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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녀의 정체
하지만 본인을 앞에 두고도 제이디의 열렬한 팬이라며, 그녀를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말하던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웃음을 참기가 힘들어진다.
“맨날 여자 만날 땐 레이란 가명을 쓰니까 그렇지!”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알렉스가 끼어들었다. 조금 전 자기만 모르는 이야길 나누던 둘에게 단단히 삐친 모양인지 눈까지 흘긴다.
“충식이 네가 여자들 앞에서 알렉스란 이름 쓰는 거랑 같은 거야.”
“무슨 소리! 난 일할 때도 알렉스잖아!”
지니의 말에 발끈한 알렉스 아니, 충식의 말에 제이디는 피식 웃어 버렸다.
“한국 일정에 앨리스 포함시켜. 지니 당신이 직접 약속 잡고. 미팅은 해 봐야지.”
“알았어, 진행할게.”
“응, 되도록 앨리스 쪽 스케줄에 맞춰 줘. 그 집념 강한 직원의 목이 걸려 있거든.”
“흐음, 알았어. 접수!”
지니는 제이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갔고 알렉스는 여전히 혼자 피식거리는 제이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알렉스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제이디는 힐끗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넌 안 나가? 일 안 해?”
저 자식, 알렉스의 빙긋거리는 눈웃음을 보자 제이디는 머리가 띵해져 온다. 집념 강한 직원은 앨리스뿐 아니라 여기에도 하나 있으니까.
“내가 대충 들어서 잘 판단이 안 되는데, 너 좀 낯설다 오늘?”
“뭐가?”
하여간 이런 쪽으론 저놈 촉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니까.
“싱글벙글거리는 얼굴도 그렇고, 잘 모르는 여자한테 상당한 호의를 보이는 것 같단 말이지?”
평소 제이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냥 좀 재미있는 여자라 그래. 아무튼 그만하고 나가서 일해.”
“쳇, 알았다. 알았어!”
저렇게 나오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알렉스는 툴툴거리며 자리를 떴다.
‘흐잉, 제이디 꼭 만나야 되는데, 안 그럼 나 회사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는데! 진짜로…….’
술에 취해 훌쩍거리며 웅얼거리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 걸었다고, 반드시 제이디를 만나서 이 기획안을 전해 줘야 한다고.
5분이라도 좋으니까 꼭 봐야 한다며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던 여자의 주정을 그는 한참을 들어 주었다.
“그나저나 내가 남자라는 건 생각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걸 어쩌나?”
피식, 그녀를 떠올리던 제이디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 커다랗고 큰 눈이 자신을 보고 얼마나 더 커질지 상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라 그대로 기절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자신을 속였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선을 돌려 버리던 그때처럼 자신을 피하는 건 아닐까?
‘제이디는 제 동경의 대상이자 롤모델이에요. 제이디 같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꼭 같이 일해 보고 싶어요. 그녀가 일하는 걸 옆에서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소원이 없어요.’
죽어도 소원이 없다. 그 말에 제이디는 웃었다. 술에 취해 감정이 격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간절함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의 눈빛에 꼭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오랜만에 심장이 쿵 소리를 냈었다.
“한국 일정이 꽤나 기대되는군.”
제이디는 오랜만에 방문할 한국에 대한 기대보다 그녀가 깜짝 놀라 할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되고 있었다.
* * *
유명 호텔 레스토랑의 VIP 라운지에서 중후한 인상의 풍채 좋은 박세웅 회장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패션 사업 전반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사업 확장을 하던 그의 회사는 어느덧 대한민국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가 되었고 그중 란제리 브랜드 헤라는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윤 실장, 프로젝트 준비는 잘되어 가는 거지?”
나직하고 무게감 있는 박 회장의 목소리에 헤라의 디자인팀 실장 세령은 마시고 있던 와인 잔을 얼른 내려놓았다. 온화하고 사람 좋은 인상의 박 회장이었으나 세령은 그를 볼 때마다 위축되고 어려웠다.
“네,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 팜믄가 뭔가 하는 회사가 유럽에서 제법 잘나가는 속옷 회사라지?”
“네, 지금 유럽에서 가장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브랜듭니다. 이미 아시아에서도 입소문이 나 있는 상태고요.”
“음, 그렇군. 한국 사람들도 이젠 제법 글로벌해졌어. 한국인이 만든 회사라지 거기가?”
서걱서걱, 고기를 썰어 가며 박 회장은 세령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네, 한국인 디자인팀이 모여서 시작된 회사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 수익이 어마어마한 회사가 되었구요.”
“아버지, 세령이 체하겠습니다. 똑 부러지는 성격인 거 잘 아시면서 무슨 걱정이세요?”
식사 자리에서 일 이야기가 길어질 조짐이 보이자 세령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진호는 그들의 대화를 자르며 넌지시 말을 던졌다.
SW패션그룹 기획본부장이자 박 회장의 외동아들인 그는 훤칠한 외모와 SW패션그룹 외아들이라는 집안 배경, 거기다 회사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남자였다.
그로 인해 그를 탐내는 집안은 하나둘이 아니었지만 그의 선택은 첫눈에 반한 윤세령이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또렷하게 자리 잡은 눈, 코, 입. 부드러워 보이는 연갈색의 짧은 머리 스타일, 세련된 옷맵시, 가녀린 외모에서 풍겨지는 우아함.
그 모든 것이 진호의 이상형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거기다 그간 자신만 보면 달려드는 여자들과는 달리 세령은 언제나 진호 앞에서 당당했고 도도했다.
그게 진짜 매력이지.
오랜 구애 끝에 얻어 낸 그녀의 마음, 그는 진심으로 세령을 사랑하고 있었다.
“저놈이 저렇게 푼수였구만? 하하! 윤 실장이 본부장 좀 많이 도와주게.”
평범한 집안 환경에서 자란 세령의 조건이 박 회장네 며느릿감으론 부족한 면이 많았다. 그렇기에 처음엔 아들의 선택을 반대하기도 했었지만 그녀가 헤라에 와서 보여 준 모습은 박 회장의 마음을 녹이는 데 충분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회장님.”
“그만하시고 식사 먼저 하세요. 저 아직 배고픕니다.”
“오냐, 그리하마. 얼른 식사부터 하자.”
“얼른 먹어, 윤 실장. 여기 스테이크 좋아하잖아.”
“네, 회장님도 어서 드세요.”
세령은 상냥한 눈빛으로 웃어 보였다. 잘생긴 외모나 집안 배경이 아니더라도 진호는 품성이 착하고 마음이 따뜻한 좋은 남자였다.
비록 심장이 아프도록 뛰게 만들지는 않지만 그와 결혼한다면 분명 모두가 부러워할 따뜻하고 좋은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겐 당신이 동아줄이니까.
* * *
처음엔 헛것을 봤나 싶었고 그러면서도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다음엔 자신에게 윙크를 날리는 남자를 보며 저 남자가 미쳤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은서는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제이디입니다.”
말끔한 슈트 차림의 제이디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반응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진짜 놀랐나 보네. 입을 못 다무는 걸 보니.
“엄마야…….”
여자의 반응에 흐뭇한 기분이 들던 때였다. 꽤나 많이 놀랐는지 은서는 결국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런! 저 정도로 놀라면 미안해지는데?
“한 대리 괜찮아? 왜 그래? 어디 아파?”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아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는 은서를 보며 놀란 장미주 팀장이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이디……, 제이디라고?
꿈을 꾸나?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은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며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눈빛들 사이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레이의 모습에 은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진짜 레이가 제이디란 말이야?
“한 대리! 괜찮아? 왜 그래?”
“아, 네…… 아니, 아니, 죄, 죄송합니다.”
은서는 풀릴 만큼 풀린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었다. 하지만 부들부들 다리가 떨려 오기 시작했고 너무 놀라 멈출 뻔했던 심장도 요란한 소릴 내며 다시 뛰기 시작했다.
“괜찮으시면 이제 회의 시작할까요?”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 은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획안으로 얼른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눈앞은 캄캄했다.
진짜 레이가 제이디란 말이지?
속았다.
정말 꿈에도 그가 제이디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아니, 제이디가 남자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동경하던,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던 그녀가 남자였다니. 그것도 자신과 하룻밤을 함께했던.
오, 마이, 갓!
은서는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회의에 집중할 수 없는 정신 상태였다. 그야말로 멘붕!
내가 일본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온 거야?
“후우.”
은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만나고 싶다고 다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 말처럼 그녀가 워낙 바쁜 사람이라서…….’
일본에서 레이가 했던 말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럴수록 밀려오는 배신감이란…….
도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냐고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었지만 일은 일이니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자신의 속과는 반대로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여유롭게 미팅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미팅을 하는 동안 단 한 순간도 레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 회사를 이끌고 있는 디자이너 겸 대표 제이디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고 유연해서 레이란 인물은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니었을까? 내가 잠깐 꿈을 꾼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워지는 은서였다.
“식사하고 오셔서 마무리하시죠?”
생각보다 길어지는 회의에 장미주 팀장이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에 있어서 깐깐한 사람이란 소문이야 이미 업계에서 파다했기에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사전 미팅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장 팀장의 말에 제이디는 빙긋, 웃음을 머금으며 은서를 바라봤다.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여자로 인해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졌다.
계속 그렇게 쳐다보지 않겠다. 그거지?
“먼저들 드시죠. 저는 한은서 씨랑 이 기획안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길 하고 싶은데…… 한은서 씨 괜찮죠?”
“네?”
“아휴, 되죠, 되고말고요. 은서 씨. 그럼 우리 식사하고 올게. 대표님이랑 이야기하고 있어요.”
장미주 팀장은 곤란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은서에게 그렇게 말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을 툭 내던진 팀장이 마치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주려 인당수에 몸을 던지려 하는 심청이를 물속으로 곱게 밀어 주는 뺑덕어멈처럼 보였다.
“은서 씨, 힘내.”
장 팀장은 그렇게 말하곤 회의실을 얼른 나섰다.
* * *
모두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간 사이 회의실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은서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제이디와 그런 그의 시선을 열심히 외면하고 있는 은서는 세렝게티의 사자와 임팔라처럼 서로의 숨소리에 집중하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흐르는 적막함, 그 팽팽한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가는 은서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쳐다도 안 볼 겁니까?”
숨 막히는 정적을 먼저 깬 쪽은 제이디였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그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 은서를 향해 질문했다.
하지만 은서의 고개는 여전히 제이디에게 향하지 않았다.
부글부글, 속이 끓어올랐다. 저 사기꾼!
“한은서 씨.”
“…….”
대답도 하기 싫다?
“은서 씨.”
“…….”
어쭈? 계속 이렇게 나오겠다 그거지?
“한은서.”
“…….”
갑작스레 날아온 반말에 은서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뭐, 뭐야? 그렇게 부르면 뭐? 설렐 줄 알아?
잠깐, 아주 잠깐 움찔거리긴 했지만 은서의 고개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
하나, 둘, 셋.
무심한 듯 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어진 말에 심장이 쾅! 하는 소릴 냈다. 순간 자신의 심장이 폭발이라도 한 건 아닌가 싶어 은서는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본인을 앞에 두고도 제이디의 열렬한 팬이라며, 그녀를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말하던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웃음을 참기가 힘들어진다.
“맨날 여자 만날 땐 레이란 가명을 쓰니까 그렇지!”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알렉스가 끼어들었다. 조금 전 자기만 모르는 이야길 나누던 둘에게 단단히 삐친 모양인지 눈까지 흘긴다.
“충식이 네가 여자들 앞에서 알렉스란 이름 쓰는 거랑 같은 거야.”
“무슨 소리! 난 일할 때도 알렉스잖아!”
지니의 말에 발끈한 알렉스 아니, 충식의 말에 제이디는 피식 웃어 버렸다.
“한국 일정에 앨리스 포함시켜. 지니 당신이 직접 약속 잡고. 미팅은 해 봐야지.”
“알았어, 진행할게.”
“응, 되도록 앨리스 쪽 스케줄에 맞춰 줘. 그 집념 강한 직원의 목이 걸려 있거든.”
“흐음, 알았어. 접수!”
지니는 제이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갔고 알렉스는 여전히 혼자 피식거리는 제이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알렉스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제이디는 힐끗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넌 안 나가? 일 안 해?”
저 자식, 알렉스의 빙긋거리는 눈웃음을 보자 제이디는 머리가 띵해져 온다. 집념 강한 직원은 앨리스뿐 아니라 여기에도 하나 있으니까.
“내가 대충 들어서 잘 판단이 안 되는데, 너 좀 낯설다 오늘?”
“뭐가?”
하여간 이런 쪽으론 저놈 촉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니까.
“싱글벙글거리는 얼굴도 그렇고, 잘 모르는 여자한테 상당한 호의를 보이는 것 같단 말이지?”
평소 제이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냥 좀 재미있는 여자라 그래. 아무튼 그만하고 나가서 일해.”
“쳇, 알았다. 알았어!”
저렇게 나오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알렉스는 툴툴거리며 자리를 떴다.
‘흐잉, 제이디 꼭 만나야 되는데, 안 그럼 나 회사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는데! 진짜로…….’
술에 취해 훌쩍거리며 웅얼거리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 걸었다고, 반드시 제이디를 만나서 이 기획안을 전해 줘야 한다고.
5분이라도 좋으니까 꼭 봐야 한다며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던 여자의 주정을 그는 한참을 들어 주었다.
“그나저나 내가 남자라는 건 생각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걸 어쩌나?”
피식, 그녀를 떠올리던 제이디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 커다랗고 큰 눈이 자신을 보고 얼마나 더 커질지 상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라 그대로 기절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자신을 속였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선을 돌려 버리던 그때처럼 자신을 피하는 건 아닐까?
‘제이디는 제 동경의 대상이자 롤모델이에요. 제이디 같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꼭 같이 일해 보고 싶어요. 그녀가 일하는 걸 옆에서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소원이 없어요.’
죽어도 소원이 없다. 그 말에 제이디는 웃었다. 술에 취해 감정이 격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간절함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의 눈빛에 꼭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오랜만에 심장이 쿵 소리를 냈었다.
“한국 일정이 꽤나 기대되는군.”
제이디는 오랜만에 방문할 한국에 대한 기대보다 그녀가 깜짝 놀라 할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되고 있었다.
유명 호텔 레스토랑의 VIP 라운지에서 중후한 인상의 풍채 좋은 박세웅 회장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패션 사업 전반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사업 확장을 하던 그의 회사는 어느덧 대한민국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가 되었고 그중 란제리 브랜드 헤라는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윤 실장, 프로젝트 준비는 잘되어 가는 거지?”
나직하고 무게감 있는 박 회장의 목소리에 헤라의 디자인팀 실장 세령은 마시고 있던 와인 잔을 얼른 내려놓았다. 온화하고 사람 좋은 인상의 박 회장이었으나 세령은 그를 볼 때마다 위축되고 어려웠다.
“네,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 팜믄가 뭔가 하는 회사가 유럽에서 제법 잘나가는 속옷 회사라지?”
“네, 지금 유럽에서 가장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브랜듭니다. 이미 아시아에서도 입소문이 나 있는 상태고요.”
“음, 그렇군. 한국 사람들도 이젠 제법 글로벌해졌어. 한국인이 만든 회사라지 거기가?”
서걱서걱, 고기를 썰어 가며 박 회장은 세령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네, 한국인 디자인팀이 모여서 시작된 회사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 수익이 어마어마한 회사가 되었구요.”
“아버지, 세령이 체하겠습니다. 똑 부러지는 성격인 거 잘 아시면서 무슨 걱정이세요?”
식사 자리에서 일 이야기가 길어질 조짐이 보이자 세령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진호는 그들의 대화를 자르며 넌지시 말을 던졌다.
SW패션그룹 기획본부장이자 박 회장의 외동아들인 그는 훤칠한 외모와 SW패션그룹 외아들이라는 집안 배경, 거기다 회사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남자였다.
그로 인해 그를 탐내는 집안은 하나둘이 아니었지만 그의 선택은 첫눈에 반한 윤세령이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또렷하게 자리 잡은 눈, 코, 입. 부드러워 보이는 연갈색의 짧은 머리 스타일, 세련된 옷맵시, 가녀린 외모에서 풍겨지는 우아함.
그 모든 것이 진호의 이상형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거기다 그간 자신만 보면 달려드는 여자들과는 달리 세령은 언제나 진호 앞에서 당당했고 도도했다.
그게 진짜 매력이지.
오랜 구애 끝에 얻어 낸 그녀의 마음, 그는 진심으로 세령을 사랑하고 있었다.
“저놈이 저렇게 푼수였구만? 하하! 윤 실장이 본부장 좀 많이 도와주게.”
평범한 집안 환경에서 자란 세령의 조건이 박 회장네 며느릿감으론 부족한 면이 많았다. 그렇기에 처음엔 아들의 선택을 반대하기도 했었지만 그녀가 헤라에 와서 보여 준 모습은 박 회장의 마음을 녹이는 데 충분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회장님.”
“그만하시고 식사 먼저 하세요. 저 아직 배고픕니다.”
“오냐, 그리하마. 얼른 식사부터 하자.”
“얼른 먹어, 윤 실장. 여기 스테이크 좋아하잖아.”
“네, 회장님도 어서 드세요.”
세령은 상냥한 눈빛으로 웃어 보였다. 잘생긴 외모나 집안 배경이 아니더라도 진호는 품성이 착하고 마음이 따뜻한 좋은 남자였다.
비록 심장이 아프도록 뛰게 만들지는 않지만 그와 결혼한다면 분명 모두가 부러워할 따뜻하고 좋은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겐 당신이 동아줄이니까.
처음엔 헛것을 봤나 싶었고 그러면서도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다음엔 자신에게 윙크를 날리는 남자를 보며 저 남자가 미쳤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은서는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제이디입니다.”
말끔한 슈트 차림의 제이디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반응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진짜 놀랐나 보네. 입을 못 다무는 걸 보니.
“엄마야…….”
여자의 반응에 흐뭇한 기분이 들던 때였다. 꽤나 많이 놀랐는지 은서는 결국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런! 저 정도로 놀라면 미안해지는데?
“한 대리 괜찮아? 왜 그래? 어디 아파?”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아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는 은서를 보며 놀란 장미주 팀장이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이디……, 제이디라고?
꿈을 꾸나?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은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며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눈빛들 사이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레이의 모습에 은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진짜 레이가 제이디란 말이야?
“한 대리! 괜찮아? 왜 그래?”
“아, 네…… 아니, 아니, 죄, 죄송합니다.”
은서는 풀릴 만큼 풀린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었다. 하지만 부들부들 다리가 떨려 오기 시작했고 너무 놀라 멈출 뻔했던 심장도 요란한 소릴 내며 다시 뛰기 시작했다.
“괜찮으시면 이제 회의 시작할까요?”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 은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획안으로 얼른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눈앞은 캄캄했다.
진짜 레이가 제이디란 말이지?
속았다.
정말 꿈에도 그가 제이디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아니, 제이디가 남자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동경하던,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던 그녀가 남자였다니. 그것도 자신과 하룻밤을 함께했던.
오, 마이, 갓!
은서는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회의에 집중할 수 없는 정신 상태였다. 그야말로 멘붕!
내가 일본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온 거야?
“후우.”
은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만나고 싶다고 다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 말처럼 그녀가 워낙 바쁜 사람이라서…….’
일본에서 레이가 했던 말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럴수록 밀려오는 배신감이란…….
도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냐고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었지만 일은 일이니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자신의 속과는 반대로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여유롭게 미팅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미팅을 하는 동안 단 한 순간도 레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 회사를 이끌고 있는 디자이너 겸 대표 제이디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고 유연해서 레이란 인물은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니었을까? 내가 잠깐 꿈을 꾼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워지는 은서였다.
“식사하고 오셔서 마무리하시죠?”
생각보다 길어지는 회의에 장미주 팀장이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에 있어서 깐깐한 사람이란 소문이야 이미 업계에서 파다했기에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사전 미팅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장 팀장의 말에 제이디는 빙긋, 웃음을 머금으며 은서를 바라봤다.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여자로 인해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졌다.
계속 그렇게 쳐다보지 않겠다. 그거지?
“먼저들 드시죠. 저는 한은서 씨랑 이 기획안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길 하고 싶은데…… 한은서 씨 괜찮죠?”
“네?”
“아휴, 되죠, 되고말고요. 은서 씨. 그럼 우리 식사하고 올게. 대표님이랑 이야기하고 있어요.”
장미주 팀장은 곤란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은서에게 그렇게 말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을 툭 내던진 팀장이 마치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주려 인당수에 몸을 던지려 하는 심청이를 물속으로 곱게 밀어 주는 뺑덕어멈처럼 보였다.
“은서 씨, 힘내.”
장 팀장은 그렇게 말하곤 회의실을 얼른 나섰다.
모두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간 사이 회의실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은서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제이디와 그런 그의 시선을 열심히 외면하고 있는 은서는 세렝게티의 사자와 임팔라처럼 서로의 숨소리에 집중하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흐르는 적막함, 그 팽팽한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가는 은서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쳐다도 안 볼 겁니까?”
숨 막히는 정적을 먼저 깬 쪽은 제이디였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그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 은서를 향해 질문했다.
하지만 은서의 고개는 여전히 제이디에게 향하지 않았다.
부글부글, 속이 끓어올랐다. 저 사기꾼!
“한은서 씨.”
“…….”
대답도 하기 싫다?
“은서 씨.”
“…….”
어쭈? 계속 이렇게 나오겠다 그거지?
“한은서.”
“…….”
갑작스레 날아온 반말에 은서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뭐, 뭐야? 그렇게 부르면 뭐? 설렐 줄 알아?
잠깐, 아주 잠깐 움찔거리긴 했지만 은서의 고개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
하나, 둘, 셋.
무심한 듯 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어진 말에 심장이 쾅! 하는 소릴 냈다. 순간 자신의 심장이 폭발이라도 한 건 아닌가 싶어 은서는 덜컥 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