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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증상입니다

(2화)



다열이 의자에 엉덩이를 채 붙이기도 전에 사내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주위를 둘러쌌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했다.

“강신이 너를 왜 찾아온 거냐?”

“둘이 어디 좋은 데 갔다 왔냐?”

“혹시 강신 취향이 너 같은 어글리냐?”

“만나서 둘이 뭐 했냐?”

다열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갖은 의성어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명백한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래도 다열은 상대하지 않았다. ‘무시’라면 일가견이 있는 다열이었다. 결국 사내아이들은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선 곧바로 다른 대화로 옮겨 갔다. 대신, 한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교실로 돌아오면서부터 내내 뚫어지게 쳐다보아서 거슬리던 아이였다. 그런데 입을 여니 말투는 더 거슬렸다.

“야. 너 우연 선배하고 뭐 할 건데?”

‘씨바. 말투 한번 싸가지 없기는. 딱 질색이야.’

다열이 입을 열지 않자 여자아이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우연 선배하고 뭐 할 거냐고 묻잖아.”

다열이 손에 턱을 괴면서 그 여자아이를 노려보았다.

“너 나랑 같은 반이었냐?”

“뭐? 기막혀. 여태 그것도 모르고 있었니?”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여자아이의 낯빛이 싸늘해졌다.

“그리고 내가 뭘 하든, 그걸 내가 왜 너한테 말해야 하지?”

“내가 우연 선배를 좀 아는데, 그 선배가 일없이 누구더러 오라 가라 할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다. 그러니까 뭐냐고.”

“좀 알면, 직접 물어보면 되겠네.”

“뭐?”

“꺼져라. 난 기지배랑 안 논다.”

“뭐? 기지배? 야!”

“왜. 기지배야.”

“허. 기막혀. 어글리 주제에 꼴값.”

여자아이가 팩,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다열은 몰랐지만, 그 여자아이는 차기 기하여신 자리를 예약한 한유랑이었다. 그리고 그 유랑과 다열은 약 17개월 뒤 바로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었다.



‘하다열. 나랑 사귀자.’

‘너, 생일이 언제지?’

‘7월 17일 제헌절. 그건 왜?’

‘난 연상 싫어하거든. 그러니까 꺼져라.’

‘뭐? 그러는 넌 언젠데?’

‘12월 29일.’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럼 우리 학년 여자애들 다 연상이게?’

‘말 돼. 내가 아는 여자애 중에는 12월 31일생도 있으니까.’

‘그게 누군데? 내가 아는 애야?’

‘알 거 없고. 하나 더 말해 주자면, 내가 누군가를 사귈 거면 강우연이지 넌 아니야. 근데 난 강우연하고도 안 사귈 거거든. 그러니까 넌 더 아니지. 꺼져라, 기지배야.’



*



[가수, 해요.]



그 문자를 보낸 날 오후, 우연이 다열을 음악실로 불렀다. 먼젓번에 들어설 땐 냉기가 풀풀 날리던 공간이었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우연이 미리 와 있어서인가, 사람 하나 있다고 그리 달라지나 싶은 게 다열은 신기했다.

“옳은 선택이야.”

‘옳다고? 그럼 거절하면 그른 게 되는 거야? 도대체 그건 어디서 온 자신감이야?’

다열이 가수를 하기로 결정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이유와 우연에게서 비롯된 이유, 그렇게 하나씩이었다.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이유는 가수가 되면 노래를 실컷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섭거나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속이 상하거나, 갖은 이유로 속이 지랄 같을 때 노래를 부르면 진정이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불렀다. 주변의 눈치가 보이면 멀리 도망가서라도 불렀다. 게다가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자신의 귀에 그리 나쁘지 않았다. 부를 수 있다면, 불러도 된다면, 원 없이 부르고 싶었다.

우연에게서 비롯된 이유는 우연의 말을 들어주고 싶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하고 싶지도, ‘싫어’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걸 하자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우연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자신만 ‘오케이’ 하면 그 모습을 두고두고 볼 수 있다는 게 설레었다. 자신만 ‘예스’ 하면 우연의 피아노 소리를 당당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게 설레었다.

우연의 표정을 보니, 잘한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닥에서부터 시작할 거야.”

“상관없어요.”

“하지만 곧 날게 될 거야.”

‘이 물건, 이거. 할 말이 없다.’

“네가 중간에 그만둬 버리면 곤란해.”

“그럴 일 없어요.”

“혹시 부모님이 몽둥이 들고 찾아오시는 건 아니겠지?”

“그럴 일은 더 없어요.”

다열의 아버지 하규태는 피아노 연주자이자 몇 년 전부터는 한 광역시에 속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기도 했다. 당연히 그 광역시에 적을 두고 있어서 한 달에 한두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했다. 다열이 그 광역시로 따라가지 않은 건 그래 봤자 달라질 게 없어서였다. 오케스트라 일이 아니더라도 공연이다 강의다 해서, 규태는 거의 떠돌이 상태나 마찬가지인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호텔이 집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성영옥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부재 상태였다. 어려서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잠들었던 기억이 아주 옅게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는 사라졌다. 서류에 ‘모’로 남아 있는 걸 보면 죽은 건 아닌데, 그녀와 외가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다. 다열은 궁금했음에도 규태와 친가 식구 중 그 누구에게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어쩐지 엄청난 소리를 들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과, 그게 무어든 그걸 감당할 깜냥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어렴풋한 확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열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가며 성장했다. 구체적으로 다열의 생활은 입주 도우미가, 다열의 공부는 주 2회 방문하는 가정교사가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규태는 진심으로 바쁜 음악가였다. 꾸준한 전화와 문자가 아니라면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릴 정도로 현실감이 떨어지는 존재였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죄책감이 하늘을 찔러서 다열에 대한 전폭적인 금전지원은 물론이고, 다열이 원하는 것이라면 불문곡직 다 들어주는 바람직하지 못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것이 다열이 피아노 치는 사람을 괜히 싫어하는 이유였다.

어쨌거나 그러한 이유에서, 다열이 가수가 아니라 다른 걸 한다 해도, 그게 범법 행위가 아닌 이상 규태가 방해를 놓을 일은 없었다.

“좋아. 연습 어떻게 할 건지 일정 잡아서 알려 줄게.”

여기서 다열은 한마디 묻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내가 노래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발톱 자국만 봐도 사자인 걸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어. 그런 거야.”

다열은 알아듣지 못했다.

‘발톱이 뭐라고? 사자가 어쨌다고?’

하지만 좋은 말인 것 같아서 그냥 있었다.

“다행이야. 내가 네 길이 될 수 있어서.”

다열이 우연을 쳐다보았다. 네 길.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려서 오래 쳐다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노래만큼 중요한 거.”

“네.”

“체중 줄여야 해.”

“네.”

“시간 여유 있으니까 처음부터 무리할 건 없어. 우선은 인스턴트와 야식 금지. 할 수 있지?”

“네.”

“피부 트러블에도 도움이 될 거야.”

“네.”

“다 네라고 대답할 줄 알았어.”

우연이 웃었다. 반만 웃었던 저번 날의 웃음을 훨씬 질러 간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멍하니 쳐다보던 다열이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더 커졌음에도 알아볼 수 없어서, 더 짙어졌음에도 힌트가 없어서, 생각이 너무 많아지게 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 이야기 앞의 이야기 2


“하다열. 밖에 2학년 선배가 너 보자는데.”

반장이 어깨를 툭 치며 말하는데, 안경 속 기다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이 상황이 무언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씨바…….”

다열이 주변에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욕을 씹어뱉고는 느릿느릿 일어나 느릿느릿 뒷문으로 향했다. 이번엔 2학년, 정말 사건이 벌어지려나 보았다. 저번과 같은 운 좋은 일이 또 일어날 리 없었다. 역시나 건혁도, 그 아닌 다른 누구도, 앞을 가로막는다거나 무얼 물어 온다거나 하지 않았다.

‘씨바…….’

꼴깍, 침을 삼키고 문을 열자마자 다열은 깜짝 놀랐다. 바로 앞에 커다란 남학생 선배 둘이 서 있었던 것이다. 딱 봐도 패거리 소속이었다.

“빠닥빠닥 안 튀 나오지, 어? 가자. 우리 형님이 좀 보자신다.”

‘형님? 씨바, 이번엔 진짜 셔틀인가 보네. 무슨 미친 짓을 해서 빠져나가지?’

<기하고등학교>가 학교 폭력 쪽에서 조용한 축에 든다는 건 동네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주변 환경이 점잖기도 했고, 학생 운이 따라 주기도 한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패거리는 분명히 존재했다. 또한 패거리 안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전쟁’도 분명히 있었다. 다열은 짐작했다. 그러니 커다란 남학생 선배들이 가리키는 ‘형님’이란, 바로 그 전쟁에서의 최후 승자일 것이라고. 2학년이 ‘형님’이라고 하는 걸 보면 그 ‘형님’의 정체란, 아마도 4대 천왕 어쩌고 때 주워들은 3학년 ‘대장’인가 보다고.

‘형님 좋아하시네. 지들이 영화배운 줄 아나. 현실 조폭은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다열은 일부러 더 껄렁거리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조금 뒤 도착한 곳은 개교 50주년 기념관 뒤편이었다. 열댓 명이 우르르 떼 지어 몰려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단출하게 네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열을 데리고 간 남학생들까지 포함하면 정확히 여섯. 힐긋하니 남학생들 사이에서 건혁의 얼굴도 보였다.

‘쪽수는 얼마 안 되지만 다들 일당십은 하게 생겼네. 웬만한 미친 짓이 아니고는 힘들 거란 그림 나오네. 씨바, 좆 됐네.’

한껏 삐딱하게 서 있자니, 그중에서 제일 크고 단단하게 생긴 남학생 하나가 다열을 향해 걸어왔다.

“네가 하다열이냐?”

“그런데요.”

“자식, 쫄지 않는 건 좋다. 발발 떠는 것들 보면 기분이 잡쳐서 말이지. 꼭 내가 괴롭히는 거 같잖아.”

‘고양이 쥐 생각하고 자빠졌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크흐흠!”

‘빨리 말해. 씨바.’

“너, 요즘 우리 강신이랑 붙어 다닌다며?”

‘씨바. 그거 때문이었어? 아, 그 물건 진짜. 엮이는 게 아니었어. 가수는 개뿔.’

“둘이 사귀냐?”

“제 취향 아닌데요.”

홧김에 저절로 튀어 나간 말이었다. 취향이고 나발이고를 다 떠나서 다열의 눈에도 우연은 예뻤으니까. 예쁜 건 예쁜 거였으니까.

잠시 잠깐의 침묵이 지난 후 해철에게서 “커억!”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 지금 뭐라고 씨불였냐? 우리 강신이 취향이 아니라고 했냐? 허, 너 같은 찐따 새끼가 뭐라고 우리 강신을 두고 그런 개소리를 해? 이걸 아주 통째로 발라 버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먹이 날아왔다. 다열이 붕 떴다가 떨어졌다. 다열은 두개골과 등 그리고 배, 그러니까 상반신 전체에서 어마어마한 진동과 통증을 동시에 느꼈다.

‘아, 씨바. 진짜 좆 됐네. 살면서 맞아 본 것 중에 제일 세네.’

“우리 강신이 어떤 여잔 줄 알아? 박사하고 맞먹을 만큼 존나 똑똑하고, 퀸은 발바닥에 문지를 만큼 겁나 예쁜 여자야. 근데 뭐? 취향이 아니야? 이런 오크 새끼가. 사귄다는 소리보다 더 열받네.”

그때였다.

“해철아.”

다열을 비롯한 일동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일제히 돌아갔다. 다열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저게 여기 왜 있어.’

우연이었다. 소나기를 몰고 온 여름 한낮의 바람처럼 스으스으…… 하는 수런거림이 한차례 지나갔다.

“가, 강 선배.”

“그래. 나 강 선배야.”

우연의 시선이 다열에게 와 잠시 머물렀다가 다열이 ‘대장’이라고 추정하고 있던 단단한 녀석에게로 다시 옮겨 갔다. 다열은 의아했다.

‘지금 강 선배라고 부른 거야? 대장은 저 물건이랑 같은 학년이잖아.’

다열이 상황을 재구성하는 사이, 단단한 녀석과 우연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제 이름을 아시네요.”

“그럼. 내가 2학년 짱을 모를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다열에게 주먹을 날린 덩치의 이름이 해철이었던 것이다. 전교 짱으로 ‘대장’이라 불리는 주한이 그 가진 어마어마한 위압감으로 무혈입성한 장군이라면, 해철은 숱한 싸움을 거치고서야 무리에서 1인자의 자리를 거머쥔, 이를테면 유혈입성한 장군이었다. 그것도 아주 피 튀기는 전쟁 말이다.

주한이 학교 폭력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아이들 사이를 직접적으로 비집고 흘러 다니는 구체적인 두려움의 진원은 사실상 해철이었다. 물론 해철은 일없이 아이들을 두들겨 패고 다니는 쪽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1 대 몇으로 맞짱 떠서 이겼대.’ 하는 카더라식의 전설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아주 충분했다. 같은 이유에서 동기들로부터도 깍듯하게 ‘형님’으로 대접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