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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턴후 직진입니다
(2화)
“저 왔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한바탕 손님들이 지나가고 유일한 직원인 기범이 예의 상큼한 미소로 출근을 했다. 주한은 한숨 돌리는 차원에서 여느 때처럼 동네를 한 바퀴 돌기 위해 카페를 나섰다.
그런데 막 한 발짝을 떼자마자 핸드폰이 진동했다. 승욱이었다.
― 산책 나갈 참이었지?
“귀신이다 아주. 아침 댓바람부터 웬일인데?”
― 이따가 갑돌이 만나기로 했는데, 껴라.
“이번엔 또 뭐가 궁금해서 만나는 건데?”
― 요새 우리 집 보스가 좀 이상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보건 교사한테 어지간히도 한다, 너도.”
― 갑돌이가 그냥 보건 교사냐? 갑돌이 어느 학교 나왔는지 몰라? 웬만한 인턴보다 아는 게 더 많을걸?
“임상이 부족한데 알아 봐야 얼마나 안다고…… 다 이론이지. 그냥 병원을 가라, 괜히 일 키우지 말고.”
― 그래도 일단 갑돌이 의견 먼저 들어 보고. 좌우당간 우좌지간, 그래서 뭐, 낄 거야 말 거야?
“낀다.”
승욱이 그럴 줄 알았다며 뒷말을 이어 가는데, 갑자기 귓속에서 위옹위옹…… 하는 소리가 생기더니 조금씩 데시벨을 올려 갔다. 들끓는 것이 마치 한여름 매미 떼 소리 같아서, 주한은 자신도 모르게 검지로 한쪽 귓구멍을 막아 버렸다. 승욱이 하는 말들이 다른 세계에서 던져 온 찢어진 메모 같았다.
*
<해부루시절>은 <기하고등학교> 고적 탐구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학교에서 아이들 웃기는 걸로는 최고인 역사과 남태문 선생이 지었는데, ‘그런 건 해부루 시절에나 있던 일이고…….’라는 본인 입버릇에서 비롯된 별명이었다.
‘해부루(解夫婁)’가 누구인가. 고대 부여의 전설적인 왕 아니던가. 그럼 그 시절이라 하면, 도대체 구체적으로 언제를 가리키는 것이란 말인가. 기원전? 기원후? 어쨌거나 주한과 승욱이 바로 그 <해부루시절>의 부원이었다. 당연히 배구반에 들 줄 알았던 주한이 <해부루시절>을 선택하자, 승욱이 미친 듯이 환호하며 따라갔다는 속사정이 둘 사이에 있었다.
여기서 승욱, 그러니까 김승욱은 ‘대장’ 민주한과 유일하게 말을 편히 트고 지내는 아이였다. 옛 성당 친구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는데, 둘 다 성당에 발을 끊은 지 꽤 되어서 ‘옛’이었다.
실제로 주한은 나름 엄격한 가풍에 반항 좀 해 보겠다는 의미에서 열심히 성당을 드나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반항으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데다, 심지어 노발대발할 줄 알았던 할아버지 유학이 누나 주담을 통해 전해 온 말은 의외이기까지 했다.
‘천주학도 익혀 둘 만한 학문이다.’
맥이 풀렸다. 그래서 그만두어 버렸다.
주한이 성당에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보스, 그러니까 엄마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승욱은 주한이 더 이상 성당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따라서 그만둔 경우였다. 그것이 승욱이 주한을 쫓아 무언가를 저지른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 일로 보스가 승욱을 쥐 잡듯 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욱은 다시는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늘 혼자 움직이는 대체 불가 짱’이라면서 승욱은 무슨 존재인가 싶겠지만, 혼자 움직인다는 건 주한이 패거리를 달고 다니지 않는다는 뜻이지, 모든 일에서 한 마리 고독한 늑대로 살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무튼, 두 사람이 고2가 되어 <해부루시절>의 신입 부원을 맞이하던 날이었다. 앞에 나와 차례로 인사하는 후배들 중에 유독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귀가 시원하게 드러난 짧은 상고머리에 바지 교복을 입고 있어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는데, 암만 봐도 보면 볼수록 여자 같았던 것이다.
승욱이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그 아이에게 집중했다.
“저는 민정금이지 말입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쿡쿡…….’과 ‘킥킥…….’이 터져 나왔다.
승욱이 한 소리 했다.
“너, 잘생긴 여자냐, 예쁘게 생긴 남자냐?”
정금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보시다시피 예쁘게 생긴 여자지 말입니다.”
그러자 이번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커다란 웃음소리들이 교실을 채웠다. 웃음 많은 승욱이 뒤로 넘어갔음은 물론이었다.
“뭐야 저거, 꺼억꺼억…… 아, 뻔뻔해. 꺼억꺼억…… 예쁜 게 뭔지를, 꺼억꺼억…… 모르는 거지, 꺼억꺼억…….”
잠시 후 커다란 웃음을 여전히 입에 문 채로 승욱이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근데, 너. 키가 몇이냐?”
“168이지 말입니다.”
“예스! 난 반올림해서 170. 아이 윈!”
하지만 주한은 다른 이유에서 정금에게 시선을 꽂았고, 모임이 끝나고 흩어지는 무리들 틈바구니에서 정금만 따로 불러냈다.
“민정금이라고?”
“예, 선배님.”
“어디 민씨지?”
“송주 민씨입니다.”
정금이 차렷, 자세로 서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대답했다.
“흠…… 더 자세히.”
“송주 민씨 이혁공파 32대손입니다.”
“하아…….”
“혹시…….”
“그래. 나는 송주 민씨 문찬공파 27대손이다.”
주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금이 슬그머니 오른쪽 다리를 뒤로 빼고 주먹을 내밀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저 맞고만 있지는 않겠습니다.”
“야, 이 녀석아. 내가 팥알만 한 너 때려서 뭐 하게. 우리 둘이 치고받으면 몇백 년 묵은 원한이 눈 녹듯 사라지기라도 한대?”
“아닙니다.”
“그럼, 차렷!”
정금의 자세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서로 알아서 조용히 살자. 집에 가서는 아무 말 말고.”
“예, 선배님.”
옆에 있던 승욱이 물었다.
“뭔 소리야?”
주한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집안끼리 원수거든.”
“내 귀 양쪽 다 2.0이야. 똑똑히 들었는데 뭐래? 아까 송 뭐였더라? 암튼 같은 민씨라며?”
“그런 게 있다.”
주한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호기심이 폭발한 승욱이 정금을 향해 검지를 내밀었다.
“민정금. 여기 선배님 입이 힘드시단다. 그러니까 네가 말해.”
“예. 여기 덩치 큰 선배님이랑 저랑 같은 송주 민씨로 엄밀히 말하자면 한집안 맞지 말입니다.”
자신 앞에선 딱딱하게 ‘습니다’ 하더니 승욱에겐 다시 말랑말랑한 ‘말입니다’였다. 자신이 정금을 긴장시켰나 싶어 주한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옛날 옛적에 저희 이혁공파 조상님들과 여기 덩치 큰 선배님의 문찬공파 조상님들 간에 큰 다툼이 벌어지는 바람에 지금까지 거의 원수로 지내고 있지 말입니다.”
“허우, 대박. 왜 싸웠는데?”
“산송 때문이지 말입니다.”
“산송? 그게 뭔데?”
“묏자리 문제로 소송을 주고받는 거지 말입니다.”
“묏자리? 무덤 쓰는 거?”
“그렇지 말입니다.”
“그게 그럴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
“예. 정말 그렇지 말입니다.”
승욱이 허우, 하고 받은 충격을 나름대로 희석시키고 있는 동안, 꼼지락거리는 정금의 발가락 끝에 시선을 두고 묵묵히 듣고만 있던 주한이 고개를 들어 다시금 정금에게 시선을 꽂았다.
“근데 너, 혹시 군인 집안?”
“예, 그렇지 말입니다.”
“높으셔?”
“육군○○○여단 부대장 민학철 대령이 제 부친 되시지 말입니다.”
“높으시네. 다른 뜻은 없고, 건너 건너 들은 것 같아서 물어봤다.”
승욱이 끼어들었다.
“민정금. 그럼 너 혹시 아버지 대령님한테 맞아 봤냐?”
“저희 부친께선 폭력을 싫어하시지 말입니다.”
주한이 승욱을 툭, 쳤다.
“갑자기 그 소리가 왜 나와?”
“전에 송현기가 그러더라고. 집에 갔는데 아버지가 정복 차림으로 정좌하고 계시면, 그날은 맞는 날이라고. 그 자식 아버지가 전투기 모는 공군 장교 아니냐. 허우…… 정복에 정좌, 가오 쩔지 않냐? 그렇지. 참교육은 그렇게 하는 거지. 무르팍 나온 추리닝 바람으로 아구창 날리는 건 참교육이 아니지.”
승욱이 씨익, 웃으며 주한과 정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좌우당간 우좌지간, 둘이 동성동본에 원수지간이라 이거지. 완전 로미오와 줄리엣인데? 아니지, 걔넨 동성동본이 아니지. 오, 나 지금 굿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앞으로 이렇게 하자.”
주한은 평소의 과묵한 그답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냥 있었지만, 호기심이 받친 정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승욱이 웃음을 빼물었다. 정금이 몹시 귀여웠던 것이다.
“너네 둘. 갑돌이와 갑순이 하자.”
주한이 픽, 정금은 헉, 했다.
“민정금. 앞으로 넌 갑돌이다. 갑순이는 당연히 여기 민주한. 난 갑돌이보다 갑순이가 더 좋으니까, 좋은 건 친구한테 넘기는 걸로.”
(2화)
“저 왔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한바탕 손님들이 지나가고 유일한 직원인 기범이 예의 상큼한 미소로 출근을 했다. 주한은 한숨 돌리는 차원에서 여느 때처럼 동네를 한 바퀴 돌기 위해 카페를 나섰다.
그런데 막 한 발짝을 떼자마자 핸드폰이 진동했다. 승욱이었다.
― 산책 나갈 참이었지?
“귀신이다 아주. 아침 댓바람부터 웬일인데?”
― 이따가 갑돌이 만나기로 했는데, 껴라.
“이번엔 또 뭐가 궁금해서 만나는 건데?”
― 요새 우리 집 보스가 좀 이상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보건 교사한테 어지간히도 한다, 너도.”
― 갑돌이가 그냥 보건 교사냐? 갑돌이 어느 학교 나왔는지 몰라? 웬만한 인턴보다 아는 게 더 많을걸?
“임상이 부족한데 알아 봐야 얼마나 안다고…… 다 이론이지. 그냥 병원을 가라, 괜히 일 키우지 말고.”
― 그래도 일단 갑돌이 의견 먼저 들어 보고. 좌우당간 우좌지간, 그래서 뭐, 낄 거야 말 거야?
“낀다.”
승욱이 그럴 줄 알았다며 뒷말을 이어 가는데, 갑자기 귓속에서 위옹위옹…… 하는 소리가 생기더니 조금씩 데시벨을 올려 갔다. 들끓는 것이 마치 한여름 매미 떼 소리 같아서, 주한은 자신도 모르게 검지로 한쪽 귓구멍을 막아 버렸다. 승욱이 하는 말들이 다른 세계에서 던져 온 찢어진 메모 같았다.
*
<해부루시절>은 <기하고등학교> 고적 탐구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학교에서 아이들 웃기는 걸로는 최고인 역사과 남태문 선생이 지었는데, ‘그런 건 해부루 시절에나 있던 일이고…….’라는 본인 입버릇에서 비롯된 별명이었다.
‘해부루(解夫婁)’가 누구인가. 고대 부여의 전설적인 왕 아니던가. 그럼 그 시절이라 하면, 도대체 구체적으로 언제를 가리키는 것이란 말인가. 기원전? 기원후? 어쨌거나 주한과 승욱이 바로 그 <해부루시절>의 부원이었다. 당연히 배구반에 들 줄 알았던 주한이 <해부루시절>을 선택하자, 승욱이 미친 듯이 환호하며 따라갔다는 속사정이 둘 사이에 있었다.
여기서 승욱, 그러니까 김승욱은 ‘대장’ 민주한과 유일하게 말을 편히 트고 지내는 아이였다. 옛 성당 친구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는데, 둘 다 성당에 발을 끊은 지 꽤 되어서 ‘옛’이었다.
실제로 주한은 나름 엄격한 가풍에 반항 좀 해 보겠다는 의미에서 열심히 성당을 드나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반항으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데다, 심지어 노발대발할 줄 알았던 할아버지 유학이 누나 주담을 통해 전해 온 말은 의외이기까지 했다.
‘천주학도 익혀 둘 만한 학문이다.’
맥이 풀렸다. 그래서 그만두어 버렸다.
주한이 성당에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보스, 그러니까 엄마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승욱은 주한이 더 이상 성당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따라서 그만둔 경우였다. 그것이 승욱이 주한을 쫓아 무언가를 저지른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 일로 보스가 승욱을 쥐 잡듯 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욱은 다시는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늘 혼자 움직이는 대체 불가 짱’이라면서 승욱은 무슨 존재인가 싶겠지만, 혼자 움직인다는 건 주한이 패거리를 달고 다니지 않는다는 뜻이지, 모든 일에서 한 마리 고독한 늑대로 살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무튼, 두 사람이 고2가 되어 <해부루시절>의 신입 부원을 맞이하던 날이었다. 앞에 나와 차례로 인사하는 후배들 중에 유독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귀가 시원하게 드러난 짧은 상고머리에 바지 교복을 입고 있어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는데, 암만 봐도 보면 볼수록 여자 같았던 것이다.
승욱이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그 아이에게 집중했다.
“저는 민정금이지 말입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쿡쿡…….’과 ‘킥킥…….’이 터져 나왔다.
승욱이 한 소리 했다.
“너, 잘생긴 여자냐, 예쁘게 생긴 남자냐?”
정금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보시다시피 예쁘게 생긴 여자지 말입니다.”
그러자 이번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커다란 웃음소리들이 교실을 채웠다. 웃음 많은 승욱이 뒤로 넘어갔음은 물론이었다.
“뭐야 저거, 꺼억꺼억…… 아, 뻔뻔해. 꺼억꺼억…… 예쁜 게 뭔지를, 꺼억꺼억…… 모르는 거지, 꺼억꺼억…….”
잠시 후 커다란 웃음을 여전히 입에 문 채로 승욱이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근데, 너. 키가 몇이냐?”
“168이지 말입니다.”
“예스! 난 반올림해서 170. 아이 윈!”
하지만 주한은 다른 이유에서 정금에게 시선을 꽂았고, 모임이 끝나고 흩어지는 무리들 틈바구니에서 정금만 따로 불러냈다.
“민정금이라고?”
“예, 선배님.”
“어디 민씨지?”
“송주 민씨입니다.”
정금이 차렷, 자세로 서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대답했다.
“흠…… 더 자세히.”
“송주 민씨 이혁공파 32대손입니다.”
“하아…….”
“혹시…….”
“그래. 나는 송주 민씨 문찬공파 27대손이다.”
주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금이 슬그머니 오른쪽 다리를 뒤로 빼고 주먹을 내밀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저 맞고만 있지는 않겠습니다.”
“야, 이 녀석아. 내가 팥알만 한 너 때려서 뭐 하게. 우리 둘이 치고받으면 몇백 년 묵은 원한이 눈 녹듯 사라지기라도 한대?”
“아닙니다.”
“그럼, 차렷!”
정금의 자세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서로 알아서 조용히 살자. 집에 가서는 아무 말 말고.”
“예, 선배님.”
옆에 있던 승욱이 물었다.
“뭔 소리야?”
주한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집안끼리 원수거든.”
“내 귀 양쪽 다 2.0이야. 똑똑히 들었는데 뭐래? 아까 송 뭐였더라? 암튼 같은 민씨라며?”
“그런 게 있다.”
주한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호기심이 폭발한 승욱이 정금을 향해 검지를 내밀었다.
“민정금. 여기 선배님 입이 힘드시단다. 그러니까 네가 말해.”
“예. 여기 덩치 큰 선배님이랑 저랑 같은 송주 민씨로 엄밀히 말하자면 한집안 맞지 말입니다.”
자신 앞에선 딱딱하게 ‘습니다’ 하더니 승욱에겐 다시 말랑말랑한 ‘말입니다’였다. 자신이 정금을 긴장시켰나 싶어 주한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옛날 옛적에 저희 이혁공파 조상님들과 여기 덩치 큰 선배님의 문찬공파 조상님들 간에 큰 다툼이 벌어지는 바람에 지금까지 거의 원수로 지내고 있지 말입니다.”
“허우, 대박. 왜 싸웠는데?”
“산송 때문이지 말입니다.”
“산송? 그게 뭔데?”
“묏자리 문제로 소송을 주고받는 거지 말입니다.”
“묏자리? 무덤 쓰는 거?”
“그렇지 말입니다.”
“그게 그럴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
“예. 정말 그렇지 말입니다.”
승욱이 허우, 하고 받은 충격을 나름대로 희석시키고 있는 동안, 꼼지락거리는 정금의 발가락 끝에 시선을 두고 묵묵히 듣고만 있던 주한이 고개를 들어 다시금 정금에게 시선을 꽂았다.
“근데 너, 혹시 군인 집안?”
“예, 그렇지 말입니다.”
“높으셔?”
“육군○○○여단 부대장 민학철 대령이 제 부친 되시지 말입니다.”
“높으시네. 다른 뜻은 없고, 건너 건너 들은 것 같아서 물어봤다.”
승욱이 끼어들었다.
“민정금. 그럼 너 혹시 아버지 대령님한테 맞아 봤냐?”
“저희 부친께선 폭력을 싫어하시지 말입니다.”
주한이 승욱을 툭, 쳤다.
“갑자기 그 소리가 왜 나와?”
“전에 송현기가 그러더라고. 집에 갔는데 아버지가 정복 차림으로 정좌하고 계시면, 그날은 맞는 날이라고. 그 자식 아버지가 전투기 모는 공군 장교 아니냐. 허우…… 정복에 정좌, 가오 쩔지 않냐? 그렇지. 참교육은 그렇게 하는 거지. 무르팍 나온 추리닝 바람으로 아구창 날리는 건 참교육이 아니지.”
승욱이 씨익, 웃으며 주한과 정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좌우당간 우좌지간, 둘이 동성동본에 원수지간이라 이거지. 완전 로미오와 줄리엣인데? 아니지, 걔넨 동성동본이 아니지. 오, 나 지금 굿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앞으로 이렇게 하자.”
주한은 평소의 과묵한 그답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냥 있었지만, 호기심이 받친 정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승욱이 웃음을 빼물었다. 정금이 몹시 귀여웠던 것이다.
“너네 둘. 갑돌이와 갑순이 하자.”
주한이 픽, 정금은 헉, 했다.
“민정금. 앞으로 넌 갑돌이다. 갑순이는 당연히 여기 민주한. 난 갑돌이보다 갑순이가 더 좋으니까, 좋은 건 친구한테 넘기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