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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고고하게 우뚝 솟은 기와집 안쪽에 불이 밝혀졌다.
구름 뒤에 가려 흐릿했던 해가 산자락 뒤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늦가을 바람은 습기를 한껏 머금어 수연의 몸을 눅눅하게 물들였다.
주변에는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섞이기 싫은 듯 외따로 떨어진 기와집은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은 수연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머니, 문 좀 열어 주세요. 거기로 돌아가기 싫어요. 여기서 살게 해 주세요. 네?”
물기 섞인 목소리엔 끌끌한 기운이 감돌았다.
벌써 몇 시간째 대문을 두드려 댄 손이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담이가 죽었어요. 그 사람 때문에 담이, 우리 담이가……. 뭐든 할게요. 방에서 꼼짝 말라고 하면 며칠이라도 숨죽이고 있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한동안 문에 매달려 있던 수연은 결국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원래도 다정다감한 어미는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매정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예의로라도 웃음 한 조각 짓지 않는 남자를 막무가내로 따라가라 했을 때도 이 정도로 서럽진 않았다.
그때는 담도 함께였으니까.
하지만 이젠 다정하게 손을 잡아 주며 맑게 웃어 줄 담은 더 이상 제 곁에 없었다.
그를 감싸고 있던 매캐한 냄새가 아직까지 그녀의 주변을 돌고 있어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감당하기 힘든 상황으로부터,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저 안에 냉대와 고립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정말 뭐든지 할게요. 저 좀 들여보내 주세요, 어머니.”
다시 힘을 그러모아 주먹을 쥐고 문을 힘껏 두들겼다.
차가운 물방울이 손 위로 떨어졌다.
자신이 울고 있는 건가 싶어 눈가를 매만지던 수연이 막 빗방울을 떨구기 시작하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비는 곧 제 모습을 갖추고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물이 눈물을 만들고, 눈물은 빗물에 섞였다.
하늘에 있는 담이 그녀를 위해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담을 따라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이젠 문을 두드려 볼 의지도, 어머니를 부를 기운도 없는 수연이 모든 걸 포기한 듯 빗속에 가만히 몸을 웅크렸다.
차가운 빗줄기가 그녀의 체온을 식히며 뽀얀 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눈을 감은 수연은 양손을 맞잡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담아, 나도 데려가. 누나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누나만 두고 가지 마.”
수연의 가는 음성은 빗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돌바닥에 머리를 기대고 누운 채 이대로 잠들어 담의 곁으로 갈 수 있기를 빌며 모든 걸 놓아 버리려던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감은 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너무 시려 힘껏 찡그렸다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문턱을 넘은 사람의 실루엣만 가늠할 수 있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먹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수연의 곁으로 우산을 든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림자는 중요한 말이라도 건넬 듯 몸을 기울여 왔다.
짙은 사향 냄새. 어머니가 아니었다.
비릿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어머니에게 떠밀려 기원을 따라가기 전 가끔 마주칠 때마다 끈적거리는 시선과 비릿한 미소로 그녀를 소름 끼치게 했던 어머니의 애인이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걸까.
이 남자 때문이었나.
기원을 따라가기 싫어하던 그녀를 매몰차게 쫓아냈던 것도, 선심 쓰듯 담을 함께 보내 준 것도, 절대로 다시 들여놓지 않겠다고 문을 굳게 닫아걸었던 것도 모두 이 남자와 단둘이 살고 싶어서 그런 걸까.
뒤죽박죽 생각이 엉켜 드는 머릿속과 달리 남자를 바라보는 수연의 눈은 그저 멍하기만 했다.
“선화가 그 녀석한테 연락했어.”
어머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어린 남자가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어머니의 이름이 너무나 선정적으로 들렸다.
“아마 곧 도착할 거야.”
남자의 말에 수연은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멈추고 통증이 일기 시작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앞으로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하면 숨겨 줄게.”
그녀를 관찰하듯 유심히 바라보던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숙여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선화 몰래 집을 하나 장만했어. 너와 함께 살 집. 처음 본 순간부터 네가 탐났어. 나와 함께 가겠다고 말하기만 하면 널 숨기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어때?”
은밀하게 속삭이던 그가 수연의 귓불을 살짝 물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짧은 비명과 함께 남자를 힘껏 밀어냈다.
둘을 가리고 있던 우산이 뒤로 나동그라지면서 그도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태 그에 의해 가려져 있던 대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눈앞을 가린 빗물을 대충 손으로 닦아 낸 수연이 누군지 가늠해 보려 눈을 부릅뜬 순간, 별안간 빛줄기가 하늘을 가르며 내리꽂혀 주변을 환히 밝혔다.
하얀 소복 차림의 선화가 서 있었다.
비에 젖은 소복이 맨몸에 찰싹 달라붙은 모습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여자로 보이게 만들었다.
지금 그녀는 수연의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보다 열두 살이나 어린 남자의 여자였다.
그걸 미처 알아채지 못한 수연이 한 가닥 솟아오른 희망을 품고 무릎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머……! 아악!”
모진 손바닥이 수연의 뺨 위로 날아들었다.
“돌아가. 네 자리는 서기원이 옆이야. 인연을 끊는 일도,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일도 모두 네 힘으로 해.”
모질게 돌아서는 선화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어머니! 담이가 죽었다고요. 그 남자 때문에 담이가 죽었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이랑 같이 살 수 없어요. 제발 여기 있게 해 주세요.”
“여기에 네 자린 없어.”
선화의 냉정한 발길질에 수연은 돌바닥 저만치 널브러졌다.
“뭐해? 안 들어오고.”
“나? 선화야, 자기야! 오해하는 거 아니지? 글쎄, 저 계집애가 날 꼬드기더라니까. 그래서 나한테는 자기밖에 없다고 말할…….”
“시끄러워. 얼른 따라 들어와.”
“가요, 가. 우리 자기 진짜 삐졌구나?”
선화의 비위를 맞추려는 남자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더니 대문이 닫히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멀어져 갔다.
잠시 움직임이 없던 수연은 꿈틀거리며 바닥에 크게 드러누웠다.
툭, 투두둑.
감은 눈 위로 빗물이 쉴 새 없이 내리꽂혔다.
그대로 잠이 든 것처럼 한동안 미동도 없이 누워 있던 수연이 갑작스레 번쩍 눈을 떴다.
흐릿하지만 맑고 따뜻한 기운이 그녀의 위에 둥실 떠 있었다.
“담이, 너니? 흑, 담아…….”
빗소리로는 감추어지지 않는 흐느낌이 애잔하게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운을 그러잡으려는 듯 양손을 뻗었다.
수연은 담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터뜨리지 못했던 울음을 한꺼번에 쏟아 내고 있었다.
흐릿한 구름 같은 것이 그녀를 감싸는가 싶더니 전류가 흐르는 듯 찌릿한 기운이 온몸으로 번져 갔다.
모든 걸 내려놓으려는 그녀를 채찍질하는 듯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어서 몸을 일으키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삶에 대한 애착도, 의지마저도 놓아 버린 수연이 담의 기운에 떠밀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돌계단을 내려가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저만치 길 끝에 자동차 헤드라이트일 게 분명한 빛이 주변을 밝히며 다가오고 있었다.
선화는 인연을 끊어 내는 일도,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내는 일도 모두 그녀의 몫이라고 말했다.
수연은 이제 그만 모든 인연을 끊어 내고 싶었다.
모질고 냉정하기만 했던 선화와도, 그녀를 이용하기만 했던 기원과도, 그 둘로 인해 생긴 모든 인연을 여기서 마무리 짓고 싶었다.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길로 나아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그녀를 흠뻑 적셨다.
굴곡진 길을 돌아온 차가 속력을 높여 미끄러지다가 길 중앙에 나타난 가녀린 형체를 발견하고 급하게 멈춰 섰다.
끼익, 하는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환한 불빛이 수연을 감쌌다.
둔탁한 충격을 느끼며 수연은 암흑 속으로 잠겨 들었다.
고고하게 우뚝 솟은 기와집 안쪽에 불이 밝혀졌다.
구름 뒤에 가려 흐릿했던 해가 산자락 뒤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늦가을 바람은 습기를 한껏 머금어 수연의 몸을 눅눅하게 물들였다.
주변에는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섞이기 싫은 듯 외따로 떨어진 기와집은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은 수연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머니, 문 좀 열어 주세요. 거기로 돌아가기 싫어요. 여기서 살게 해 주세요. 네?”
물기 섞인 목소리엔 끌끌한 기운이 감돌았다.
벌써 몇 시간째 대문을 두드려 댄 손이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담이가 죽었어요. 그 사람 때문에 담이, 우리 담이가……. 뭐든 할게요. 방에서 꼼짝 말라고 하면 며칠이라도 숨죽이고 있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한동안 문에 매달려 있던 수연은 결국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원래도 다정다감한 어미는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매정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예의로라도 웃음 한 조각 짓지 않는 남자를 막무가내로 따라가라 했을 때도 이 정도로 서럽진 않았다.
그때는 담도 함께였으니까.
하지만 이젠 다정하게 손을 잡아 주며 맑게 웃어 줄 담은 더 이상 제 곁에 없었다.
그를 감싸고 있던 매캐한 냄새가 아직까지 그녀의 주변을 돌고 있어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감당하기 힘든 상황으로부터,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저 안에 냉대와 고립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정말 뭐든지 할게요. 저 좀 들여보내 주세요, 어머니.”
다시 힘을 그러모아 주먹을 쥐고 문을 힘껏 두들겼다.
차가운 물방울이 손 위로 떨어졌다.
자신이 울고 있는 건가 싶어 눈가를 매만지던 수연이 막 빗방울을 떨구기 시작하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비는 곧 제 모습을 갖추고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물이 눈물을 만들고, 눈물은 빗물에 섞였다.
하늘에 있는 담이 그녀를 위해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담을 따라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이젠 문을 두드려 볼 의지도, 어머니를 부를 기운도 없는 수연이 모든 걸 포기한 듯 빗속에 가만히 몸을 웅크렸다.
차가운 빗줄기가 그녀의 체온을 식히며 뽀얀 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눈을 감은 수연은 양손을 맞잡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담아, 나도 데려가. 누나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누나만 두고 가지 마.”
수연의 가는 음성은 빗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돌바닥에 머리를 기대고 누운 채 이대로 잠들어 담의 곁으로 갈 수 있기를 빌며 모든 걸 놓아 버리려던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감은 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너무 시려 힘껏 찡그렸다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문턱을 넘은 사람의 실루엣만 가늠할 수 있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먹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수연의 곁으로 우산을 든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림자는 중요한 말이라도 건넬 듯 몸을 기울여 왔다.
짙은 사향 냄새. 어머니가 아니었다.
비릿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어머니에게 떠밀려 기원을 따라가기 전 가끔 마주칠 때마다 끈적거리는 시선과 비릿한 미소로 그녀를 소름 끼치게 했던 어머니의 애인이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걸까.
이 남자 때문이었나.
기원을 따라가기 싫어하던 그녀를 매몰차게 쫓아냈던 것도, 선심 쓰듯 담을 함께 보내 준 것도, 절대로 다시 들여놓지 않겠다고 문을 굳게 닫아걸었던 것도 모두 이 남자와 단둘이 살고 싶어서 그런 걸까.
뒤죽박죽 생각이 엉켜 드는 머릿속과 달리 남자를 바라보는 수연의 눈은 그저 멍하기만 했다.
“선화가 그 녀석한테 연락했어.”
어머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어린 남자가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어머니의 이름이 너무나 선정적으로 들렸다.
“아마 곧 도착할 거야.”
남자의 말에 수연은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멈추고 통증이 일기 시작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앞으로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하면 숨겨 줄게.”
그녀를 관찰하듯 유심히 바라보던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숙여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선화 몰래 집을 하나 장만했어. 너와 함께 살 집. 처음 본 순간부터 네가 탐났어. 나와 함께 가겠다고 말하기만 하면 널 숨기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어때?”
은밀하게 속삭이던 그가 수연의 귓불을 살짝 물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짧은 비명과 함께 남자를 힘껏 밀어냈다.
둘을 가리고 있던 우산이 뒤로 나동그라지면서 그도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태 그에 의해 가려져 있던 대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눈앞을 가린 빗물을 대충 손으로 닦아 낸 수연이 누군지 가늠해 보려 눈을 부릅뜬 순간, 별안간 빛줄기가 하늘을 가르며 내리꽂혀 주변을 환히 밝혔다.
하얀 소복 차림의 선화가 서 있었다.
비에 젖은 소복이 맨몸에 찰싹 달라붙은 모습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여자로 보이게 만들었다.
지금 그녀는 수연의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보다 열두 살이나 어린 남자의 여자였다.
그걸 미처 알아채지 못한 수연이 한 가닥 솟아오른 희망을 품고 무릎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머……! 아악!”
모진 손바닥이 수연의 뺨 위로 날아들었다.
“돌아가. 네 자리는 서기원이 옆이야. 인연을 끊는 일도,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일도 모두 네 힘으로 해.”
모질게 돌아서는 선화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어머니! 담이가 죽었다고요. 그 남자 때문에 담이가 죽었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이랑 같이 살 수 없어요. 제발 여기 있게 해 주세요.”
“여기에 네 자린 없어.”
선화의 냉정한 발길질에 수연은 돌바닥 저만치 널브러졌다.
“뭐해? 안 들어오고.”
“나? 선화야, 자기야! 오해하는 거 아니지? 글쎄, 저 계집애가 날 꼬드기더라니까. 그래서 나한테는 자기밖에 없다고 말할…….”
“시끄러워. 얼른 따라 들어와.”
“가요, 가. 우리 자기 진짜 삐졌구나?”
선화의 비위를 맞추려는 남자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더니 대문이 닫히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멀어져 갔다.
잠시 움직임이 없던 수연은 꿈틀거리며 바닥에 크게 드러누웠다.
툭, 투두둑.
감은 눈 위로 빗물이 쉴 새 없이 내리꽂혔다.
그대로 잠이 든 것처럼 한동안 미동도 없이 누워 있던 수연이 갑작스레 번쩍 눈을 떴다.
흐릿하지만 맑고 따뜻한 기운이 그녀의 위에 둥실 떠 있었다.
“담이, 너니? 흑, 담아…….”
빗소리로는 감추어지지 않는 흐느낌이 애잔하게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운을 그러잡으려는 듯 양손을 뻗었다.
수연은 담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터뜨리지 못했던 울음을 한꺼번에 쏟아 내고 있었다.
흐릿한 구름 같은 것이 그녀를 감싸는가 싶더니 전류가 흐르는 듯 찌릿한 기운이 온몸으로 번져 갔다.
모든 걸 내려놓으려는 그녀를 채찍질하는 듯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어서 몸을 일으키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삶에 대한 애착도, 의지마저도 놓아 버린 수연이 담의 기운에 떠밀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돌계단을 내려가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저만치 길 끝에 자동차 헤드라이트일 게 분명한 빛이 주변을 밝히며 다가오고 있었다.
선화는 인연을 끊어 내는 일도,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내는 일도 모두 그녀의 몫이라고 말했다.
수연은 이제 그만 모든 인연을 끊어 내고 싶었다.
모질고 냉정하기만 했던 선화와도, 그녀를 이용하기만 했던 기원과도, 그 둘로 인해 생긴 모든 인연을 여기서 마무리 짓고 싶었다.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길로 나아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그녀를 흠뻑 적셨다.
굴곡진 길을 돌아온 차가 속력을 높여 미끄러지다가 길 중앙에 나타난 가녀린 형체를 발견하고 급하게 멈춰 섰다.
끼익, 하는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환한 불빛이 수연을 감쌌다.
둔탁한 충격을 느끼며 수연은 암흑 속으로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