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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사라진 연애세포
맥주잔에 남아 있는 술을 다 마셔 버린 은서는 다시 치킨에 집중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
레이는 자신을 공항에 친절하게 데려다주면서도 어딘지 선을 긋는 느낌이 들었다. 차 안에서 침묵을 유지하는 것도 그랬고 눈빛도 처음과는 달리 차가워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선뜻 연락처조차 먼저 물어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다시 볼 일 없는 여자니까, 선을 긋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그 남자 팜므 직원이라며? 이름은 아니까 물어보면……. 그건 좀 그런가?”
“됐어, 나랑 그냥 원나잇으로 끝내고 싶었던 거 같아. 생각해 보면 나도 그게 좋을 것 같고.”
그래. 상대방은 원하지 않는데 내 감정만 앞세울 순 없자나. 그러기엔 나도 겁나는 게 많아.
레이의 반응에 서운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흐음, 그래 하루 즐겼으면 됐지! 너는 그렇게 해서라도 남자 좀 만나야 돼.”
“더 생각 안 할래. 마시자, 마셔!”
빈 맥주잔에 술이 채워졌고 다시 비우길 반복했다. 제법 마신 것 같은데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마지막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론 오랜 시간 남자란 존재를 일적인 것 외에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아마 그래서다. 그랬기에 레이의 사소한 행동에도 그렇게 심장이 난리 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그래, 너무 안 만나다가 만나서 마음이 그런 거야. 더는 생각하지 말자!
지금 와서 잘 생각해 보면 같이 밥을 먹는 동안 레이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랬기에 은서 역시 그에게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오늘 밤, 호텔에 혼자 있으면 당신 생각이 날 것 같아.’
공항에 은서를 데려다준 레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언뜻언뜻 내보이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의 얼굴은 그날 아침 호텔에서 처음 보았던 남자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레이는 그렇게 작별 인사를 하며 은서의 이마에 입 맞췄다. 이상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컷의 냄새를 풍기다가도 어느새 다정한 눈빛을 보낸다.
어제 처음 만나 고작 하룻밤 잠자리를 한 사이임에도 남자의 눈빛은 순간순간 남자 친구의 눈빛처럼 다정해 보였다.
그래 놓고 연락처도 안 물어보냐? 또 보긴 어떻게 봐? 세상에 레이란 이름이 한둘이야? 은서란 이름이 한둘이냐고!
그래도…… 연락처나 물어볼걸.
비행기를 타고서야 은서는 후회가 되었다. 잠자리의 궁합이 좋아서인지, 그의 잘생긴 얼굴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는 은서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러니까 이제 연애도 좀 하고 그래라. 너무 일에 미쳐 있지만 말고.”
“그럴 시기 아니잖아. 아직 팜므에서도 연락이 없고.”
나영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누군가를 만나 시간과 감정을 나누는 것이 은서에게는 기쁜 일이기보다 감정 소비, 시간 낭비로 느껴졌다. 프로젝트만 우선시 하고 싶은 마음이다.
“웃기지 마! 은서 네가 일할 땐 독종에 미친개라도 내가 다 참고 이해해 주는데, 혼자 늙어 가는 독거할매가 되는 건 반대한다.”
“독거할매라니,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너무한다?”
나영의 말에 은서는 울상을 지어 보이며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그러니까 연애 좀 하라고. 너 상훈 오빠랑 헤어지고 나서 벌써 몇 년째야?”
“그 이야긴 왜 꺼내.”
나영의 말에 은서는 눈을 흘겼다. 잊고 지내던 이름이었는데 나영의 입을 통해 다시 듣고 보니 괜히 울컥, 기분이 나빠졌다.
그 나쁜 자식.
“그 천하의 양아치는 다른 여자 만나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넌 이러고 있으니 내 속이 터지지!”
누군가를 다시 마음에 담을 수 있을까?
그 천하의 나쁜 놈과 헤어졌을 때, 살면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대학에 입학했던 스무 살에 그를 만나 졸업할 때까지 그와 함께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은서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 신분이었고 연애를 하는 동안 학교를 졸업하고 한 회사에 취직했다.
대기업은 아니었으나 그의 입장에서 갈 수 있는 꽤 좋은 회사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갓 대학을 졸업한 어린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오랜 시간 차곡차곡 은서에게 줬던 마음을 조금씩 떼어 그 여자에게로 옮겼고 아무것도 몰랐던 은서에게 어느 날 갑자기 번개처럼 이별이 다가왔다.
만나 온 시간에 비해 매우 간결하고 우스운 이별이었다.
처음부터 열심히 사랑했다. 최선을 다했고, 언제나 그에게 좋은 여자이고 싶어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근거림은 잦아들고, 익숙해졌으며, 서로에게 무덤덤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이 다 그렇게 익숙해지고 무던해지며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두근거리는 감정은 다 한때이며, 열렬함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함으로 변해 때론 귀찮게 된다. 그렇기에 영원한 사랑은 없다.
고로 레이에 대한 이 두근거림이나 서운함도 시간이 지나면 분명 없어질 것이다. 이미 그런 과정을 겪어 봤으니 확신할 수 있는 일이다.
“연애는 당분간 됐어. 일단 이번 일이나 제대로 성공했으면 좋겠다.”
“그래,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해결해야지, 마시자!”
“그래!”
은서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느껴지자 나영은 잔을 들었다. 저 미련한 친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지금 이것뿐이니까.
“나영아, 전화 온다. 받아.”
조금 전부터 느껴지는 진동 소리에 은서가 고갯짓했다. 나영의 핸드폰이 애처롭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팀장님이네? 잠깐만. 네, 신나영입니다. 어쩐 일이세요? 이 시간에?”
밤 9시. 퇴근한 지 세 시간이 넘은 이 시간에 걸려 온 팀장의 전화는 나영의 큰 눈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네? 진짜예요? 정말요?”
“왜? 무슨 일 있대?”
“아, 알겠습니다. 지금 회사 근처예요. 바로 사무실로 들어갈게요.”
은서의 말에 대충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영의 얼굴은 한껏 격양되어 보였다.
“일어나, 회사 들어가야 돼.”
잠깐 멍해져 있던 정신을 깨운 나영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한은서 너 진짜 대단해! 대단하다!”
나영은 자신의 핸드백과 은서의 백을 동시에 집어 들며 감탄을 연발했다. 평소 차분한 성격의 나영이 흥분하는 모습에 은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냈다.
“뭐가? 뭐가 대단해?”
혹시? 아니, 아니, 기대했다가 실망할지도 몰라. 차분하자, 한은서!
“팜므에서 연락 왔대! 일주일 뒤에 한국 들어올 때 만났으면 좋겠대. 얼른 일어나. 그쪽 담당자가 너랑 통화하고 싶대!”
귓가를 웅웅거리며 들려오는 나영의 목소리에 은서는 저도 모르게 꺄악! 입 밖으로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지, 진짜야?”
은서는 총구에서 쏘아진 총알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아, 얼른. 팀장님이 10분 뒤에 전화 준다고 말해 놨데. 얼른 회사 들어가야 돼!”
“알았어! 들어가자, 얼른!”
“무작정 일본에 간다고 해서 걱정했더니, 한은서 대단하다! 대단해! 이거 진짜 그 레이란 사람 찾아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응, 그러게.”
제이디에게 기획안을 보냈다고 했던 레이의 말이 떠올랐다. 짙은 눈썹 밑으로 시원하게 트여 있던 눈매, 웃을 때면 눈꼬리가 아래로 살며시 처지던 레이의 얼굴이 생각난 은서는 다시금 심장이 쿵쿵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혹시 만날 수 있으려나? 팜므랑 일하게 되면…….
다시 만나고 싶다.
그가 전해 준 열기도, 그에게서 나던 비누 향도 아직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제이디를 만나고 싶어 무작정 찾아갔던 일본에서 지금 이 순간 제이디보다 더 보고 싶은 남자를 만나 버린 은서였다.
* * *
“너, 요즘 이상해도 너무, 너무, 너무 이상한 거 알지?”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간 티셔츠,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알렉스는 사무실로 들어오는 레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평소 저렇게 환하게 웃는 레이의 얼굴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남자는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너 패션쇼하던 날 어디로 내뺐냐? 너 때문에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내가 가나 안 가나 별로 상관없는 일이잖아. 지니가 알아서 잘할 테고.”
레이는 사무실 안 따로 준비된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그런 레이의 뒤를 따라 알렉스도 들어섰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날 이후로 너무 이상해, 얼굴이 펴도 너무 폈어!”
“비밀이야. 그보다 한국 쪽 리스트는 추려 놨지?”
레이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결재 서류들을 눈으로 휙휙 읽어 내려갔다. 며칠 일을 쉬었더니 그간 처리해야 할 업무가 꽤나 쌓여 있었다.
“미팅 약속도 잡아야 하니까 오늘 내로 나올 거야. 뭐, 헤라랑 라온 정도 아니겠어?”
“…….”
“헤라는 알다시피 한국 란제리계에서 확고부동한 1위 기업, 라온은 그 뒤를 잇는 회사. 라온은 스포츠웨어 전문이긴 하지만 충분히 메리트는 있다고 봐.”
알렉스는 자신의 회사인 것처럼 어깨까지 으쓱거리며 두 회사에 대한 이야길 술술 풀어냈다.
“그래?”
‘메리트라.’ 알렉스 말에 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아마 기획실에선 헤라로 판가름 나지 않겠어?”
한국 시장 점유율 1위의 란제리 브랜드 ‘헤라’와의 콜라보 진행이 확률적으로는 가장 높다는 이야기에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통망도 탄탄하고 브랜드의 가치도 있으니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준 기획안은? 어떻게 됐어?”
“아, 그 기획안? 지니가 먼저 확인하고 넘겼을 거야.”
“앨리스 기획안 말하는 거지?”
알렉스가 쉴 틈 없이 말을 이어 가는 사이 레이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화려한 외모의 여자가 나타났다. 짙은 붉은색의 립스틱 때문인지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보였다.
갑자기 사려졌던 레이가 나타나 확인해 보라며 건넸던 기획안을 지니는 꼼꼼히 확인하고 또 했다.
“당신 그날, 그 아가씨랑 같이 있었어?”
지니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뭐야, 너 그날 여자랑 있었어? 그래서 그 뒤로 이렇게 얼굴이 폈던 거야?”
갑자기 나타나 쓸데없는 보고를 하고 있는 지니로 인해 레이는 읽고 있던 서류를 덮어 버렸다.
“제이디를 애타게 찾길래 이유가 뭘까 궁금해서 말이야. 뒤풀이 참석자 명단을 찾아보니까 거기에 앨리스 디자인팀 대리라고 떡하니 적혀 있더라고.”
“쓸데없는 짓 많이도 한다.”
“잠깐, 잠깐, 거기 둘! 자꾸 나만 모르는 이야길 하는데 친절한 설명 좀?”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자신이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딘지 왕따를 당하는 느낌에 알렉스의 얼굴이 붉어진다.
“흐음, 미팅 약속조차 못 잡았던 모양인데, 어떻게 된 거야?”
알렉스의 궁금증은 살며시 뒤로 제쳐 둔 채 레이는 물었다.
“이미 두 회사로 추려진 상태였고 가지고 있는 정보로는 시장 점유율이나 디자인팀의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했어. 뭐, 이 정도로 강한 집념을 가진 직원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 기획안 확인해 봐서 알겠지만 나쁘지 않아, 디자인 면에선 경쟁력이 떨어져 보이지도 않고.”
“흐음, 그건 나도 인정해, 생각보다 참신하더라고.”
“미팅 약속 잡아. 그 정도 기회는 줘도 될 것 같은데?”
레이의 말에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이 일 문제에 개인감정을 넣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
지니는 말끝을 잠시 흐렸다.
“당신이 제이디란 건 말해 준 거야?”
“그럴 리가! 날 200프로 여자라고 생각하던데?”
지니의 말에 레이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워낙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소문이 많다 보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맥주잔에 남아 있는 술을 다 마셔 버린 은서는 다시 치킨에 집중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
레이는 자신을 공항에 친절하게 데려다주면서도 어딘지 선을 긋는 느낌이 들었다. 차 안에서 침묵을 유지하는 것도 그랬고 눈빛도 처음과는 달리 차가워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선뜻 연락처조차 먼저 물어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다시 볼 일 없는 여자니까, 선을 긋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그 남자 팜므 직원이라며? 이름은 아니까 물어보면……. 그건 좀 그런가?”
“됐어, 나랑 그냥 원나잇으로 끝내고 싶었던 거 같아. 생각해 보면 나도 그게 좋을 것 같고.”
그래. 상대방은 원하지 않는데 내 감정만 앞세울 순 없자나. 그러기엔 나도 겁나는 게 많아.
레이의 반응에 서운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흐음, 그래 하루 즐겼으면 됐지! 너는 그렇게 해서라도 남자 좀 만나야 돼.”
“더 생각 안 할래. 마시자, 마셔!”
빈 맥주잔에 술이 채워졌고 다시 비우길 반복했다. 제법 마신 것 같은데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마지막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론 오랜 시간 남자란 존재를 일적인 것 외에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아마 그래서다. 그랬기에 레이의 사소한 행동에도 그렇게 심장이 난리 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그래, 너무 안 만나다가 만나서 마음이 그런 거야. 더는 생각하지 말자!
지금 와서 잘 생각해 보면 같이 밥을 먹는 동안 레이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랬기에 은서 역시 그에게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오늘 밤, 호텔에 혼자 있으면 당신 생각이 날 것 같아.’
공항에 은서를 데려다준 레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언뜻언뜻 내보이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의 얼굴은 그날 아침 호텔에서 처음 보았던 남자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레이는 그렇게 작별 인사를 하며 은서의 이마에 입 맞췄다. 이상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컷의 냄새를 풍기다가도 어느새 다정한 눈빛을 보낸다.
어제 처음 만나 고작 하룻밤 잠자리를 한 사이임에도 남자의 눈빛은 순간순간 남자 친구의 눈빛처럼 다정해 보였다.
그래 놓고 연락처도 안 물어보냐? 또 보긴 어떻게 봐? 세상에 레이란 이름이 한둘이야? 은서란 이름이 한둘이냐고!
그래도…… 연락처나 물어볼걸.
비행기를 타고서야 은서는 후회가 되었다. 잠자리의 궁합이 좋아서인지, 그의 잘생긴 얼굴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는 은서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러니까 이제 연애도 좀 하고 그래라. 너무 일에 미쳐 있지만 말고.”
“그럴 시기 아니잖아. 아직 팜므에서도 연락이 없고.”
나영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누군가를 만나 시간과 감정을 나누는 것이 은서에게는 기쁜 일이기보다 감정 소비, 시간 낭비로 느껴졌다. 프로젝트만 우선시 하고 싶은 마음이다.
“웃기지 마! 은서 네가 일할 땐 독종에 미친개라도 내가 다 참고 이해해 주는데, 혼자 늙어 가는 독거할매가 되는 건 반대한다.”
“독거할매라니,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너무한다?”
나영의 말에 은서는 울상을 지어 보이며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그러니까 연애 좀 하라고. 너 상훈 오빠랑 헤어지고 나서 벌써 몇 년째야?”
“그 이야긴 왜 꺼내.”
나영의 말에 은서는 눈을 흘겼다. 잊고 지내던 이름이었는데 나영의 입을 통해 다시 듣고 보니 괜히 울컥, 기분이 나빠졌다.
그 나쁜 자식.
“그 천하의 양아치는 다른 여자 만나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넌 이러고 있으니 내 속이 터지지!”
누군가를 다시 마음에 담을 수 있을까?
그 천하의 나쁜 놈과 헤어졌을 때, 살면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대학에 입학했던 스무 살에 그를 만나 졸업할 때까지 그와 함께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은서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 신분이었고 연애를 하는 동안 학교를 졸업하고 한 회사에 취직했다.
대기업은 아니었으나 그의 입장에서 갈 수 있는 꽤 좋은 회사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갓 대학을 졸업한 어린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오랜 시간 차곡차곡 은서에게 줬던 마음을 조금씩 떼어 그 여자에게로 옮겼고 아무것도 몰랐던 은서에게 어느 날 갑자기 번개처럼 이별이 다가왔다.
만나 온 시간에 비해 매우 간결하고 우스운 이별이었다.
처음부터 열심히 사랑했다. 최선을 다했고, 언제나 그에게 좋은 여자이고 싶어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근거림은 잦아들고, 익숙해졌으며, 서로에게 무덤덤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이 다 그렇게 익숙해지고 무던해지며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두근거리는 감정은 다 한때이며, 열렬함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함으로 변해 때론 귀찮게 된다. 그렇기에 영원한 사랑은 없다.
고로 레이에 대한 이 두근거림이나 서운함도 시간이 지나면 분명 없어질 것이다. 이미 그런 과정을 겪어 봤으니 확신할 수 있는 일이다.
“연애는 당분간 됐어. 일단 이번 일이나 제대로 성공했으면 좋겠다.”
“그래,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해결해야지, 마시자!”
“그래!”
은서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느껴지자 나영은 잔을 들었다. 저 미련한 친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지금 이것뿐이니까.
“나영아, 전화 온다. 받아.”
조금 전부터 느껴지는 진동 소리에 은서가 고갯짓했다. 나영의 핸드폰이 애처롭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팀장님이네? 잠깐만. 네, 신나영입니다. 어쩐 일이세요? 이 시간에?”
밤 9시. 퇴근한 지 세 시간이 넘은 이 시간에 걸려 온 팀장의 전화는 나영의 큰 눈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네? 진짜예요? 정말요?”
“왜? 무슨 일 있대?”
“아, 알겠습니다. 지금 회사 근처예요. 바로 사무실로 들어갈게요.”
은서의 말에 대충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영의 얼굴은 한껏 격양되어 보였다.
“일어나, 회사 들어가야 돼.”
잠깐 멍해져 있던 정신을 깨운 나영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한은서 너 진짜 대단해! 대단하다!”
나영은 자신의 핸드백과 은서의 백을 동시에 집어 들며 감탄을 연발했다. 평소 차분한 성격의 나영이 흥분하는 모습에 은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냈다.
“뭐가? 뭐가 대단해?”
혹시? 아니, 아니, 기대했다가 실망할지도 몰라. 차분하자, 한은서!
“팜므에서 연락 왔대! 일주일 뒤에 한국 들어올 때 만났으면 좋겠대. 얼른 일어나. 그쪽 담당자가 너랑 통화하고 싶대!”
귓가를 웅웅거리며 들려오는 나영의 목소리에 은서는 저도 모르게 꺄악! 입 밖으로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지, 진짜야?”
은서는 총구에서 쏘아진 총알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아, 얼른. 팀장님이 10분 뒤에 전화 준다고 말해 놨데. 얼른 회사 들어가야 돼!”
“알았어! 들어가자, 얼른!”
“무작정 일본에 간다고 해서 걱정했더니, 한은서 대단하다! 대단해! 이거 진짜 그 레이란 사람 찾아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응, 그러게.”
제이디에게 기획안을 보냈다고 했던 레이의 말이 떠올랐다. 짙은 눈썹 밑으로 시원하게 트여 있던 눈매, 웃을 때면 눈꼬리가 아래로 살며시 처지던 레이의 얼굴이 생각난 은서는 다시금 심장이 쿵쿵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혹시 만날 수 있으려나? 팜므랑 일하게 되면…….
다시 만나고 싶다.
그가 전해 준 열기도, 그에게서 나던 비누 향도 아직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제이디를 만나고 싶어 무작정 찾아갔던 일본에서 지금 이 순간 제이디보다 더 보고 싶은 남자를 만나 버린 은서였다.
“너, 요즘 이상해도 너무, 너무, 너무 이상한 거 알지?”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간 티셔츠,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알렉스는 사무실로 들어오는 레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평소 저렇게 환하게 웃는 레이의 얼굴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남자는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너 패션쇼하던 날 어디로 내뺐냐? 너 때문에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내가 가나 안 가나 별로 상관없는 일이잖아. 지니가 알아서 잘할 테고.”
레이는 사무실 안 따로 준비된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그런 레이의 뒤를 따라 알렉스도 들어섰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날 이후로 너무 이상해, 얼굴이 펴도 너무 폈어!”
“비밀이야. 그보다 한국 쪽 리스트는 추려 놨지?”
레이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결재 서류들을 눈으로 휙휙 읽어 내려갔다. 며칠 일을 쉬었더니 그간 처리해야 할 업무가 꽤나 쌓여 있었다.
“미팅 약속도 잡아야 하니까 오늘 내로 나올 거야. 뭐, 헤라랑 라온 정도 아니겠어?”
“…….”
“헤라는 알다시피 한국 란제리계에서 확고부동한 1위 기업, 라온은 그 뒤를 잇는 회사. 라온은 스포츠웨어 전문이긴 하지만 충분히 메리트는 있다고 봐.”
알렉스는 자신의 회사인 것처럼 어깨까지 으쓱거리며 두 회사에 대한 이야길 술술 풀어냈다.
“그래?”
‘메리트라.’ 알렉스 말에 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아마 기획실에선 헤라로 판가름 나지 않겠어?”
한국 시장 점유율 1위의 란제리 브랜드 ‘헤라’와의 콜라보 진행이 확률적으로는 가장 높다는 이야기에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통망도 탄탄하고 브랜드의 가치도 있으니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준 기획안은? 어떻게 됐어?”
“아, 그 기획안? 지니가 먼저 확인하고 넘겼을 거야.”
“앨리스 기획안 말하는 거지?”
알렉스가 쉴 틈 없이 말을 이어 가는 사이 레이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화려한 외모의 여자가 나타났다. 짙은 붉은색의 립스틱 때문인지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보였다.
갑자기 사려졌던 레이가 나타나 확인해 보라며 건넸던 기획안을 지니는 꼼꼼히 확인하고 또 했다.
“당신 그날, 그 아가씨랑 같이 있었어?”
지니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뭐야, 너 그날 여자랑 있었어? 그래서 그 뒤로 이렇게 얼굴이 폈던 거야?”
갑자기 나타나 쓸데없는 보고를 하고 있는 지니로 인해 레이는 읽고 있던 서류를 덮어 버렸다.
“제이디를 애타게 찾길래 이유가 뭘까 궁금해서 말이야. 뒤풀이 참석자 명단을 찾아보니까 거기에 앨리스 디자인팀 대리라고 떡하니 적혀 있더라고.”
“쓸데없는 짓 많이도 한다.”
“잠깐, 잠깐, 거기 둘! 자꾸 나만 모르는 이야길 하는데 친절한 설명 좀?”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자신이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딘지 왕따를 당하는 느낌에 알렉스의 얼굴이 붉어진다.
“흐음, 미팅 약속조차 못 잡았던 모양인데, 어떻게 된 거야?”
알렉스의 궁금증은 살며시 뒤로 제쳐 둔 채 레이는 물었다.
“이미 두 회사로 추려진 상태였고 가지고 있는 정보로는 시장 점유율이나 디자인팀의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했어. 뭐, 이 정도로 강한 집념을 가진 직원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 기획안 확인해 봐서 알겠지만 나쁘지 않아, 디자인 면에선 경쟁력이 떨어져 보이지도 않고.”
“흐음, 그건 나도 인정해, 생각보다 참신하더라고.”
“미팅 약속 잡아. 그 정도 기회는 줘도 될 것 같은데?”
레이의 말에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이 일 문제에 개인감정을 넣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
지니는 말끝을 잠시 흐렸다.
“당신이 제이디란 건 말해 준 거야?”
“그럴 리가! 날 200프로 여자라고 생각하던데?”
지니의 말에 레이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워낙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소문이 많다 보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