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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신비주의 디자이너(2)
“한국분이세요?”
은서는 어느새 다가와 상냥한 얼굴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낯선 여자에게 물었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 정도? 큰 키의 늘씬한 몸매를 한 여자는 방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까부터 두리번두리번하는 게 보여서요.”
“아, 다행이다. 안 그래도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하던 차였거든요.”
“네, 혹시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필요한 건 아니고, 뭐 하나 물어볼게요.”
“네.”
은서는 중대한 이야길 하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누가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라도 하듯 작게 소곤거렸다.
“혹시 ‘팜므’ 관계자들 어디 있는지 알아요? 제가 꼭 좀 만나야 돼서요.”
“팜므 관계자요?”
“네, 꼭 만나야 해서 그래요. 알면 좀 가르쳐 줄래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스태프 중 한 명이 밖에 있는 건 봤어요. 팜므 직원들이 하는 레드 카드를 목에 걸고 있는 걸 봤거든요.”
“아, 그래요? 고마워요!”
방금까지 풀 죽어 있던 은서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펴졌다. 꾸벅 인사를 한 후 파티장을 빠져나가던 은서는 조상님들의 지혜는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한 그 말처럼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와중에 짠! 하고 나타난 그녀는 그야말로 은서에겐 구원자요, 솟아날 구멍이었다.
하늘이 돕는구나, 반드시 제이디를 만나고 말겠어!
* * *
은서는 자신을 도와준 천사 같은 여자가 해 준 말을 따라 바깥 정원으로 나왔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은서를 스쳐 지나갔고 싱그럽게 피어 있는 벚나무들이 조명으로 인해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 있는 거지?”
팜므의 관계자들이 한다는 붉은색 출입증 카드를 목에 걸고 있는 사람을 찾으려 은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간간이 오가는 사람은 눈에 띄었지만 붉은색 출입 카드를 하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갔나?”
“누구, 찾습니까?”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던 은서의 귀에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울림이 좋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돌린 은서는 등 뒤에 서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 하얀색 면 티셔츠에 검은색 바지 차림의 키가 큰 남자였다. 서글서글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걸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은서는 다가와 말을 거는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뒷걸음을 쳤다. 표정 없는 얼굴 때문이었을까? 온몸에 소름이 돋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 레드 카드?”
그리고 그토록 찾았던 팜므 관계자의 표식인 붉은색 출입 카드가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혹시 팜므 관계자예요?”
은서는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고 남자는 공격적인 여자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다행이다. 아무도 못 만나고 돌아가나 했는데!”
“무슨 일이시죠?”
감격에 겨워 잔뜩 신이 난 목소리의 여자를 남자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 수상한 여자는 뭐지?’ 하는 눈빛이 쏟아졌다.
내가 수상해 보이나?
“저 수상한 사람 아니고요, 제이디를 만나러 왔어요, 한국에서.”
“한국에서 왔다고요?”
“네, 제이디를 만나고 싶은데 어디 있는지 아세요? 뒤풀이에 온다고 들었는데.”
은서는 자신이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말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남자는 더욱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 눈빛을 반짝거리며 제이디의 스케줄을 읊고 있는 여자. 그것도 제이디와 정식 약속을 잡지도 않았고 무작정 만나겠다며 한국에서 날아온 여자. 그의 눈엔 은서가 충분히 의심스러울 상황이었다.
“만나고 싶다고 다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나 만나지도 않지만.”
사나운 검은 고양이처럼 남자는 은서를 경계했다.
그래, 수상해 보일 수 있지. 그럼, 그럼!
“저는 한국 앨리스의 디자인팀 대리 한은서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하게 될 프로젝트 때문에 제이디와 미팅 약속을 잡고 싶은데 스케줄이 여의치 않다고 하셔서 직접 뵈러 왔어요.”
남자의 의심을 풀기 위해선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 은서는 계획에도 없던 자기소개를 하며 명함을 내밀었고 그제야 남자는 조금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앨리스에서 직접 왔단 말입니까? 제이디를 만나러?”
여자가 건넨 명함을 이리저리 살피던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 은서를 바라보았다.
“네. 꼭 뵙고 싶어서요.”
“음, 어쩌죠? 제이디는 호텔로 바로 돌아갔거든요. 만날 수 없을 것 같네요.”
남자는 은서가 건넨 명함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제이디를 만나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는 좋게 평가하지만 이렇게 무작정 찾아와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요? 뒤풀이 온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그럴 예정이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바로 돌아갔어요.”
방금 전까지 제이디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들떠 있던 은서의 얼굴은 이내 울상이 되었다. 그를 향한 팬심뿐 아니라 이건 비즈니스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팀장 역시 개인 사비까지 털어 이리저리 선을 대어 은서를 일본까지 보낸 것이었다.
“아, 미치겠네!”
“흐음, 제이디를 꼭 봐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남자는 좌절하는 은서를 바라보다 물었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제이디를 만나서 제대로 된 미팅 약속을 잡아 오겠다고 큰소리쳤거든요. 한국 프로젝트 파트너로 말이죠.”
이곳에 오면 반드시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은서는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인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제이디의 털끝도 구경하지 못하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다음번을 기약해야겠네요. 들어가서 식사하고 가세요.”
“제가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에요.”
이 와중에 밥이 넘어가겠어요?
은서는 새침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속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앞의 남자에게 화풀이해 봐야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먹어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그러다가 우리 회사 윗분들을 만날 수도 있잖아요?”
하나, 둘, 셋.
단 3초, 은서의 머릿속 계산기는 타닥타닥하며 답을 내놓았다.
“갑시다. 밥 먹으러!”
* * *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정신은 들었지만 눈은 떠지지 않았고 그저 귓가에 들리는 소리만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으음…….
쏴아아―
샤워기를 틀어 놨나?
귓가에 들리는 그 소리를 한참을 듣고 나서야 그게 샤워실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인지한 은서였다.
차박― 차박―
한참 들리던 샤워실의 물소리가 뚝 끊어지자 이번엔 차박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소리는 점점 크게, 점점 가까이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지, 저 소리는?
소리가 자신에게로 가까워질수록 은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 제이디를 만나지 못한다는 실망감에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했던 술.
그리고 자신과 함께 술잔을 기울여 준 팜므의 직원이라던 남자 하나. 그는 자신의 이름을 ‘레이’라고 했다.
분명 같이 마신 건 기억이 나는데, 내가 혼자 호텔에 돌아왔나?
불안한 느낌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헉!”
방금 전까지 눈조차 뜨기 어려웠던 몸은 튕겨 나가는 고무줄처럼 빛의 속도로 침대에서 떨어졌고 감겨 있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떠졌다.
“일어났네? 깨우려 했는데.”
잔뜩 커질 대로 커진 은서의 눈앞에 머리의 물기를 털어 내며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편해 보이는 바지를 입고 상체는 벌거벗은 남자. 검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어젯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준 레이였다.
“뭐, 뭐, 뭐예요?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왜 당신이…….”
샤워를 하고 나와요? 그것도 반누드로?
은서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얼른 이불에 가려진 자신의 몸을 살폈다.
제발, 제발, 그런 건 아니겠지? 응?
“…….”
하지만 헛된 바람일 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알몸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꿈이겠지?
은서는 자신의 알몸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몇 번이나 쳐다보았지만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리고 너무 놀라 말조차 하지 못하는 은서의 모습에 어느새 다가온 남자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안, 아프지? 어젠 내가 너무 거칠게 안았어.”
꺄아아악!
* * *
한 잔 두 잔 천천히 마시기 시작한 술은 어느새 탄력을 받았는지 목구멍을 미끄러지듯 술술 넘어갔다. 정신은 몽롱해졌고 애써 진정시켰던 가슴은 다시금 요동쳤다.
낯선 남자는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의 푸념을 들어 주었고 은서는 그 다정함에 조금 위로받고 있었다.
“내가요. 제이디 속옷을 얼마나 좋아하냐면 말이죠!”
“내가 그 이야기를 벌써 세 번째 듣는 건 알아?”
잔뜩 흐트러진 눈빛으로 쫑알쫑알 뭐가 그렇게도 즐거운지 여자는 했던 이야길 하고 또 하고 있었다.
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제이디의 속옷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즐거웠다 우울했다 표정의 변화가 다채롭기 그지없다.
뭐 이렇게 흐트러진 이유는 제이디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하긴 한국에서 무작정 왔다던데, 속상하겠지.
“그러니까요, 제가 제이디 속옷을 얼마나 좋아하느냐면!”
“남자 친구랑 헤어진 것보다 그 남자가 사 준 속옷을 버릴 때 더 마음 아팠다며?”
“어? 어떻게 알았어요?”
외울 지경이다, 이 여자야!
기껏 한국에서 일본까지 실낱같은 희망으로 날아와 그 희망마저 산산조각 난 여자의 사정이 아니었다면 이미 이 주정뱅이 여자를 두고 돌아갔을 것이다.
딱해서 참는다. 참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데, 그만하고 일어나죠?”
“흐잉, 돌아가면 안 되는데요? 제이디 만나야 되거든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는 어느덧 취해서 훌쩍이는 은서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대로 두다간 여기 있는 술을 몽땅 마시고 사고라도 칠 것 같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집요하네, 알았으니까 일단 일어나라고. 너무 마셨어.”
한국에서 제이디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찾아왔다는 여자. 평소라면 모르는 척 내버려 뒀을 텐데 왜 이렇게 뒤통수가 당기는지. 레이는 결국 비틀거리는 여자의 몸을 부축해야 했다.
* * *
“미안, 아프지? 어젠 내가 너무 거칠게 안았어.”
당황스러움에 흔들리던 시선을 단 한마디로 사로잡은 레이는 갓 샤워했다는 걸 뽐내기라도 하듯 산뜻한 비누 향을 풍기고 있었다.
밝은 곳에서 마주한 레이의 얼굴은 짙은 눈썹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날카로운 눈매가 시원스레 트여 있었다.
물방울 정도는 그대로 미끄러져 내릴 것 같은 날렵한 콧날. 그 밑으로 붉은 입술이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머릿속에 경고등이 반짝였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이유 모를 소름이 다시금 은서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한국분이세요?”
은서는 어느새 다가와 상냥한 얼굴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낯선 여자에게 물었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 정도? 큰 키의 늘씬한 몸매를 한 여자는 방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까부터 두리번두리번하는 게 보여서요.”
“아, 다행이다. 안 그래도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하던 차였거든요.”
“네, 혹시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필요한 건 아니고, 뭐 하나 물어볼게요.”
“네.”
은서는 중대한 이야길 하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누가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라도 하듯 작게 소곤거렸다.
“혹시 ‘팜므’ 관계자들 어디 있는지 알아요? 제가 꼭 좀 만나야 돼서요.”
“팜므 관계자요?”
“네, 꼭 만나야 해서 그래요. 알면 좀 가르쳐 줄래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스태프 중 한 명이 밖에 있는 건 봤어요. 팜므 직원들이 하는 레드 카드를 목에 걸고 있는 걸 봤거든요.”
“아, 그래요? 고마워요!”
방금까지 풀 죽어 있던 은서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펴졌다. 꾸벅 인사를 한 후 파티장을 빠져나가던 은서는 조상님들의 지혜는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한 그 말처럼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와중에 짠! 하고 나타난 그녀는 그야말로 은서에겐 구원자요, 솟아날 구멍이었다.
하늘이 돕는구나, 반드시 제이디를 만나고 말겠어!
은서는 자신을 도와준 천사 같은 여자가 해 준 말을 따라 바깥 정원으로 나왔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은서를 스쳐 지나갔고 싱그럽게 피어 있는 벚나무들이 조명으로 인해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 있는 거지?”
팜므의 관계자들이 한다는 붉은색 출입증 카드를 목에 걸고 있는 사람을 찾으려 은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간간이 오가는 사람은 눈에 띄었지만 붉은색 출입 카드를 하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갔나?”
“누구, 찾습니까?”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던 은서의 귀에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울림이 좋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돌린 은서는 등 뒤에 서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 하얀색 면 티셔츠에 검은색 바지 차림의 키가 큰 남자였다. 서글서글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걸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은서는 다가와 말을 거는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뒷걸음을 쳤다. 표정 없는 얼굴 때문이었을까? 온몸에 소름이 돋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 레드 카드?”
그리고 그토록 찾았던 팜므 관계자의 표식인 붉은색 출입 카드가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혹시 팜므 관계자예요?”
은서는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고 남자는 공격적인 여자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다행이다. 아무도 못 만나고 돌아가나 했는데!”
“무슨 일이시죠?”
감격에 겨워 잔뜩 신이 난 목소리의 여자를 남자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 수상한 여자는 뭐지?’ 하는 눈빛이 쏟아졌다.
내가 수상해 보이나?
“저 수상한 사람 아니고요, 제이디를 만나러 왔어요, 한국에서.”
“한국에서 왔다고요?”
“네, 제이디를 만나고 싶은데 어디 있는지 아세요? 뒤풀이에 온다고 들었는데.”
은서는 자신이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말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남자는 더욱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 눈빛을 반짝거리며 제이디의 스케줄을 읊고 있는 여자. 그것도 제이디와 정식 약속을 잡지도 않았고 무작정 만나겠다며 한국에서 날아온 여자. 그의 눈엔 은서가 충분히 의심스러울 상황이었다.
“만나고 싶다고 다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나 만나지도 않지만.”
사나운 검은 고양이처럼 남자는 은서를 경계했다.
그래, 수상해 보일 수 있지. 그럼, 그럼!
“저는 한국 앨리스의 디자인팀 대리 한은서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하게 될 프로젝트 때문에 제이디와 미팅 약속을 잡고 싶은데 스케줄이 여의치 않다고 하셔서 직접 뵈러 왔어요.”
남자의 의심을 풀기 위해선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 은서는 계획에도 없던 자기소개를 하며 명함을 내밀었고 그제야 남자는 조금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앨리스에서 직접 왔단 말입니까? 제이디를 만나러?”
여자가 건넨 명함을 이리저리 살피던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 은서를 바라보았다.
“네. 꼭 뵙고 싶어서요.”
“음, 어쩌죠? 제이디는 호텔로 바로 돌아갔거든요. 만날 수 없을 것 같네요.”
남자는 은서가 건넨 명함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제이디를 만나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는 좋게 평가하지만 이렇게 무작정 찾아와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요? 뒤풀이 온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그럴 예정이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바로 돌아갔어요.”
방금 전까지 제이디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들떠 있던 은서의 얼굴은 이내 울상이 되었다. 그를 향한 팬심뿐 아니라 이건 비즈니스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팀장 역시 개인 사비까지 털어 이리저리 선을 대어 은서를 일본까지 보낸 것이었다.
“아, 미치겠네!”
“흐음, 제이디를 꼭 봐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남자는 좌절하는 은서를 바라보다 물었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제이디를 만나서 제대로 된 미팅 약속을 잡아 오겠다고 큰소리쳤거든요. 한국 프로젝트 파트너로 말이죠.”
이곳에 오면 반드시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은서는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인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제이디의 털끝도 구경하지 못하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다음번을 기약해야겠네요. 들어가서 식사하고 가세요.”
“제가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에요.”
이 와중에 밥이 넘어가겠어요?
은서는 새침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속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앞의 남자에게 화풀이해 봐야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먹어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그러다가 우리 회사 윗분들을 만날 수도 있잖아요?”
하나, 둘, 셋.
단 3초, 은서의 머릿속 계산기는 타닥타닥하며 답을 내놓았다.
“갑시다. 밥 먹으러!”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정신은 들었지만 눈은 떠지지 않았고 그저 귓가에 들리는 소리만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으음…….
쏴아아―
샤워기를 틀어 놨나?
귓가에 들리는 그 소리를 한참을 듣고 나서야 그게 샤워실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인지한 은서였다.
차박― 차박―
한참 들리던 샤워실의 물소리가 뚝 끊어지자 이번엔 차박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소리는 점점 크게, 점점 가까이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지, 저 소리는?
소리가 자신에게로 가까워질수록 은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 제이디를 만나지 못한다는 실망감에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했던 술.
그리고 자신과 함께 술잔을 기울여 준 팜므의 직원이라던 남자 하나. 그는 자신의 이름을 ‘레이’라고 했다.
분명 같이 마신 건 기억이 나는데, 내가 혼자 호텔에 돌아왔나?
불안한 느낌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헉!”
방금 전까지 눈조차 뜨기 어려웠던 몸은 튕겨 나가는 고무줄처럼 빛의 속도로 침대에서 떨어졌고 감겨 있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떠졌다.
“일어났네? 깨우려 했는데.”
잔뜩 커질 대로 커진 은서의 눈앞에 머리의 물기를 털어 내며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편해 보이는 바지를 입고 상체는 벌거벗은 남자. 검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어젯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준 레이였다.
“뭐, 뭐, 뭐예요?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왜 당신이…….”
샤워를 하고 나와요? 그것도 반누드로?
은서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얼른 이불에 가려진 자신의 몸을 살폈다.
제발, 제발, 그런 건 아니겠지? 응?
“…….”
하지만 헛된 바람일 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알몸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꿈이겠지?
은서는 자신의 알몸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몇 번이나 쳐다보았지만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리고 너무 놀라 말조차 하지 못하는 은서의 모습에 어느새 다가온 남자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안, 아프지? 어젠 내가 너무 거칠게 안았어.”
꺄아아악!
한 잔 두 잔 천천히 마시기 시작한 술은 어느새 탄력을 받았는지 목구멍을 미끄러지듯 술술 넘어갔다. 정신은 몽롱해졌고 애써 진정시켰던 가슴은 다시금 요동쳤다.
낯선 남자는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의 푸념을 들어 주었고 은서는 그 다정함에 조금 위로받고 있었다.
“내가요. 제이디 속옷을 얼마나 좋아하냐면 말이죠!”
“내가 그 이야기를 벌써 세 번째 듣는 건 알아?”
잔뜩 흐트러진 눈빛으로 쫑알쫑알 뭐가 그렇게도 즐거운지 여자는 했던 이야길 하고 또 하고 있었다.
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제이디의 속옷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즐거웠다 우울했다 표정의 변화가 다채롭기 그지없다.
뭐 이렇게 흐트러진 이유는 제이디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하긴 한국에서 무작정 왔다던데, 속상하겠지.
“그러니까요, 제가 제이디 속옷을 얼마나 좋아하느냐면!”
“남자 친구랑 헤어진 것보다 그 남자가 사 준 속옷을 버릴 때 더 마음 아팠다며?”
“어? 어떻게 알았어요?”
외울 지경이다, 이 여자야!
기껏 한국에서 일본까지 실낱같은 희망으로 날아와 그 희망마저 산산조각 난 여자의 사정이 아니었다면 이미 이 주정뱅이 여자를 두고 돌아갔을 것이다.
딱해서 참는다. 참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데, 그만하고 일어나죠?”
“흐잉, 돌아가면 안 되는데요? 제이디 만나야 되거든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는 어느덧 취해서 훌쩍이는 은서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대로 두다간 여기 있는 술을 몽땅 마시고 사고라도 칠 것 같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집요하네, 알았으니까 일단 일어나라고. 너무 마셨어.”
한국에서 제이디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찾아왔다는 여자. 평소라면 모르는 척 내버려 뒀을 텐데 왜 이렇게 뒤통수가 당기는지. 레이는 결국 비틀거리는 여자의 몸을 부축해야 했다.
“미안, 아프지? 어젠 내가 너무 거칠게 안았어.”
당황스러움에 흔들리던 시선을 단 한마디로 사로잡은 레이는 갓 샤워했다는 걸 뽐내기라도 하듯 산뜻한 비누 향을 풍기고 있었다.
밝은 곳에서 마주한 레이의 얼굴은 짙은 눈썹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날카로운 눈매가 시원스레 트여 있었다.
물방울 정도는 그대로 미끄러져 내릴 것 같은 날렵한 콧날. 그 밑으로 붉은 입술이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머릿속에 경고등이 반짝였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이유 모를 소름이 다시금 은서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