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팔을 걷어 확인하며 걱정을 늘어놓는 신혜를 남 일인 듯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겁이 나도 그렇지, 어쩌자고 처음 본 남자 품으로 뛰어들었을까.

늘 일상인 듯 지내다가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날이 있다.

바로 오늘처럼.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나타나 그녀를 삼켜 버릴 듯 주변을 맴도는 어둡고 음습한 기운이 못 견디게 싫었다.

이런 날이면 혼자 있는 게 버거워 신혜의 성화에 못 이긴 척 밥을 얻어먹으러 나왔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주문이 밀려 들어와 정신없는 신혜에게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한 일이 걱정만 얹은 꼴이 되어 버렸다.

“얘 봐. 웃어? 웃음이 나오니?”

“그냥 살짝 까진 거예요. 괜찮아.”

팔을 빼내 소매로 상처를 가리며 하는 말에 신혜가 눈을 가느다랗게 내리떴다.

“수연이 너, 밖에서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신혜의 말에 불현듯 남자의 단단한 가슴이 떠올랐다.

보기 드물게 맑은 기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뭐? 그 남자는 아마도 자신을 정상인으로 보지 않았을 게 뻔했다.

자해 공갈이 어쩌고, 형법이 어쩌고 하는 것 같았는데 혹시 신고하진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좋은 일은 무슨. 그만 들어갈게요.”

“좀 이따 정필이 오면 같이 나가. 해가 짧아서 그런지 너무 어둡네.”

“가로등 있는데 뭐. 리포트 제출할 것도 있고…….”

붙잡아도 소용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신혜는 섭섭한 마음에 삶은 계란을 주섬주섬 담아 수연에게 건넸다.

처음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시작했대도 이젠 친동생같이 여기는 신혜에 비해 수연은 마음을 열지 못하고 그녀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서운하고 안타깝고 답답했지만 그저 기다려 주는 것 외에 신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혼자 집안에 틀어박혀 삶을 마감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던 걱정과 달리, 수연은 2년 전 우연찮은 기회를 통해 일을 가지게 됐고, 그 일로 인해 방송통신대 편입도 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금세라도 다른 세계로 날아가 버릴 것 같던 수연이 한발 한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꺼리는 편이었지만, 차차 나아질 거라 여겼다.

“이거 가지고 가서 간식으로 먹어. 조심해서 들어가고 도착하면 전화해.”

“네.”

저 아이에게 빨리 좋은 인연이 생겼으면 좋겠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필요 없다며 휴대폰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수연에게는 다소 힘들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 * *



간만의 휴식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듯 힘찬 발걸음을 보이던 정혁이 이른 시간부터 어수선한 사무실 분위기에 미간을 슬쩍 일그러뜨렸다.

그런 그를 발견한 태랑이 쪼르르 달려왔다. 얼마 전 지능 범죄 수사팀으로 발령받아 온 그는 수사보다 사교성에서 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반장님.”

대충 손만 들어 보이고 휘적휘적 제자리로 향하는 정혁에게 태랑이 젖 달라고 보채는 아이마냥 따라붙었다.

“반장님, 신현덕 사건이요.”

“그게 왜? 검찰로 송치한 지가 언젠데.”

“그랬죠. 그랬는데요…….”

“검찰에서 다시 수사 협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인마, 정신 사납게 촐랑대지 말고 커피나 좀 뽑아 와.”

장철민 형사가 어깨춤이라도 출 듯 신나 있는 태랑의 뒤통수를 치며 말을 가로챘다.

“커피요? 누구 거요?”

“반장님, 이렇게 눈치코치 없는 녀석을 계속 우리 팀에 둬도 되는 겁니까? 이태랑 형사, 내가 처음에 뭐라고 했냐?”

철민이 태랑의 단단한 복근을 손가락으로 푹푹 찔러 댔다.

“지능 범죄 수사팀은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커피라는 게 마시기 싫은 사람…….”

“난 아메리카노.”

“태랑아, 난 카페 모카.”

“난 거품 잔뜩 들어간 거로 부탁해.”

태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팀 전원이 공모라도 한 듯 여기저기서 각자 주문을 읊어 대고 있었다.

금세 울상이 된 태랑을 본 정혁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장 형사, 왜 자꾸 애를 놀려?”

정색을 하며 말을 뱉은 정혁이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태랑에게 내밀었다.

“역시 반장님 밖에 없습니다. 존경…….”

“요 옆에 새로 생긴 커피숍, 커피 맛 좋더라. 주문 다 외웠지? 난 아메리카노. 거스름돈은 넣어 뒀다가 맛난 거 사 먹어.”

여기저기서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반장님…….”

“뭐해? 시간 없어. 얼른 갔다 와.”

정혁이 올라가려는 입매를 굳히며 고갯짓을 해 보이자, 철민이 친절하게 태랑을 돌려세워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갔다 와라, 아가.”

태랑이 손가락을 곱으며 구시렁거렸다.

“반장님은 아메리카노, 김 형사님도 아메리카노, 이 형사님은 카페모카, 장 형사님은…… 장 형사님은 뭐라고 하셨죠?”

“쓰읍, 우리 팀으로 온 첫날 내가 뭐라고 했지?”

“같은 말 두 번 시키지 마라. 입 아프다. 휴.”

금세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태랑이 비척비척 밖으로 나가자 잠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다들 바쁜지 곧 업무를 계속했다.

“신현덕 건은 왜 다시 넘어온 거야?”

정혁의 얼굴에도 좀 전까지 장단 맞춰 주며 보였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어젯밤 23시 20분경, 신현덕이 드림캐슬 아파트 25층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채로 발견됐답니다.”

“그렇다고 다시 우리한테 넘겨? 담당 검사가 누구야?”

“서기원 검사요. 스타 검사 아닙니까? 귀찮은 일은 피하고 볼 심산이겠죠.”

드림캐슬 아파트 입주자 대표였던 신현덕은 승강기 교체 공사 과정에서 업체와 짜고 지명 경쟁 입찰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해 수천만 원의 부당 이득을 취한 혐의로 고소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혐의가 사실로 밝혀진 것은 물론, 승강기 폐자재를 불법으로 팔아넘겨 이득을 취한 사실도 드러나 검찰에 송치한 사건이었다.

“안 그래도 잘못 건드렸다간 미운털 박힐 판이었는데 자살까지 했으니, 혹시나 강압 수사를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을 거고…….”

정혁은 순간 짜증이 확 밀려왔다.

수사 중에 신현덕이 현직 국회의원과 줄이 닿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의 구현은 개나 줘 버리라고 해라. 개인의 정의감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수사하는 내내 외압에 시달렸었다.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아버지인 차현수 경찰청장의 후광이 작용했을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살했다고 바뀔 것도 없잖아. 그냥 대충 현장 둘러보고 다시 송치해.”

“저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신현덕의 마누라가 협박 전화 비슷한 걸 받았다고 절대로 자살한 게 아니라는 말을 했답니다.”

자리에 앉은 정혁이 골치가 아픈 듯 한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문질러 댔다.

“어제 검거한 보이스 피싱 연락책 심문은?”

“준비 중입니다.”

3일을 꼬박 돌아가면서 잠복한 끝에 잡은 끄나풀이었다.

정보에 따르면 엄청난 규모의 보이스 피싱 조직과 연락이 가능한 녀석이었다.

잘만 하면 중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피해를 양산하고 있는 거대 조직을 소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검찰에 송치했던 사건을 다시 파고들어야 하는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사팀 전원, 그쪽에 집중해.”

짧게 명령을 내린 정혁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현덕 건은 내가 맡도록 하지.”

“아무리 그래도 혼자…….”

“혼자는 왜 혼자야? 저 녀석 있잖아.”

정혁이 가리키는 입구 쪽에는 수사 지원팀 장유정 형사와 커피 캐리어를 나누어 들고서 얼굴에 웃음이 만발한 태랑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태랑.”

“헉. 네, 반장님!”

유정을 보며 싱글거리고 있던 태랑이 정혁의 목소리에 놀라 부동자세를 취했다.

“입 놀리는 것만큼 실력도 괜찮은지 한 번 볼까?”

정혁은 그 말을 남긴 채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와 함께 휙 지나쳐 갔다.

“선배님, 어디 가세요? 저 드릴 말씀 있는데요.”

미소를 머금고 있던 유정이 다급하게 정혁을 불렀다.

“나중에.”

“저 별일 없는데, 같이 갈까요?”

“네가 왜? 이태랑, 종일 커피 심부름만 할 거야? 빨리 못 움직여?”

“네, 반장님.”

다시 부동자세를 취했던 태랑이 허둥지둥 커피를 넘기고 부리나케 정혁의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정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 * *



정혁은 관리 사무소의 도움을 받아 신현덕이 뛰어내렸다는 옥상을 살펴본 뒤, 태랑을 그의 집으로 보내고 아파트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신현덕이 떨어졌던 자리는 말끔히 치워진 채 거친 모래로 덮여 있었다. 근접한 화단 부근을 살펴보던 정혁은 사람을 찾는 전단지 한 장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열일곱 살 여자아이를 찾는다는 내용을 쓱 훑어보고 고개를 한껏 젖혀 옥상으로 시선을 보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통통한 체격인 50대 후반의 신현덕이 올라서기에 옥상 난간은 너무 높았다.

하필이면 왜 이런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옥상까지 올라갔을까.

더구나 잠겨 있었다던 옥상 문은 어떻게 열었을까.

여러 면에서 신현덕이 자살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어색한 점들이 있었다.

의문이 담긴 정혁의 눈이 20층에 있는 신현덕의 집을 훑다가 뻐근해지는 고개를 바로 하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네, 반장님.

“양해 구하고 신현덕 휴대폰 받아 오는 거 잊지 마.”

짧게 내뱉고 휴대폰을 종료시킨 정혁의 눈이 한곳에 못 박혔다.

그 여자다.

간밤에 잠들기 전까지 그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던 여자.

찰나에 마주쳤던 칠흑같이 까만 눈이 잊히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다가들었던 말랑한 몸이 낙인처럼 찍혀 잠들기 직전까지 그를 괴롭혔었다.

사건과 관련된 일도 아니고, 특별히 여자에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니 그대로 잊히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그의 통제를 벗어나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당히 찜찜한 상황이었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잠잘 시간도 모자란 그이다 보니 곧 잊히겠지, 애써 덮으려던 참이었다.

그런 생각과 달리 그녀는 너무도 빨리 정혁의 눈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