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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수연은 거침없이 달려드는 음습한 검은 그림자를 피해 무작정 도로로 뛰어들었다.

3년 전. 비 내리는 가을밤의 스산함과는 거리가 먼, 봄기운이 완연한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멈춰 선 차의 마찰음과 환한 불빛에 노출된 그녀는 마치 3년 전의 암흑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간 듯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당신 뭐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

차에서 내려 팔을 거칠게 움켜쥔 남자의 벼락같은 말에 과거를 헤매던 수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뛰어들면 어쩌자는 겁니까? 내가 주의해서 운전했으니 망정이지.”

눈부신 헤드라이트에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놀랍도록 잘생긴 데다 예리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혹시 당신, 다른 마음먹고 일부러 뛰어들었나? 자해 공갈로 운전자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행위는 형법 제347조 사기죄에 의거,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는 거 모릅니까?”

전혀 자해 공갈을 할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되짚어 보건데 좀 전 상황은 분명 이 가녀린 여자가 그의 차 앞으로 일부러 뛰어들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거의 태반이 범죄자처럼 생기지 않았다.

정혁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일종의 살아남기 위한 보호색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얼마 전 강력 1팀에서 수사를 종결지은 30대 남자 피살 사건의 범인도 불면 날아가지나 않을까 싶은 청순한 외모의 20대 여자였다.

남자 친구가 양다리였다는 이유만으로 수십 차례 칼로 찔러 살해한 뒤 달아났던 여자는 파리 한 마리조차 죽이지 못할 만큼 연약해 보였다.

덕분에 증거물을 들이대며 여자를 매섭게 몰아붙였던 정 형사는 동료들 사이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놈으로 낙인찍히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그 여자는 일말의 뉘우침도 없이 남자 친구를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뻔뻔한 진범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세상이었다.

멍한 눈길로 여린 몸을 떨고 있는,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이 여자도 탁월한 보호색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예쁘장한 얼굴에 시리게 반짝이는 눈, 가느다란 팔까지 보호색치곤 상당히 완벽했다.

더구나 표정 연기가 압권이었다.

정혁의 위협적인 말에도 아랑곳없이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 멍한 눈길은 그를 지나쳐 저만치 으슥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단언컨대 이 여자를 겁먹게 하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정혁의 의문을 담은 시선이 그녀의 눈길이 머문 뒤쪽 어디쯤으로 돌려졌다.

“이봐요, 저기 뭐가 있습니까?”

정혁의 물음에도 그녀의 시선은 어딘가에 묶인 듯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의 시선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주시하다가 다시 옮겨졌을 때, 그녀의 시선은 무언가 움직이는 걸 쫓듯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다.

어찌나 생생한지 정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마음은 알 바 아니라는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동공은 두려움을 담고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친 여자한테 잘못 걸린 듯싶었다.

잠복근무를 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버티다가 3일 만에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샤워와 안락한 잠자리가 미치도록 그리운 마당에, 아무리 남다른 정의감과 태평양 같은 오지랖을 자랑하는 그라도 이런 상황은 결코 반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두자니 양심이란 녀석이 허락을 안 해서 적당히 떠넘기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정혁이 그녀와 억지로 눈을 맞췄다.

“집이 어딥니까? 다니는 병원……!”

작고 부드러운 몸이 갑자기 그를 덮쳐 왔다.

반사 신경이라면 남다르다 자부했던 정혁은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고 그대로 얼어 버렸다.

바보처럼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쳐든 수연이 빠르게 주변을 살핀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 저기 그…….”

갑자기 울린 굵직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수연이 그를 확 밀쳐 내자 정혁은 이번에도 어이없게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수연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죄, 죄송합니다.”

웅얼거리듯 사과의 말을 뱉은 수연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더니, 돌아서서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봐, 잠깐!”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정혁이 그녀를 잡으려다 그만두었다.

굳이 잡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저만치 멀어져 가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정혁은 허, 하고 어이없는 단음절을 내뱉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 * *



한차례 붐비는 시간이 지난 김밥 전문점.

신혜가 부지런히 김밥을 말며 동시에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얼굴엔 초조한 빛이 가득했다.

기다리던 손님에게 김밥을 건네면서도 쉴 새 없이 밖을 살피던 신혜가 낯익은 형체를 발견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뱉어 냈다.

신혜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수연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늦어서 걱정했어. 배달은 잘 했지?”

“네.”

“미안해. 손님들은 왜 꼭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꺼번에 몰아닥치나 몰라. 하여튼 김정팔이, 얘는 일복도 없어. 꼭 그래, 꼭! 팔푼이 김정팔이 홀딱 자리 비우면 손님도 많고, 배달도 밀린다니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 그것도 수연이 스스로 가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신혜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덕분에 평소엔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의 남편, 정필만 ‘팔푼이 김정팔’이 되어 버렸다.

“형부가 놀러 간 것도 아닌데요, 뭘.”

정필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공사다망하신 신혜의 시어머니가 발목을 삐끗했다며 전화에 대고 악을 써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

“하여튼 노인네, 주책도 그런 주책이 없어. 아니 나이를 생각해야지, 젊은 애들이나 신는 뾰족 구두 신고 나갈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수연은 배달하고 받아 온 돈을 카운터에 내려놓고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빙그레 웃기만 했다.

원래도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어릴 적보다 더 말이 없어졌다. 그나마 웃어 주기라도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3년 전, 서기원이라는 사람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만 해도 말 못 하는 병에 걸린 게 아닌지 착각했을 정도였으니까.

“아우, 내가 진짜 동네 창피해서 못살아. 적적해서 춤이나 배워야겠다고 했을 때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렸어야 했어. 글쎄 남자 친구가 생겼단다. 그것도 다섯 살 연하 할아버지. 아침마다 허옇게 바르고 머리 지지고 난리가 아니다, 야. 어쩌면 좋니? 나 우리 어머니 때문에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집에서 혼자 우울하게 보내시는 것보다 훨씬 낫죠.”

그렇게 잘 아는 애가, 에휴.

수연의 말에 신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신혜가 기원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수연은 열흘 동안이나 의식이 없었다고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따져 묻는 그녀에게 기원은 그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만 남긴 채 짐짝 떠맡기듯 하고 사라졌다.

신혜가 기억하는 한, 얼굴 몇 번 본 게 전부인 선화 이모는 방금 만나고 헤어진 사람마냥 안부 인사도 없이 ‘당분간 네가 걜 맡아 줘야겠다’라는 한마디만 남긴 채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처음엔 당황하여 그냥 넘어갔지만 나중엔 화가 났다.

신혜의 엄마가 죽기 전 유명한 무속인이었던 선화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양해도 구하지 않고 수연을 떠맡기는 건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화를 만나러 갔을 때, 얼굴 서너 번 봤을 뿐인 사촌 동생이었다.

인형 같은 얼굴로 맑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 예뻐 알록달록한 탱화로 둘러싸인 집과는 참 어울리지 않았던 아이.

수줍게 말을 건네는 모습은 외따로 떨어져 있던 기와집처럼 고고한 기운을 풍기며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을 느끼게 했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선화의 딸이라곤 믿기지 않는 모습에 수연을 마주한 신혜는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말하는 모습, 웃는 모습, 걷는 모습,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까지.

모두 다 신혜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녀를 만나고 온 뒤 며칠간은 거울을 보며 흉내 내기 바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나 병원 침대에 잠들어 있는 수연은 초췌하고 초라해 보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더욱 내키지 않았다. 그냥 모른 척 버려두고 가고 싶었다.

더군다나 정필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가뜩이나 정필의 어머니가 부모마저 모두 돌아가시고 변변한 일가친척 하나 없다는 이유로 그녀를 탐탁지 않아 하던 터였다.

몸이 아픈 사촌 동생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하면 결혼이고 뭐고 다 엎어 버릴 것만 같았다. 남의 처지를 생각할 입장이 못 됐다.

결심을 굳힌 신혜가 그냥 가 버리기도 뭐해서 선화에게 다시 전화를 했지만, 신호음이 끊기도록 받지 않았다.

친엄마에게서도 버림받은 수연이 딱했지만 끝내 매정하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막 병실을 나서려던 그녀의 휴대폰으로 선화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돈 보내마. 계좌 번호 찍어라. 그 아이가 깨어나면 이제 나와는 더 이상 인연이 아니라고 전해라.>

참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메시지를 보는 순간 수연을 떠맡는 것이 못 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준비로 생활이 빠듯해 한 푼이라도 아쉬울 때였다.

수연에게 미안하고 낯부끄러웠지만, 잘 돌봐 주면 된다고 스스로를 정당화시켰다.

그 후로 3년이 지났다.

신혜는 여전히 수연에게 미안했다. 퇴원하기 전 기원은 딱 한 번 병원을 방문했고, 머물다 간 시간은 채 2분을 넘기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안 사실이지만, 기원은 수연과 법적으로 혼인 관계였다.

기원이 다녀간 뒤 꼭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내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수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담이 목숨 값이에요. 난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간신히 내뱉는 말에 울음이 한가득 섞여 있어서, 통장을 내미는 손이 애잔하게 떨리고 있어서 차마 마다하지도, 담이 누구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 돈은 결국 정필이 실직한 후 이 김밥 전문점을 내는 데 쓰였다.

수연과 함께 산 기간은 기껏해야 그녀가 몸을 추스르는 데 걸린 한 달 남짓이었다.

신혜가 죄책감에 내어놓은 선화가 준 돈으로 자그마한 원룸을 얻어 나간 뒤로 수연은 지금까지 쭉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신혜가 억지로 불러내지 않으면 바깥출입도 거의 없는 편이었지만 요즘은 말도 곧잘 하고, 진짜 웃는 것 같진 않았지만 미소도 가끔 보여 제법 좋아졌다고 만족하던 참이었다.

그럼에도 수연을 마주할 때마다 샘솟는 안쓰러움을 미처 갈무리하지 못하고 바라보던 신혜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어머, 수연아! 이거 뭐야? 피나잖아. 어쩌다 이랬어?”

옷소매에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신혜가 호들갑 떨기 전까지 깨닫지도 못하고 있던 수연은 그제야 팔꿈치 부근에서 쓰라림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