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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잘 먹겠습니다.”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린 한마디를 끝으로 식탁엔 정적이 돌았다. 끄트머리까지 순금이 박힌 수저와 고개를 숙이면 얼굴이 선명하게 비치는 고급 대리석 식탁, 프랑스 산 도자기에 아기자기하게 담긴 정갈한 반찬들만이 저들끼리 조용히 부딪쳤다.

혜준은 밥알을 돌멩이를 삼킨 것처럼 힘겹게 씹다 겨우 목으로 넘기곤 했다. 수저에 묻힌 밥풀이 말라 들어갈 정도로 식사시간은 길고 지루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 식탁에 그녀 혼자만 앉아 있다는 거다.

아버지나 계모, 언니나 오빠 중 한 명이라도 함께했었다면 밥알은 작은 돌멩이가 아니라 자갈쯤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목구멍이 부르트도록 밥알을 넘기고 또 넘겨야 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면서.

“저녁엔 죽을 좀 만들까?”

요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주방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비싸고 질이 좋은 재료로 만든 반찬에 전혀 손을 대지 않으니 어지간히 신경이 쓰였나 보다. 혜준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뇨. 됐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6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지 일주일째.

이 집은 6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아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들어온 일곱 살 때부터, 이 3층짜리 고급 저택은 그녀에게 여전히 낯설고 벗어나고 싶은 세계였다. 발목에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진 기분. 그래서 아버지가 조종하는 대로 개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기분.

그건 유학을 끝내고 돌아와서도 변하지 않는 현실 중 하나였다.



‘네가 서른 살이 되면 적당히 재산을 증여해 줄 거야. 그걸로 네 엄마를 찾아서 둘이 살게 해 줄게. 그 전까진 회사에 충성을 다하도록 해. 내 말만 잘 듣고 서른 살까지만 버텨주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줄 거야.’



그녀를 강제로 엄마 품에서 떼어 내 이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아버지라는 사람이 내민 달콤한 제안은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일찍부터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니, 제 사업을 돕고 함께할 자식들의 후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 아버지는 자신의 선택에 박수를 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후계자 리스트에서 사고만 치고 다니는 아들과 회사엔 전혀 관심이 없는 딸의 이름에 과감하게 ‘X’ 자를 그리고, 마지막 후보이자 혼외자식인 혜준이라도 키워야겠다고 일찌감치 결정했을지도.

아버진 그녀가 서른 살이 돼도 놔줄 생각이 전혀 없을 것이고, 그녀 나름대로 긴 시간 이 삶에 적응할 거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물질과 명예를 한꺼번에 손에 쥘 수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버지의 최고 가치니까.

정말, 그렇게 되는 걸까.

어쩔 수 없이 이 감옥 같은 생활에 적응하면서, 엄마를 찾지도 못하고 평생 살아가게 되는 걸까.

어렸을 땐 서른 살까지 악착같이 버텨 돈을 받고 당당하게 이 집을 떠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허무하고 막막하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제로라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멍해져간다. 무기력하게 주저앉고만 싶어진다. 목표를 잃은 채 이리저리 표류하는 배, 그게 그녀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생각을 하자니 목이 막히는 것 같아 혜준은 그만 수저를 놔 버렸다. 조용히 일어나 식탁을 벗어나는 그녀를, 주방 아주머니의 짠한 시선이 함께했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하나씩 밟으면서, 혜준은 오늘 하루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토요일이지만 회사에 출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이 있었다. 우선 출근해서 눈도장만 대충 찍고 몰래 작업실로 가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아버지가 붙일 감시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아버지의 심부름을 가는 척하고 나올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를 만들 것인가.

2층에 도착해 3층으로 진입하는 모퉁이를 돌던 혜준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2층 끝에 있는 언니의 방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대화는 언니인 아진과 계모인 민숙이 나누고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 새로 들으려 의도하지 않아도 그들의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싫어, 엄마. 싫다구! 왜 나한테 강요해?”

“이것아. 엄마 말 좀 들어. 너 이 결혼이라도 해야 나이 먹어서 추레해지지 않아. 명심해. 오늘 저녁 7시 청담동 사거리 맥스 호텔 커피숍이야. 알았지?”

“나 죽어도 안 나가.”

“너 이 엄마 죽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 그렇지 않아도 네 아빠는 혜준이 년한테 회사 물려줄 것 같은데 엄마가 그런 꼴까지 봐야겠어? 아버지 보란 듯이 그 집 아들이랑 결혼해서 사모님 소리 듣고 살아! 그게 너한테 좋아.”

혜준은 대화의 요지 파악을 모두 끝냈다. 그러니까 민숙이 아진의 맞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인 거다. 아진이 저렇게 나가지 않겠다고 발악하는 이유를, 혜준은 알고 있었다. 아진이 몰래 만나는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어젯밤 아진이 테라스에 나와 남자 친구와 통화하는 것을, 3층 베란다에 있던 혜준이 모두 들은 것이다.

계모인 민숙은 역시 계산이 잘 서는 사람이었다. 아진이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을 재능이나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재빨리 정략결혼으로 방향을 틀다니.

“난 절대 안 나가.”

아진의 단호한 한마디에, 그때까지만 해도 멍멍하던 혜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색을 달리했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빛이 깔끔하게 일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건 그녀에게 온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가 말했듯, 누구도 죽은 개는 발로 걷어차지 않는다.

아버지의 충실한 개로 살아가는 걸 원치 않는다면, 이쯤에서 죽은 개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남은 인생에 희로애락이라는 게 없을 거라면 차라리 방향을 틀어 숨이라도 쉬면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게다가 걘 나보다 세 살이나 어려. 연하랑 뭘 하라는 거야?”

“연하면 다 연하니? 걘 다인 백화점 대표가 될 애야. 너도 알잖아. 최윤결이 어떤 앤지.”

최윤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다인백화점과 최윤결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절대 낯설지 않은 기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흩날리는 봄바람, 언제나 저를 향하던 시선, 치기 어린 심경으로 옷을 벗었던 그때, 제 살결을 따라 올라오던 윤결의 서툰 손길. 그 손끝에서 뜨거워지던 유두.

갑자기 유두가 따가워지는 느낌에 혜준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눈앞에 열아홉의 윤결이 서 있는 것만 같다. 아주 가끔, 떠올릴 때마다 설핏 웃게 만들었던 존재.

그 녀석이, 그 최윤결이 언니의 맞선상대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윤결을 향한 건지 아니면 그 시절의 자신을 향한 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침잠물처럼 가라앉았다 다시 솟구쳤다.

딸깍.

당황해 멍멍한 눈빛을 미처 치울 새도 없이 문이 열리고 민숙이 나왔다. 혜준은 막 올라온 척 어정쩡하고 어색한 자세로 그녀에게 인사를 했고, 민숙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못마땅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갔다.

고개를 돌리니 반쯤 열린 문틈으로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아진이 보였다. 생각과 감정을 챙기고 들여다볼 여유도 없이 혜준은 발길을 아진의 방으로 옮겼다. 혜준의 등장에 “뭐야?”라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낸 아진은, 그녀가 낸 한마디에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그 맞선, 내가 대신 나갈까?”







#1.





「저녁 7시. 맥스 호텔 커피숍. 나가지 않을 시 차와 카드 압수+저축액의 30% 차압. 더 기분 나쁘게 만들면 상속재산은 없음. 알아서 기도록.」



핸드폰 화면이 가득하도록 뜬 메시지에 윤결은 뇌를 재빨리 가동시켰다. 메시지의 발신인은 ‘늙은 돈줄’. 작년까지만 해도 ‘젊은 돈줄’이었으나, 할머니가 백화점 대표이사 직을 퇴직하고 명예이사로 남으면서 ‘젊은’은 ‘늙은’으로 바뀌었다.

할머니가 가진 파워가 줄어든 데 대한 반가움의 외적표현이었다고 할까.

어쨌든 할머니가 내민 여러 벌칙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한숨부터 흘렀다. 이 벌칙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민해야 했다.

“할머니 요즘도 홍삼 드세요?”

윤결은 액정 화면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늙은 돈줄께서 며칠 전부터 맞선이니 결혼이니 외치며 단식농성에 들어가시더니, 그게 결코 쇼가 아니었다는 것에 일견 진지해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핸드폰으로 문자 찍는 방법을 알려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쥐고 있던 박 실장이 슬쩍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응. 왜?”

“하나뿐인 손자보다 더 팔팔한 칠순 노인네는 우리 할머니뿐일 거라니까. 당장 홍삼부터 끊으시라고 해야겠어. 중독이셔, 이 정도면.”

“맞선 때문이지? 며칠 전에 그러시더라구. 네가 조만간 맞선을 볼지도 모른다고.”

“맞선이라는 패를 쥐고 이렇게 냉정하게 틈새를 공략하실 줄이야. 사업가들은 다 이런가. 도무지 휴머니즘이나 공명정대함이라곤 없으니.”

“회장님이 무슨 틈새를 공략하셨는데?”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거라고나 할까요. 차량 압수는 버틸 수 있겠는데 카드까지. 돈은 소중하거든. 근데 거기에 하나 더 끼얹으시네.”

“끼얹으셔?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