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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는 남자
1화. 신비주의 디자이너(1)
그를 볼 때마다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차가운 눈빛이 내리꽂힐 때면 온몸이 아프도록 저려 왔고, 심장은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마주할 때마다 두렵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두려워하고 겁내 할수록 그는 나의 반응을 즐기는 듯 보였다. 성큼성큼 다가왔고, 여전히 따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의 자비도 그는 내게 베풀지 않았다.
* * *
“한 대리, 메일 확인 했지? 이번에도 거절이야.”
“왜? 왜! 도대체 왜냐구!”
이른 아침. 출근을 하자마자 자리에 앉아 메일을 확인한 은서는 입사 동기이자 친구인 나영의 말에 좌절했다.
벌써 세 번째.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내용의 답장을 받았고 그 메일에 여지없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은서였다.
“독하다, 너나 그쪽이나.”
“도대체 왜 미팅조차 안 해 준다는 거냐고!”
“스케줄상 시간이 없다잖아.”
“아니, 제이디는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 화장실도 안 가냐고! 직접 찾아가겠다는데 왜 자꾸만 거절인데?”
“네 사심을 눈치챘나 보다.”
아침부터 곱게 세팅한 머리카락을 헝클며 좌절하는 은서의 모습이 재밌는 모양인지 나영은 히죽거렸다.
“사심이라니? 난 엄연히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여자거든?”
나영의 놀림에 은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게 어떻게 온 기회인데 이대로 포기할까 봐? 웃기지 마! 반드시 성공해 보일 테니까.”
은서는 방금 전까지 삐죽이던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러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제이디의 출장 스케줄상 4월에는 귀사와의 미팅은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제이디 일정 어떻게 되는지 알아?”
은서는 옆에 앉아 있는 나영에게 물었다.
“다음 주 일본에서 패션쇼 있고, 그다음엔 개인적인 스케줄이라고 하던데?”
“일본에서 패션쇼를 한다 그거지?”
나영의 말에 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다부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대리, 아침부터 파이팅이 넘치네?”
모니터를 보며 의지를 활활 불태우는 은서 앞에 장미주 팀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짧은 커트머리에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블라우스, 무릎까지 내려오는 H라인 스커트, 화려하지만 무척 세련된 외모의 그녀는 속옷 브랜드 ‘앨리스’의 디자인팀 팀장이며 은서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팀장님, 은서 칭찬하지 마세요. 이러다 폭주할 것 같으니까.”
나영은 자리에 앉는 팀장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더 은서를 부추긴다면 지금 당장 유럽행 비행기 표를 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폭주하면 어때? 그 일만 성사시키면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할게.”
“정말이죠?”
팀장의 말에 은서는 고개를 들어 눈을 번뜩였다.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린 것을 보아 무언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왜? 무슨 방법 있어? 팜므에서 그렇게 쉽게 파트너를 고르진 않을 거야. 경쟁사도 많고.”
“일본에서 하는 팜므 패션쇼에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너도나도 눈치 보는 이 판국엔 직접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잖아요?”
“한 대리, 진짜 찾아갈 거야?”
은서의 말에 나영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미 은서의 두 귀는 다른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좋아, 구해 줄게 패션쇼 초대장. 하지만 알지? 이 일이 얼마나 리스크가 큰 일인지. 직접 찾아가서 그녀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우린 이번 프로젝트에서 아웃되는 거야. 그럼 한 대리 커리어도 아웃되는 거란 거 명심해!”
“걱정 마세요. 제 인생에 포기란 엄마 배 속에서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 * *
“하아, 하아.”
한 줄기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침실 안은 여자가 흘리는 신음 소리만이 가득했다.
남자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새어 나오는 그녀의 소리는 환희와 쾌락으로 뭉쳐 온 방 안을 떠돌고 있었다.
“레이, 빨리…….”
여자의 외침이 날카롭게 퍼졌지만 남자의 손길은 더욱 여유롭게 여자의 가슴 위를 훑었다. 자신의 손길에 이미 달아오를 대로 오른 여자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레이, 그렇게 애태우지만 말고. 응?”
“쉿.”
여자의 탐스럽고 봉긋한 가슴을 스치던 남자의 손길이 그녀의 입술로 다가갔다. 여자는 이미 남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남자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너 그거 알아?”
여자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레이가 말했다.
“뭘 말하는 거야?”
“나는 말이야, 해 달라고 조르는 여자한텐 의욕이 안 생겨.”
남자가 주는 쾌감에 들떠 있던 여자는 어느새 식어 버린 남자의 목소리에 두 눈을 깜빡였다.
“뭐?”
“이렇게 쉽게 가질 수 있는 건 매력이 없다는 소리야.”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향해 싱긋 웃어 준 남자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풀어져 있던 바지 버클을 채웠다.
달뜬 여자의 몸을 그대로 안아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그건 남자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 일어나자, 오늘은 안 되겠어. 데려다줄게.”
어느새 창가로 다가간 남자는 커튼을 활짝 걷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지 붉어진 햇살이 침실로 비쳐 들었고 알몸의 여자는 밀려오는 수치심에 남자를 노려보았다.
“내가 쉬워서 매력이 없다 그거야?”
“미안, 그만 나가자. 나 일하러 가야 해.”
“하!”
너무도 태연한 레이의 말에 여자는 어이가 없어졌다. 저런 걸 뻔뻔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님 솔직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지이잉― 지이잉―
“씻고 나와. 데려다줄 테니까.”
레이는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며 말했다.
“네, 레이입니다.”
― 레이? 흐음! 또 여자랑 있구나? 어디야? 호텔?
전화기 너머로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호텔. 이제 나갈 거야.”
― 시간 다 되어 가는 거 알지? 늦지 않게 와야 돼!
“OK, 걱정 마.”
“데려다줄 필요 없어.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어느새 옷을 다 입었는지 여자는 레이를 노려보며 말했고 밖으로 나서려는 여자의 손목을 레이는 낚아챘다.
“기다려, 데려다줄게.”
방금까지 여자에게 감당하기 힘든 수치심을 안겼던 남자가 맞기는 한지 금방 다정한 눈길로 여자에게 말하고 있는 레이였다.
― 뭐야? 또 여자한테 못된 짓 했구나?
“못된 짓이란 표현은 좀 그렇잖아?”
― 하여튼 자기도 병이야, 병! 바로 와. 시간 없어!
“알았어. 조금 있다 보자고.”
레이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쫑알거리는 잔소리가 재밌다는 듯 피식 웃어 보이고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난 혼자 갈 테니까, 빨리 오라는 그 여자한테나 가 봐.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말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목소리에 잔뜩 신경이 날카로워진 여자는 레이의 손을 뿌리치고는 금방이라도 그의 얼굴을 할퀼 것 같은 강렬한 눈빛으로 노려본 후 호텔 방을 나섰다.
“이번에도 너무 솔직했나?”
쾅 소릴 내며 닫힌 문을 바라보던 레이는 자신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날카로운 말은 쉽사리 밖으로 튀어 나간다.
“하아.”
레이는 밀려오는 씁쓸함에 한숨을 내쉰 후 복잡해져 오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버릇. 마음 한편이 답답해져 왔다.
* * *
누가 봐도 아름다운 색감, 저절로 눈길을 끄는 레이스와 관능적인 디자인. 유럽에서 요 몇 년간 가장 사랑받는 란제리 브랜드 ‘더 팜므’의 패션쇼는 은서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한시도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속옷 디자이너가 된 지 이제 5년.
막 대리를 달았고 일의 재미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은서에게 ‘팜므’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브랜드 중 하나였다.
거기다 팜므의 대표이자 디자이너 제이디는 그야말로 은서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디자이너가 신비주의라 더 흥미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디자인이 하나같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디자이너들이 모여 만든 디자인팀으로 시작한 팜므는 어느덧 유럽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가 되었고 아시아 진출을 위해 한국의 속옷 회사와 콜라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 소식에 업계에선 너도나도 팜므의 프로젝트에 뛰어들었고 은서의 회사도 그 열기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경쟁자가 많아 아직까진 확고부동하게 업계에 자리매김하지 못한 앨리스로선 이번 프로젝트는 반드시 성공시키고 싶은 일이었다.
제이디와의 미팅 약속조차 잡지 못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고 오겠다고 큰소리쳤으니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다. 반드시 그녀를 만나 설득해야 한다는 것.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거지.”
패션쇼가 성황리에 끝이 나고 따로 초대받은 사람들만 모이는 뒤풀이 장소에 도착했다. 능력 있는 팀장과 일본 협력 업체의 도움으로 오게 된 뒤풀이 장소는 그야말로 화려한 파티장이었다.
너도나도 화려한 드레스 차림과 반짝거리는 보석, 거기에다 한껏 치장한 화려한 외모까지. 은서 본인이 남자였다면 이곳의 여자들을 보고 브라보를 외치고 있지 않았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드레스 하나 빌려 오는 건데.
그저 간단한 뒤풀이쯤으로 생각한 은서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곳에서 가장 소박하고 단출한 차림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나저나 제이디도 온다고 했는데 어디 있는 거야?”
이렇게 화려한 자리라곤 생각조차 못 하고 온 자신의 행색이 그야말로 초라함의 극치였지만 은서는 두리번거리며 제이디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얼굴을 모르니, 찾기도 어렵고…….”
제이디에 관해 아는 것이라곤 삼십 대 중후반의 젊은 여성 디자이너로 세련된 외모를 가졌다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소문일 뿐 실체를 아는 사람은 그의 측근들 외에는 없다고 했다.
이처럼 신비주의를 고집하던 그녀가 뒤풀이 장소에 나타난다고 했으니 분명 그녀의 곁으로 사람들이 몰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은서는 삼삼오오 모여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를 유심히 살폈다.
제이디가 못 해 준다는 미팅을 억지로 하러 온 거니까 실수 없이 해야 돼. 팀장 말대로 이번에 삐끗하면 우린 진짜 그 프로젝트에서 아웃일 테니까.
무조건 성공시키고 오겠노라 큰소리를 쳤지만 불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이디에 관한 무수히 많은 소문 중 하나가 일에 관해서는 그 어떤 사람보다 깐깐하고 독종이라는 것이었다.
무작정 찾아오긴 했지만 은서의 마음이야 어쨌든 받아들이는 상대방으로선 부담스러운 일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뭐 좀 물어보려고 해도 한국 사람이 누군지 알 수가 있어야지.”
가뜩이나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 거기다 외국인들 천지인 이곳에서 마음 편하게 한국말로 무엇인가를 물어보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곤란해하고 있던 은서에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또렷하고 정확한 한국말이었다.
1화. 신비주의 디자이너(1)
그를 볼 때마다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차가운 눈빛이 내리꽂힐 때면 온몸이 아프도록 저려 왔고, 심장은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마주할 때마다 두렵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두려워하고 겁내 할수록 그는 나의 반응을 즐기는 듯 보였다. 성큼성큼 다가왔고, 여전히 따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의 자비도 그는 내게 베풀지 않았다.
“한 대리, 메일 확인 했지? 이번에도 거절이야.”
“왜? 왜! 도대체 왜냐구!”
이른 아침. 출근을 하자마자 자리에 앉아 메일을 확인한 은서는 입사 동기이자 친구인 나영의 말에 좌절했다.
벌써 세 번째.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내용의 답장을 받았고 그 메일에 여지없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은서였다.
“독하다, 너나 그쪽이나.”
“도대체 왜 미팅조차 안 해 준다는 거냐고!”
“스케줄상 시간이 없다잖아.”
“아니, 제이디는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 화장실도 안 가냐고! 직접 찾아가겠다는데 왜 자꾸만 거절인데?”
“네 사심을 눈치챘나 보다.”
아침부터 곱게 세팅한 머리카락을 헝클며 좌절하는 은서의 모습이 재밌는 모양인지 나영은 히죽거렸다.
“사심이라니? 난 엄연히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여자거든?”
나영의 놀림에 은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게 어떻게 온 기회인데 이대로 포기할까 봐? 웃기지 마! 반드시 성공해 보일 테니까.”
은서는 방금 전까지 삐죽이던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러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제이디의 출장 스케줄상 4월에는 귀사와의 미팅은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제이디 일정 어떻게 되는지 알아?”
은서는 옆에 앉아 있는 나영에게 물었다.
“다음 주 일본에서 패션쇼 있고, 그다음엔 개인적인 스케줄이라고 하던데?”
“일본에서 패션쇼를 한다 그거지?”
나영의 말에 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다부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대리, 아침부터 파이팅이 넘치네?”
모니터를 보며 의지를 활활 불태우는 은서 앞에 장미주 팀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짧은 커트머리에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블라우스, 무릎까지 내려오는 H라인 스커트, 화려하지만 무척 세련된 외모의 그녀는 속옷 브랜드 ‘앨리스’의 디자인팀 팀장이며 은서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팀장님, 은서 칭찬하지 마세요. 이러다 폭주할 것 같으니까.”
나영은 자리에 앉는 팀장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더 은서를 부추긴다면 지금 당장 유럽행 비행기 표를 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폭주하면 어때? 그 일만 성사시키면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할게.”
“정말이죠?”
팀장의 말에 은서는 고개를 들어 눈을 번뜩였다.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린 것을 보아 무언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왜? 무슨 방법 있어? 팜므에서 그렇게 쉽게 파트너를 고르진 않을 거야. 경쟁사도 많고.”
“일본에서 하는 팜므 패션쇼에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너도나도 눈치 보는 이 판국엔 직접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잖아요?”
“한 대리, 진짜 찾아갈 거야?”
은서의 말에 나영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미 은서의 두 귀는 다른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좋아, 구해 줄게 패션쇼 초대장. 하지만 알지? 이 일이 얼마나 리스크가 큰 일인지. 직접 찾아가서 그녀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우린 이번 프로젝트에서 아웃되는 거야. 그럼 한 대리 커리어도 아웃되는 거란 거 명심해!”
“걱정 마세요. 제 인생에 포기란 엄마 배 속에서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아, 하아.”
한 줄기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침실 안은 여자가 흘리는 신음 소리만이 가득했다.
남자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새어 나오는 그녀의 소리는 환희와 쾌락으로 뭉쳐 온 방 안을 떠돌고 있었다.
“레이, 빨리…….”
여자의 외침이 날카롭게 퍼졌지만 남자의 손길은 더욱 여유롭게 여자의 가슴 위를 훑었다. 자신의 손길에 이미 달아오를 대로 오른 여자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레이, 그렇게 애태우지만 말고. 응?”
“쉿.”
여자의 탐스럽고 봉긋한 가슴을 스치던 남자의 손길이 그녀의 입술로 다가갔다. 여자는 이미 남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남자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너 그거 알아?”
여자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레이가 말했다.
“뭘 말하는 거야?”
“나는 말이야, 해 달라고 조르는 여자한텐 의욕이 안 생겨.”
남자가 주는 쾌감에 들떠 있던 여자는 어느새 식어 버린 남자의 목소리에 두 눈을 깜빡였다.
“뭐?”
“이렇게 쉽게 가질 수 있는 건 매력이 없다는 소리야.”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향해 싱긋 웃어 준 남자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풀어져 있던 바지 버클을 채웠다.
달뜬 여자의 몸을 그대로 안아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그건 남자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 일어나자, 오늘은 안 되겠어. 데려다줄게.”
어느새 창가로 다가간 남자는 커튼을 활짝 걷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지 붉어진 햇살이 침실로 비쳐 들었고 알몸의 여자는 밀려오는 수치심에 남자를 노려보았다.
“내가 쉬워서 매력이 없다 그거야?”
“미안, 그만 나가자. 나 일하러 가야 해.”
“하!”
너무도 태연한 레이의 말에 여자는 어이가 없어졌다. 저런 걸 뻔뻔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님 솔직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지이잉― 지이잉―
“씻고 나와. 데려다줄 테니까.”
레이는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며 말했다.
“네, 레이입니다.”
― 레이? 흐음! 또 여자랑 있구나? 어디야? 호텔?
전화기 너머로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호텔. 이제 나갈 거야.”
― 시간 다 되어 가는 거 알지? 늦지 않게 와야 돼!
“OK, 걱정 마.”
“데려다줄 필요 없어.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어느새 옷을 다 입었는지 여자는 레이를 노려보며 말했고 밖으로 나서려는 여자의 손목을 레이는 낚아챘다.
“기다려, 데려다줄게.”
방금까지 여자에게 감당하기 힘든 수치심을 안겼던 남자가 맞기는 한지 금방 다정한 눈길로 여자에게 말하고 있는 레이였다.
― 뭐야? 또 여자한테 못된 짓 했구나?
“못된 짓이란 표현은 좀 그렇잖아?”
― 하여튼 자기도 병이야, 병! 바로 와. 시간 없어!
“알았어. 조금 있다 보자고.”
레이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쫑알거리는 잔소리가 재밌다는 듯 피식 웃어 보이고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난 혼자 갈 테니까, 빨리 오라는 그 여자한테나 가 봐.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말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목소리에 잔뜩 신경이 날카로워진 여자는 레이의 손을 뿌리치고는 금방이라도 그의 얼굴을 할퀼 것 같은 강렬한 눈빛으로 노려본 후 호텔 방을 나섰다.
“이번에도 너무 솔직했나?”
쾅 소릴 내며 닫힌 문을 바라보던 레이는 자신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날카로운 말은 쉽사리 밖으로 튀어 나간다.
“하아.”
레이는 밀려오는 씁쓸함에 한숨을 내쉰 후 복잡해져 오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버릇. 마음 한편이 답답해져 왔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색감, 저절로 눈길을 끄는 레이스와 관능적인 디자인. 유럽에서 요 몇 년간 가장 사랑받는 란제리 브랜드 ‘더 팜므’의 패션쇼는 은서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한시도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속옷 디자이너가 된 지 이제 5년.
막 대리를 달았고 일의 재미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은서에게 ‘팜므’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브랜드 중 하나였다.
거기다 팜므의 대표이자 디자이너 제이디는 그야말로 은서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디자이너가 신비주의라 더 흥미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디자인이 하나같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디자이너들이 모여 만든 디자인팀으로 시작한 팜므는 어느덧 유럽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가 되었고 아시아 진출을 위해 한국의 속옷 회사와 콜라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 소식에 업계에선 너도나도 팜므의 프로젝트에 뛰어들었고 은서의 회사도 그 열기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경쟁자가 많아 아직까진 확고부동하게 업계에 자리매김하지 못한 앨리스로선 이번 프로젝트는 반드시 성공시키고 싶은 일이었다.
제이디와의 미팅 약속조차 잡지 못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고 오겠다고 큰소리쳤으니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다. 반드시 그녀를 만나 설득해야 한다는 것.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거지.”
패션쇼가 성황리에 끝이 나고 따로 초대받은 사람들만 모이는 뒤풀이 장소에 도착했다. 능력 있는 팀장과 일본 협력 업체의 도움으로 오게 된 뒤풀이 장소는 그야말로 화려한 파티장이었다.
너도나도 화려한 드레스 차림과 반짝거리는 보석, 거기에다 한껏 치장한 화려한 외모까지. 은서 본인이 남자였다면 이곳의 여자들을 보고 브라보를 외치고 있지 않았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드레스 하나 빌려 오는 건데.
그저 간단한 뒤풀이쯤으로 생각한 은서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곳에서 가장 소박하고 단출한 차림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나저나 제이디도 온다고 했는데 어디 있는 거야?”
이렇게 화려한 자리라곤 생각조차 못 하고 온 자신의 행색이 그야말로 초라함의 극치였지만 은서는 두리번거리며 제이디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얼굴을 모르니, 찾기도 어렵고…….”
제이디에 관해 아는 것이라곤 삼십 대 중후반의 젊은 여성 디자이너로 세련된 외모를 가졌다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소문일 뿐 실체를 아는 사람은 그의 측근들 외에는 없다고 했다.
이처럼 신비주의를 고집하던 그녀가 뒤풀이 장소에 나타난다고 했으니 분명 그녀의 곁으로 사람들이 몰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은서는 삼삼오오 모여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를 유심히 살폈다.
제이디가 못 해 준다는 미팅을 억지로 하러 온 거니까 실수 없이 해야 돼. 팀장 말대로 이번에 삐끗하면 우린 진짜 그 프로젝트에서 아웃일 테니까.
무조건 성공시키고 오겠노라 큰소리를 쳤지만 불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이디에 관한 무수히 많은 소문 중 하나가 일에 관해서는 그 어떤 사람보다 깐깐하고 독종이라는 것이었다.
무작정 찾아오긴 했지만 은서의 마음이야 어쨌든 받아들이는 상대방으로선 부담스러운 일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뭐 좀 물어보려고 해도 한국 사람이 누군지 알 수가 있어야지.”
가뜩이나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 거기다 외국인들 천지인 이곳에서 마음 편하게 한국말로 무엇인가를 물어보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곤란해하고 있던 은서에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또렷하고 정확한 한국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