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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4.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하아.”
이상하다.
그렇게 좋아하는 밥알이건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지를 않는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눈앞이 깜깜해져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온다. 왜 이러는 거지? 복잡해진 머리로 인해 승지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힘없이 숟가락질을 하며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그녀를 흘깃거리던 셋째 오빠 진겸은 결국 참다못해 입술을 열었다.
“어이, 도승지. 웬 한숨이야? 너, 요즘따라 한숨이 많아졌어.”
승지는 진겸의 말에 그를 슥 바라보더니 다시 밥그릇에 숟가락을 푹 박으며 중얼거렸다.
“몰라. 머리 아픈 일이 많아서 그래.”
지끈거리는 머리는 아프다 못해 터져 버릴 것만 같다. 제길. 이게 다 제 상사 차신영 때문이다. 승지는 또다시 후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김치를 향해 젓가락을 뻗었다.
차신영.
이 망할 상사!
아주 이상한 데다 곤란하기까지 한 남자.
싫다는 사람에게 왜 자꾸 구애를 펼쳐 대는 걸까.
‘사랑할래?’란 제안을 받은 이후로 평온하기만 했던 그녀의 일상은 하루도 조용히 보내는 날이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승지는 세 명의 오빠들 사이에서 홀로 자라 왔던 터라 눈치가 백 단이었다. 그런고로, 지난 2주간 어딜 가든 그녀를 대동하고 다니려는 신영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분명 그는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온몸으로 티를 다 낼 만큼.
각종 요상한 방법으로 승지를 곤란하게 만드는 신영으로 인해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되도록 조용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싶은데 말이다.
물론 태연하게 대처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그가 묘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그리고 그녀를 칭찬할 때마다 눈치 없이 벌렁거리기 시작하는 심장 때문에 꽤나 곤란하다. 절대로 시선을 주어서도, 마음이 흔들려서도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하고 있었기에 겨우 버틸 수 있었지, 포기를 하지 않고 신영이 그런 무지막지한 대시를 고집한다면 정말 홀라당 넘어갈지도 모른다.
승지는 바랐다.
제발 그런 상황까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신영과 같은 사람은 언제 돌변할지 몰라 무섭다. 당해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그런지, 더욱 두렵기만 하다. 만약 차신영이란 남자가 조금만 덜 잘났어도 모르는 척 넘어가 줄 수 있었건만 워낙 잘났기에 꺼려진다.
오늘은 또 무슨 방법으로 그녀에게 다가올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져 버릴 지경이다. 업무에 지장을 받는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정말 사표를 쓸 각오도 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승지는 이 회사를 사랑하는 편이었다. 급여도 다른 직원들보다 많았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어떡하면 좋냐.’
점점 창백해지는 승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은겸은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그녀를 불렀다.
“야, 꼬맹이.”
“으응?”
“전화 오는데?”
그는 깊은 상념에서 벗어나 슬며시 고개를 드는 승지를 보며 그녀의 방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살짝 열린 그녀의 방에서 요란한 벨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승지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구야?”
아침 7시.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올 만한 사람은 없었다. 혹, 요즘 들어 자주 걸려 오는 스팸 전화가 아닐까 의심하며 터덜터덜 방을 향해 걸어가던 승지는 침대 위에서 춤을 추듯 움직여 대는 핸드폰을 발견하곤 액정을 내려다봤다. 이윽고 승지의 눈이 점차 커지더니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열었다.
“선배님?”
―아, 승지 씨.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들려오는 듣기 좋은 목소리가 승지의 귀를 울린다. 전화의 상대는 다름 아닌 도준이었다.
―미안해요, 아침부터. 깨어…… 있었죠?
“네. 선배님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도준의 갑작스런 전화에 승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술을 움직였다. 도준은 그런 승지의 대답에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 말을 이었다.
―음, 저 그게…….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도준의 머뭇거림에 승지는 더욱 의아해졌다. 그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승지 씨, XX동 근처에 살죠?
“네? 아, 네.”
XX동이라면 승지네 동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상하게 동네 이름이 익숙하다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승지를 향해 도준은 말을 이어 나갔다.
―운전은 할 줄 알고? 요리도 할 줄 아시죠?
스물이 되자마자 면허를 땄기에 운전 정도야 익숙하다. 술 취한 오빠들을 데리러 직접 차를 몰고 간 적도 있었고. 요리…… 는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계란 프라이 정도는 할 수 있다. 그 정도면 요리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결론을 내린 승지는 자신 있게 외쳤다.
“당연하죠!”
―잘됐네. 그럼……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도준의 목소리엔 절박함이 깔려 있었다. 승지는 지난 6개월간 그와 함께 일을 하면서 처음 듣는 부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껏 그에게 배우기만 했는데 드디어 도준이 그녀에게 부탁을 할 만큼 성장한 것인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그의 부탁이 무엇인지 들어 보지도 않고 외쳤다.
“네, 선배님! 어떤 부탁이든 들어 드릴게요!”
이것이, 사고의 시작이었다.

* * *

―내가 오늘 개인 사정 때문에 결근을 할 것 같아 그러는데 이사님 좀 깨우러 가 줄 수 있어요? 아, 그리고 오늘 하루 동안 나 대신 이사님이랑 함께 움직여 줘요.
과연 도준의 부탁이 무엇일까. 어떤 부탁이기에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하는 것일까. 기대감이 넘치는 얼굴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도준의 목소리만 들리기를 기다리던 승지의 귀를 울리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네?’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멍하니 두 눈만 깜빡이는 승지의 모습을 마치 생생히 보고 있는 듯 도준은 말을 이어 나갔다.
―부탁할게요. 집에 정말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요.
‘아, 저, 저는…….’
―참! 어제 이사님이 술을 드셨다던데…… 그분이 술에 좀 약하셔서 아마 깨우기 힘들 거니 마음 단단히 먹어요.
‘서, 선배님!’
―미안. 보상 차원으로 승지 씨가 원하는 날에 휴가 내줄게요. 난 승지 씨만 믿어요!
뒤늦게 목청을 높여 크게 외치는 승지의 목소리에 들려온 답변은 없었다. 승지는 끊어져 버린 전화를 붙들며 한참을 서 있었다. 지금 선배님이 뭐라고 한 거지? 도준에게 뭔가 요상한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현실인지 자각할 수가 없어 그녀는 손을 들어 뺨을 꼬집어 봤다.
‘으윽.’
아팠다. 그것도 너무.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세게 꼬집어서 뺨에 자국까지 생겼다. 그녀는 생생하게 느껴지는 현실에 정신이 확 들어 다시 그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도준의 전화는 불통이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털썩 주저앉은 승지는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계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XX동이 도준의 입에서 나올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젠장할! 이번 일도 분명 신영이 꾸민 일이 분명하다. 그녀는 얼굴을 확 구기며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짜 안 될 사람이네! 이번엔 확실하게 말해야겠어!’
회사에서도 모자라 이젠 비서를 이용하기까지 하다니. 그렇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건만 꿈쩍도 안 하는 신영에게 따끔한 한 마디를 해야겠다 마음먹은 도승지는 씩씩거리며 얼른 샤워를 했다. 마저 밥을 먹고 가라는 정겸의 말에 바빠서 안 되겠다는 말을 날리곤 차를 타 신영의 집으로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백문백답으로 억지로 알게 된 신영의 집을 찾아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도준이 미리 말해 놨는지 친절하게 그녀를 신영의 집까지 안내하는 경비원의 뒤를 따라 움직인 승지는 굳게 닫혀 있는 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거리며 고민하고 있었다.
현재 시간 8시. 출근 시간 전까지 그를 깨워 회사까지 데려가려면 지금 당장 신영의 집으로 들어가야 하건만 이상하게 망설여진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핸드폰으로 도착한 신영의 집 도어록 비밀번호가 적힌 도준의 문자와 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 세 명과 함께 살고 있는 승지이지만, 외간 남자의 집에 이렇게 불쑥 찾아간 적은 없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방방 뛰는 것을 겨우 진정시키던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초인종을 꾹 눌렀다. ‘이건 업무의 일환일 뿐이야, 너무 긴장하지 마.’란 말을 연신 되뇌며.
딩동―
“…….”
워낙 일찍 회사에 출근을 하는 신영이었기에 지금쯤이면 분명 일어났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그의 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못 들었나?’
승지는 1분을 기다려도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다시 한 번 초인종을 꾹 눌렀다.
딩동―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
‘안 일어난 건가?’
조용하기만 한 집을 가만히 바라보던 승지는 자꾸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압박감에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바라봤다. 그리곤 문자에 선명히 찍혀 있는 도어록 비밀번호를 몇 번 중얼거리며 눈앞의 도어록에 손가락을 뻗는다. 한 자, 한 자 틀리지 않게 꾹꾹 누르고 별표를 누르자 ‘열렸습니다!’란 안내 멘트가 나오더니 철커덩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요란하게 뛴다. 도둑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건지. 승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손잡이를 잡았다.
“들……어갑니다.”
살금살금 발을 안으로 들여놓은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돌아섰다. 승지는 준비된 듯 놓여 있는 현관 앞의 슬리퍼를 신으며 그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 사는 집 맞아? 썰렁하다 못해 으스스하네.’
생긴 것부터가 찬바람이 쌩쌩 날리게 생긴 신영이었지만 이렇게 깔끔하다 못해 썰렁해 보이기까지 한 집은 처음이다. 정말 필수 가구 외엔 그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새삼 집에서 밥을 먹고 있을 제 오라버니들이 생각나 피식 웃던 그녀는 겨우 하나밖에 없는 장식장으로 걸어갔다.
‘회장님이다! 어머, 사장님도 계시네.’
장식장 안의 사진 중에는 그녀에게도 익숙한 R패션의 차 회장 내외의 사진도 있었다.
‘의외로 효자구나.’
사장님이 자주 이사실을 들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집에 부모님의 사진을 떡하니 놓아둘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승지는 신영에 대해 몰랐던 점을 알게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히 시선을 돌리자 이번엔 그와 쏙 빼닮은 한 남자와 웬 여자, 그리고 신영이 함께 찍은 사진이 보인다.
‘어리네.’
방긋방긋 웃고 있는 여자가 승지의 눈을 자극한다. 그의 비서로 취직을 하게 된 후로 수많은 여자가 이사실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지켜봤던 승지였지만 처음 보는 여자였다. 신영과 아마 그의 동생일 거라 짐작되는 남자 사이에서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승지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야. 얼른 깨워야지!”
이상한 기분이 몽글몽글 피어나 한참을 서 있던 그녀는 자신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써 십 분이 흘러 버렸다는 사실에 놀라 자꾸만 눈길이 가는 장식장에서 시선을 뗀 그녀는 주위를 살폈다.
승지가 알기론 이 넓은 집에 신영은 혼자 살고 있었다. 몇 개씩이나 되는 방을 두리번거리며 그가 있을 곳을 짐작하던 그녀는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방들을 제외하고 살짝 열려 있는 방을 향해 걸어갔다.
‘아.’
문고리를 살며시 밀자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고 자고 있는 신영의 모습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조심스레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확실히…… 잘생기긴 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할 말을 잃어버릴 만큼.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사람을 홀리는 탁월한 외모의 소유자인 제 상사는 그녀가 자신의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잠에 빠져 있었다.
꿀꺽. 잘난 남자들을 꺼려하는 그녀긴 하지만, 사실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가 그녀에게 대시만 하지 않았더라도 남몰래 그의 얼굴을 훔쳐보는 일을 감행할 만큼 눈이 가는 얼굴이기도 하고.
‘내가 뭐하는 거야.’
이렇게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간 결국 또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승지는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이사님.”
그는 미동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승지는 조금 더 큰 소리로 그를 부르기로 결심했다.
“이사님!”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변함이 없다. 새어 나오는 한숨을 겨우 참은 그녀는 침대로 조금 더 다가가서는 허리를 숙이며 팔을 뻗었다.
“이사님, 이사님!”
손가락만 살짝 뻗어 그의 팔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살짝 건드리자 신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승지는 효과가 있나 싶어 이번엔 힘을 주며 외쳤다.
“이사님, 일어나세요!”
“흐음…….”
“이사님!”
승지로 인해 자꾸 몸이 흔들리자 신영이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는다. 조금만 더 흔들면 깨울 수도 있을 것 같아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리던 승지는 그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살짝 느껴지는 술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이사님! 일어나시라니…… 악!”
그의 팔을 잡고 소리치던 승지는 갑자기 그녀의 목을 향해 뻗어 오는 팔 하나에 비틀거리며 그만 신영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말았다. 코끝을 자극하는 그의 체취와 술 냄새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고 신영이 낮게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한데, 그것을 채 인식하기도 전에 승지는 사력을 다해 몸을 일으키며 그의 가슴을 세게 내려쳤다.
“일어나라고, 이 인간아!”

쥐구멍이 있다면 그곳에 숨고 싶을 심정이 들 정도로, 승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온몸으로 아프다는 걸 표현하고 있는 신영은 가슴 한군데 떡하니 찍혀 있는 두 개의 손바닥 자국을 매만지며 승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를 입힌 당사자인 승지 역시도 가슴이 쿡쿡 찔릴 정도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선명한 손바닥 자국은 보기만 해도 무척이나 아파 보였다.
‘그러길래 왜 옷을 벗고 있냐고. 상의 안 입고 자? 제길!’
벌써 3분째.
진작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승지를 바라보며 무어라 말을 하지 않는 신영으로 인해 심장의 격한 뜀박질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질 않는다. 그의 입술 사이로 무언가의 말이 새어 나오기를 간절히 기원해 봤지만 가슴에 박힌 빨간 손바닥 자국만 쓰다듬을 뿐이다.
민소매 정도는 입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은 그는 이불 아래로 상의를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선명하기만 한 제 손바닥 자국에 승지는 울상을 지었다.
“도승지 씨.”
아무 말이나 좋으니 제발 한 마디만. 입술만 좀 움직여 달라고 속으로 연신 되뇌던 승지는 그가 그녀를 발견한 지 무려 5분이 되어서야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신영의 말에 고개를 획 들어 올렸다.
“네, 이사님!”
그러자 신영은 속을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를 그녀에게 고정시키며 말했다.
“손이…… 무척 매운 편이군.”
어느새 부풀어 오르기까지 한 손바닥 자국에 승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런 편이죠. 하하.”
승지는 신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얼른 입을 닫았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도준이 부탁했다고 하더라도 거절하는 거였다. 승지는 아침에 걸려온 그 전화를 받는 게 아니었다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승지 씨가 여기 왜 있지?”
그리고 그때.
항상 자신을 살갑게만 대해 준 도준을 처음으로 원망하던 그녀의 귀에 신영의 말이 들렸다. 그에게 저질러 버린 일로 인해 잠시 망각하고 있던 사실이 떠올라 승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사님이…… 시키신 일이 아닌가요?”
“무슨 소리야? 시키다니?”
신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자 승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시킨 게 아니라구?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신영의 모습으로 보아, 확실히 거짓을 고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승지 씨?”
입을 다무는 그녀를 다시 부르는 신영을 가만히 쳐다보던 승지는 이내 언제 넋을 놓고 있었냐는 듯 말한다.
“선배…… 아니 장 비서님께 부탁을 받았습니다.”
“부탁?”
“예. 이사님은 술을 드시면 그다음 날은 누가 깨우지 않는 이상은 못 일어나신다고 해서 깨우러 왔습니다.”
“그 일은 장 비서가 해야 하는 걸로 아는데, 왜 승지 씨가 여기에 있는 거야?”
“장 비서님은 개인적 사정으로 결근을 하신다고 합니다. 이사님께는 어제 말씀드렸다고 하던데 못 들으셨나요?”
신영은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승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미간을 찌푸리다 문득 출근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가리키는 시계를 발견하며 화들짝 놀라 말했다.
“일단, 얼른 씻으세요. 장 비서님이 결근을 하셨으니 오늘 하루는 좋든 싫든 저와 함께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싫지는 않은데.”
“네?”
지금 준비해도 출근 시간에 맞춰 회사에 도착하는 것은 무리다. 다행히 회사의 대표나 마찬가지인 신영이었기에 꼭 정시에 도착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사실로 가 전화를 받고 스케줄 관리를 해야 하는 승지로서는 다급했다. 하지만 신영은 알 수 없는 말만 내뱉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신영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을 걷어 내려 했다.
“꺄악!”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신영과 함께 이 집을 나서야겠다며 몇 번이고 중얼거리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벗어나는 그를 향해 다시 말하려다 발견한 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저, 저 남자가 지, 지금……!’
얼마나 놀랐는지 말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승지는 입술을 덜덜 떨며 그를 바라봤다. 신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그녀를 바라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놀라?”
“이, 이, 이…….”
“이 뭐?”
“이사님! 미, 밑에 아무것도 안 입었다면 안 입었다고 말씀하셨어야죠!”
물론 아예 안 입은 것은 아니나, 브리프만 입은 건 옷을 입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다. 상의를 입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망할!
본의 아니게 남자의 드러난 몸매를 감상하게 된 승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얼굴을 빨갛게 붉힌 그녀가 고개를 획 돌리며 버럭 외치자 신영은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로 들렸다. 승지는 소리쳤다.
“뭐가요!”
신영은 대답했다.
“보통 여자들은 나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던데. 감상하기 좋은 몸이라더군.”
“그, 그건 그 여자들만 그렇겠죠!”
여전히 다른 곳을 바라보는 승지의 귀에 신영의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자꾸 흘깃거리나.”
어머! 그러고 보니 본능적으로 자꾸만 눈이 신영의 몸을 향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승지는 벌떡 일어났다.
“저, 저는 아무것도 안 봤어요! 못 봤어요!”
가급적 그를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며 승지가 외치자 신영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럼 뭐, 그렇게 알고 있을게.”
왠지 대충 넘어가려는 신영의 말에 승지는 다시 외쳤다.
“안 봤습니다, 이사님!”
“알았어.”
“정말 안 봤다니까요!”
“그래그래.”
“이사님, 믿어 주세요!”
“도승지 씨.”
인정하고 싶지 않아 바락바락 소리치던 승지는 갑자기 진지해진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흡!’
신영은 형용할 수 없는 묘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서 있었다. 이상하게 아래로 내려가려는 시선을 억지로 그의 눈에 고정시키던 그녀는 천천히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에 놀라 숨을 크게 들이켰다. 두근두근. 가슴이 심하게 들썩인다.
“승지 씨.”
멍한 얼굴로 그의 목젖이 움직이는 걸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의 귀에 신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꿀꺽. 입 안이 바짝 말라 갔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삐뽀삐뽀 울리기 시작했다. 승지는 찐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자꾸만 다가오는 신영을 피해 뒷걸음질 쳤다. ‘이, 이사님. 왜 이러세요!’란 말이 차마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다.
왠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묘하고 끈적한 분위기. 브리프만 입은 남자와 그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겨 버린 한 여자. 그리고 둘 말고는 아무도 없는 방.
두근두근. 쿵쾅쿵쾅.
눈치 없는 심장이 염치 불구하고 마구 뛰기 시작한다. 새빨간 입술이 조금씩 들썩이려 하니 이상하게 긴장이 된다.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쉰 승지는 고요한 가운데서 크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깜빡였다.
신영은 거의 헐벗었다 싶은 반나체의 모습으로 승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속을 읽을 수 없는 깊고 깊은 눈동자를 그녀의 얼굴에 콕 박으며 말했다.
“……건가?”
마법에 걸린 듯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좇으며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신영의 말을 놓치고야 말았다. 네? 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신영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피식 웃으며 붉은 입술을 다시 움직였다.
“안 나갈 거냐고 물었어.”
승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가다니요? 어디를요?”
내키진 않지만 존경하는 그녀의 선배인 도준의 부탁을 받고 온 상태였다. 그 일이 무엇일지라도 상사가 시킨 일은 훌륭히 완수해야 한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던 도승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신영의 집에 도착해서 한 일은 도어록을 열고 들어와선 술에 취해 일어나지 못하는 그에게 의도치 않았던 폭력을 휘둘러 깨운 것밖에 없다. 도준이 시켰던 첫 번째 일은 훌륭히 완수했으나 아직 남은 일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이사님.”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은 승지는 신영을 향해 대답했다.
“그럴 수…… 없다?”
신영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나 승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직 제겐 마치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아, 그래?”
“네. 그러니 안 나갈 겁니다.”
너무도 확고하게 말을 잇는 승지를 보자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신영은 눈을 빛내고 있는 승지를 향해 알겠다는 듯 제스처를 취하더니 돌연 하체를 가리고 있던 브리프를 향해 손을 가져다 댔다.
‘어?’
꼭 신영을 회사로 데려가겠다는 마음으로 서 있던 승지는 신영의 행동에 크게 당황했다.
“지,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이사님!”
승지의 다급한 목소리에 신영은 브리프를 내리려던 행동을 멈추고 말한다.
“안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럼 하는 수 없잖아. 도승지 씨 앞에서 갈아입을 수밖에.”
태연하게 말을 잇는 신영을 본 승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그런 의미가 아, 아니었습니다!”
“그래?”
“당연하죠! 전 이사님에겐 전혀 관심이 없다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물론 저절로 시선이 가긴 하지만 그건 본능적인 거다, 그래, 본능. 애써 저를 달랜 승지의 외침에 신영은 중얼거렸다.
“거 참, 도승지 씨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대체 왜 자꾸 내 몸을 몰래 훔쳐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승지가 버럭 외쳤다.
“제, 제가 언제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그를 보던 승지는 자신이 그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리쳤다.
“나, 나갈 겁니다! 나갈 거예요!”
그리곤 획 몸을 돌려 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쌩하니 방을 벗어났다. 신영은 그런 승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으며 샤워를 하기 위해 방 안의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