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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빨갛게 익은 얼굴로 거실에 나와 소파에 앉은 승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왜 이렇게 동요하는 거야. 침착해라, 도승지. 침착해!’
신영의 말에 자꾸만 말려드는 스스로를 책망하며 자꾸만 아른거리는 신영의 반나체를 머릿속에서 지워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그녀의 핸드폰에 도준이 보냈으리라 짐작되는 멀티메일이 도착했다. 승지는 얼른 메일을 확인했다.
<승지 씨가 할 일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로 시작되는 도준의 메일은 꽤나 길었다.
<지금쯤 이사님의 잠을 깨웠을 거라 생각합니다.>
마치 그녀의 행동을 지켜본 듯 도준의 말은 날카로웠다. 순간 주위를 살피던 그녀는 다시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이사님을 깨운 후 승지 씨가 할 일은 이사님의 아침을 차려 드리는 것입니다.>
아침? 개인 비서는 그런 일도 하나? 승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음 글을 읽어 내렸다.
<원래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데, 하필이면 오늘 이사님의 집을 봐주시는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오시지 않는 날이라서요. 정말 미안하지만, 혹 승지 씨가 할 수 있다면 이사님께 해장국을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사님께서 어제 술을 많이 드셨거든요.>
그러고 보니 술 냄새도 조금 났던 것 같다. 그를 깨우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을 때 몸에서 풍기던 알싸한 알코올 향이 아직까지 코끝을 자극하는 것 같다 중얼거리던 승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해장국이라니. 도씨 집안에서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큰 오라버니의 곁에서 설거지를 한 경험은 허다하나 국을 끓여 본 적은 없다. 할 줄 아는 요리라곤 오직 계란 프라이밖에. 왜 도우미 아주머니는 하필 오늘 집에 오지 않으신 걸까.
도준의 메일을 보고 놀란 승지는 순간 밖으로 나가 음식점을 찾아 헤매야 하는 건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속이 좋지 않은 신영에게 계란 프라이를 먹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어진 도준의 문구는 그녀를 안도시켰다.
<하지만 만들 수 없다면 그냥 간단한 아침 식사 거리를 준비해 주세요. 그러나 점심때는 꼭 얼큰한 국물이 있는 식사를 하는 걸 잊지 마시구요.>
다행이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승지는 도준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메일의 나머지를 마저 읽었다.
<식사를 차려 드린 다음엔 오늘의 일정을 불러 드리세요. 곧 오늘의 일정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사님께서 일정을 조절하길 원하신다면 따르세요. 요즘 조금 예민하신 것 같으니 가급적이면 많은 일정을 잡지는 마시구요.>
그건 승지도 원하는 바이다.
안 그래도 퇴근 시간마저 늘어났는데 일마저 많으면 골치가 아프니까.
<일정을 불러 드린 다음엔 회사로 이사님을 모시고 오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퇴근 시간까지 저 대신 이사님을 잘 보필해 주길 바랍니다. 요 며칠 함께 이사님과 움직였던 경험이 있고, 제가 아는 승지 씨라면 잘 해내리라 믿습니다.>
그녀에겐 난감하고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기억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지만 잘 해내리라 믿는다는 도준의 말이 유난히 가슴에 박힌다. 승지는 한참이나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승지 씨, 어려운 부탁을 들어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마지막 문구까지 읽어 내리자 도준이 얼마나 그녀를 의지하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비교적 간단하단 말로 승지를 홀리긴 하지만 실상은 전혀 간단하지 않다. 아니, 간단하지 않다 못해 어렵기만 하다. 혹시 지금은 전화를 받을까 싶어 통화 버튼을 눌렀더니 여전히 그의 전화는 불통이었다. 어찌 제 말만 하고 그리 칼같이 핸드폰을 꺼 버리는지.
‘약았어.’
승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돼. 이사님의 행동이 약간 걸리긴 하지만, 그건 너만 신경 안 쓰면 되는 일이야!’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 결의를 다지던 승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시각 8시 25분. 서둘러도 출근 시간에 맞출 수는 없겠지만 일단 급히 움직여야 했다.
승지는 도준이 시킨 일과 중 하나인 <이사님을 위한 아침 식사 차리기>를 수행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계란 프라이도 괜찮겠지?’
해장국을 만들 수 없다면 간단한 아침 식사라도 준비하라던 도준의 말에 승지는 자신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요리를 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제가 만든 계란 프라이를 먹고 있는 신영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우아한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아 엉망진창으로 쪼개져 있는 계란 프라이 뭉치를 입 안으로 쑤셔 넣고 있는 신영의 모습은 평소와 괴리감이 있기는 하지만 거부감은 들지 않는다.
‘그래, 차려 준다는데 안 먹는 게 더 이상한 거지.’
잠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내 훌훌 떨쳐 낸 그녀는 냉장고를 향해 걸어가선 안에 들어 있는 계란을 몇 개 꺼내 불로 달궈진 프라이팬에 넣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 * *
장도준이 결근을?
듣도 보도 못한 소리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싶던 신영은 머릿속을 쌩 하고 스쳐 지나가는 어젯밤의 기억에 입을 다물었다.
신영은 자신을 웬 술집으로 데려온 도준과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왠지 심각해 보이는 신영과는 다르게 도준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술을 따르는 중이었다. 신영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도준이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오랜만에 함께 마시는 술로 인해 조금씩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자 도준은 신영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이사님의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니나 조금, 잘못된 것 같습니다.’
얼른 그 도움이라는 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신영과는 다르게 도준은 이상하게 뜸을 들였다. 맘 같아서는 해결책을 빨리 제시해 달라고 조르고 싶었지만 인내하며 도준의 행동을 묵인했다. 그런 상황에서 겨우 들린 도준의 말에 신영은 눈을 크게 떴다. 도준은 입 안으로 투명한 액체를 집어넣고 술잔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씩 웃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방법이 잘못됐다니?’
신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획기적이라 생각했던 방법이었건만 잘못됐다니.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어떻게 해야 마음을 끌 수 있을지 장 비서는 안다는 소린가?’
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빈 강정이나 다름없는 신영보다는 아마 자신이 연애에 있어선 고수이리라. 눈을 빛내는 신영을 바라보던 도준은 흠흠 하고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입술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 승지 씨는 사람을 만나는 데 조금 신중한 것 같습니다.’
신영은 동의했다. 도준은 덧붙였다.
‘그리고 잘난 남자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더군요.’
그것도 맞는 말이다. 승지가 말하던 세 가지 조건이 불현듯 떠올랐다.
얼굴 잘났고 돈 많고 능력 좋은 남자는 절대로 싫다고 말하던 그녀. 물론 자신이 ‘잘난’ 건 사실인지라 인정은 하지만 괜히 기분은 나쁘다.
신영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는 것과 상관없이 도준은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이사님의 방식을 계속 고수하면 심각한 오류가 생길 것 같습니다.’
오류? 신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도준은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그 점을 고치지 않는 이상은 아마 승지 씨는 이사님께 상사 이상의 감정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지요.’
‘뭐? 상사 이상의 감정을 못 느껴?’
가슴을 철렁거리게 만드는 도준의 말에 신영은 다급히 물었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신영의 술잔에 연신 술을 따라 주며 도준은 사악하게 웃었다. 어찌나 사악한지 신영이 흠칫거릴 정도로. 눈빛을 빛내는 도준은 자신이 아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지만 좋은 생각이란 말에 솔깃한 신영이 말했다.
‘얼른 말해 봐.’
‘여태껏 이사님은 승지 씨와 갖는 시간을 늘리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함께 움직일 때마다 일을 하셨죠.’
‘일은 해야 하니까.’
사랑도 중요하지만 그에겐 일도 그 못지않게 중요했다.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신영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던 도준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게 틀렸단 겁니다. 한 가지만 집중을 해야 할 때 다른 것까지 병행하니 쉽지 않은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크게 동요하는 신영의 두 눈을 바라보던 도준은 입꼬리를 더욱 위로 올렸다.
‘저만 믿으십시오, 이사님. 내일 저는 결근하는 걸로 알아주시구요.’
‘그게 무슨…….’
‘내일 회사에 오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잡혀 있던 약속은 제가 알아서 미뤄 두겠습니다. 계기는 제가 마련할 터이니 내일 하루 동안은 승지 씨에게 전념하시길 바랍니다.’
‘뭐?’
‘자. 일단, 한 잔 받으시죠. 저절로 일어나지 못할 만큼 취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말을 마친 도준은 신영의 잔에 술을 따랐다. 신영은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도준을 믿으며 입 안으로 술을 털어 넣었다.
‘믿으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길고 긴 기억의 되새김 끝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 신영은 자신의 사소한 행동과 말 하나 하나에 흠칫흠칫 놀라던 승지를 떠올렸다. 그 당시엔 알아들을 수 없었던 도준의 그 ‘계기’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신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신영은 심각한 얼굴로 계란을 프라이팬에 깨뜨리는 승지를 흘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아직까지 신영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도준의 도움으로 그녀가 제 발로 늑대의 소굴로 들어오기는 했으나, 회사의 정해진 출근 시간까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걸로 봐서는 분명 승지는 바삐 움직이려 할 것이 분명하다.
‘내일 하루 동안은 승지 씨에게 전념하시길 바랍니다.’
신영을 향해 신신당부를 하며 업무에 대한 문제는 걱정하지 말라고 못을 박아 대던 도준의 말이 생각났다. 그의 말대로라면 승지가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할 터인데, 대체 어떤 수를 쓴단 말인가.
하얀 목욕 가운을 대충 걸쳐 입고 물에 젖은 머리를 탈탈 털던 신영은 한참을 고민하다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올라 슬며시 웃으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뭐해?”
“악!”
계란 노른자가 익어 가는 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며 도승지표 계란 프라이를 만들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승지는 뒷걸음질 치다 신영의 가슴에 머리를 박았다.
워낙 갑작스레 일이 발생했던지라 순간 멍하니 그의 넓은 품속에 안겨 있던 승지는 신영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뺨에 닿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서둘러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뒤를 돌아보곤 외쳤다.
“오, 오셨으면 오셨다고 말을 하셨어야죠!”
“뭐?”
“그, 그렇게 갑자기 오, 오시면 놀라잖아요…….”
말끝을 흐리던 그녀는 덤덤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신영의 모습을 바라보다 점점 두 눈을 크게 떴다. 샤워를 마치고 출근할 차림으로 밖으로 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신영은 자신이 방금 욕실에서 나왔다는 티를 팍팍 내는 목욕 가운 차림으로 승지의 앞에 서 있다. 발작하듯 심장이 다시금 뜀박질하는 것을 진정시키려 애쓰던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생각했다.
‘패, 팬티는 입은 건가?’
호흡에 그의 가슴이 들썩일 때마다 하얀 가운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탄탄한 근육에 저절로 눈길이 꽂혔다. 그녀는 그런 제 모습에 놀라 속으로 외쳤다.
‘내가 뭐하는 거야!’
신영은 당황하는 승지를 말없이 응시하다 이내 턱짓으로 프라이팬을 가리켰다.
“타는데.”
응?
“어머!”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승지는 얼굴을 돌리다 새까맣게 변한 계란 프라이를 발견하곤 얼른 밸브를 잠갔다. 그리곤 멀뚱히 서 있는 신영의 모습을 흘깃거리며 복잡한 눈빛을 쏘아 대더니 은근슬쩍 탄 부분을 떼어 낸 다음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계란 프라이를 그릇에 담는다.
‘…….’
신영은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다 식탁 앞 의자에 앉으며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릇을 손에 들고 한참이나 망설이던 승지는 이내 결심했다는 얼굴로 그의 앞에 다가와 식탁 위에 이미 계란 프라이라는 이름을 감히 붙일 수 없는 정체 모를 요리가 있는 그릇을 얹으며 말했다.
“아……침입니다, 이사님.”
설마설마했더니 정말로 주는 건가. 그녀의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신영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겨우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침?”
신영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걸 목격했으나 그녀는 당당했다.
“예.”
그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이걸…… 음식이라고 주는 거야?”
이게 뭐가 어때서?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요. 제 딴에는 열심히 만든 겁니다.”
밑 부분이 타긴 했지만 탄 부분은 거둬 낸 상태고, 형체가 보통의 계란 프라이와는 다르게 뭉개져 있었으나 분명 음식은 음식이다. 맛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 여기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출근 시간 안에 그와 이 집에서 벗어나야 하는 사명을 속으로 되뇌던 승지의 뻔뻔한 모습에 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들어올렸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승지는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계란 프라이의 처참한 모습을 지켜보며 신영이 내뱉을 다음 말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몇 초가 흘렀을까.
입을 오물거리며 한참이나 계란 프라이를 씹어 대던 신영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일그러졌다.
“윽!”
형태는 보기 좋지 않아도 맛은 일품일 거라 생각했던 도승지는 신영의 변화에 흠칫거렸다.
“왜 그러세요?”
조심스레 그를 향해 묻자 신영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짜.”
“네?”
“후우, 승지 씨. 당신…… 음식 솜씨는 영 꽝이네.”
계란 프라이 하나로 승지의 음식 솜씨를 정의 내린 신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비켜 봐. 내가 요리란 뭔지 가르쳐 줄게.”
승지는 다급히 외쳤다.
“이, 이사님!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가도 늦어요.”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바로 회사로 나가려던 계획이 흐트러지자 그녀가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신영은 괜찮다는 듯 손을 몇 번 휘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배고파서 그래. 그러니 잠자코 거기서 기다려.”
“자.”
지지고 볶는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짙어지는 맛있는 냄새 때문인지 들러붙었던 뱃가죽이 요동을 쳤다. 그녀의 뱃속을 잠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던 지난 몇 분간의 고역 끝에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앞에 나타난 신영을 올려다보던 승지는 생각했다.
‘정말…… 못하는 것이 없어.’
얼굴만 잘난 줄 알았더니 돈도 많고, 거기다 능력까지 좋아 안 그래도 거부감이 치밀어 오르는데 요리까지 수준급이다. 미래의 배우자감으로 극히 평범한 남자를 추구하는 도승지이긴 하지만 유일하게 그 남자가 잘했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요리였다.
오빠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큰 오라비 정겸으로 인해 요리를 잘하는 남자들에 대한 호감도가 넘쳐 났던 승지는 자신을 의자에 앉히고 현란한 손놀림으로 칼과 국자를 휘두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새삼 가슴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맛있어 보이는 볶음밥과 콩나물국을 그녀의 앞에 가져다 놓는 그를 바라보며 승지는 홀린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단하시네요.”
반어법이 아닌 진심이 묻어나는 그녀의 말에 아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앞에 앉던 신영은 말했다.
“내가 못하는 건 거의 없어.”
오만한 말이었지만 틀린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어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말없이 입술을 삐죽거리는 승지를 흘깃거리던 그는 이내 수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먹어.”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수저를 들고 움직이는 신영을 따라 승지는 열심히 손을 놀려 입 안으로 그가 만든 음식을 집어넣었다. 냄새만큼이나 맛은 가히 예술적이었다. 요리에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정겸도 위협할 만큼 너무나.
급히 나오느라 아침까지 굶은 승지는 흡입하듯 금세 그의 볶음밥을 먹어 치웠다. 신영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이윽고 밥 한 톨까지 박박 긁어먹어 그릇을 깨끗이 비워 버린 승지는 얼굴에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그제야 제 추태를 알아차리고 뒤늦게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신영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의 뜨거운 시선에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승지는 문득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발견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이사님!”
어느덧 시계는 아홉 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예상외의 일로 인해 아침 식사가 늦어졌긴 하지만 그는 얼른 회사로 출근을 해야 하는 몸이다. 저렇게 여유를 부리며 밥을 먹고, 아직까지 옷도 제대로 입지 않아선 안 되는. 다급히 외치는 승지에게서 느릿하게 시선을 뗀 신영은 제 밥그릇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난 아직 다 안 먹었어.”
승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따라 식사 속도가 느리시네요.”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를 향해 승지는 외쳤다.
“네! 대체 무슨 속셈이시죠? 지금 이사님이 하시는 행동들은 곧 출근할 사람의 행동들 같지 않습니다.”
그래, 뭐 어젯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늦게 일어난 것 정도는 이해한다. 아침을 계란 프라이로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 그녀에게 갖다 바친 것도 까다로운 식성의 그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서 넘어가기로 하고.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느리게 수저를 움직이며 밥알 한 톨 한 톨을 쉽게 넘기지 않겠다는 듯 곱씹어 먹는 그의 행동은 그녀가 느끼기에 시간 끌기와 다름없었다.
9시 이전에 회사에 도착하는 승지가 먼저 인사를 하러 갈 정도로 이미 그녀의 출근 전에 도착해 서류를 훑어보던 차신영의 모습과는 거리감이 있는 현재 모습에 그녀가 의심을 품는 것은 결코 괜한 걱정이 아니리라.
신영은 자신을 수상쩍어하는 승지를 직시하다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후우, 정말 승지 씨는 못 속이겠군.”
그는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드는 제스처를 취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솔직히 말하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
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신영의 얼굴은 너무나 멀쩡했다. 승지는 여전히 의심의 눈빛을 지워 내지 못하며 말했다.
“몸이요?”
아프다곤 생각할 수 없는 모습에 승지는 코웃음을 쳤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는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래.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인지 꽤, 피곤하군.”
‘이사님, 술이 센 편이 아니셨나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가 어디까지 가려는지 궁금해서 입술을 다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승지 씨. 아무래도 오늘 회사로 출근하기는 힘들 것 같아. 그러니까 오늘 업무는 집에서 보도록 하지. 여덟 시까지 여기가 회사라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도록.”
‘싫습니다. 당장 준비하셔서 회사로 가요.’
자택근무의 명을 받은 도승지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말은,
‘나도 싫어. 오늘은 집을 안 떠날 거야.’
라고 대응하는 신영의 말에 묵살됐다.
물론 그와 같은 반응에 잠자코 있을 도승지가 아니었다.
‘그럼 저라도 가겠습니다. 이사님은 여기서 계세요.’
집을 나가려는 승지가 몸을 돌리려 하자 신영은 말했다.
‘그것도 기각.’
‘예?’
‘도승지 씨.’
‘네.’
‘승지 씬 결근한 장 비서 대신 여기 온 거 아니었어요?’
승지는 당황했다.
‘무, 물론 그건 그렇지만…….’
갑자기 도준을 들먹이는 신영으로 인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눈을 빛냈다.
‘장 비서는 나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는 사람이야. 승지 씨도 알겠지만 업무 시간에는 잠시도 내 곁을 벗어난 적이 없지.’
‘아.’
‘그런데 오늘 승지 씨는 그런 장 비서를 대신해서 여기에 왔어. 그렇담 평소와는 다르게 장 비서처럼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꾹 다문 승지를 바라보며 신영은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난 여기서 오늘 하루 업무를 보려고 하니, 승지 씨도 거기에 따라 줬으면 좋겠어. 승지 씨는 유능한 비서니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었겠지. 그리고 밖에 안 나가고 집에만 있으면 편하고 좋잖아. 안 그래요?’
전혀.
결코.
네버.
좋지…… 않다.
좋지 않다 못해 심장병이 걸릴 정도로 가슴이 시도 때도 없이 들썩인다.
방방 뛰는 심장 때문인지 업무에 집중하기도 힘들고. 자꾸만 시선이 그를 향하는 것을 겨우 막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일을 할 수 있다고?
무리다, 무리!
결국 차신영의 뛰어난 언변에 무어라 태클 하나 걸지 못하고 퇴근 시간인 8시까지 일명 ‘재택근무’라는 것을 하게 된 승지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몰아쉬며 일정을 조정해야만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신영의 스케줄 관리를 위하여 핸드폰으로 도준의 메일을 확인한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오늘은 외근 일정도 잡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해서 결국 ‘휴가’나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게 된 신영과는 달리 승지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얄미워.’
승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신영을 흘깃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현재 시각 열 시.
이미 출근 시간은 훌쩍 넘어 버린 지 오래고, 그걸로도 모자라 그는 여전히 목욕 가운을 입은 채로 거실의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업무에 미쳐 있던 사람이라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입가에 희미한 미소까지 그려 가며 TV 시청에 열을 올리는 신영을 바라보던 그녀는, 일단 회사에 이 사실을 알리는 전화를 마친 후에 그를 향해 다가가며 결국 목구멍을 간질이던 말을 꺼냈다.
“이사님.”
신영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끄고 승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승지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물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승지는 말을 이었다.
“좋아요, 그래, 재택근무. 저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나쁘지는 않지요, 확실히.”
“그런데?”
“그렇지만 이곳에 이사님 한 분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과년한 처자가 이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제발 옷 좀 제대로 입어 주실 수 없습니까?”
“입고 있잖아.”
“가운만 걸치신 거잖아요!”
그가 다리를 꼴 때마다, 그리고 몸을 들썩일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구릿빛 피부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해도 속으로 그를 향해 원망의 멘트를 날리기 위해 신영을 힐끔거리는 승지였으므로 야릇하게 그 속살이 보이자 이상하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재택근무를 한다는 사람이 일은커녕 놀고 있는 것도 화가 나는데 그녀의 신경을 자꾸만 자극하는 행위를 은연중에 하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신영은 그녀의 외침에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신경 쓰여?”
승지는 버럭 외쳤다. 그럼 안 쓰이겠어?
“당연하죠! 일이 안 됩니다!”
“호오, 그래?”
헉!
신영의 얼굴이 살짝 밝아지는 것을 목격한 승지는 당황했다.
“아, 바, 방금 한 말은…… 조,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저…….”
“왜 그렇게 말을 더듬나.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을 억지로 감추며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그를 바라보던 승지는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하, 하여간 전 이사님한테 관심 없대두요!”
신영은 다시 리모컨을 들며 중얼거렸다.
“누가 뭐래? 거참, 도승지 씨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남자에게 상처 주는 말을 너무나 잘 하는군. 난 상처 받았어.”
“이사님!”
그녀는 제게서 시선을 떼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어, 어쨌든 자꾸 이러시면 파업할 겁니다! 그래,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신영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파업하면 자를 거야.”
승지는 지지 않았다.
“그럼 신고할 거예요!”
신영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는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다 혼자 넋두리를 하듯 중얼거린다.
“다른 직장보다 급여도 많고 일도 훨씬 수월한 걸로 아는데. 재택근무 한 번 했다고 파업하고, 자른다는 귀여운 협박을 한 번 했다고 신고를 하겠다니. 승지 씨, 너무한 거 아냐?”
귀여운 협박? 이 남자가 뭐라는 거야, 지금!
“전부 이사님 때문이잖아요!”
“내가 뭘.”
“자꾸 그런 눈으로 절 쳐다보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내 눈이 뭐가 어떤데.”
“절 잡아먹을 것 같은 눈이잖아요!”
신영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도승지 씨를 바라보지도 않았는데?”
말로는 승부를 볼 수가 없다. 승지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하여간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에요, 이사님이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이상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벌렁거리는 심장도 그렇고. 저 눈을 마주할 때마다 앞이 어지러운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는 흐트러진 얼굴로 말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쨌든, 보아하니 오늘 하루는 아예 일을 하지 않으실 작정인 것 같은데……. 딱히 시키실 일이 없다면 차라리 전 저 방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승지는 굳게 닫혀 있는 한 방을 가리켰다. 신영은 고개를 젓는다.
“안 돼. 내 눈앞에 있어. 말했잖아. 장 비서는 내 곁에서 떨어진 적이 없대도?”
“하!”
“거기 서 있는 게 불편하면 여기 앉든가.”
그가 제가 앉은 자리 옆을 톡톡 두드리며 말하자 승지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입술을 열었다.
“이사님. 정말……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지?”
“이사님 같지가 않잖아요!”
“그런가?”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지난 이 주 동안은 정말 제가 아는 이사님이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원래 이러는 분이 아니셨잖아요. 설마 이렇게 행동하시는 거, 혹시 절…… 유혹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단도직입적인 승지의 말에 신영은 조금 놀랐지만 이내 곧 평정을 되찾는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승지의 모습이 귀엽게 보여 묘한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뭘까, 이 묘한 느낌은.
그는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다 말했다.
“이제 알았나?”
입을 쭉 내밀며 투덜대던 승지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하는 신영을 응시했다. 뭐라고 했지 방금? 신영은 눈을 크게 뜨는 승지의 곁으로 엉덩이를 살짝 옮기며 낮게 속삭였다.
“맞아. 유혹하는 거야.”
그리고 아찔할 만큼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어때? 내 유혹법이 조금 통하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