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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더구나 감 좋은 정혁이 보기에 그녀의 행동은 더할 수 없이 수상해 보였다.

옆을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며, 떼기 싫은 발걸음을 옮기는 것같이 미적대면서도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여기 사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정혁이 손에 들고 있던 전단지를 아무렇게나 구겨 주머니 속에 넣은 뒤, 조용히 그녀의 뒤로 따라붙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입구에 멈춰 선 그녀는 얕은 한숨을 뱉어 낸 뒤 결심을 굳힌 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하까지 내려간 후 그녀의 행동은 한층 더 수상해졌다.

으슥한 곳만 찾아 기웃거리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하더니,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쓰인 출입문 옆 귀퉁이에 멈춰 섰다.

정혁도 덩달아 멈춰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주변을 유심히 살피던 그녀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뭐 하는 거지?

그녀를 향한 물음인 동시에 자신을 향한 물음이기도 했다.

자신은 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정혁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면서도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할지, 그녀 앞에 나서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망설임이 깊어진 그가 습관처럼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댔다.

야옹.

정혁에게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의심과 긴장감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나 보다.

미행 따위는 생각조차 않는, 길고양이 밥을 챙길 정도의 선량함을 지닌 여자는 자신을 몰래 훔쳐보며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맑은 음성으로 고양이를 불러 댔다.

잠시 후 길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안녕.”

짧게 인사를 건넨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부스럭거리며 고양이 밥을 챙겨 줬다.

“이게 마지막이야. 다음엔 아무리 못살게 굴어도 절대로 다시 안 올 거야.”

단호하게 뱉어 놓고도 괜스레 고양이가 안쓰러워진 수연이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우리 담이가 고양이 엄청 좋아했는데. 고양이에 대한 거라면 모르는 게 없었어. 고양이는 개보다 기억력이 좋대. 공기의 맛도 느낄 수 있다고 했는데, 진짜야? 아, 맞다. 암고양이는 오른손, 아니 오른발잡이고 수고양이는 왼발잡이라는데. 넌 암컷이야, 수컷이야?”

야옹.

“다 먹었어? 벌써 가려고? 나 진짜 다시는 안 올 거야. 그러니까 너도 더 이상 여기 있지 마. 저번에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고양이 덫 놓는다고 한 거 너도 들었지? 여기보다 괜찮은 데 찾아봐. 알았지?”

수연의 말을 알아듣기는 한 건지 나타날 때와는 반대로 고양이는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흐릿하게 뭉쳐져 주변을 맴돌던 기운도 고양이를 따라 사라져 버린 것을 확인한 수연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윽.”

모퉁이에 서 있던 정혁이 수연의 신음 소리에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 발을 멈칫했다.

“으, 다리야.”

또 한 번 정혁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런 걸 알 리 없는 수연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코끝에 열심히 발라 대기 바빴다.

정혁은 이제 그만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돌아서야지 하면서도 이상하게 아쉬움이 남았다.

그게 화근이었다.

별안간 조용한 지하 주차장 안에 갑자기 요란한 벨소리가 울려 댔다.

화들짝 놀란 수연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당황한 정혁이 전화를 받을 생각도 못 하고 주춤 다가서자 수연은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던 칠흑같이 까만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드러난 예리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둘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정혁이 느끼기에 여자는 그를 기억하는 눈치였다.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 장담했던 남자가 그녀의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보기완 다르게 집착이 대단한 남자였나. 진짜 고소라도 하려고 찾아온 걸까.

무표정인 것과는 다르게 수연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이 모든 의문을 확인하기에 앞서 지금 당장은 벨소리가 너무 요란했다.

“받으세요.”

“네?”

수연의 뜬금없는 말에 당황한 정혁은 미간을 구겼다.

“전화요.”

정혁은 그제야 주머니 속에서 제 존재를 알리고 있는 휴대폰이 생각났다.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한 번 내뱉고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태랑의 우렁찬 목소리가 휴대폰을 뚫고 나와 고요한 지하 주차장을 울렸다.

—반장님, 저 지금 차 앞인데 어디 계시는 거예요?

“기다려.”

—반…….

휴대폰을 주머니로 거칠게 쑤셔 넣은 정혁이 아무런 변화 없이 양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서 있는 수연에게 다시 집중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아니 뭘 하려는 건지 그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수연에게서 뜬금없고도 간략한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방금 전까지 고양이와 다정히 대화를 나눴던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네?”

“자해 공갈범 아니에요.”

“아.”

“성추행범도 아닌데, 그때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수연의 생각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 어리둥절하던 정혁이 그녀가 제멋대로 안겨 들었던 순간을 생각해 내고는 입매를 굳혔다.

“신경이 쓰인 건 사실이지만, 기분 나쁘진 않았습니다.”

그가 듣기에도 상당히 딱딱한 어조였다.

정혁을 아는 사람들 대부분 그가 정색한 채 말을 꺼내면 없는 잘못이라도 빌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혹시나 그의 말투에 겁을 집어먹은 건 아닌지 살펴보자 그녀는 여전히 일말의 변화도 없는 표정이었다.

너무 짙어서 빨려 들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만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반짝거렸다.

허투루 빈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다가서자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혹시 절 고소하거나 그럴 생각은 아니신 거죠?”

“네, 뭐.”

“그럼 저는 이만…….”

주춤 뒤로 몇 발 물러선 수연이 왔던 길을 되밟아 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멀어지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정혁이 다급하게 뒤를 따랐다.

이대로 보내면 왠지 후회할 것 같았다.

“여기 삽니까?”

산책하듯 걷던 수연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한 템포 느리게 돌려진 얼굴은 역시나 아무 변화가 없었다.

“아니요.”

“그럼 왜?”

“부탁을 받아서요. 고양이 밥.”

“아, 실례지만 이름이…….”

“반장님, 여기 계셨어요? 한참 찾았습니다.”

눈치 없고도 방정맞은 목소리가 저만치서 들려왔다.

미간을 구긴 정혁이 태랑을 바라보는 사이 부담스러운 시선에서 벗어난 수연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잡을 명분도 없었지만, 얼결에 여자를 놓쳐 버린 정혁이 와다다 다가서는 태랑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날렸다.

“윽! 아, 왜요?”

“왜요? 아까 전화로 뭐라고 했냐?”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게 맞을 일입니까?”

“당연히 맞을 일이지. 너 때문에 지금…….”

저 여자를 놓쳤잖아, 라는 말을 삼킨 정혁이 뒤에서 굿을 하든가 말든가 고고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게. 이름은 알아서 뭐할까.

용의자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고 그녀 말마따나 자해 공갈범, 성추행범은 더더욱 아닌데.

이름을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뭘까, 이 찜찜함은.

“휴대폰은 받아 왔어?”

“네, 반장님. 죽기 직전에도 누군가와 통화를 했답니다. 관리 사무소 소장과도 조사받은 이후 여러 차례 다툼이 있었고, 요 며칠간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헛소리도 가끔 했다고 말하더라고요.”

“헛소리?”

“네. ‘그러려던 게 아니야’,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 주로 그 비슷한 말들이었대요. 악몽도 자주 꿔서 소리를 지르면서 깨어나기 일쑤였고, 깨어나면 잘못했다고 싹싹 빌기도 했다는데요. 정말 검찰에서 강압 수사를 한 건 아닐까요?”

“서기원 검사가 그랬을 리 없어.”

출세에 눈먼 사람들은 건드려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귀신같이 구별해 냈다.

서기원이라면 신현덕이 현직 국회의원과 연이 닿아 있다는 사실쯤 이미 어렵지 않게 파악했을 것이다.

그럼 대충 덮고 무마시키는 방향으로 가지, 강압 수사를 할 리가 없었다.

“그럴까요? 근데 반장님, 아까 무슨 말씀하시려던 겁니까?”

“알 거 없어, 인마. 휴대폰 분석 들어가고, 혹시 타살 흔적이 있는지 국과수에 의뢰해.”

“네. 근데 진짜 뭔데요, 반장님? 혹시 아까 지나친 예쁘게 생긴 여자랑 무슨 일 있으셨던 겁니까? 그 여자, 아주 분위기 죽이던데요.”

정혁이 태랑의 뒤통수를 훅 쳤다.

죽이던데요, 라니. 그녀가 그런 저급한 말로 평가받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알 수 없는 마음이었고, 알고 싶지도 않은 마음이었다.



* * *



봄답지 않게 을씨년스러운 날이었다. 하늘은 금세라도 비를 뿌릴 듯 찌뿌둥했다.

차에서 내린 정혁이 드림캐슬 아파트에서 세 블록 정도 떨어져 있는 낡은 다세대 주택을 올려다보다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제대로 풀리는 게 없어서 그런지 피로가 배로 느껴졌다.

금세 꼬리를 잡을 것 같았던 보이스 피싱 조직은 겁쟁이들만 모여 있는지 공들여 만든 미끼를 물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국과수로부터 죽은 신현덕의 등에서 멍 자국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요즘 사회적으로 아파트 비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추세였지만, 자살을 택해야 할 정도로 처벌이 강하진 않았다.

더구나 정혁이 알기로 신현덕은 죄책감을 느낄 타입도 아니었고, 쉽게 인생을 포기할 타입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자살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현덕의 휴대폰에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 PC나 노트북, 휴대폰 등 각종 저장 매체 또는 인터넷 상에 남아 있는 각종 디지털 정보를 분석해 범죄 단서를 찾는 수사 기법)을 실시하기 전, 그가 죽기 직전 통화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던 건 순전히 태랑의 호들갑 때문이었다.

받을 거라고 생각도 못 한 팀원들은 그의 뒤통수를 날릴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순진한 건지, 맹한 건지 전화를 받은 여자는 이쪽 신분을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순순히 주소까지 알려 주었다. 이런 경우 용의자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직접 여기까지 온 이유는 아무런 감정 없이 주소를 읊어 대던 목소리가 어쩐지 낯설지 않아서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던 정혁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대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짙게 구겼다.

단지 목소리가 비슷했다는 이유만으로 혹시 그녀가 아닐까 생각한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그녀와의 짧은 만남이 잊히지가 않는다는 게 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