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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미남입니다

(1화)




<기하고등학교>의 4대 천왕이라 하면, 다음과 같다.

전형적인 마이웨이 스타일의 싹수머리 없는 ‘박사’ 서재필, 늘 혼자 움직이는 대체 불가 짱 ‘대장’ 민주한, 피아노 치는 우아한 뇌섹녀 ‘강신’ 강우연, 그리고 매너 좋기로 유명한 영재 초식남 ‘퀸’ 우해강. 그러니까 외모부터 재능까지 신이 특별히 신경 써서 어루만진 다음 세상에 내놓은 인종들. 하지만 사랑 앞에서만큼은 그들도 하늘의 덕을 누릴 수 없었으니, 다시 말해서 순전히 제 할 노릇이었던 것이었던 거시다.



프롤로그


<우정철한의원> 부원장 우한진은 최근 근거를 알 수 없는 불안함에 기분이 저기압이었다. 자도 잔 것 같지 않았고,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샌가 자신의 시선이 아들 해강을 집요하게 좇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는 일이 자꾸 반복되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해강이 전 같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가 없을 때조차도 기본적으로 느긋한 미소가 드러나던 아이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눈 속에 아이답지 않은 공허가 보이고 있었다. 어쩐지 안색도 안 좋아 보였다. 심지어 오늘 아침엔 아무런 표정도 보여 주지 않아서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아무래도 얘기를 해 봐야겠어.’

결혼 7년 만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전 아내가 숨을 놓던 순간에도 계속해서 이름을 부르던 귀한 아들이었다.

한진은 아버지 우정철 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의원을 나와 태권도 도장으로 향했다. 유치원으로 가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지금쯤이면 해강은 도장에 거의 도착해 갈 것이었다.

‘오랜만에 발차기하는 모습도 보고. 녀석, 실력은 좀 늘었으려나?’

길 어귀에 차를 세워 두고 도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몇 발짝 앞에 해강과 같은 <무진태권도> 도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보였다. 발표회 날, 해강과 한 팀으로 묶여 태권무를 선보인 그 아이였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 같은 상태의 운기雲氣랄까, 한의학에서 말하는 가볍고 맑은 상태의 청기淸氣랄까, 그런 기운이 서린 깨끗한 아이여서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한진에게 아빠미소가 떠올랐다.

“안녕? 도장 가는구나?”

하지만 한진은 계속 웃을 수 없었다. 여자아이가 한진을 보고 표시가 날 정도로 놀라더니, 너무나도 진지한 얼굴로 쳐다본 때문이었다.

“왜? 아저씨 이상한 사람 아닌데. 해강이 아빤데.”

“알아요.”

“그렇구나. 이름이 뭐니?”

“재형이요. 서재형. 남자 이름이에요.”

“아저씨 귀엔 전혀 남자 이름 같지 않은데?”

한진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가 또 거두어들였다. 여자아이, 그러니까 재형의 반응이 적잖이 이상했던 것이다. 불안해 보인다고나 할까, 초조해 보인다고나 할까.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아저씨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혹시 해강이가 짓궂게 굴기라도 하니?”

“아니요. 깡이는 그런 애 아니에요.”

‘깡이…….’

“깡이는 착해요.”

“다행이구나. 그럼 뭘까? 아저씨가 보기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데.”

재형이 눈꺼풀을 빠른 속도로 깜빡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한진은 그냥 보았다. 잠시 후 재형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약속해 주세요. 화내지 않는다고요.”

“그래. 약속하마.”

“정말이죠?”

“그럼. 걱정 안 해도 된단다.”

내내 부산하던 손가락이 일순 얌전해졌다.

“저…….”

“그래. 말해 보렴.”

“‘식스센스’라는 영화 아세요?”

“‘식스센스’? 그 영화를 네가 어떻게 아니? 너희들이 보는 영화 아닌데.”

“그게…… 서, 오빠 때문에 어쩌다 봤는데요.”

한진은 입을 다물었다. 「식스센스」가 열두 살은 되어야 볼 수 있는 영화라느니 같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직감이었다.

“그랬구나. 그런데?”

“거기에 죽은 언니가 나와요. 동생까지 죽을까 봐 걱정돼서 유령으로 나타난 언니요. 아세요?”

“그래. 나도 기억나는구나. 근데 그게 왜?”

“저…… 그니까…… 깡이 새엄마 아줌마요.”

“누구?”

“깡이가 비밀이라면서 말해 줬어요. 친엄마 아니라고.”

한진은 놀랐다. 해강은 친엄마니 새엄마니, 그런 말을 남한테 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재형이란 아이는 해강에게 있어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될 만큼 아주 중요한 친구라는 뜻이었다. 한진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 것 하나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어…… 그랬구나. 근데 해강이 새, 새엄마가 왜?”

재형이 또 머뭇머뭇, 우물쭈물했다. 한진은 문득 오한이 느껴졌다. 첫 아내와 사별 후 2년 만에 재혼해 이제 1년. 인지는 완벽한 여자였다. 한진에게는 물론, 한진의 부모인 우정철 원장과 이양숙 여사에게도 나무랄 데 없이 잘했고, 외아들 해강에게는 그야말로 지극정성이었으며, 집안 살림도 제대로 꾸려 가고 있었다.

“괜찮아. 말해도 돼. 무슨 말이든 다 들을게.”

“영화에 나온 그 새엄마 같아요.”

한진이 휘청, 하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다리가 풀려 버린 것이다. 그런 한진을 재형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 해…… 하아…… 해강이가 그러든? 새, 새엄마가 이상하다고?”

“아니요. 깡이는 그런 말 하는 애 아니에요.”

“그, 근데 재형이는 아저씨한테 왜, 왜 그런 말을 하지?”

혀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서 한진은 말을 계속 더듬거렸다.

“그냥 그렇게 보였어요.”

“그냥 그렇게 보였다고?”

“깡이하고 저는요. 집에 갈 때는 도장 버스 같이 타거든요. 저는 원래 걸어가도 되는데, 깡이하고 조금이라도 얘기 더 하고 싶어서 같이 타서 그래요. 그래서 그 새엄마 아줌마 매일 봐요. 다른 친구들은 다 예쁘다고 부러워해요. 근데요, 저는 그게…… 처음엔 그냥 무섭기만 했는데요. 영화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한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저번에 발표회 때, 아저씨 봤어요. 아저씨는 안 무서워서 아저씨한테는 말하고 싶었는데요, 못 했어요. 아빠가 다른 사람 나쁘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한 게 생각나서요. 그래도 자꾸 걱정됐어요. 그리고 겁났어요. 깡이도 그 영화에 나온 언니처럼 죽을까 봐서요.”

쏟아 내듯 말을 이어 붙인 재형이 돌연 울음을 터뜨렸다. 한진은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둔 일곱 살짜리의 말이 너무나 무거워서, 그 말을 끌어안고 아래로, 아래로 끝도 없이 굴러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한진이 덜덜 떨면서 재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하나뿐인 구명줄에 매달리듯이. 재형이 맞잡아 왔다. 작고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손이었다.



1. 겨울에서 봄


“휘이후우…… 완전 횡재수.”

재형의 휘파람 소리가 입김과 함께 옥상을 날았다.

“권적운이라. 보기 드문데. 어쩐지 벌집 같은 게 모양도 잘 나왔고. 오늘 무슨 날인가? 엄마한테 복권이라도 사라 그럴까?”

권적운. 일명 털쌘구름. 하얀 조각돌처럼 생긴 얼음덩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입자들이 햇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제법 광택이 인다. 다른 구름에 비해 잘 나타나지 않기도 하고, 나타나 봐야 곧 모양이 달라져 버려서 보기 귀한 편에 든다. 아니나 다를까, 구름은 금세 밋밋해지면서 하늘로 스며들었다. 언제 있기라도 했었냐는 듯이.

“아까워라.”

재형이 미련이 잔뜩 남은 눈으로 하늘을 힐끔거리며 텐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재형이 살고 있는 아담한 단층 단독주택의 옥상에는 사시사철 텐트가 쳐져 있었다. 재형의 하늘 관찰용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구름 관찰용이었다. 결혼식 주례 말씀도 아니건만, 비가 떨어지나 눈이 내리나 햇살이 따가우나 바람이 부나, 틈만 나면 올라가 앉아 있는 재형을 보다 못한 서장군 씨께서 재형의 열 번째 생일 선물로 사다가 설치해 준 텐트였다. 거의 10년 가까이 쓰고 있지만 색이 조금 바랜 것 말고는 멀쩡했다. 재필의 침입을 염려한 재형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얄짤없는 1인용이기도 했다. 하지만 재필은 재형이 없을 때조차도 텐트 안을 침범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에, 텐트로 인한 무력 충돌이나 유혈 사태가 둘 사이에 일어난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