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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증상입니다
(1화)
『애인이 미남입니다』,『유턴후 직진입니다』에 이은 「기하고등학교 4대 천왕」그 세 번째 이야기
<기하고등학교>의 4대 천왕이라 하면, 다음과 같다.
전형적인 마이웨이 스타일의 싹수머리 없는 ‘박사’ 서재필, 늘 혼자 움직이는 대체 불가 짱 ‘대장’ 민주한, 피아노 치는 우아한 뇌섹녀 ‘강신’ 강우연, 그리고 매너 좋기로 유명한 영재 초식남 ‘퀸’ 우해강. 그러니까 외모부터 재능까지 신이 특별히 신경 써서 어루만진 다음 세상에 내놓은 인종들. 하지만 사랑 앞에서만큼은 그들도 하늘의 덕을 누릴 수 없었으니, 다시 말해서 순전히 제 할 노릇이었던 것이었던 거시다.
프롤로그
― 이야기 앞의 이야기 1
“하다열. 밖에 3학년 선배가 너 찾아.”
반장이 등을 툭 치며 말하는데, 안경 속의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반짝했다. 이 상황이 무언가 신난 모양이었다. 반면, 다열은 순식간에 기분이 상해 버렸다.
“씨바…….”
다열이 제 귀에만 들릴 정도의 아주 작은 소리로 욕을 씹어뱉었다. 그러곤 거의 나무늘보 수준으로 느릿느릿 일어나 느릿느릿 교실 뒤쪽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시간이 같이 느리게 움직여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씨바…….”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3주나 지난 시점에서 선배가 후배를 찾는다는 건, 중학교 시절에 비추어 보건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2학년도 아니고 3학년이라니, 걸려도 된통 크게 걸릴 모양이었다. 두터운 밤색 뿔테 안경을 낀 통통한 까치집 머리 여드름쟁이라고 해서 일명 ‘어글리’로 불리는 다열로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동아리도 독서반을 들어 둔 마당에, 이제 와 자신을 찾는다면 그 용건이야 뻔할 뻔 자였다.
‘셔틀이라도 필요한 거겠지. 기하가 점잖은 학교라고 누가 그랬어.’
욕이 연거푸 나왔다.
“씨바…… 아, 씨바…….”
그때였다. 커다란 덩치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박건혁이었다. 고등학교 배정이 확정된 날, 일찌거니 2학년 패거리에게 발탁되었다는 <동희중학교> 전 짱. 다열도 <동희중학교> 출신이었기에 아주 잘 알았다. 심지어 1학년과 2학년, 2년 동안은 같은 반으로 묶여 있기까지 했었다.
“야, 어글리.”
“씨바…….”
“씨바? 죽고 싶냐?”
“죽여 봐. 그 전에 네 책상, 내 책상 뽀개서 이쁘게 관부터 짜고.”
다열이 쏘아보며 쏘아붙이자 건혁이 흠칫했다. <동희중학교> 시절, 다열이 건혁보다 작은 체구였을 때도 건혁이 끝내 무릎 꿇리지 못한 유일한 아이가 다열이었다. 힘이 좋아서? 아니었다. 독기, 그거였다. 눈에서 심상치 않은 빛을 뿜어 대면서 ‘죽일 테면 죽여 봐. 전국이 들썩일 정도로 요란하게 죽어 줄 테니까.’ 하고 목을 들이밀던 다열은 누가 봐도 딱 미친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열이 건혁보다 조금 더 컸다. 중학교 1학년 때만 해도 키가 작고 비쩍 곯아 있던 녀석이 점점 키도 크고 조금씩 살도 올라선, 적어도 현재의 액면만으로는 다열이 건혁보다 우위로 보였다.
“하여간 주제에 이빨 하나는 존나 살벌해요.”
건혁은 일단 접었다. 안 그래도 담임이 자신을 예의 주시하는 것 같은데, 일을 키워 봐야 본인만 손해인 시기라는 판단이었다. 앞으로 새털같이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고, 그러니 손은 적당한 때 봐 주면 될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성질을 눌러 앉혔다.
“됐고. 너 따위를 강신이 어떻게 아냐?”
“그게 뭔데?”
“헐. 강신을 몰라? 기하여신 강우연을?”
‘아!’
그제야 입학하고 나서 얼핏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4대 천왕의 홍일점, 피아노 치는 우아한 뇌섹녀 어쩌고저쩌고. 그때 다열은 젖 먹던 힘을 다해 코웃음 쳤었다. 피아노 치는 것들 다 재수 없어, 라면서.
‘그 망할 피아노 이름이 강우연인가 보지?’
“정말 몰라?”
“몰라.”
퉁명 중 퉁명으로 대꾸한 다열이 건혁을 스쳐 지나갔다. 아까는 밖으로 욕을 씹어뱉었다면, 이번엔 안으로 욕을 씹어 삼키면서 여전히 느릿느릿 말이다. 게 물렀거라, 늘보 나리 행차시다. 아이들이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길을 터 주었다.
‘씨바…….’
뒷문을 열었다. 일단 눈앞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주먹질이나 발길질이 예상한 곳에서 날아온 적은 없었으니까. 욕이 다시금 재생되었다. 정말이지 조용히 살고 싶었다. 없는 듯이 지내고 싶었다. 근데 왜 찾고 난리인 거냐고.
‘아, 씨바…….’
다열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복도로 몸을 내밀었다.
“하다열!”
‘허억. 씨바…….’
다열은 정말 깜짝 놀랐다. 굵직한 목소리가 내지르는 거방진 욕 한 다발, 혹은 묵직하게 울리는 두툼한 주먹의 벽 치기, 혹은 비명을 삼키게 만드는 대퇴부 갈기기, 대강 그런 것들을 예상했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낭랑한 목소리였던 것이다. 휙, 하고 돌아보니 한 여학생이 반쯤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어 왔다.
“성가시지? 난 3학년 강우연.”
‘강우연? 하, 박건혁이 그래서 그 말을. 근데 강신이 너냐? 손은 뭐? 어쩌라고? 악수라도 하게?’
다열이 그 손을 바라보기만 할 뿐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도 우연은 손을 거둬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결국 다열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맞잡았다. 다열의 거북함을 우연의 끈질김이 이긴 것이다.
‘뭐가 이렇게 따뜻해. 꽃샘추위라는데.’
우연이 싱긋 웃고는 손을 놓았다.
“나하고 잠시 갈 데가 있어.”
“뭐? 네?”
“자리 비우는 건 걱정 마. 담임 선생님이 송학찬 선생님이시지? 오면서 말씀드렸어. 당연히 허락받았고. 가자.”
‘뭐? 게슈타포를 어쨌다고?’
다열의 담임인 송학찬은 화학과 교사로 대단히 무서운 사람이었다. 별도의 분장 없이 있는 그대로 공포 영화 속에 집어넣어도 위화감이 없을 만큼 스산하면서도 살벌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더욱이 대대로 학년 짱이 속해 있는 반을 도맡았다는 소문이 자자한 터였다.
그러다 보니 다열처럼 한 성깔 하는 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건혁처럼 말썽을 달고 사는 아이들도 일단 화학 시간엔 몸을 사렸다. 그래서 게슈타포였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독일 나치 정권의 비밀스런 정치 경찰, 바로 그 게슈타포 말이다.
그런데, 부르지 않는 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일은 절대 없는 그에게, 제 발로 걸어가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았단다.
‘게슈타포는 또 어쨌다고?’
아연해 있는 다열을 두고 우연이 몸을 돌려 앞장섰다. 지나치게 가는 등허리에서 하나로 질끈 묶은 새까만 머리 다발이 탈랑거렸다. 다열은 순식간에 게슈타포를 잊었다.
‘허, 좁아. 저렇게 좁아도 오장육부가 다 들어가나? 간 정도는 빼놓고 다니나?’
다열은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우연을 따라나섰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음악실이었다. 우연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음산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 같은 게 다열은 순식간에 기분이 또 나빠졌지만, 잠자코 우연을 따라 들어가긴 했다.
우연이 말없이 불을 켜고는 곧장 피아노로 향했다. 이어서 뚜껑을 열고 의자를 빼 앉았다. 우연이 행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너무도 스스럼없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다열은 순간적으로 우연을 아주 오랜 시간 알고 지내 온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연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왔을 때, 하마터면 ‘누나’ 하고 부를 뻔했다.
“노래 불러 볼래?”
“뭐? 네?”
다열은 황당했다.
‘아, 다짜고짜. 사람 좀 고만 놀래키라고.’
우연이 다시 말했다.
“노래 불러 보라고.”
“지금요? 왜요?”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부른 적은 없지? 내가 해 줄게.”
“세상의 모든 노래를 다 알아요?”
다열은 알아채지 못했다. 대화의 논점이 순식간에 달라져 버렸음을. 노래를 부르고 부르지 않고가 아니라, 다열이 고를 노래를 우연이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음을.
“불러 봐.”
다열이 바지 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 팔짱을 꼈다. 그러곤 우연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우연이 마주 응시해 왔다. 그런데 그 눈이 어찌나 깊고 눈빛은 또 어찌나 진지한지, 다열은 결국 항복하고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르면 될 거 아니야.’
다열의 수그러든 기색에 우연이 건반에 시선을 얹어 두고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열이 노래 하나를 끄집어냈다. 아마도 천 번은 넘게 불렀을 노래였다.
그러지 말걸
모른 척할걸
안 보이는 것처럼
보지 못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그럴걸
‘모른 척할걸’에서부터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멜로디도 멜로디지만, 원음보다 조금 높게 잡았는데도 코드마저 정확했다. 다열은 놀랐다. 적어도 다열의 또래들 중에서는 「그럴걸」을 아는 경우가 없어서였다. 놀라움 속에서도 다열은 노래를 이어 갔다.
이상했어, 말 한마디 없었는데
사랑을 알게 되고
이상했어, 말 한마디 없었는데
사랑이 느껴지고
우연의 말처럼 혼자 부르는 것과 제대로 된 피아노 반주를 깔고 부르는 것엔 큰 차이가 있었다. 간혹 이용했던 노래방 기계 반주와는 격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다열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고조돼서는 다른 때보다 더 공들여 불렀다.
사실은 아니지
다 알고 있었는걸
너를 보고만 그 처음이
너를 알아차린 그때가
내겐 정말 다행이라는 걸
그러니 그냥, 그러니까 그냥
안다고 말할걸
그럴걸
노래가 끝났다. 다열이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우연은 다열의 감정이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뒤 다열이 현실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우연이 조용히,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하다열. 계속 노래하자. 내가 길이 돼 줄게.”
“뭐? 네?”
“가수 하자고.”
(1화)
『애인이 미남입니다』,『유턴후 직진입니다』에 이은 「기하고등학교 4대 천왕」그 세 번째 이야기
<기하고등학교>의 4대 천왕이라 하면, 다음과 같다.
전형적인 마이웨이 스타일의 싹수머리 없는 ‘박사’ 서재필, 늘 혼자 움직이는 대체 불가 짱 ‘대장’ 민주한, 피아노 치는 우아한 뇌섹녀 ‘강신’ 강우연, 그리고 매너 좋기로 유명한 영재 초식남 ‘퀸’ 우해강. 그러니까 외모부터 재능까지 신이 특별히 신경 써서 어루만진 다음 세상에 내놓은 인종들. 하지만 사랑 앞에서만큼은 그들도 하늘의 덕을 누릴 수 없었으니, 다시 말해서 순전히 제 할 노릇이었던 것이었던 거시다.
프롤로그
― 이야기 앞의 이야기 1
“하다열. 밖에 3학년 선배가 너 찾아.”
반장이 등을 툭 치며 말하는데, 안경 속의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반짝했다. 이 상황이 무언가 신난 모양이었다. 반면, 다열은 순식간에 기분이 상해 버렸다.
“씨바…….”
다열이 제 귀에만 들릴 정도의 아주 작은 소리로 욕을 씹어뱉었다. 그러곤 거의 나무늘보 수준으로 느릿느릿 일어나 느릿느릿 교실 뒤쪽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시간이 같이 느리게 움직여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씨바…….”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3주나 지난 시점에서 선배가 후배를 찾는다는 건, 중학교 시절에 비추어 보건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2학년도 아니고 3학년이라니, 걸려도 된통 크게 걸릴 모양이었다. 두터운 밤색 뿔테 안경을 낀 통통한 까치집 머리 여드름쟁이라고 해서 일명 ‘어글리’로 불리는 다열로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동아리도 독서반을 들어 둔 마당에, 이제 와 자신을 찾는다면 그 용건이야 뻔할 뻔 자였다.
‘셔틀이라도 필요한 거겠지. 기하가 점잖은 학교라고 누가 그랬어.’
욕이 연거푸 나왔다.
“씨바…… 아, 씨바…….”
그때였다. 커다란 덩치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박건혁이었다. 고등학교 배정이 확정된 날, 일찌거니 2학년 패거리에게 발탁되었다는 <동희중학교> 전 짱. 다열도 <동희중학교> 출신이었기에 아주 잘 알았다. 심지어 1학년과 2학년, 2년 동안은 같은 반으로 묶여 있기까지 했었다.
“야, 어글리.”
“씨바…….”
“씨바? 죽고 싶냐?”
“죽여 봐. 그 전에 네 책상, 내 책상 뽀개서 이쁘게 관부터 짜고.”
다열이 쏘아보며 쏘아붙이자 건혁이 흠칫했다. <동희중학교> 시절, 다열이 건혁보다 작은 체구였을 때도 건혁이 끝내 무릎 꿇리지 못한 유일한 아이가 다열이었다. 힘이 좋아서? 아니었다. 독기, 그거였다. 눈에서 심상치 않은 빛을 뿜어 대면서 ‘죽일 테면 죽여 봐. 전국이 들썩일 정도로 요란하게 죽어 줄 테니까.’ 하고 목을 들이밀던 다열은 누가 봐도 딱 미친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열이 건혁보다 조금 더 컸다. 중학교 1학년 때만 해도 키가 작고 비쩍 곯아 있던 녀석이 점점 키도 크고 조금씩 살도 올라선, 적어도 현재의 액면만으로는 다열이 건혁보다 우위로 보였다.
“하여간 주제에 이빨 하나는 존나 살벌해요.”
건혁은 일단 접었다. 안 그래도 담임이 자신을 예의 주시하는 것 같은데, 일을 키워 봐야 본인만 손해인 시기라는 판단이었다. 앞으로 새털같이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고, 그러니 손은 적당한 때 봐 주면 될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성질을 눌러 앉혔다.
“됐고. 너 따위를 강신이 어떻게 아냐?”
“그게 뭔데?”
“헐. 강신을 몰라? 기하여신 강우연을?”
‘아!’
그제야 입학하고 나서 얼핏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4대 천왕의 홍일점, 피아노 치는 우아한 뇌섹녀 어쩌고저쩌고. 그때 다열은 젖 먹던 힘을 다해 코웃음 쳤었다. 피아노 치는 것들 다 재수 없어, 라면서.
‘그 망할 피아노 이름이 강우연인가 보지?’
“정말 몰라?”
“몰라.”
퉁명 중 퉁명으로 대꾸한 다열이 건혁을 스쳐 지나갔다. 아까는 밖으로 욕을 씹어뱉었다면, 이번엔 안으로 욕을 씹어 삼키면서 여전히 느릿느릿 말이다. 게 물렀거라, 늘보 나리 행차시다. 아이들이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길을 터 주었다.
‘씨바…….’
뒷문을 열었다. 일단 눈앞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주먹질이나 발길질이 예상한 곳에서 날아온 적은 없었으니까. 욕이 다시금 재생되었다. 정말이지 조용히 살고 싶었다. 없는 듯이 지내고 싶었다. 근데 왜 찾고 난리인 거냐고.
‘아, 씨바…….’
다열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복도로 몸을 내밀었다.
“하다열!”
‘허억. 씨바…….’
다열은 정말 깜짝 놀랐다. 굵직한 목소리가 내지르는 거방진 욕 한 다발, 혹은 묵직하게 울리는 두툼한 주먹의 벽 치기, 혹은 비명을 삼키게 만드는 대퇴부 갈기기, 대강 그런 것들을 예상했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낭랑한 목소리였던 것이다. 휙, 하고 돌아보니 한 여학생이 반쯤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어 왔다.
“성가시지? 난 3학년 강우연.”
‘강우연? 하, 박건혁이 그래서 그 말을. 근데 강신이 너냐? 손은 뭐? 어쩌라고? 악수라도 하게?’
다열이 그 손을 바라보기만 할 뿐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도 우연은 손을 거둬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결국 다열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맞잡았다. 다열의 거북함을 우연의 끈질김이 이긴 것이다.
‘뭐가 이렇게 따뜻해. 꽃샘추위라는데.’
우연이 싱긋 웃고는 손을 놓았다.
“나하고 잠시 갈 데가 있어.”
“뭐? 네?”
“자리 비우는 건 걱정 마. 담임 선생님이 송학찬 선생님이시지? 오면서 말씀드렸어. 당연히 허락받았고. 가자.”
‘뭐? 게슈타포를 어쨌다고?’
다열의 담임인 송학찬은 화학과 교사로 대단히 무서운 사람이었다. 별도의 분장 없이 있는 그대로 공포 영화 속에 집어넣어도 위화감이 없을 만큼 스산하면서도 살벌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더욱이 대대로 학년 짱이 속해 있는 반을 도맡았다는 소문이 자자한 터였다.
그러다 보니 다열처럼 한 성깔 하는 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건혁처럼 말썽을 달고 사는 아이들도 일단 화학 시간엔 몸을 사렸다. 그래서 게슈타포였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독일 나치 정권의 비밀스런 정치 경찰, 바로 그 게슈타포 말이다.
그런데, 부르지 않는 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일은 절대 없는 그에게, 제 발로 걸어가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았단다.
‘게슈타포는 또 어쨌다고?’
아연해 있는 다열을 두고 우연이 몸을 돌려 앞장섰다. 지나치게 가는 등허리에서 하나로 질끈 묶은 새까만 머리 다발이 탈랑거렸다. 다열은 순식간에 게슈타포를 잊었다.
‘허, 좁아. 저렇게 좁아도 오장육부가 다 들어가나? 간 정도는 빼놓고 다니나?’
다열은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우연을 따라나섰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음악실이었다. 우연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음산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 같은 게 다열은 순식간에 기분이 또 나빠졌지만, 잠자코 우연을 따라 들어가긴 했다.
우연이 말없이 불을 켜고는 곧장 피아노로 향했다. 이어서 뚜껑을 열고 의자를 빼 앉았다. 우연이 행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너무도 스스럼없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다열은 순간적으로 우연을 아주 오랜 시간 알고 지내 온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연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왔을 때, 하마터면 ‘누나’ 하고 부를 뻔했다.
“노래 불러 볼래?”
“뭐? 네?”
다열은 황당했다.
‘아, 다짜고짜. 사람 좀 고만 놀래키라고.’
우연이 다시 말했다.
“노래 불러 보라고.”
“지금요? 왜요?”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부른 적은 없지? 내가 해 줄게.”
“세상의 모든 노래를 다 알아요?”
다열은 알아채지 못했다. 대화의 논점이 순식간에 달라져 버렸음을. 노래를 부르고 부르지 않고가 아니라, 다열이 고를 노래를 우연이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음을.
“불러 봐.”
다열이 바지 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 팔짱을 꼈다. 그러곤 우연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우연이 마주 응시해 왔다. 그런데 그 눈이 어찌나 깊고 눈빛은 또 어찌나 진지한지, 다열은 결국 항복하고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르면 될 거 아니야.’
다열의 수그러든 기색에 우연이 건반에 시선을 얹어 두고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열이 노래 하나를 끄집어냈다. 아마도 천 번은 넘게 불렀을 노래였다.
그러지 말걸
모른 척할걸
안 보이는 것처럼
보지 못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그럴걸
‘모른 척할걸’에서부터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멜로디도 멜로디지만, 원음보다 조금 높게 잡았는데도 코드마저 정확했다. 다열은 놀랐다. 적어도 다열의 또래들 중에서는 「그럴걸」을 아는 경우가 없어서였다. 놀라움 속에서도 다열은 노래를 이어 갔다.
이상했어, 말 한마디 없었는데
사랑을 알게 되고
이상했어, 말 한마디 없었는데
사랑이 느껴지고
우연의 말처럼 혼자 부르는 것과 제대로 된 피아노 반주를 깔고 부르는 것엔 큰 차이가 있었다. 간혹 이용했던 노래방 기계 반주와는 격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다열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고조돼서는 다른 때보다 더 공들여 불렀다.
사실은 아니지
다 알고 있었는걸
너를 보고만 그 처음이
너를 알아차린 그때가
내겐 정말 다행이라는 걸
그러니 그냥, 그러니까 그냥
안다고 말할걸
그럴걸
노래가 끝났다. 다열이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우연은 다열의 감정이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뒤 다열이 현실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우연이 조용히,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하다열. 계속 노래하자. 내가 길이 돼 줄게.”
“뭐? 네?”
“가수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