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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오늘 맞선에 나가지 않을 경우 나한테 일 원도 물려주지 않으실 거라는데요?”
“하하. 최후의 일격이시네.”
박 실장의 잔웃음이 차 안에 흘렀지만 윤결은 그저 관자놀이가 팽팽하게 당겨질 뿐이었다. 골칫거리를 떠다 안은 기분이랄까. 할머니가 이 정도로 맹공을 해 오실 줄은 몰랐다.
“지난달에 할아버지 무덤도 못 알아보고 그 옆 무덤에 앉아서 통곡하고 계시기에 그땐 드디어 치매가 온 거구나 했는데, 그새 뇌에 기름칠이라도 하신 건가. 제법 머리를 쓰셨어, 우리 할머니.”
“어떻게…… 핸들 돌릴까? 지금 6시 30분인데.”
계기판의 시계를 슬쩍 본 박 실장이 룸미러 속 윤결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박 실장이 보채지 않아도 윤결에겐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다. 어렸을 때부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를 일찍 결혼시킬 거라던 할머니의 생각이 이렇게 빨리 구체화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겨우 스물여섯인데.
세상은 넓고 앞으로 함께 즐겨야 할 여자들은 널렸는데.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디시피 했던 대학을 겨우 졸업하자마자 결혼이라는 카드를 내미시다니. 그것도 치사한 방법을 써 가면서 말이다. 팽팽해진 관자놀이가 이젠 구겨진 인상으로 주름졌다. 그 표정을 본 박 실장이 머뭇거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말이야, 윤결아. 이사님은 외로우신 게 아닐까 싶어. 너 다섯 살 때 부모님 돌아가셨잖아. 그때부터 이사님이 혼자서 널 키웠고 이제 나이도 있으시니 하루 빨리 가족을 만들고 싶으실 거야.”
“플러스, 나 이제 정신 차리라는 깊으신 뜻도 있겠고.”
“그, 그러시겠지.”
“거기에 더 플러스하자면, 날 영원히 백화점에 묶어 두실 생각인 거고.”
“그, 그런가?”
“할머닌 워낙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는 분이니까.”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윤결이 가만히 덧붙였다. 박 실장이 설명하지 않아도 할머니의 속뜻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할머니가 대표이사직 퇴직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도 모두 윤결이 하루 빨리 백화점에 들어가길 바라는 의미였다는 것도.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 싶다. 어차피 때가 되면 누구나 죽을 테고 그건 시기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 대충 즐기며 살다가 문득 다가온 그 시기를 즐겁게 맞이하면 그만 아닌가.
사람의 앞날이란,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니까.
그건 그가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함께 죽었다던 부모님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럼 맥스 호텔로…….”
박 실장이 주저하다 다시 입을 뗐다. 그가 원하는 대답 대신, 윤결은 날카로운 눈매를 운전석으로 던졌다.
“난 할머니가 왜 뜬금없이 박 실장을 나한테 갖다 붙이셨는지 잘 알죠.”
“으, 응?”
“이른바, ‘감시’라는 걸 텐데 내 말 맞죠? 굳이 필요도 없는 운전기사 노릇이나 하라고 박 실장님 같은 고급인력을 나한테 던질 이유가 없다니까.”
“그게, 윤결아.”
“박 실장님 이제 서른여덟이시죠?”
“응? 아, 응.”
“같은 남자끼리 허심탄회해지자구요. 여자 얘기할 때마다 아랫도리 서는 거 장난 아니시던데, 아직 정력이 캬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늘만 딱 눈감아주면 예쁜 누님 한 분 소개해드리죠.”
“유, 윤결아.”
“그리고 누구한테든 쓸데없이 공 들이지 마세요. 헛짓거리니까.”
공 들인 상대에게 가차 없이 버려지는 것에 이미 학습된 상태인지라, 그게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한 일인지 윤결은 모르지 않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윤결은 눈을 감고 머리를 기댔다. 박 실장은 입을 다물었고 차는 계속 움직였다.
공 들이지 말라는 말로 거부의 의사를 정확하게 표시했건만, 그로부터 30분 후 차는 정확하게 맥스 호텔 앞에 도착해 있었다. 허탈한 미소가 윤결의 얼굴에 조용히 흘렀다. 뒷머리를 탈탈 털어 내는 손길에는 체념이 묻어 있었다.
“미안하다, 윤결아. 난 이사님한테서 월급을 받는 처지라 어쩔 수가 없었어.”
괜히 제 발 저렸는지 박 실장이 핸들을 슥슥 닦아내는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윤결은 자신과 굳이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박 실장을 가만히 흘겨보면서 비아냥거렸다.
“대단해. 자본으로 하나 되는 우리 가문.”
이로써 오늘 저녁 주강과 인혁을 만나, 클럽에서 조신하게 커뮤니케이션을 가질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귀찮은 일에 휘말린 사람처럼, 윤결의 얼굴은 이리저리 다양한 방향으로 구겨졌다. 그런 윤결의 눈치를 슬쩍 살핀 박 실장이 한 술 더 뜬다.
“그럼 오늘 맞선상대에 대해서 짧게 브리핑을 할게. 그러니까 상대는 유명한 기연호텔리조트 그룹…….”
“잠깐.”
윤결이 돌연 박 실장의 말허리를 잘랐다. 날이 선 음성이 박 실장의 뒷머리를 날카롭게 후려쳤다. 기연호텔리조트 그룹이라는 단어에 두 귀가 팽팽하게 당겨진 탓이었다. 박 실장이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왜?”
“무슨…… 어디라구요?”
“기연호텔리조트 그룹. 왜? 뭐 문제 있어?”
흐릿하게 가라앉았던 눈빛이 차차 맑게 개였다. 박 실장은 브리핑을 다시 이어갈 태세였지만 윤결의 손은 이미 뒷문을 열고 있었다.
“흐음. 갑자기 구미가 팍 당기는데?”
설마, 그 녀석일까.
그가 아는 기연호텔리조트 그룹에서 맞선자리에 나올 만한 인물이라면 딱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그보다 세 살 위인 여자, 그리고 그 여자의 동생, 서혜준. 그의 열아홉 전체를 지배했던 녀석, 마음을 줬지만 처참한 배신으로 종지부를 찍었던 그의 첫사랑.
아니, 첫사랑이라 이름 붙이고 싶지도 않은 애매한 상대라 칭하고 싶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녀석의 배신에 대한 응분의 대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면해지지 않는 이유는 뭔가.
그때의 감정도, 그때의 생각도, 그때의 나이도 아니건만.
호텔로 향하는 윤결의 발걸음이 속도를 더해갔다. 뒤에서 박 실장의 구둣발소리가 들려왔지만 윤결은 이 흥미로운 사건을 한시라도 빨리 접하고 싶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열아홉 혜준의 얼굴과 목소리를 번갈아 떠올리느라 조금 복잡해진 머릿속은, 커피숍 앞에서 정확하게 가동을 멈췄다.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윤결은 두 발을 우뚝 멈췄고, 시선을 커피숍 내부로 향했다.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커피숍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가 찾고자 하는 대상은 너무도 빨리, 그리고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반대쪽 창가 테이블에 정물화 속 화병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여자.
갈색 톤의 염색머리가 등을 온통 덮고, 계절에 어울리는 핑크빛 원피스를 입고, 이따금 테이블로 내린 시선을 다시 들어 올려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여자는 겉으론 변한 게 없어 보였다. 타인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단단한 철옹성 같던 그 녀석이, 자신의 등장을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윤결의 잘생긴 입술이 삐딱한 미소를 물었다. 6년만의 재회가 이토록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흥분해야 하는지 아니면 덤덤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녀석을 발견하자마자 어이없게도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어느 정도 표정관리가 필요한 것 같아 입매를 잔뜩 굳히고 있는데, 뒤늦게 다가온 박 실장이 혜준을 쳐다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어? 이상한데.”
“뭐가요.”
혜준에게 박힌 눈길을 떼지 않고 물은 윤결은, 곧장 날아온 박 실장의 대답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맞선에 나오기로 한 건 저분이 아닌데.”
“저분이 아니다?”
“저분 언니가 나오기로 돼 있었어.”
기껏 수습했던 표정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할머니의 뇌구조를 해부하고 싶을 정도였다. 대체 연상을 갖다 붙이는 저의가 뭔지. 할머니 당신도 할아버지보다 두 살 연상이셔서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라도 있으신 건지.
“뭐야. 연상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거 할머니도 아실 텐데.”
윤결은 짧게 혀를 차곤 서둘러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혜준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된 그림들이 한층 선명해졌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얼굴이 기억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된 순간 이미 이 맞선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짐작했을지도 몰랐다.
“여어. 이게 누구야.”
몸을 묻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털썩 의자에 앉은 윤결은, 곧장 긴 다리를 꼬고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린 채 턱을 괴었다. 혜준은 멀리서 본 것보다 더 희고 가냘프고 창백하고, 또 차갑게 느껴졌다.
한때 이 녀석에게 마음을 뺏겼고, 이 녀석으로 인해 몸이 뜨거워진 순간이 있었다는 게 생각나지 않을 만큼, 재회의 감회는 무척 새삼스럽고 얼떨떨하고 그리고 야속했다. 여전히 혜준이 풍기고 있는 냉기와 두르고 있는 경계의 벽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안녕.”
힘을 주어 그 단어를 내뱉었다. 혜준은 윤결을 보자마자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깊은 늪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유일한 상대를 향한 들뜸이었다. 그는 여전해 보였다. 삐딱하게 문 미소, 유혹적으로 짓고 있는 표정, 건들거리는 자세. 그녀 자신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들을 스스럼없이 해 버리는 윤결을, 그녀는 늘 부러워했었다.
“오늘 맞선에 나가지 않을 경우 나한테 일 원도 물려주지 않으실 거라는데요?”
“하하. 최후의 일격이시네.”
박 실장의 잔웃음이 차 안에 흘렀지만 윤결은 그저 관자놀이가 팽팽하게 당겨질 뿐이었다. 골칫거리를 떠다 안은 기분이랄까. 할머니가 이 정도로 맹공을 해 오실 줄은 몰랐다.
“지난달에 할아버지 무덤도 못 알아보고 그 옆 무덤에 앉아서 통곡하고 계시기에 그땐 드디어 치매가 온 거구나 했는데, 그새 뇌에 기름칠이라도 하신 건가. 제법 머리를 쓰셨어, 우리 할머니.”
“어떻게…… 핸들 돌릴까? 지금 6시 30분인데.”
계기판의 시계를 슬쩍 본 박 실장이 룸미러 속 윤결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박 실장이 보채지 않아도 윤결에겐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다. 어렸을 때부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를 일찍 결혼시킬 거라던 할머니의 생각이 이렇게 빨리 구체화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겨우 스물여섯인데.
세상은 넓고 앞으로 함께 즐겨야 할 여자들은 널렸는데.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디시피 했던 대학을 겨우 졸업하자마자 결혼이라는 카드를 내미시다니. 그것도 치사한 방법을 써 가면서 말이다. 팽팽해진 관자놀이가 이젠 구겨진 인상으로 주름졌다. 그 표정을 본 박 실장이 머뭇거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말이야, 윤결아. 이사님은 외로우신 게 아닐까 싶어. 너 다섯 살 때 부모님 돌아가셨잖아. 그때부터 이사님이 혼자서 널 키웠고 이제 나이도 있으시니 하루 빨리 가족을 만들고 싶으실 거야.”
“플러스, 나 이제 정신 차리라는 깊으신 뜻도 있겠고.”
“그, 그러시겠지.”
“거기에 더 플러스하자면, 날 영원히 백화점에 묶어 두실 생각인 거고.”
“그, 그런가?”
“할머닌 워낙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는 분이니까.”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윤결이 가만히 덧붙였다. 박 실장이 설명하지 않아도 할머니의 속뜻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할머니가 대표이사직 퇴직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도 모두 윤결이 하루 빨리 백화점에 들어가길 바라는 의미였다는 것도.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 싶다. 어차피 때가 되면 누구나 죽을 테고 그건 시기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 대충 즐기며 살다가 문득 다가온 그 시기를 즐겁게 맞이하면 그만 아닌가.
사람의 앞날이란,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니까.
그건 그가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함께 죽었다던 부모님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럼 맥스 호텔로…….”
박 실장이 주저하다 다시 입을 뗐다. 그가 원하는 대답 대신, 윤결은 날카로운 눈매를 운전석으로 던졌다.
“난 할머니가 왜 뜬금없이 박 실장을 나한테 갖다 붙이셨는지 잘 알죠.”
“으, 응?”
“이른바, ‘감시’라는 걸 텐데 내 말 맞죠? 굳이 필요도 없는 운전기사 노릇이나 하라고 박 실장님 같은 고급인력을 나한테 던질 이유가 없다니까.”
“그게, 윤결아.”
“박 실장님 이제 서른여덟이시죠?”
“응? 아, 응.”
“같은 남자끼리 허심탄회해지자구요. 여자 얘기할 때마다 아랫도리 서는 거 장난 아니시던데, 아직 정력이 캬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늘만 딱 눈감아주면 예쁜 누님 한 분 소개해드리죠.”
“유, 윤결아.”
“그리고 누구한테든 쓸데없이 공 들이지 마세요. 헛짓거리니까.”
공 들인 상대에게 가차 없이 버려지는 것에 이미 학습된 상태인지라, 그게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한 일인지 윤결은 모르지 않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윤결은 눈을 감고 머리를 기댔다. 박 실장은 입을 다물었고 차는 계속 움직였다.
공 들이지 말라는 말로 거부의 의사를 정확하게 표시했건만, 그로부터 30분 후 차는 정확하게 맥스 호텔 앞에 도착해 있었다. 허탈한 미소가 윤결의 얼굴에 조용히 흘렀다. 뒷머리를 탈탈 털어 내는 손길에는 체념이 묻어 있었다.
“미안하다, 윤결아. 난 이사님한테서 월급을 받는 처지라 어쩔 수가 없었어.”
괜히 제 발 저렸는지 박 실장이 핸들을 슥슥 닦아내는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윤결은 자신과 굳이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박 실장을 가만히 흘겨보면서 비아냥거렸다.
“대단해. 자본으로 하나 되는 우리 가문.”
이로써 오늘 저녁 주강과 인혁을 만나, 클럽에서 조신하게 커뮤니케이션을 가질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귀찮은 일에 휘말린 사람처럼, 윤결의 얼굴은 이리저리 다양한 방향으로 구겨졌다. 그런 윤결의 눈치를 슬쩍 살핀 박 실장이 한 술 더 뜬다.
“그럼 오늘 맞선상대에 대해서 짧게 브리핑을 할게. 그러니까 상대는 유명한 기연호텔리조트 그룹…….”
“잠깐.”
윤결이 돌연 박 실장의 말허리를 잘랐다. 날이 선 음성이 박 실장의 뒷머리를 날카롭게 후려쳤다. 기연호텔리조트 그룹이라는 단어에 두 귀가 팽팽하게 당겨진 탓이었다. 박 실장이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왜?”
“무슨…… 어디라구요?”
“기연호텔리조트 그룹. 왜? 뭐 문제 있어?”
흐릿하게 가라앉았던 눈빛이 차차 맑게 개였다. 박 실장은 브리핑을 다시 이어갈 태세였지만 윤결의 손은 이미 뒷문을 열고 있었다.
“흐음. 갑자기 구미가 팍 당기는데?”
설마, 그 녀석일까.
그가 아는 기연호텔리조트 그룹에서 맞선자리에 나올 만한 인물이라면 딱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그보다 세 살 위인 여자, 그리고 그 여자의 동생, 서혜준. 그의 열아홉 전체를 지배했던 녀석, 마음을 줬지만 처참한 배신으로 종지부를 찍었던 그의 첫사랑.
아니, 첫사랑이라 이름 붙이고 싶지도 않은 애매한 상대라 칭하고 싶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녀석의 배신에 대한 응분의 대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면해지지 않는 이유는 뭔가.
그때의 감정도, 그때의 생각도, 그때의 나이도 아니건만.
호텔로 향하는 윤결의 발걸음이 속도를 더해갔다. 뒤에서 박 실장의 구둣발소리가 들려왔지만 윤결은 이 흥미로운 사건을 한시라도 빨리 접하고 싶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열아홉 혜준의 얼굴과 목소리를 번갈아 떠올리느라 조금 복잡해진 머릿속은, 커피숍 앞에서 정확하게 가동을 멈췄다.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윤결은 두 발을 우뚝 멈췄고, 시선을 커피숍 내부로 향했다.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커피숍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가 찾고자 하는 대상은 너무도 빨리, 그리고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반대쪽 창가 테이블에 정물화 속 화병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여자.
갈색 톤의 염색머리가 등을 온통 덮고, 계절에 어울리는 핑크빛 원피스를 입고, 이따금 테이블로 내린 시선을 다시 들어 올려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여자는 겉으론 변한 게 없어 보였다. 타인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단단한 철옹성 같던 그 녀석이, 자신의 등장을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윤결의 잘생긴 입술이 삐딱한 미소를 물었다. 6년만의 재회가 이토록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흥분해야 하는지 아니면 덤덤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녀석을 발견하자마자 어이없게도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어느 정도 표정관리가 필요한 것 같아 입매를 잔뜩 굳히고 있는데, 뒤늦게 다가온 박 실장이 혜준을 쳐다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어? 이상한데.”
“뭐가요.”
혜준에게 박힌 눈길을 떼지 않고 물은 윤결은, 곧장 날아온 박 실장의 대답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맞선에 나오기로 한 건 저분이 아닌데.”
“저분이 아니다?”
“저분 언니가 나오기로 돼 있었어.”
기껏 수습했던 표정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할머니의 뇌구조를 해부하고 싶을 정도였다. 대체 연상을 갖다 붙이는 저의가 뭔지. 할머니 당신도 할아버지보다 두 살 연상이셔서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라도 있으신 건지.
“뭐야. 연상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거 할머니도 아실 텐데.”
윤결은 짧게 혀를 차곤 서둘러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혜준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된 그림들이 한층 선명해졌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얼굴이 기억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된 순간 이미 이 맞선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짐작했을지도 몰랐다.
“여어. 이게 누구야.”
몸을 묻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털썩 의자에 앉은 윤결은, 곧장 긴 다리를 꼬고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린 채 턱을 괴었다. 혜준은 멀리서 본 것보다 더 희고 가냘프고 창백하고, 또 차갑게 느껴졌다.
한때 이 녀석에게 마음을 뺏겼고, 이 녀석으로 인해 몸이 뜨거워진 순간이 있었다는 게 생각나지 않을 만큼, 재회의 감회는 무척 새삼스럽고 얼떨떨하고 그리고 야속했다. 여전히 혜준이 풍기고 있는 냉기와 두르고 있는 경계의 벽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안녕.”
힘을 주어 그 단어를 내뱉었다. 혜준은 윤결을 보자마자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깊은 늪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유일한 상대를 향한 들뜸이었다. 그는 여전해 보였다. 삐딱하게 문 미소, 유혹적으로 짓고 있는 표정, 건들거리는 자세. 그녀 자신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들을 스스럼없이 해 버리는 윤결을, 그녀는 늘 부러워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