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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턴후 직진입니다
(1화)
일러두기
1.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허구입니다. 그 어떤 역사적 사실, 인물, 장소와도 관련이 없음을 밝혀 두는 바입니다.
2. 이 이야기는 『각성』의 공간과 인물을 기본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각성』의 스핀오프라고 이르기에는 보다 더 독립적이라는 점 또한 밝혀 두는 바입니다.
『애인이 미남입니다』에 이은
「기하고등학교 4대 천왕」 그 두 번째 이야기
<기하고등학교>의 4대 천왕이라 하면, 다음과 같다.
전형적인 마이웨이 스타일의 싹수머리 없는 ‘박사’ 서재필, 늘 혼자 움직이는 대체 불가 짱 ‘대장’ 민주한, 피아노 치는 우아한 뇌섹녀 ‘강신’ 강우연, 그리고 매너 좋기로 유명한 영재 초식남 ‘퀸’ 우해강. 그러니까 외모부터 재능까지 신이 특별히 신경 써서 어루만진 다음 세상에 내놓은 인종들. 하지만 사랑 앞에서만큼은 그들도 하늘의 덕을 누릴 수 없었으니, 다시 말해서 순전히 제 할 노릇이었던 것이었던 거시다.
프롤로그
압록강 변의 송주를 근거로 한 송주 민씨는 고려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그러니까 고려시대에 아주 높은 벼슬을 지낸 민숭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얼마나 대단한 벼슬이었는가 하면, 무려 총 29계로 이루어진 관제 중에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특진(特進)’에 이은 제3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열 3위라니, 그만큼 송주 민씨는 뜨르르한 집안이었다.
그런데 이 송주 민씨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던 무렵, 집안싸움에 휘말려 들었다. 형제지간인 이혁공 격과 문찬공 홍의 뜻이 극명하게 갈린 것이다.
“완전히 들어엎어야 함세. 썩을 대로 썩어 빠진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워 새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야 함세. 오직 혁명만이 답이라 이것이네. 우리 시조께서도 개국 1등 공신이셨네. 그 피가 우리에게도 흐르고 있네.”
“그래 봐야 한패거리인 것을. 다만 권력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 가는 것일 뿐. 고치고 바꾸는 힘이 백성에게 있거늘, 고작 나라 이름을 바꾸고 임금을 갈아 버린다 하여 될 일은 아닌 것을. 흘려야 할 피가 아까울 따름인 것을.”
이혁공은 문찬공을 향해 이상에 젖어 세상의 이치와 순리를 읽을 줄 모른다며 조롱했고, 문찬공은 이혁공을 향해 야망에 눈이 멀어 충심과 합리를 잊었다며 비난했다. 설득은 통하지 않았고, 타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로써 이혁공은 조선의 공신으로, 문찬공은 고려의 충신으로 기록에 남았다.
이후 두 집안은 한 지붕 아래 머리를 같이 두고는 절대 살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게다가 문찬공의 집안이 새 정부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할 때, 이혁공이 전혀 도와주지 않고 나 몰라라 함으로써 두 집안은 급기야 원수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런데 안 그래도 냉기가 풀풀 오고 가던 두 집안의 관계가 더 심각해지는 상황이 조선 후기에 일어나고야 말았다. 한겨울 시베리아 기단에서 빚어진 한랭 건조한 북서풍이랄까, 늦은 봄 오호츠크해 기단에서 비롯된 한랭 습윤한 북동풍이랄까, 아무튼 그런 차디찬 바람 말이다.
바로 산송(山訟)이었다. 조상의 묘를 두고 벌이는 소송, 산송.
나라가 바뀌는 과정에서 은둔에 들어갔다가 실종돼, 끝내 흔적조차 찾지 못했던 문찬공의 묘가 난데없이 송주에서 발견된 것이다. 압록강 변의 송주가 아니라 낙동강 변의 송주였다. 문제는 낙동강 변의 송주가 이혁공파의 집성촌이라는 사실이었다. 이혁공 집안이 조선 개국 이후 통째로 이동해 와 자리를 잡은 때문이었다. 게다가 문찬공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던 바, 송주 민씨라 하면 으레 이혁공파가 먼저 언급되는 형편이기도 했다.
어쨌든 후손들로서는 난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문찬공이 잠든 곳이 송주에서도 하필 이혁공 장남의 가족묘 자리였던 것이다. 묘석도 없고 표석도 없어, 그저 조상 중 한 사람이겠거니 하고 제를 잊지 않았던 이혁공 후손들은 자신들이 모셔 온 묘가 문찬공의 것임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큰 홍수가 나지 않았다면, 그 결에 토사가 이리저리 쓸려 내려가지 않았다면, 그 과정에서 묘가 훼손되지 않았다면, 그 틈으로 묘 주인이 누구인지를 적어 둔 작은 석판이 비어져 나오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사실이었다.
이혁공 후손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파내 가라, 그것이었다.
문찬공의 후손들은 곤혹스러웠다. 문찬공이 왜 거기에 누워 있는지 정확한 연유도 모르는 마당에, 묘를 함부로 옮긴다는 것은 자손 된 도리로 불효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볼 때, 누운 순서를 따지자면 문찬공이 먼저가 아니겠느냐는 논리였다. 그러니 못 파 간다, 그것이었다.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그들이 조정에 대고 번차례로 올린 상소가 얼마나 많았던지, 임금이었던 이반이 송주의 ‘소나무 송(松)’을 ‘다툴 송(訟)’으로 바꿔 버리겠다, 민격과 민홍 두 선조의 이름을 기록이란 기록에서 싹 다 없애 버리겠다, 두루두루 엄포도 놓았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진절머리를 내며 일렀다.
“입, 입, 입. 시끄럽고, 시끄럽고, 또 시끄럽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으라 하라.”
소송은 이반이 죽고 그의 아들 이경이 임금이 되어 화해를 도모했을 때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집안싸움을 조정에까지 끌고 들어와 분란을 일으킨다 하여, 결국 양쪽에서 고령의 최고 어른들이 유배를 가기도 했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소송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은 어이없이 찾아왔다. 그로부터 약 180여 년이 흐른 1970년대에 송주댐 건설이 시작되면서 송주의 7할이 물에 잠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묘지가 자리한 땅이 바로 그 7할에 들어 있었다. 보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쪽이고 저쪽이고 간에 조상을 물에 묻어 버릴 작정이 아니라면 다 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통에도 굳건했던 묘지로서는 허무한 결말이었다.
길일을 따지다 보니 공교롭게도 하필 같은 날 묘를 옮기게 된 이혁공파의 대표 민효엽과 문찬공파의 대표 민유학은 이쪽과 저쪽 끝에 서서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문중의 최고 어른을 모시고 나온 행동 대장 입장에서,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은 금물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명심해야 할 것은 단 하나였다. ‘천지가 개벽을 해도 서로 간에 인연이 닿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라는, 6백 년도 훨씬 더 전 조상님의 유지, 바로 그것이었다.
◆이혁공파
민효엽+정갑연→ 1남 1녀
⇒ 민학철+송맑음 → 정금ㆍ정호(11살 차이)
◆문찬공파
민유학+최숙분 → 3남 2녀
⇒ 민찬기+①한주은 → 주담ㆍ주한(11살 차이),
민찬기+②공태란 → 3남 1녀
1. 신호등 앞-1
배롱산 앞자락 언덕배기에 자리한 <장자빌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1층 북카페 <프롤로그>의 나무 간판이었다. 자작나무 판에 한글과 알파벳, 두 가지 모양의 글씨를 조각칼 삐치는 대로 자연스럽게 새겼는데, 조경사 고춘호 실장의 솜씨였다.
그리고 그 나무 간판을 틈틈이 한 번씩 물끄러미 바라보다 들어가는 <프롤로그>의 주인은 민주한이었다. 맞다. <기하고등학교> 4대 천왕 중의 하나로 ‘늘 혼자 움직이는 대체 불가 짱’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대장’, 바로 그였다. 무려 10년도 전의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주한은 <장자빌딩>의 세입자이기도 했다. 5년 전, <장자빌딩> 301호가 나왔다는 소리에 재빨리 계약에 들어가서는 집이 비자마자 신속하게 짐을 옮겨 온 때문이었다. 누나 주담 집에서의 더부살이로부터 해방된 날이었다. 전역하고 나서 주담의 일을 도와주던 와중에 얼결에 반강제로 시작한 동거였는데, 불편하기가 내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담은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주담은 한동안 주한을 놔주지 않았고, 어머니 주은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안 돼. 사건 사고 만들지 마.’
물론 독립했다고 해서 주담의 레이더망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북카페 <프롤로그>가 주담이 운영하는 독립 출판사 <프롤로그>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때문이었다. 공간을 분리해 주는 장치도 고작 불투명한 강화 유리 벽이 전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북카페가 본디 주담의 소유였던 것이다. 출판사와 함께 시작했다가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후회하기 시작했고, 바리스타를 두고 근근이 이어 오던 중 주한에게 넘긴 것이었다. 물론 거저는 아니었다. 돈 계산은 정확히 이루어졌다.
어쨌든 이사 이후로 주한의 오전 시간이 훨씬 여유로워진 건 사실이었다. 주한은 카페의 문을 꽤 일찍 열었다. 근처에 여대가 있는 관계로 올망졸망한 원룸 건물이 잔뜩 들어서 있는 지리적인 여건상, 이른 아침에 커피를 원하는 손님이 제법 많다는 시장 조사 결과에 따라서였다.
그러다 보니 이사 전엔 늘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 주담은 매형의 출근과 조카들의 등교까지 마무리한 다음 10시까지 나와도 업무에 지장이 없었지만, 7시부터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주한은 늦어도 6시 반까지는 나와야 한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5시에는 일어나 준비해야 했다.
무뚝뚝한 성격에 손놀림마저 섬세하지 못해 근심 반 염려 반으로 시작한 생활이었지만, 그럭저럭 6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커피머신과는 혼연일체의 경지에 이르렀고, 나이도 어느덧 삼십 줄에 접어들었다. 주담이 간혹 지나가는 말로 결혼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결혼은커녕 강희와의 연애는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1화)
일러두기
1.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허구입니다. 그 어떤 역사적 사실, 인물, 장소와도 관련이 없음을 밝혀 두는 바입니다.
2. 이 이야기는 『각성』의 공간과 인물을 기본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각성』의 스핀오프라고 이르기에는 보다 더 독립적이라는 점 또한 밝혀 두는 바입니다.
『애인이 미남입니다』에 이은
「기하고등학교 4대 천왕」 그 두 번째 이야기
<기하고등학교>의 4대 천왕이라 하면, 다음과 같다.
전형적인 마이웨이 스타일의 싹수머리 없는 ‘박사’ 서재필, 늘 혼자 움직이는 대체 불가 짱 ‘대장’ 민주한, 피아노 치는 우아한 뇌섹녀 ‘강신’ 강우연, 그리고 매너 좋기로 유명한 영재 초식남 ‘퀸’ 우해강. 그러니까 외모부터 재능까지 신이 특별히 신경 써서 어루만진 다음 세상에 내놓은 인종들. 하지만 사랑 앞에서만큼은 그들도 하늘의 덕을 누릴 수 없었으니, 다시 말해서 순전히 제 할 노릇이었던 것이었던 거시다.
프롤로그
압록강 변의 송주를 근거로 한 송주 민씨는 고려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그러니까 고려시대에 아주 높은 벼슬을 지낸 민숭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얼마나 대단한 벼슬이었는가 하면, 무려 총 29계로 이루어진 관제 중에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특진(特進)’에 이은 제3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열 3위라니, 그만큼 송주 민씨는 뜨르르한 집안이었다.
그런데 이 송주 민씨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던 무렵, 집안싸움에 휘말려 들었다. 형제지간인 이혁공 격과 문찬공 홍의 뜻이 극명하게 갈린 것이다.
“완전히 들어엎어야 함세. 썩을 대로 썩어 빠진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워 새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야 함세. 오직 혁명만이 답이라 이것이네. 우리 시조께서도 개국 1등 공신이셨네. 그 피가 우리에게도 흐르고 있네.”
“그래 봐야 한패거리인 것을. 다만 권력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 가는 것일 뿐. 고치고 바꾸는 힘이 백성에게 있거늘, 고작 나라 이름을 바꾸고 임금을 갈아 버린다 하여 될 일은 아닌 것을. 흘려야 할 피가 아까울 따름인 것을.”
이혁공은 문찬공을 향해 이상에 젖어 세상의 이치와 순리를 읽을 줄 모른다며 조롱했고, 문찬공은 이혁공을 향해 야망에 눈이 멀어 충심과 합리를 잊었다며 비난했다. 설득은 통하지 않았고, 타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로써 이혁공은 조선의 공신으로, 문찬공은 고려의 충신으로 기록에 남았다.
이후 두 집안은 한 지붕 아래 머리를 같이 두고는 절대 살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게다가 문찬공의 집안이 새 정부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할 때, 이혁공이 전혀 도와주지 않고 나 몰라라 함으로써 두 집안은 급기야 원수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런데 안 그래도 냉기가 풀풀 오고 가던 두 집안의 관계가 더 심각해지는 상황이 조선 후기에 일어나고야 말았다. 한겨울 시베리아 기단에서 빚어진 한랭 건조한 북서풍이랄까, 늦은 봄 오호츠크해 기단에서 비롯된 한랭 습윤한 북동풍이랄까, 아무튼 그런 차디찬 바람 말이다.
바로 산송(山訟)이었다. 조상의 묘를 두고 벌이는 소송, 산송.
나라가 바뀌는 과정에서 은둔에 들어갔다가 실종돼, 끝내 흔적조차 찾지 못했던 문찬공의 묘가 난데없이 송주에서 발견된 것이다. 압록강 변의 송주가 아니라 낙동강 변의 송주였다. 문제는 낙동강 변의 송주가 이혁공파의 집성촌이라는 사실이었다. 이혁공 집안이 조선 개국 이후 통째로 이동해 와 자리를 잡은 때문이었다. 게다가 문찬공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던 바, 송주 민씨라 하면 으레 이혁공파가 먼저 언급되는 형편이기도 했다.
어쨌든 후손들로서는 난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문찬공이 잠든 곳이 송주에서도 하필 이혁공 장남의 가족묘 자리였던 것이다. 묘석도 없고 표석도 없어, 그저 조상 중 한 사람이겠거니 하고 제를 잊지 않았던 이혁공 후손들은 자신들이 모셔 온 묘가 문찬공의 것임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큰 홍수가 나지 않았다면, 그 결에 토사가 이리저리 쓸려 내려가지 않았다면, 그 과정에서 묘가 훼손되지 않았다면, 그 틈으로 묘 주인이 누구인지를 적어 둔 작은 석판이 비어져 나오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사실이었다.
이혁공 후손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파내 가라, 그것이었다.
문찬공의 후손들은 곤혹스러웠다. 문찬공이 왜 거기에 누워 있는지 정확한 연유도 모르는 마당에, 묘를 함부로 옮긴다는 것은 자손 된 도리로 불효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볼 때, 누운 순서를 따지자면 문찬공이 먼저가 아니겠느냐는 논리였다. 그러니 못 파 간다, 그것이었다.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그들이 조정에 대고 번차례로 올린 상소가 얼마나 많았던지, 임금이었던 이반이 송주의 ‘소나무 송(松)’을 ‘다툴 송(訟)’으로 바꿔 버리겠다, 민격과 민홍 두 선조의 이름을 기록이란 기록에서 싹 다 없애 버리겠다, 두루두루 엄포도 놓았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진절머리를 내며 일렀다.
“입, 입, 입. 시끄럽고, 시끄럽고, 또 시끄럽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으라 하라.”
소송은 이반이 죽고 그의 아들 이경이 임금이 되어 화해를 도모했을 때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집안싸움을 조정에까지 끌고 들어와 분란을 일으킨다 하여, 결국 양쪽에서 고령의 최고 어른들이 유배를 가기도 했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소송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은 어이없이 찾아왔다. 그로부터 약 180여 년이 흐른 1970년대에 송주댐 건설이 시작되면서 송주의 7할이 물에 잠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묘지가 자리한 땅이 바로 그 7할에 들어 있었다. 보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쪽이고 저쪽이고 간에 조상을 물에 묻어 버릴 작정이 아니라면 다 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통에도 굳건했던 묘지로서는 허무한 결말이었다.
길일을 따지다 보니 공교롭게도 하필 같은 날 묘를 옮기게 된 이혁공파의 대표 민효엽과 문찬공파의 대표 민유학은 이쪽과 저쪽 끝에 서서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문중의 최고 어른을 모시고 나온 행동 대장 입장에서,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은 금물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명심해야 할 것은 단 하나였다. ‘천지가 개벽을 해도 서로 간에 인연이 닿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라는, 6백 년도 훨씬 더 전 조상님의 유지, 바로 그것이었다.
◆이혁공파
민효엽+정갑연→ 1남 1녀
⇒ 민학철+송맑음 → 정금ㆍ정호(11살 차이)
◆문찬공파
민유학+최숙분 → 3남 2녀
⇒ 민찬기+①한주은 → 주담ㆍ주한(11살 차이),
민찬기+②공태란 → 3남 1녀
1. 신호등 앞-1
배롱산 앞자락 언덕배기에 자리한 <장자빌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1층 북카페 <프롤로그>의 나무 간판이었다. 자작나무 판에 한글과 알파벳, 두 가지 모양의 글씨를 조각칼 삐치는 대로 자연스럽게 새겼는데, 조경사 고춘호 실장의 솜씨였다.
그리고 그 나무 간판을 틈틈이 한 번씩 물끄러미 바라보다 들어가는 <프롤로그>의 주인은 민주한이었다. 맞다. <기하고등학교> 4대 천왕 중의 하나로 ‘늘 혼자 움직이는 대체 불가 짱’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대장’, 바로 그였다. 무려 10년도 전의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주한은 <장자빌딩>의 세입자이기도 했다. 5년 전, <장자빌딩> 301호가 나왔다는 소리에 재빨리 계약에 들어가서는 집이 비자마자 신속하게 짐을 옮겨 온 때문이었다. 누나 주담 집에서의 더부살이로부터 해방된 날이었다. 전역하고 나서 주담의 일을 도와주던 와중에 얼결에 반강제로 시작한 동거였는데, 불편하기가 내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담은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주담은 한동안 주한을 놔주지 않았고, 어머니 주은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안 돼. 사건 사고 만들지 마.’
물론 독립했다고 해서 주담의 레이더망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북카페 <프롤로그>가 주담이 운영하는 독립 출판사 <프롤로그>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때문이었다. 공간을 분리해 주는 장치도 고작 불투명한 강화 유리 벽이 전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북카페가 본디 주담의 소유였던 것이다. 출판사와 함께 시작했다가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후회하기 시작했고, 바리스타를 두고 근근이 이어 오던 중 주한에게 넘긴 것이었다. 물론 거저는 아니었다. 돈 계산은 정확히 이루어졌다.
어쨌든 이사 이후로 주한의 오전 시간이 훨씬 여유로워진 건 사실이었다. 주한은 카페의 문을 꽤 일찍 열었다. 근처에 여대가 있는 관계로 올망졸망한 원룸 건물이 잔뜩 들어서 있는 지리적인 여건상, 이른 아침에 커피를 원하는 손님이 제법 많다는 시장 조사 결과에 따라서였다.
그러다 보니 이사 전엔 늘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 주담은 매형의 출근과 조카들의 등교까지 마무리한 다음 10시까지 나와도 업무에 지장이 없었지만, 7시부터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주한은 늦어도 6시 반까지는 나와야 한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5시에는 일어나 준비해야 했다.
무뚝뚝한 성격에 손놀림마저 섬세하지 못해 근심 반 염려 반으로 시작한 생활이었지만, 그럭저럭 6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커피머신과는 혼연일체의 경지에 이르렀고, 나이도 어느덧 삼십 줄에 접어들었다. 주담이 간혹 지나가는 말로 결혼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결혼은커녕 강희와의 연애는 지지부진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