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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미남입니다
(2화)
“사진도 못 찍고…….”
재형이 텐트에 뚫린 창문으로 하늘을 내다보며 구시렁거렸다. 카메라는커녕 핸드폰조차 챙겨 오지 않은 자신이 한심했다. 하긴, 줄넘기하려고 마당에 나왔다가 권적운이 뜬 걸 보고 놀라선 바로 서둘러 올라온 거였으니까.
순간, 검은 형체가 창문을 가렸다.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뻔했다. 재필. 재형의 이란성 쌍둥이 오빠, 서재필.
“맞는다. 몸뚱어리 치워라.”
“현기가 전화했어. 너 연락 안 된다고. 폰 좀 챙겨 다니지?”
“남이사.”
“오늘 졸업 기념으로 알타이르 마지막 치킨 파티 한다며. 현기가 전해 달라더라. 늦어서도 안 되고, 빠져서는 더 안 된다고.”
<알타이르>는 <기하고등학교>의 별자리 관측 동아리였다. ‘알타이르’란 독수리자리의 알파(α)별로 우리나라에서는 견우성이라고도 부른다. 맞다. 칠석날 까마귀 머리통 지르밟고 서서 ‘직녀’랑 끌어안고 울고 부는 그 ‘견우’ 할 때의 견우성.
어쨌거나 구름덕후 서재형이 별자리 관측 동아리에서 활동한 이유는 단순했다. 동아리 소유의 성능 좋은 망원경을 낮에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는 것. 어쩔 수 없었다. 구름을 관찰하겠다고 모이는 사람들은 찾아지지 않았으니까.
“안 가.”
“가.”
“싫어.”
“그래도 가.”
“왜.”
“바람 좀 쏘이라고.”
“집에도 바람 불어.”
“서재형.”
“뭐! 왜!”
“너답지 않게 괜히 처져 있지 마.”
“잘난 네가 뭘 알아.”
재필이 텐트의 지퍼를 열어젖히고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3년 내 그 비싼 망원경 실컷 써 놓고 이러면 안 되지. 유종의 미라는 거 몰라? 무엇보다도 서재형이 안 가면 내 친구 송현기가 혼자 힘들어져. 후배들한테 분명히 당할 거라고. 그러니까 가. 어?”
재형이 입술을 있는 대로 내밀고 비쭉이더니, 곧 엉덩이를 조금씩 밀면서 텐트 밖으로 나왔다.
“아, 송현기. 덩칫값 못 하고 찌질해 가지고는…….”
“찌질한 게 아니고 순한 거야. 거기다 파일럿 예약한 잘난 놈이고. 이젠 보기 힘들어질 텐데 하던 대로 너무 막 굴리지 마라.”
재형은 더 이상 가타부타하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재형을 따라 내려가며 재필은 생각했다.
‘서씨 집안의 최고 악바리가 맘은 약해 빠져서. 어차피 잘할 거면서.’
*
‘아, 귀찮아. 치킨이 대수야.’
재형은 계속해서 심난한 상태였다. 수시 전형으로 일찌거니 대학이 정해진 재필과 달리 재형은 원서를 내는 족족 모두 떨어졌고, 정시 전형으로도 원하는 학교, 원하는 과에 들어가기에는 애매모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추가 접수까지 가기 전에 진로를 다시 잡아야 했다.
‘물리, 물리라.’
그랬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물리학과였다. 기상학이건 천문학이건, 하다못해 중간에 포기하고 약대에 편입한다고 가정해도 물리학은 잡고 있어야 하는 때문이었다.
‘아, 물리만은 재미없는데. 자신도 없고.’
신경이 꽤 긁혔다. 구름만 보고 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속상했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사람은 좋겠다.’
그때 누군가가 재형의 어깨를 확, 하고 잡아챘다. 현기였다.
“오, 서재형. 나의 보디가드! 서재필 닦달한 보람이 있네.”
“맞는다. 닭발 치워라.”
현기의 손을 쳐 내면서 고개를 돌리는데, 정작 현기는 재형이 아닌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현기의 시선을 좇아가니 멀찍이 해강이 서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붙어 있네.’
해강은 현기와 무슨 수신호인가를 주고받고는 그대로 사라졌고, 현기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함박 웃으면서 ‘다시금’ 재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재형이 ‘다시금’ 쳐 낸 것은 물론이었다.
“사귀니?”
“뭐?”
“송현기, 너님요. 퀸하고 사귀시냐고요.”
현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양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렸다.
“어머어머, 형님. 멀쩡한 남정네 혼삿길 막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해강은 <기하고등학교>의 4대 천왕 중 하나였다. 전형적인 마이웨이 스타일의 싹수머리 없는 ‘박사’ 서재필, 늘 혼자 움직이는 대체 불가 짱 ‘대장’ 민주한, 피아노 치는 우아한 뇌섹녀 ‘강신’ 강우연, 그리고 매너 좋기로 유명한 영재 초식남 ‘퀸’ 우해강. 그러니까 외모부터 재능까지 신이 특별히 신경 써서 어루만진 다음 세상에 내놓은 인종들.
그중에서도 해강은 지나치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잘생겨서 ‘퀸’으로 불리는 아이였다. 그런 퀸과 서글서글한 운동선수 분위기의 현기가 노상 같이 다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으니, 둘이 중학교 시절부터 절친이라는 사실이었다.
“왜. 그냥 사귀어 봐. 밀어줄게. 까탈스러운 서재필하고는 친구밖에 못 하잖아.”
“뭐라고라?”
현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상반신을 뒤로 젖혔다.
“내 생각에 퀸은 그냥 남자랑 사귀는 게 낫겠다 싶거든.”
“왜이지라?”
“생각해 봐라. 어떤 여자가 퀸을 감당하겠니. 좀비 떼처럼 달려드는 여자들 등쌀에 어디 숨은 제대로 쉬며 살겠니? 허우.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너처럼 덜떨어진 남자나 헬렐레 펠렐레 붙어 있는 게 가능한 일인 거지.”
현기가 고개를 돌려선 방금 전에 해강이 서 있던 자리를 흘깃했다.
“해강이 들으면 곡할 소리네.”
“하…… 곡은 내가 하게 생겼다.”
“왜. 물리학 안 내켜서?”
“내키고 안 내키고를 떠나서 알아들을 수나 있을까 싶다.”
“그럼 지구과학 그런 걸로는 안 되나?”
“물 건너갔다. 강서대 물리학과로 결정 나지 싶으니까. 정 내 머리로 안 될 거 같으면 중간에 집어치우고 수능을 다시 치든가, 다른 데로 편입을 하든가.”
“집어치운다니. 악바리께서 무슨 그런 말씀을. 좌우지당간 묻기도 전에 먼저 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입으로는 ‘형님!’인데 표정은 ‘이놈아!’인 현기가 잽싸게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어딘가로 문자를 다다닥 찍어 보내곤 재형의 팔을 잡았다.
“뭐냐. 대화 중에 예의 없이.”
“미안.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마지막이니까 봐준다.”
“서재형. 걱정 마. 잘될 거야.”
“서재필이랑 똑같은 소리 하네.”
“아무렴. 재필이하고 난 수어지교, 관포지교, 금란지교, 지란지교…….”
“편손끝세워찌르기로 명치에 보라색 물들이고 싶지?”
‘편손끝세워찌르기’는 태권도의 대표적인 찌르기 동작으로 명치를 목표로 한다. 손가락을 펴기 때문에 손가락 길이만큼의 거리를 공격할 수 있다. 재형은 태권도 유단자였던 것이다.
“아닙니다, 형님. 퍼뜩 가시죠, 형님. 어여 퍼뜩…….”
현기가 연신 굽신굽신거리며 재형을 치킨집으로 안내해 갔다.
졸업식 닷새 전이었다. 다군 전형 원서 접수 마지막 날 기준으로는 사흘 전이기도 했다.
*
예상 범주라는 것이 있다. 벌어질 만한 일이 있고 벌어질 리 없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다. 20년 가까이 살아오는 동안, 재형의 생활은 대체로 예상 범주 안에서 착실하게 이루어져 왔다. 서재필의 발목을 움켜쥔 상태로 세상에 나온 이후, 인큐베이터에서 한 달 반, 뒤이어 입퇴원 열한 번과 그중에 수술 다섯 번을 겪으면서, 너무나도 일찍 죽음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당장 내일 어디가 또 고장 날지 모른다는, 어쩌면 다음번엔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들에 익숙해지다 보니 웬만해선 놀라지 않게 되었고, 어지간한 것들은 다 받아들이며 살게 되었다. 죽는 것보다 큰일은 없었으므로.
그런 이유로 아주 담담하게 태권도 대회에 나가 메달 열일곱 개라는 기록도 세울 수 있었다. 긴장감 따위 전혀 없었기에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졸업식 날 아침, 아주 뜻밖의 일을 겪으면서 재형은 자신이 아직 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졸업식을 한 시간여 앞둔 교실은 난리법석이었다. 재잘재잘, 와글와글, 왁자지껄……. 일단 강당으로 가면 친구들과 오붓한 대화는 불가능했기에, 다들 끼리끼리 모여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재형은 좀처럼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물리, 물리라.’
양손에 턱을 괴고 앉아 앞으로 어찌 될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에 한참 빠져 있는데, 책상 바로 앞에 남자 교복이 나타났다. 흠칫하는 순간, 재형은 교실이 굉장히 조용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뭐지?’
자세는 그대로 유지한 채 눈동자만 슬쩍 들어 올린 재형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 퀸?’
그랬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 교복의 주인공은 팔짱을 낀 해강이었다.
‘얘가 왜 여기 있지?’
그때였다.
“서재형!”
재형은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해강이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고등학교에 들어와 처음 만난 데다 같은 반으로 엮인 적도 없었을뿐더러, 해강은 재형의 쌍둥이 오빠인 재필과도 친분이 없었다. 물론 현기가 가운데 끼어 있기는 해도, 재필과 해강은 완전 별개였다. 두 사람은 형식적으로라도 함께 어울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학교에서 ‘서재형’이라는 이름이 공개적으로 불린 일도 없었다. 특별히 무슨 상을 받은 적도 없었거니와,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태권도 대회에 나가는 걸 그만둔 관계로 방송실에 불려 가 메달을 받는 모습이 찍힌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재형은 남자아이들 입에 오르내릴 만한 여학생이 아니었다. 즉, 예쁜 여학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재형이 자신의 외모에 별다른 불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뭘 그렇게까지 놀라, 인마.”
재형은 더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친근한 말투라니. 종종 왈가닥에 왈패 소리까지 듣는 천하의 서재형이었지만, 재형은 움직일 수 없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예상 범주 밖의 일이었으므로. 뇌가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야. 졸업 축하해.”
해강이 팔짱을 풀더니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동글게 말아 재형의 이마에 일명 ‘딱밤’을 매기고는 싱글거리며 사라졌다. 전혀 아프지 않은 부드러운 딱밤을.
‘뭐야 저거.’
여자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재형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건지, 무슨 사연인지, 그러니까 너 따위에게 가당치도 않게 퀸이 왜 그러느냐는 맥락의 비슷비슷한 질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영문을 모르기는 재형 또한 다르지 않았기에 전에 없이 ‘어버어버…….’ 하는 동안 강당으로 집합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우해강 저거 미친 거 아니야? 8월 복더위를 벌써 당겨먹은 거야?’
(2화)
“사진도 못 찍고…….”
재형이 텐트에 뚫린 창문으로 하늘을 내다보며 구시렁거렸다. 카메라는커녕 핸드폰조차 챙겨 오지 않은 자신이 한심했다. 하긴, 줄넘기하려고 마당에 나왔다가 권적운이 뜬 걸 보고 놀라선 바로 서둘러 올라온 거였으니까.
순간, 검은 형체가 창문을 가렸다.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뻔했다. 재필. 재형의 이란성 쌍둥이 오빠, 서재필.
“맞는다. 몸뚱어리 치워라.”
“현기가 전화했어. 너 연락 안 된다고. 폰 좀 챙겨 다니지?”
“남이사.”
“오늘 졸업 기념으로 알타이르 마지막 치킨 파티 한다며. 현기가 전해 달라더라. 늦어서도 안 되고, 빠져서는 더 안 된다고.”
<알타이르>는 <기하고등학교>의 별자리 관측 동아리였다. ‘알타이르’란 독수리자리의 알파(α)별로 우리나라에서는 견우성이라고도 부른다. 맞다. 칠석날 까마귀 머리통 지르밟고 서서 ‘직녀’랑 끌어안고 울고 부는 그 ‘견우’ 할 때의 견우성.
어쨌거나 구름덕후 서재형이 별자리 관측 동아리에서 활동한 이유는 단순했다. 동아리 소유의 성능 좋은 망원경을 낮에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는 것. 어쩔 수 없었다. 구름을 관찰하겠다고 모이는 사람들은 찾아지지 않았으니까.
“안 가.”
“가.”
“싫어.”
“그래도 가.”
“왜.”
“바람 좀 쏘이라고.”
“집에도 바람 불어.”
“서재형.”
“뭐! 왜!”
“너답지 않게 괜히 처져 있지 마.”
“잘난 네가 뭘 알아.”
재필이 텐트의 지퍼를 열어젖히고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3년 내 그 비싼 망원경 실컷 써 놓고 이러면 안 되지. 유종의 미라는 거 몰라? 무엇보다도 서재형이 안 가면 내 친구 송현기가 혼자 힘들어져. 후배들한테 분명히 당할 거라고. 그러니까 가. 어?”
재형이 입술을 있는 대로 내밀고 비쭉이더니, 곧 엉덩이를 조금씩 밀면서 텐트 밖으로 나왔다.
“아, 송현기. 덩칫값 못 하고 찌질해 가지고는…….”
“찌질한 게 아니고 순한 거야. 거기다 파일럿 예약한 잘난 놈이고. 이젠 보기 힘들어질 텐데 하던 대로 너무 막 굴리지 마라.”
재형은 더 이상 가타부타하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재형을 따라 내려가며 재필은 생각했다.
‘서씨 집안의 최고 악바리가 맘은 약해 빠져서. 어차피 잘할 거면서.’
*
‘아, 귀찮아. 치킨이 대수야.’
재형은 계속해서 심난한 상태였다. 수시 전형으로 일찌거니 대학이 정해진 재필과 달리 재형은 원서를 내는 족족 모두 떨어졌고, 정시 전형으로도 원하는 학교, 원하는 과에 들어가기에는 애매모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추가 접수까지 가기 전에 진로를 다시 잡아야 했다.
‘물리, 물리라.’
그랬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물리학과였다. 기상학이건 천문학이건, 하다못해 중간에 포기하고 약대에 편입한다고 가정해도 물리학은 잡고 있어야 하는 때문이었다.
‘아, 물리만은 재미없는데. 자신도 없고.’
신경이 꽤 긁혔다. 구름만 보고 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속상했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사람은 좋겠다.’
그때 누군가가 재형의 어깨를 확, 하고 잡아챘다. 현기였다.
“오, 서재형. 나의 보디가드! 서재필 닦달한 보람이 있네.”
“맞는다. 닭발 치워라.”
현기의 손을 쳐 내면서 고개를 돌리는데, 정작 현기는 재형이 아닌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현기의 시선을 좇아가니 멀찍이 해강이 서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붙어 있네.’
해강은 현기와 무슨 수신호인가를 주고받고는 그대로 사라졌고, 현기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함박 웃으면서 ‘다시금’ 재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재형이 ‘다시금’ 쳐 낸 것은 물론이었다.
“사귀니?”
“뭐?”
“송현기, 너님요. 퀸하고 사귀시냐고요.”
현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양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렸다.
“어머어머, 형님. 멀쩡한 남정네 혼삿길 막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해강은 <기하고등학교>의 4대 천왕 중 하나였다. 전형적인 마이웨이 스타일의 싹수머리 없는 ‘박사’ 서재필, 늘 혼자 움직이는 대체 불가 짱 ‘대장’ 민주한, 피아노 치는 우아한 뇌섹녀 ‘강신’ 강우연, 그리고 매너 좋기로 유명한 영재 초식남 ‘퀸’ 우해강. 그러니까 외모부터 재능까지 신이 특별히 신경 써서 어루만진 다음 세상에 내놓은 인종들.
그중에서도 해강은 지나치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잘생겨서 ‘퀸’으로 불리는 아이였다. 그런 퀸과 서글서글한 운동선수 분위기의 현기가 노상 같이 다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으니, 둘이 중학교 시절부터 절친이라는 사실이었다.
“왜. 그냥 사귀어 봐. 밀어줄게. 까탈스러운 서재필하고는 친구밖에 못 하잖아.”
“뭐라고라?”
현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상반신을 뒤로 젖혔다.
“내 생각에 퀸은 그냥 남자랑 사귀는 게 낫겠다 싶거든.”
“왜이지라?”
“생각해 봐라. 어떤 여자가 퀸을 감당하겠니. 좀비 떼처럼 달려드는 여자들 등쌀에 어디 숨은 제대로 쉬며 살겠니? 허우.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너처럼 덜떨어진 남자나 헬렐레 펠렐레 붙어 있는 게 가능한 일인 거지.”
현기가 고개를 돌려선 방금 전에 해강이 서 있던 자리를 흘깃했다.
“해강이 들으면 곡할 소리네.”
“하…… 곡은 내가 하게 생겼다.”
“왜. 물리학 안 내켜서?”
“내키고 안 내키고를 떠나서 알아들을 수나 있을까 싶다.”
“그럼 지구과학 그런 걸로는 안 되나?”
“물 건너갔다. 강서대 물리학과로 결정 나지 싶으니까. 정 내 머리로 안 될 거 같으면 중간에 집어치우고 수능을 다시 치든가, 다른 데로 편입을 하든가.”
“집어치운다니. 악바리께서 무슨 그런 말씀을. 좌우지당간 묻기도 전에 먼저 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입으로는 ‘형님!’인데 표정은 ‘이놈아!’인 현기가 잽싸게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어딘가로 문자를 다다닥 찍어 보내곤 재형의 팔을 잡았다.
“뭐냐. 대화 중에 예의 없이.”
“미안.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마지막이니까 봐준다.”
“서재형. 걱정 마. 잘될 거야.”
“서재필이랑 똑같은 소리 하네.”
“아무렴. 재필이하고 난 수어지교, 관포지교, 금란지교, 지란지교…….”
“편손끝세워찌르기로 명치에 보라색 물들이고 싶지?”
‘편손끝세워찌르기’는 태권도의 대표적인 찌르기 동작으로 명치를 목표로 한다. 손가락을 펴기 때문에 손가락 길이만큼의 거리를 공격할 수 있다. 재형은 태권도 유단자였던 것이다.
“아닙니다, 형님. 퍼뜩 가시죠, 형님. 어여 퍼뜩…….”
현기가 연신 굽신굽신거리며 재형을 치킨집으로 안내해 갔다.
졸업식 닷새 전이었다. 다군 전형 원서 접수 마지막 날 기준으로는 사흘 전이기도 했다.
*
예상 범주라는 것이 있다. 벌어질 만한 일이 있고 벌어질 리 없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다. 20년 가까이 살아오는 동안, 재형의 생활은 대체로 예상 범주 안에서 착실하게 이루어져 왔다. 서재필의 발목을 움켜쥔 상태로 세상에 나온 이후, 인큐베이터에서 한 달 반, 뒤이어 입퇴원 열한 번과 그중에 수술 다섯 번을 겪으면서, 너무나도 일찍 죽음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당장 내일 어디가 또 고장 날지 모른다는, 어쩌면 다음번엔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들에 익숙해지다 보니 웬만해선 놀라지 않게 되었고, 어지간한 것들은 다 받아들이며 살게 되었다. 죽는 것보다 큰일은 없었으므로.
그런 이유로 아주 담담하게 태권도 대회에 나가 메달 열일곱 개라는 기록도 세울 수 있었다. 긴장감 따위 전혀 없었기에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졸업식 날 아침, 아주 뜻밖의 일을 겪으면서 재형은 자신이 아직 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졸업식을 한 시간여 앞둔 교실은 난리법석이었다. 재잘재잘, 와글와글, 왁자지껄……. 일단 강당으로 가면 친구들과 오붓한 대화는 불가능했기에, 다들 끼리끼리 모여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재형은 좀처럼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물리, 물리라.’
양손에 턱을 괴고 앉아 앞으로 어찌 될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에 한참 빠져 있는데, 책상 바로 앞에 남자 교복이 나타났다. 흠칫하는 순간, 재형은 교실이 굉장히 조용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뭐지?’
자세는 그대로 유지한 채 눈동자만 슬쩍 들어 올린 재형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 퀸?’
그랬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 교복의 주인공은 팔짱을 낀 해강이었다.
‘얘가 왜 여기 있지?’
그때였다.
“서재형!”
재형은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해강이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고등학교에 들어와 처음 만난 데다 같은 반으로 엮인 적도 없었을뿐더러, 해강은 재형의 쌍둥이 오빠인 재필과도 친분이 없었다. 물론 현기가 가운데 끼어 있기는 해도, 재필과 해강은 완전 별개였다. 두 사람은 형식적으로라도 함께 어울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학교에서 ‘서재형’이라는 이름이 공개적으로 불린 일도 없었다. 특별히 무슨 상을 받은 적도 없었거니와,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태권도 대회에 나가는 걸 그만둔 관계로 방송실에 불려 가 메달을 받는 모습이 찍힌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재형은 남자아이들 입에 오르내릴 만한 여학생이 아니었다. 즉, 예쁜 여학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재형이 자신의 외모에 별다른 불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뭘 그렇게까지 놀라, 인마.”
재형은 더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친근한 말투라니. 종종 왈가닥에 왈패 소리까지 듣는 천하의 서재형이었지만, 재형은 움직일 수 없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예상 범주 밖의 일이었으므로. 뇌가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야. 졸업 축하해.”
해강이 팔짱을 풀더니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동글게 말아 재형의 이마에 일명 ‘딱밤’을 매기고는 싱글거리며 사라졌다. 전혀 아프지 않은 부드러운 딱밤을.
‘뭐야 저거.’
여자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재형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건지, 무슨 사연인지, 그러니까 너 따위에게 가당치도 않게 퀸이 왜 그러느냐는 맥락의 비슷비슷한 질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영문을 모르기는 재형 또한 다르지 않았기에 전에 없이 ‘어버어버…….’ 하는 동안 강당으로 집합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우해강 저거 미친 거 아니야? 8월 복더위를 벌써 당겨먹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