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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턴후 직진입니다
(3화)
1. 신호등 앞-2
<연리초등학교> 보건실에 5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이 한 여자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샘. 우리 예쁜이 좀 봐 주세요. 농구 뛰다가 손가락을 다쳤는데, 무조건 안 아프다고만 해서요. 전 다른 아가들 때문에 운동장에 가 있을 테니까 연락 주세요.”
담임 선생님이 보건실을 나간 것과 동시에 정금이 아이를 맞은편에 앉혔다. 짙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놀라긴 한 모양이었다.
“이름이 뭐야?”
“윤주현이요.”
“그래, 주현아. 어디 볼까?”
손가락을 살피면서 정금이 물었다.
“농구하다가 다쳤다고?”
“네.”
“피구가 아니고?”
“피구는 피구대로 했고요. 이번엔 여자들도 농구 한번 해 보자고 해서요. 그렇게 됐어요.”
다행히 차분하게 대꾸를 해 왔다. 부러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부러진 경우, 심하게는 토하거나 기절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랬구나. 근데 어쩌다가 다쳤어?”
“오늘이 체육 대회 예선이었거든요, 1, 2반 대 3, 4반. 근데 4반에 진짜 농구하는 애가 있단 말이에요. 걔 이모도 전에 농구 선수였대요. 그래서 이거저거 더 많이 배웠대요. 하는 게 완전 어른 같아요. 그래서 걔 따라다니면서 막는 게 제 임무였는데, 공 쳐 낸다고 손 뻗다가 정통으로 맞았어요.”
“일대일 대인 방어 한 거야?”
“네.”
“주현이도 농구 잘하는구나. 그런 거 아무한테나 안 시키잖아.”
“잘해서가 아니라요, 지독해서 맡은 거예요.”
“지독해?”
“제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요.”
정금이 웃었다. 오래전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샘도 옛날에 승부 기질 엄청났었는데.”
“진짜요?”
“말도 못 했지. 공부는 안 그런데, 운동 시합이나 게임에서 지면 분해서 잠이 안 오더라고.”
“저도요.”
정금이 아이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아이는 이제 안정을 찾은 듯했다. 평시의 기운도.
“엄마, 집에 계셔?”
“아니요, 출근했어요.”
정금은 아이에게 엄마가 학교로 올 수 있겠느냐고 묻지 않았다. 출근이 아니라 더한 것을 했대도, 엄마가 달려올 형편이면 아이들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 다른 어른은?”
“아무도 안 계세요. 왜요? 저 병원 가야 해요?”
“응. 아무래도 엑스레이는 찍어 봐야 할 거 같아. 혹시 실금이라도 갔으면 큰일이니까.”
“혼자 갈 수 있어요.”
“정말? 대단하네.”
“5학년이에요. 병원도 혼자 못 가면 그건 바보예요.”
정금이 웃었다. 조그만 상처 하나에도 자지러지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꽤 큰 상처임에도 죽지 않는 이상 큰일 아니라는 식으로 담대한 아이들도 있었다. 그건 나이나 학년보다는 성향의 차이였는데, 아이를 데리러 오는 보호자, 주로 엄마의 말이나 행동거지를 보면 유전자와 가정 환경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었다.
“씩씩해서 예쁘네. 그런데, 어쩌지? 너 혼자는 못 보내거든. 그랬다간 샘이랑 담임 샘이 엄청 곤란해져. 학교에서 다친 건 원래 좀 복잡해서 말이야. 샘 좀 봐줘야겠는데? 나 잘리면 안 되거든. 샘은 저 아래 시골에 늙으신 부모님과 더 늙으신 조부모님이 계시단 말이지. 거기다 엄청 많이 먹는 큰 개 두 마리도 있고. 샘이 안 벌면…….”
“아, 샘. 알았어요.”
“그럼 잠시 기다려. 교감 샘한테 허락받으러 같이 가자.”
“교감 샘이요? 아우…….”
정금은 속으로 웃었다. 교감 선생님의 악명은 해마다 드높아지는 모양이었다. 아이들 반응이 점점 거세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네. 어쩔 수 없죠. 보건 샘도 참 안되신 거 같아요.”
“왜?”
“무슨 저처럼 다 큰 애를 데리고 귀찮게…….”
정금은 아이의 말이 도통 남 얘기 같지 않았다. 자신도 어려서 병원은 혼자 가야 하는 곳이라며 종종 고집을 부리곤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고모가 얼마나 진땀을 뺐던지.
“그런 거 하라고 학교에서 나 뽑은 거야.”
“그러니까 안됐다고 말한 거예요. 전 세상에서 애들 뒤치다꺼리하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해 보여요. 전 애들 싫어요. 사촌들 한번 다녀갈 적마다 10년씩 늙어요.”
정금이 웃음을 터뜨렸다.
“10년씩 늙었으면 넌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어.”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샘은 엄마한테 배운 말 없어요?”
“음, 난 엄마보다는 할아버지한테 배운 말이 더 많아.”
“아…….”
정금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철이 너무 일찍 들어서 그렇든, 독립심이 너무 일찍 자리 잡아서 그렇든, 그렇게 혼자 해결하려는 아이들을 보면 정금은 어쩐지 가슴이 아렸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인 걸까. 부임해서 2, 3년이 지날 때까지만 해도 그런 아이들이 신통하기만 했는데, 요즘은 신통보다는 안쓰럽다는 마음이 더 많이 들고 있었다.
‘나도 많이 변했지.’
아이를 데리고 나와 보건실 문을 잠갔다. 혹시나 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승욱에게서 톡 한 개가 와 있었다.
[갑순이도 참석.]
정금이 담담한 얼굴로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맞아. 생각은 변해. 마음도 변할 수 있어. 단지…….’
정금이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함께 앞을 향해 걸었다.
‘시간이 걸릴 뿐이야.’
*
<기하고등학교> 개교기념일 하루 전날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기념식에 이어 체육 대회가 바로 진행되었다. 여러 예선이 차례대로 치러지는 가운데, 정금이 피구 경기에 투입되었다. 수월한 통과였다. 주한도 마찬가지였다. 농구 예선을 넘은 것이다.
그렇게 시끌시끌 요란뻑적지근했던 오전이 지나가고 여러 결승이 남은 오후가 되었다. 피구 결승에서 매트릭스 권법을 시전하며 끝까지 살아남아 우승의 주역이 된 정금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스탠드에 앉아 농구 결승전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주한이 선수로 뛰고 있었던 것이다. <해부루시절> 모임 때 말고는 딱히 자주 마주치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남다르게 다가오는 존재였다.
물론 정금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혁공이건 문찬공이건, 막상 닥치니 그건 아주 먼 나라 일일 뿐이라고, 그저 보기 드문 한집안 사람이라 반가워 그런 거라고, 그렇게 여길 따름이었다. 실제로 송주 민씨는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이었다.
‘이겨야지 말입니다. 송주 민씨의 자존심이 걸렸지 말입니다.’
주한은 예선 때부터 주전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배구 선수로 활약했던 내공이 농구 경기에서도 십분 발휘되고 있었다. 종목은 달라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월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195센티미터의 장신이었다. 천하무적에 다름없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상대편이 너무 잘 알고 대비했다는 사실이었다. 철저한 일대일 대인 방어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다리의 움직임이 여의치 않아 팔을 움직이는 것 외에는 공격이 어려운 주한을 보며 정금은 안타까움의 장탄식을 연달아 내뱉었다.
그러다 지나친 수비에 밀려 3점 슛까지 실패로 돌아가자 정금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코트까지 한달음에 뛰어 내려가 주한의 방어를 전담하고 있던 상대 팀 선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완전 치사 빤쓰지 말입니다. 사나이가 정정당당해야지 말입니다.”
복식 호흡이라도 한 것처럼 목청이 어마무시하게 울려 퍼지면서 선수들이 뛰다 말고 죄다 고개를 돌려 정금을 바라보았다. 주한도 물론이었다. 그렇다고 시합이 중단된 것은 아니어서 다시 공이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고, 그 공을 따라서 정금도 각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찌나 결사적이던지, 게다가 우습기는 또 얼마나 우습던지, 심판 나온 선생님은 쫓아내지 않고 구경하는 걸로 결정을 지었다.
“계속 그러면 안 되지 말입니다. 어어…… 젠장, 빨리 풀지 말입니다.”
그렇게 코트 주변을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삿대질을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빽빽거리던 정금이 급기야 상대 팀 골대 밑에 서서는 주먹 쥔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후회 없고 후퇴 없다. 오직 전진하고, 오직 승리할 뿐이다. 으악!”
그리고 양손을 허리에 얹고는 허리를 좌우로 야무지게 흔들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승부 외에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승부 말고는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자의 적나라한 모델이었다.
삼천 리 반도 금수강산 아름다운 이 강토에
사나이 붉은 피 걸고 매일을 산다
총성이 빗발치고 포탄이 작렬하는
불바다도 무릅쓰고 달려 나간다
내 고향 내 가족 내 사랑 위해
멸공의 횃불 들고 전진을 한다
전우여, 아 전우여,
우리는야 자랑스러운 대한의 건아
첫 소절에 이미 몇몇 남자 선생님들이 배를 잡고 허리를 숙인 가운데, 가사를 통해 군가임을 이해한 남학생들이 “아, 존나!” 하고 낄낄거림과 동시에 여학생들이 “뭐야, 뭐야!” 하며 술렁거렸다.
승욱이 뒤로 넘어갔다.
“갑돌이 저거, 꺼억꺼억…… 아 웃겨, 꺼억꺼억…… 멸공의 횃불을, 꺼억꺼억…… 왜 지가 들어, 꺼억꺼억…… 나 죽네, 꺼억꺼억…….”
군가를 끝까지 마친 정금이 고래고래 외쳤다.
“송주, 송주, 으악! 민주한, 민주한, 으악!”
주한과 정금이 같은 ‘송주 민씨’라는 사실을 전교생이 알게 된 날이었다. 그 사실은 이후 주한과 정금의 관계에 꽤 큰 영향을 미쳤다. ‘대(對)주한 접근 금지령’이 해제된 것이다.
물론 접근 금지령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던 그전에도 정금만큼은 개의치 않고 주한을 따라다니곤 했었다. 너무 거리낌이 없어서 오히려 무어라 보탤 말이 없을 정도였다. 팬클럽도 팬클럽이었지만, 당사자인 주한에게 있어서도 그런 캐릭터는 처음이었다. 승욱조차도 처음에는 주한을 꽤 어려워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주한의 팬클럽으로부터 ‘너는 프리패스다!’라고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건 나름 의미가 있었다. 그 이유가 정금이 주한과 한집안 사람이어서든, 정금이 다른 여학생들의 수비선 밖에 존재하는 선머슴이어서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정금이 ‘열외’가 되었다는 거, 그게 중요할 따름이었다. 주한이 한시름 덜었던 것이다. 퀸 우해강에게 다가가려고 시도했다가 무자비하게 잘려 나간 여러 케이스를 통해 배운 바가 있던 때문이었다.
물론 대장 주한의 팬클럽은 퀸 해강의 팬클럽에 비하면 조용하고 묵직한 편이긴 했다. 대신 ‘힘’을 경외하는 아이들이 다수 있어서인지 무시할 수 없는 ‘한 방’이라는 게 있었다. 혹여 그 ‘한 방’에 정금이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결코 참지 못할 것이라고, 주한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알고 지낸 지 고작 얼마나 됐다고, 왜 그렇게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지, 정말이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열과 성의를 다한 정금의 응원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그때부터 주한의 3점 슛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기가 오른 다른 선수들도 덩달아 날아올랐고, 결국 주한의 팀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호루라기가 울림과 동시에 정금이 코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곤 주한의 허리춤을 양손으로 꽉 붙들고는 “꺄오! 오호호! 꺄오!” 원숭이 소리를 내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이겼지 말입니다. 역시 승부는 이겨야 맛이지 말입니다.”
주한이 발갛게 달아오른 정금의 낯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말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땀에 떡이 된 정금의 머리카락을 완전히 헝클어뜨렸다. 그러면서 정직하게 웃었다.
“어이구, 녀석아.”
말은 그게 다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감정과 무수한 단어들이 담겨 있었다.
(3화)
1. 신호등 앞-2
<연리초등학교> 보건실에 5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이 한 여자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샘. 우리 예쁜이 좀 봐 주세요. 농구 뛰다가 손가락을 다쳤는데, 무조건 안 아프다고만 해서요. 전 다른 아가들 때문에 운동장에 가 있을 테니까 연락 주세요.”
담임 선생님이 보건실을 나간 것과 동시에 정금이 아이를 맞은편에 앉혔다. 짙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놀라긴 한 모양이었다.
“이름이 뭐야?”
“윤주현이요.”
“그래, 주현아. 어디 볼까?”
손가락을 살피면서 정금이 물었다.
“농구하다가 다쳤다고?”
“네.”
“피구가 아니고?”
“피구는 피구대로 했고요. 이번엔 여자들도 농구 한번 해 보자고 해서요. 그렇게 됐어요.”
다행히 차분하게 대꾸를 해 왔다. 부러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부러진 경우, 심하게는 토하거나 기절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랬구나. 근데 어쩌다가 다쳤어?”
“오늘이 체육 대회 예선이었거든요, 1, 2반 대 3, 4반. 근데 4반에 진짜 농구하는 애가 있단 말이에요. 걔 이모도 전에 농구 선수였대요. 그래서 이거저거 더 많이 배웠대요. 하는 게 완전 어른 같아요. 그래서 걔 따라다니면서 막는 게 제 임무였는데, 공 쳐 낸다고 손 뻗다가 정통으로 맞았어요.”
“일대일 대인 방어 한 거야?”
“네.”
“주현이도 농구 잘하는구나. 그런 거 아무한테나 안 시키잖아.”
“잘해서가 아니라요, 지독해서 맡은 거예요.”
“지독해?”
“제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요.”
정금이 웃었다. 오래전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샘도 옛날에 승부 기질 엄청났었는데.”
“진짜요?”
“말도 못 했지. 공부는 안 그런데, 운동 시합이나 게임에서 지면 분해서 잠이 안 오더라고.”
“저도요.”
정금이 아이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아이는 이제 안정을 찾은 듯했다. 평시의 기운도.
“엄마, 집에 계셔?”
“아니요, 출근했어요.”
정금은 아이에게 엄마가 학교로 올 수 있겠느냐고 묻지 않았다. 출근이 아니라 더한 것을 했대도, 엄마가 달려올 형편이면 아이들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 다른 어른은?”
“아무도 안 계세요. 왜요? 저 병원 가야 해요?”
“응. 아무래도 엑스레이는 찍어 봐야 할 거 같아. 혹시 실금이라도 갔으면 큰일이니까.”
“혼자 갈 수 있어요.”
“정말? 대단하네.”
“5학년이에요. 병원도 혼자 못 가면 그건 바보예요.”
정금이 웃었다. 조그만 상처 하나에도 자지러지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꽤 큰 상처임에도 죽지 않는 이상 큰일 아니라는 식으로 담대한 아이들도 있었다. 그건 나이나 학년보다는 성향의 차이였는데, 아이를 데리러 오는 보호자, 주로 엄마의 말이나 행동거지를 보면 유전자와 가정 환경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었다.
“씩씩해서 예쁘네. 그런데, 어쩌지? 너 혼자는 못 보내거든. 그랬다간 샘이랑 담임 샘이 엄청 곤란해져. 학교에서 다친 건 원래 좀 복잡해서 말이야. 샘 좀 봐줘야겠는데? 나 잘리면 안 되거든. 샘은 저 아래 시골에 늙으신 부모님과 더 늙으신 조부모님이 계시단 말이지. 거기다 엄청 많이 먹는 큰 개 두 마리도 있고. 샘이 안 벌면…….”
“아, 샘. 알았어요.”
“그럼 잠시 기다려. 교감 샘한테 허락받으러 같이 가자.”
“교감 샘이요? 아우…….”
정금은 속으로 웃었다. 교감 선생님의 악명은 해마다 드높아지는 모양이었다. 아이들 반응이 점점 거세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네. 어쩔 수 없죠. 보건 샘도 참 안되신 거 같아요.”
“왜?”
“무슨 저처럼 다 큰 애를 데리고 귀찮게…….”
정금은 아이의 말이 도통 남 얘기 같지 않았다. 자신도 어려서 병원은 혼자 가야 하는 곳이라며 종종 고집을 부리곤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고모가 얼마나 진땀을 뺐던지.
“그런 거 하라고 학교에서 나 뽑은 거야.”
“그러니까 안됐다고 말한 거예요. 전 세상에서 애들 뒤치다꺼리하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해 보여요. 전 애들 싫어요. 사촌들 한번 다녀갈 적마다 10년씩 늙어요.”
정금이 웃음을 터뜨렸다.
“10년씩 늙었으면 넌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어.”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샘은 엄마한테 배운 말 없어요?”
“음, 난 엄마보다는 할아버지한테 배운 말이 더 많아.”
“아…….”
정금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철이 너무 일찍 들어서 그렇든, 독립심이 너무 일찍 자리 잡아서 그렇든, 그렇게 혼자 해결하려는 아이들을 보면 정금은 어쩐지 가슴이 아렸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인 걸까. 부임해서 2, 3년이 지날 때까지만 해도 그런 아이들이 신통하기만 했는데, 요즘은 신통보다는 안쓰럽다는 마음이 더 많이 들고 있었다.
‘나도 많이 변했지.’
아이를 데리고 나와 보건실 문을 잠갔다. 혹시나 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승욱에게서 톡 한 개가 와 있었다.
[갑순이도 참석.]
정금이 담담한 얼굴로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맞아. 생각은 변해. 마음도 변할 수 있어. 단지…….’
정금이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함께 앞을 향해 걸었다.
‘시간이 걸릴 뿐이야.’
*
<기하고등학교> 개교기념일 하루 전날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기념식에 이어 체육 대회가 바로 진행되었다. 여러 예선이 차례대로 치러지는 가운데, 정금이 피구 경기에 투입되었다. 수월한 통과였다. 주한도 마찬가지였다. 농구 예선을 넘은 것이다.
그렇게 시끌시끌 요란뻑적지근했던 오전이 지나가고 여러 결승이 남은 오후가 되었다. 피구 결승에서 매트릭스 권법을 시전하며 끝까지 살아남아 우승의 주역이 된 정금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스탠드에 앉아 농구 결승전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주한이 선수로 뛰고 있었던 것이다. <해부루시절> 모임 때 말고는 딱히 자주 마주치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남다르게 다가오는 존재였다.
물론 정금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혁공이건 문찬공이건, 막상 닥치니 그건 아주 먼 나라 일일 뿐이라고, 그저 보기 드문 한집안 사람이라 반가워 그런 거라고, 그렇게 여길 따름이었다. 실제로 송주 민씨는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이었다.
‘이겨야지 말입니다. 송주 민씨의 자존심이 걸렸지 말입니다.’
주한은 예선 때부터 주전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배구 선수로 활약했던 내공이 농구 경기에서도 십분 발휘되고 있었다. 종목은 달라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월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195센티미터의 장신이었다. 천하무적에 다름없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상대편이 너무 잘 알고 대비했다는 사실이었다. 철저한 일대일 대인 방어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다리의 움직임이 여의치 않아 팔을 움직이는 것 외에는 공격이 어려운 주한을 보며 정금은 안타까움의 장탄식을 연달아 내뱉었다.
그러다 지나친 수비에 밀려 3점 슛까지 실패로 돌아가자 정금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코트까지 한달음에 뛰어 내려가 주한의 방어를 전담하고 있던 상대 팀 선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완전 치사 빤쓰지 말입니다. 사나이가 정정당당해야지 말입니다.”
복식 호흡이라도 한 것처럼 목청이 어마무시하게 울려 퍼지면서 선수들이 뛰다 말고 죄다 고개를 돌려 정금을 바라보았다. 주한도 물론이었다. 그렇다고 시합이 중단된 것은 아니어서 다시 공이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고, 그 공을 따라서 정금도 각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찌나 결사적이던지, 게다가 우습기는 또 얼마나 우습던지, 심판 나온 선생님은 쫓아내지 않고 구경하는 걸로 결정을 지었다.
“계속 그러면 안 되지 말입니다. 어어…… 젠장, 빨리 풀지 말입니다.”
그렇게 코트 주변을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삿대질을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빽빽거리던 정금이 급기야 상대 팀 골대 밑에 서서는 주먹 쥔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후회 없고 후퇴 없다. 오직 전진하고, 오직 승리할 뿐이다. 으악!”
그리고 양손을 허리에 얹고는 허리를 좌우로 야무지게 흔들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승부 외에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승부 말고는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자의 적나라한 모델이었다.
삼천 리 반도 금수강산 아름다운 이 강토에
사나이 붉은 피 걸고 매일을 산다
총성이 빗발치고 포탄이 작렬하는
불바다도 무릅쓰고 달려 나간다
내 고향 내 가족 내 사랑 위해
멸공의 횃불 들고 전진을 한다
전우여, 아 전우여,
우리는야 자랑스러운 대한의 건아
첫 소절에 이미 몇몇 남자 선생님들이 배를 잡고 허리를 숙인 가운데, 가사를 통해 군가임을 이해한 남학생들이 “아, 존나!” 하고 낄낄거림과 동시에 여학생들이 “뭐야, 뭐야!” 하며 술렁거렸다.
승욱이 뒤로 넘어갔다.
“갑돌이 저거, 꺼억꺼억…… 아 웃겨, 꺼억꺼억…… 멸공의 횃불을, 꺼억꺼억…… 왜 지가 들어, 꺼억꺼억…… 나 죽네, 꺼억꺼억…….”
군가를 끝까지 마친 정금이 고래고래 외쳤다.
“송주, 송주, 으악! 민주한, 민주한, 으악!”
주한과 정금이 같은 ‘송주 민씨’라는 사실을 전교생이 알게 된 날이었다. 그 사실은 이후 주한과 정금의 관계에 꽤 큰 영향을 미쳤다. ‘대(對)주한 접근 금지령’이 해제된 것이다.
물론 접근 금지령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던 그전에도 정금만큼은 개의치 않고 주한을 따라다니곤 했었다. 너무 거리낌이 없어서 오히려 무어라 보탤 말이 없을 정도였다. 팬클럽도 팬클럽이었지만, 당사자인 주한에게 있어서도 그런 캐릭터는 처음이었다. 승욱조차도 처음에는 주한을 꽤 어려워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주한의 팬클럽으로부터 ‘너는 프리패스다!’라고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건 나름 의미가 있었다. 그 이유가 정금이 주한과 한집안 사람이어서든, 정금이 다른 여학생들의 수비선 밖에 존재하는 선머슴이어서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정금이 ‘열외’가 되었다는 거, 그게 중요할 따름이었다. 주한이 한시름 덜었던 것이다. 퀸 우해강에게 다가가려고 시도했다가 무자비하게 잘려 나간 여러 케이스를 통해 배운 바가 있던 때문이었다.
물론 대장 주한의 팬클럽은 퀸 해강의 팬클럽에 비하면 조용하고 묵직한 편이긴 했다. 대신 ‘힘’을 경외하는 아이들이 다수 있어서인지 무시할 수 없는 ‘한 방’이라는 게 있었다. 혹여 그 ‘한 방’에 정금이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결코 참지 못할 것이라고, 주한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알고 지낸 지 고작 얼마나 됐다고, 왜 그렇게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지, 정말이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열과 성의를 다한 정금의 응원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그때부터 주한의 3점 슛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기가 오른 다른 선수들도 덩달아 날아올랐고, 결국 주한의 팀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호루라기가 울림과 동시에 정금이 코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곤 주한의 허리춤을 양손으로 꽉 붙들고는 “꺄오! 오호호! 꺄오!” 원숭이 소리를 내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이겼지 말입니다. 역시 승부는 이겨야 맛이지 말입니다.”
주한이 발갛게 달아오른 정금의 낯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말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땀에 떡이 된 정금의 머리카락을 완전히 헝클어뜨렸다. 그러면서 정직하게 웃었다.
“어이구, 녀석아.”
말은 그게 다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감정과 무수한 단어들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