐, 어련히 외웠겠지. 난 도승지 씨를 믿어.’
그 말을 던지고 다시 서류에 집중을 하는 신영으로 인해 승지는 한참이나 움직이질 않았다. 그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일 봐.’
멍하니 서 있는 승지를 흘깃거리던 신영이 말을 흘리자 그녀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화가 나기는 하지만 어쩌겠나. 됐다고 하는데.
그녀는 다시 유능한 비서로 돌아가기 위해 백문백답의 일을 잊어버리고 업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흘러 퇴근 때가 되자 승지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아, 승지 씨.”
요즘, 여섯 시 정각만 되면 칼 퇴근을 하던 자신의 상사를 떠올리며 오늘도 여섯 시에 퇴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신영이 이사실을 나서자마자 집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가방에 소지품을 넣던 승지는 그녀의 행동을 빤히 보는 도준을 발견했다. 도준은 의아해하는 승지를 향해 조금은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저기…….”
“왜 그러세요, 선배님?”
자꾸만 머뭇거리는 도준의 행동이 이상해 승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 퇴근 시간 말인데.”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다.
그는 승지를 바라보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사님께서 다시 원래대로…… 퇴근하신다고 하시네.”
승지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왜요?”
말까지 더듬거리는 그녀를 향해 도준이 어색하게 웃었다.
“다시 일에 전념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아.
“그렇게 알아요.”
그리곤 도준은 언제 말을 꺼냈냐는 듯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승지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이내 굳게 닫힌 신영의 방문을 노려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백문백답에 이어 퇴근 시간을 조절하다니!
승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다시 8시로 늘어난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려던 승지가 신영에게 인사를 마치고 나오다 도준을 발견하곤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하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화답했다.
“잘 가요, 승지 씨. 내일 보죠.”
“예.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승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더니 도준이 다시 말을 건넬 사이도 없이 이사실을 벗어났다. 도준은 한참을 그녀의 뒤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신영의 방으로 향했다. 신영도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는지 서류와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역시 수상해.’
지난 2주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사무실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사실 정도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며 그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사님.”
도준은 친절하게도 부하 직원을 먼저 퇴근시켜 준 신영을 향해 다가가 그를 불렀다.
“장 비서? 아직 안 갔나?”
신영은 도준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준은 놀라는 신영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술을 열었다. 그는 이내 가방을 집어 드는 신영을 향해 마음속에 맴도는 말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할 말 있어?”
“예.”
“뭐지?”
“…….”
“장 비서?”
도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이사님,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묻고 싶은 게 뭔데?”
도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다시 입술을 달싹인다.
“혹, 도승지 씨에게 관심이 있으십니까?”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어느 순간 급변한 신영의 태도에 적응하느라 내색하지 않았지만 조금 힘들었다. 그가 짐작하기에 신영의 태도는 정확히 백문백답 사건 이후로 변했다. 그리고 그 태도 변화의 원인은 분명 승지에게 있었다. 정말 확연하게 느낄 정도로 신영은 승지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으니까.
‘오늘은 회식을 하도록 하지.’
다시 8시로 늘어난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려던 승지의 발목을 잡질 않나,
‘오늘은 도승지 씨랑 함께 나가는 게 좋겠어.’
도준을 데리고 외근을 하러 나가던 그가 돌연 승지를 대동하겠다는 선언을 하질 않나,
‘앞으로 점심은 다 같이 하도록 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는 불편한 점심 식사를 제안하지를 않나,
‘도승지 씨는 정말로 유능한 인재야. 당신 같은 비서를 둔 나는 행운아군. 아, 물론 장 비서도 마찬가지야.’
평소엔 잘 하지도 않던 칭찬 세례를 퍼부으며 승지를 당황하게 만들지 않나.
그가 알고 있던 차신영의 모습은 도통 찾아볼 수 없는 지난 2주간은 도준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만들었다. 차신영이 도승지에게 일방적 구애를 퍼붓고 있다는 것. 이 사실에 확신을 가지기까지 2주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에러라면 에러였지만서도.
신영은 도준의 물음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장 비서.”
“네.”
“그걸, 이제 알아차렸나?”
여태껏 그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신영의 마음을 헤아렸던 도준이었건만 이번엔 조금 느렸다. 도준의 두 눈이 신영의 대답에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신영은 말을 잇지 못하는 도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꽤 관심이 있어.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그런데 쉽지 않아. 어떻게 해서든 관심을 끌려고 노력해 봤는데 끄떡도 안 하거든. 그래서…… 지금 고민 중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 먼저 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말로 거절의 의사를 전달한 승지를 알아 가기 위해 백문백답을 받아 냈고,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기에 6시로 옮겼던 퇴근 시간을 다시 8시로 늘렸다. 그녀의 백문백답을 토대로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파는 곳으로 회식을 나갔고, 점심도 먹였다. 유능하다는 말을 좋아하는 것 같기에 다른 사원들 앞에서 칭찬도 늘어놔 줬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 그녀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도승지는 차신영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 않았다. 정말로 그녀는 그를 상사 외의 다른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애가 탄다.
말을 걸어 봐도 딱딱한 대답이 돌아오기에 어떻게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에겐 그가 남자로서 느껴지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답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며 쓰게 웃는 모습을 응시하던 도준은 여태껏 그의 주위를 맴돌던 여자들과 승지를 비교해 보았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지금껏 그가 만나 왔던 여자들에게 대했던 방법으로 승지를 대한다면 분명 승지는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는 건 좋은 생각이긴 했지만 그 늘어난 시간 동안 신영은 일도 병행했다. 그것이 잘못된 거다.
‘좋아!’
도준은 승지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그가 알고 있던 그 어떤 여자들보다 싹싹하고 성실했다. 외모도 여태껏 신영과 만났던 여자들과 비교했을 때 결코 못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미래에 R패션의 안주인이 된다면 아마 R패션은 더 승승장구할 수 있으리라.
“이사님.”
생각을 마친 도준은 자신이 보기에도 사랑에 있어서는 아직 서툴기만 한 자신의 상사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도준은 그의 상사를 좋아하는 편이었고 상사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으니까. 다시 자신을 향해 시선을 마주하는 신영을 보던 도준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조금, 도와 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