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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7화
2. 장마 (3)
“빨리 검사해 줘.”
정확히 10분 후, 놈이 내게 교과서를 들이밀었다. 막 집중하려는 찰나에 놈이 방해한 꼴이었다. 팍 인상을 쓰고 놈을 노려보았지만 놈은 눌리지 않을 기세였다. 오히려 교과서를 흔들어 대며 나를 종용했다.
“빨리, 빨리.”
“진짜 다 외웠어?”
“어.”
“머리 아프다며.”
“다 외웠는데?”
빤빤한 소리를 하는 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내 붙잡고 있던 걸 10분 만에 외울 리가. 풀고 있던 문제집을 잠시 한쪽으로 치우고 놈의 교과서를 받아 들었다.
“설명해 봐.”
놈이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앓는 소리를 내며 더듬거렸지만 내용의 중반부를 접어들면서 꽤 빠르고 정확하게 내용을 읊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5분 후에는.
“끝.”
“…….”
“빼먹은 거 있나?”
없었다. 정말로 놈은 내용을 다 외운 터였다. 믿지 못해 벙 찐 나와 달리 놈은 씨익 웃어 보였다.
“키스하자.”
“잠깐만.”
“아, 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놈에게 항의를 하려는데 어깨를 바싹 낮추고 나를 노려보던 놈이 책상 위로 몸을 쭉 빼서는 내 턱을 잡아채어 제멋대로 입술을 부벼 댔다. 요령 없이 우악스럽게 놈이 나를 짓눌러 와서 어깨를 밀쳤지만 놈은 아랑곳도 않았다. 외려 무작정 입술을 꾹꾹 누르며 어기적어기적 책상을 넘어왔다.
“윽……!”
정신을 차리고 보니 놈이 위에서 나를 짓누르는 형국이었다. 나보다 몸도 두껍고 단단한 놈이 내 몸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짓눌렀다. 몸을 움직여 편한 자세를 잡으려는 나와 달리 놈은 내 턱이나 뒷덜미 같은 곳을 더듬으며 자꾸 입술을 부딪쳤다.
“아, 좀……!”
“가만있어 봐.”
안 그래도 190에 육박하는 놈이 온몸을 눌러 오니 무게가 어마어마했다. 밀어 내려고 해도 기다리라는 말 따위를 하면서 계속 입술을 부딪쳐 왔다. 떨어지라고 말하면 정색을 하곤 약속 타령을 했다.
“읏, 좀, 이런 게 아니라……!”
“외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내가 주먹으로 옆구리며 어깨를 때리는데도 놈은 꿈쩍도 안 했다. 입술을 어물거리면서도 끝까지 내 입 안을 훑어 대는 행동이 무척이나 집요했다. 다급하게 내 혀를 빨던 놈의 행위는 시간이 지나자 금세 부드러워졌다. 내 다리를 가둔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 아랫입술을 연신 빨며 입 안을 자극해 왔다. 입천장을 혀끝으로 간질일 때는 팔뚝 위로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놈을 밀어 낼 뻔했다.
어차피 완력으로는 놈을 이길 수 없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몸에서 힘을 빼자 놈이 지난번처럼 내 등이나 허리를 더듬거렸다. 이번에는 도망칠 곳이라곤 전혀 없었다. 영악하게도 놈은 내 팔을 단단히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내가 힘을 주려고 하면 단단한 악력으로 나를 짓누를 뿐이었다.
“이거 좋다.”
“뭐가?”
“공부 다 하면 키스하는 거.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뭐래.”
“진짠데. 전교 1등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놈은 퍽 진지하게 말했다. 한태경은 자꾸 내게 약속을 하려 들었다. 공부를 잘하면 키스를 하자는 거였다. 그러나 놈이 읊어 준 계획을 잘 뜯어보면 공부하는 시간이나 분량은 얼마 되지 않았다.
“싫어.”
“왜? 뭐가 싫은데?”
말도 안 되는 제안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싫다며 고개를 저으면 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태경이 공부를 하건 말건 나와 관련 없다. 나는 놈이 내 앞에서 엎드려 자도 그냥 내 할 일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놈은 내가 제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쓸데없이 말을 걸며 귀찮게 했다.
“나랑 키스하는 게 싫어?”
이런 질문을 하면 특히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미묘한 기분이었다. 놈은 내 반응을 살피며 웃었다.
그날 내내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결국 놈은 거래에 성공했다. 그날 할 일을 다 끝내면 키스 시간을 늘리는 걸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
“어, 박상식 아니냐.”
드물게도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나는 놈을 대신해 일요일 저녁 대형 서점에 가서 놈이 풀 만한 문제집을 골라 왔다. 공부를 안 해 본 것치곤 놈은 이해력도, 암기력도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공부할 만한 책이 교과서뿐이라 내 것을 사는 김에 겸사겸사 사 왔다.
나는 입술을 희생해 공부 시간을 확보했다. 처음에는 입술뿐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놈은 내 몸을 여기저기 더듬어 댔다. 처음에는 셔츠 위로 만지는 것에 그쳤는데 이제는 맨살을 주물거렸다. 이제 와서 제지하는 것도 이상해 보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 씨발 좋아 보인다.”
“이 새끼 살찐 거 봐. 자숙하랬더니 놀다 왔네.”
그 때문에 박상식의 존재를 자연스레 잊어버렸다. 어쩐지 아침부터 의자가 망가져서 나는 1층까지 내려가서 새 의자를 가져와야 했다. 놈은 다른 애들과 시답잖은 말을 한두 마디씩 주고받았다.
“씨발, 재수 없이 걸려서 좆뱅이나 치고 왔네.”
근황을 묻는 반 아이의 말에 놈이 상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재수 없게 걸렸다는 그 말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빤했다. 나는 놈이 무슨 말을 하건 말건 내 일을 했다. 그놈의 말에 일일이 반응을 보이며 재미나게 굴었다면 놈이 바짝 약이 올라 내 카메라를 박살 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은근하게 시선이 내게로 와 박혔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담임은 오랜만에 돌아온 놈에게 사고 치지 말라며 훈계를 했고 박상식을 비롯한 반 아이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놈은 이를 갈았다. 그 의도는 명백한 것이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쉬는 시간마다 놈은 몇 번 내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트집을 잡고 싶은데 좀체 잡을 것이 없어 못마땅한 눈치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급식실로 뛰어나간 후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보온 도시락에 담긴 국이나 반찬은 아주 약간 식을 뿐 먹기에 나쁘지 않았다.
“우리 선우 도시락 싸 가지고 다니네.”
한껏 꾸며 낸 놈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입만 어설프게 웃고 있었다. 박상식이 내 책상 다리를 걷어찼다. 꺼내 놓은 반찬이 한 번 흔들릴 뿐 다행히 흘리지는 않았다.
“이 새끼는 눈깔만 시퍼래 가지고.”
놈이 쓸데없는 시비를 걸어왔다. 징계를 받은 건 알았는데, 뭘 했는지는 몰랐다. 놈이 없는 동안 내 얼굴의 멍이 가라앉고 붓기가 빠졌다. 아버지가 아마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며 알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게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씨팔,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좆같이 고생을 하다 왔는데.”
“어이, 박상식.”
놈이 막 내게 울분을 토하려는 찰나, 앞문에서 누가 어슬렁거리며 들어왔다. 다름 아닌 한태경이었다. 놈과 내 사이에는 학교에서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굳이 아는 척을 할 이유는 없었다.
“어, 오랜만이다.”
“학교 언제 왔어?”
막 내게 분노를 쏟아 내려던 박상식은 얼떨떨한 얼굴로 한태경에게 인사했다. 둘이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애써 모르는 척하며 젓가락을 움직였다. 한태경은 교복 안에 티셔츠를 하나 입고 단추를 풀어 헤친 채로 돌아다녔다. 어슬렁어슬렁 교실 안으로 들어오자 내 앞에 있던 박상식이 주춤거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웬일이야?”
“그냥. 궁금해서.”
한태경이 빈 의자에 대충 걸터앉으며 짧게 대답하자 박상식이 아아, 하고 작게 신음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한태경과 달리 박상식은 앉아 있지도, 서 있지도 못하고 뻘쭘하게 주변만 둘러보았다. 자연스레 한태경 앞에서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선 모습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왜, 왜 왔는데?”
“지나가다 너 보여서.”
“아아, 그래.”
박상식은 놈이 어색한 듯 굴었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짧아 대화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교실에는 나를 제외하고도 한두 명이 더 남아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이 둘의 대화에 흥미가 있는지 흘끔거렸다. 나는 시선을 반찬에 둔 채로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하아. 이 한숨은 한태경의 것이었다. 공부를 하다 보면 한태경은 내 앞에서 한숨을 수시로 쉬었다.
“오랜만에 학교 왔다면서 여전히 좆같네.”
“어? 아.”
가벼운 타격음이 들렸다. 한태경이 주먹으로 박상식을 툭 건드린 모양이었다.
“왜?”
“아니. 아니야.”
때린 건 한태경인데 아무렇지 않은 척은 박상식이 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박상식이 뒷짐을 진 채로 서 있자 한태경이 박상식의 배를 툭툭 건드렸다. 처음에는 뒤로 밀려나던 박상식은 배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즈음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기력이 없는지, 놈은 아랫입술을 물고 버티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한태경.”
“아, 한태경?”
배를 치는 주먹의 힘이 점점 실리더니 무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박상식이 목소리를 낮추고 한태경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귀에 거슬린 듯, 오히려 놈이 박상식의 말을 따라 하자 박상식은 난감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입을 다물었다.
“왜. 오랜만에 학교 왔더니 좆같아?”
“아아니, 그게 아니고.”
“미쳤네, 이 새끼.”
어느 순간 한태경이 벌떡 일어났다. 박상식도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한태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태경만큼 큰 애는 학교에서도 거의 없었다. 한태경이 박상식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 녀석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아아, 왜 그래 너. 내가 뭐 잘못했어?”
“그냥, 얼굴이 좆같아.”
“뭐를, 아악!”
갑작스러운 비명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창가로 내몰린 박상식에게 한태경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그 직전이었다.
“작게 말해, 작게. 어?”
“흐읍, 흐으, 그러니까 왜…….”
“좆같다니까.”
한태경이 이유 없이 피식 웃으며 대답을 해 주었다. 누가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었다. 특히 구타를 당하고 있는 박상식에게는 특히. 오랜만에 학교를 왔다는 이유로 맞고 있는 것이었다.
구타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일찌감치 식사를 하러 간 애들이 돌아올 때까지 박상식은 신명 나게 맞았다. 웃으면서 교실로 뛰어 들어왔던 반 아이들은 한태경이 발길질을 하는 걸 보고는 숙연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야.”
“…….”
“무시하냐? 대답 못 해?”
“어어어!”
“잘해라. 어?”
“아, 알겠어.”
근 20분 넘게 이유 없이 맞은 박상식이 후다닥 대답하자 한태경이 잘하라며 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날도 더운데 비위도 좋네. 한태경은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서서 뒷문으로 걸어갔다. 잠깐 사이에 시선이 마주쳤다. 여전히 굳은 얼굴로, 한태경은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
“……한태경 왜 온 거야?”
“모르지, 그냥 갑자기 와서 존나 패던데.”
한태경이 지나간 자리에는 웅성거림만 남았다. 한껏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박상식의 위신은 반나절 만에 바닥으로 추락했고,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반 아이들은 서로서로에게 ‘박상식이 한태경에게 왜 맞았는가?’를 두고 토론했다. 다만 그걸 이야기하는 것도 그리 당당하고 시끌벅적하진 못해서 은밀히, 마치 비밀이라도 되는 양 질문하곤 했다.
“걍 얼굴이 좆같다 그랬다던데.”
“박상식이 좀 좆같긴 하지.”
보통 대화의 끝은 박상식에 대한 가벼운 무시였다. 한태경의 등장은 그런 의미였다. 이 무리 안에 형성된 서열과 힘의 논리를 철저히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동시에 박상식의 존재를 밟아 버리는 것. 새삼 한태경이 속한 위치가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놀랍게도,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을 입에 담던 누구도 한태경이 왜 박상식을 때렸으며, 그 정당방위 여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박상식이 잘못했네.”
“그 새끼가 문제네, 좆같아서 그런 거라며.”
그저 아이들은 박상식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할 뿐이었다. 가십거리로서 박상식은 별 화제가 되지 않는 편이었지만 한태경이 끼자 조금 달라졌다. 새삼 신기했다.
“왜 자꾸 쳐다봐?”
박상식은 화를 내며 몇 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게 끝이었다. 퉁퉁 부은 얼굴로 오후 수업을 들었는데, 선생들이 들어올 때마다 박상식에게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고 물어봤다. 정작 박상식은 가만히 있는데 다른 애들이 나서서 ‘친구와 싸웠다’고 하자 선생들은 하나같이 혀를 차며 이제 학교에 나온 애가 벌써 친구랑 쌈박질을 하면 어떻게 하냐며 박상식을 타박했다. 그러다 학교 진짜 잘릴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내자 박상식은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짜증을 삭였다.
“아니야.”
“왜? 볼수록 잘생겼어?”
“미친놈.”
어째 한태경의 레퍼토리는 달라지는 법도 없는지, 꽤 심각한 얼굴로 영어 교과서를 들여다보는 놈의 얼굴을 흘끔거리다가 들키고야 말았다. 갑자기 우리 반에 왜 왔냐고 물으려다가 내심 속이 시원해서 이유 따위 무슨 상관이 있겠나 싶었다.
놈은 감자튀김 세 개를 한꺼번에 입 안에 욱여넣었다. 저런 짓을 할 때는 좀 모자라 보이는데, 주먹은 되게 센가 보다. 그런 것치곤 나름 얌전하게 앉아서 공부를 하는 것도 꽤 신기했다. 공부해 본 적 없다는 말이 진짜인 것도 같았다.
“영어 짜증 난다. 한국말이나 잘하면 됐지, 뭘.”
“잘해 두면 좋아. 편하고.”
“영어 잘해?”
“어릴 때 잠깐 살아서.”
“오오.”
그건 또 몰랐네. 놈이 또 감자튀김을 잔뜩 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어릴 때 살다 온 것이 양분이 되어 나는 영어 공부에 특별히 시간을 쏟지 않는 편이었다. 놈은 한참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히죽 웃었다.
“그럼 해외여행 갈 때 걱정 안 해도 되겠네.”
“뭐를?”
“너 영어 잘한다며.”
“……근데 왜.”
네가 걱정을 안 하는데……. 질문을 하는 게 멍청해 보여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가끔 놈은 상상을 초월할 말은 꺼내곤 했는데 대체로 내가 생각해 본 적 없거나 연상하기 어려운 것들이라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이상하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선풍기의 풍력을 세게 올리고 나는 얼른 책에 집중했다. 감자튀김을 먹는 소리가 묘하게 거슬렸다.
***
“끝.”
예정된 시각의 20분 일찍 놈이 책을 덮었다. 사다 준 문제집을 곧잘 풀기에 거짓말인 줄 알았더니 정답률도 꽤 높은 편이었다. 놈은 책상에 엎어져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언제 다 풀어?”
“기다려.”
“기다리기 힘들어.”
머리가 워낙 백지라 그런 건가, 놈은 배운 걸 잘 흡수했다. 앞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를 무시한 채 내 책에 집중했지만 놈의 시선이 자꾸 신경 쓰였다.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비가 그치더라도 하늘은 늘 어두컴컴하고 눅눅하고 거센 바람이 불어 항상 비의 위험이 도사렸다.
놈의 집에 가져다 둔 내 티셔츠는 꽤 많아졌다. 지난번, 우연히 해가 났던 날 놈과 함께 빨래를 돌렸다. 세탁기 안에서 한데 뭉쳐 엉킨 놈과 내 옷을 털어 말리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멍청하게 내가 입을 옷도 생각하지 않고 다 빨아 버려서 놈의 옷을 빌려 입어야 했는데, 한태경은 그날따라 내게 유독 엉겨 왔다.
“임선우.”
“왜.”
“힘들다니까.”
“참아, 아직 안 끝났어. 아, 하지 마.”
본격적인 시험 기간이었다. 수행 평가가 완전히 끝나고 모든 과목이 시험 범위를 맞추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다. 놈의 발끝이 내 종아리를 긁었다. 놈은 열이 많은 편이었다. 둘이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 반드시 선풍기가 필요한 이유였다.
“더워.”
놈의 다리를 걷어차며 짜증을 냈더니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째 점점 공부를 끝내는 시간이 빨라지는 것 같아 지난번에 박박 우기고 우겨서 분량을 늘렸는데도 끝나는 시간은 비슷했다. 책상 아래로 놈이 내 발목을 더듬었다. 짜증을 부리며 몸을 밀어 내다가 어째 시간만 버릴 것 같아 그냥 놔두었더니 마치 장난감인 양 내 다리를 더듬거렸다.
“하지 마, 거기는.”
발목과 발등을 배회하던 손이 어느샌가 종아리를 두드리더니 종내에는 무릎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하지 말라고 낮게 경고하자 놈이 무릎 뒤쪽으로 손을 넣어 움푹 파인 곳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신기하네.”
“뭐가.”
“털도 별로 없는 것 같아서.”
“…….”
자꾸 꼼꼼하게 만져 댄다 싶었더니 저딴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털이 없진 않았다. ……적은 건 사실이지만.
그나마 있는 털도 색이 옅어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 봤자 솜털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아.”
“왜?”
“아냐.”
놈이 갑자기 탄성을 내뱉기에 반사적으로 물었더니 놈이 아니라며 대답을 했다. 별일 아닌가 싶어 다시 수학 문제에 집중했다. 놈은 즐거운 생각이 난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릎까지 올라왔던 손이 다시 발로 내려갔다. 발등뿐만 아니라 발바닥을 만지려 들기에 더러울 것 같아 몸을 뒤로 물렸다.
놈의 방해 덕분에 예정 시간보다 더 늦어졌다.
“10분이나 늦었어.”
“너 때문이거든?”
볼멘소리를 하는 놈에게 화를 내자 놈이 히죽 웃었다. 우리 집까지 가는 시간을 생각해 학습 시간을 정해 두었는데 늦어지면 놈은 불만을 터뜨렸다. 키스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맨날 물고 빠는 게 내 입술인데 저러고 싶을까. 놈이 앉은뱅이책상을 접어 정리하는 동안 나는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겼다.
“가자, 읏.”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는데, 한태경이 내 몸을 밀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로 뒷걸음질을 쳐 한태경의 침대에 걸터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놈은 내 어깨를 더듬어 가방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특별히 조심해야 할 건 없지만 내 물건을 던지니 신경은 쓰였다.
“왜 던져?”
“눕히고 싶어서.”
그러고는 정말로 내 몸을 뒤로 눕히곤 입을 맞추었다. 교복이 구겨질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갈아입지도 않는 거였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나는 그새 놈과의 키스가 익숙해졌다. 이게 과연 좋은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놈이 혀를 내 입 안에 집어넣고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내 혀를 잡아끄는 것에 이제는 제법 어울릴 수 있게 됐다. 깊이 혀뿌리까지 자극하며 여기저기 입 안을 간질이는 놈을 보고 있으면 명치께가 제법 뜨거워졌다.
놈이 내 위를 올라타며 아까 내내 더듬었던 무릎을 만졌다. 한쪽 다리를 제 허리에 감게 하고는 내 가슴께부터 허리, 엉덩이 라인을 손으로 훑었다. 내가 허락한 건 입술뿐인데 놈은 은근히 그 영역을 잘도 넓혀 갔다.
“왜 이런 건 입어 가지고.”
놈이 꼭 잠겨 있는 소매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투덜거렸다. 내가 긴소매밖에 못 입는 걸 빤히 알면서 하는 소리였다. 놈은 단추를 풀려는 듯 몇 번 시도하다가 쉽게 되지 않자 금세 포기하고는 허리께로 손을 옮겼다.
“아……!”
“왜?”
“하지 마.”
놈이 은근한 손길로 허리를 쓸어 올리면 소름이 돋았다. 움찔 몸을 떨며 놈의 팔을 밀어 내려고 하면 놈은 고집스럽게 허리를 더듬거렸다. 간지러운 듯, 묘한 기분에 하지 말라고 놈을 몇 번이나 말렸지만 이럴 때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교복 짜증 나.”
“맨날 입는 게 교복이면서.”
“여긴 학교가 아니잖아.”
놈이 투덜거리면서 내 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내 눈치를 살피더니 목덜미 안쪽에도 입을 맞추었다. 하얀 피부에 놈의 까슬한 입술이 닿으면 붉게 달아올랐다. 놈은 그 변화를 보는 걸 무척 좋아했다.
“다 벗었으면 좋겠는데.”
“변태 새끼.”
“이제 알았어?”
놈이 이렇게 나오면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웃으며 넘겼지만 놈의 말이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라는 건 종종 실감하곤 했다. 애초에 집에 갈 때 이렇게 열심히 교복을 챙겨 입은 것도, 한태경이 자꾸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그런 거였다. 요즘도 가끔 옷 갈아입을 타이밍을 놓치면 놈이 티셔츠 안쪽으로 맨 허리를 마구 더듬거렸다.
2. 장마 (3)
“빨리 검사해 줘.”
정확히 10분 후, 놈이 내게 교과서를 들이밀었다. 막 집중하려는 찰나에 놈이 방해한 꼴이었다. 팍 인상을 쓰고 놈을 노려보았지만 놈은 눌리지 않을 기세였다. 오히려 교과서를 흔들어 대며 나를 종용했다.
“빨리, 빨리.”
“진짜 다 외웠어?”
“어.”
“머리 아프다며.”
“다 외웠는데?”
빤빤한 소리를 하는 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내 붙잡고 있던 걸 10분 만에 외울 리가. 풀고 있던 문제집을 잠시 한쪽으로 치우고 놈의 교과서를 받아 들었다.
“설명해 봐.”
놈이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앓는 소리를 내며 더듬거렸지만 내용의 중반부를 접어들면서 꽤 빠르고 정확하게 내용을 읊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5분 후에는.
“끝.”
“…….”
“빼먹은 거 있나?”
없었다. 정말로 놈은 내용을 다 외운 터였다. 믿지 못해 벙 찐 나와 달리 놈은 씨익 웃어 보였다.
“키스하자.”
“잠깐만.”
“아, 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놈에게 항의를 하려는데 어깨를 바싹 낮추고 나를 노려보던 놈이 책상 위로 몸을 쭉 빼서는 내 턱을 잡아채어 제멋대로 입술을 부벼 댔다. 요령 없이 우악스럽게 놈이 나를 짓눌러 와서 어깨를 밀쳤지만 놈은 아랑곳도 않았다. 외려 무작정 입술을 꾹꾹 누르며 어기적어기적 책상을 넘어왔다.
“윽……!”
정신을 차리고 보니 놈이 위에서 나를 짓누르는 형국이었다. 나보다 몸도 두껍고 단단한 놈이 내 몸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짓눌렀다. 몸을 움직여 편한 자세를 잡으려는 나와 달리 놈은 내 턱이나 뒷덜미 같은 곳을 더듬으며 자꾸 입술을 부딪쳤다.
“아, 좀……!”
“가만있어 봐.”
안 그래도 190에 육박하는 놈이 온몸을 눌러 오니 무게가 어마어마했다. 밀어 내려고 해도 기다리라는 말 따위를 하면서 계속 입술을 부딪쳐 왔다. 떨어지라고 말하면 정색을 하곤 약속 타령을 했다.
“읏, 좀, 이런 게 아니라……!”
“외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내가 주먹으로 옆구리며 어깨를 때리는데도 놈은 꿈쩍도 안 했다. 입술을 어물거리면서도 끝까지 내 입 안을 훑어 대는 행동이 무척이나 집요했다. 다급하게 내 혀를 빨던 놈의 행위는 시간이 지나자 금세 부드러워졌다. 내 다리를 가둔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 아랫입술을 연신 빨며 입 안을 자극해 왔다. 입천장을 혀끝으로 간질일 때는 팔뚝 위로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놈을 밀어 낼 뻔했다.
어차피 완력으로는 놈을 이길 수 없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몸에서 힘을 빼자 놈이 지난번처럼 내 등이나 허리를 더듬거렸다. 이번에는 도망칠 곳이라곤 전혀 없었다. 영악하게도 놈은 내 팔을 단단히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내가 힘을 주려고 하면 단단한 악력으로 나를 짓누를 뿐이었다.
“이거 좋다.”
“뭐가?”
“공부 다 하면 키스하는 거.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뭐래.”
“진짠데. 전교 1등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놈은 퍽 진지하게 말했다. 한태경은 자꾸 내게 약속을 하려 들었다. 공부를 잘하면 키스를 하자는 거였다. 그러나 놈이 읊어 준 계획을 잘 뜯어보면 공부하는 시간이나 분량은 얼마 되지 않았다.
“싫어.”
“왜? 뭐가 싫은데?”
말도 안 되는 제안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싫다며 고개를 저으면 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태경이 공부를 하건 말건 나와 관련 없다. 나는 놈이 내 앞에서 엎드려 자도 그냥 내 할 일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놈은 내가 제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쓸데없이 말을 걸며 귀찮게 했다.
“나랑 키스하는 게 싫어?”
이런 질문을 하면 특히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미묘한 기분이었다. 놈은 내 반응을 살피며 웃었다.
그날 내내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결국 놈은 거래에 성공했다. 그날 할 일을 다 끝내면 키스 시간을 늘리는 걸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
“어, 박상식 아니냐.”
드물게도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나는 놈을 대신해 일요일 저녁 대형 서점에 가서 놈이 풀 만한 문제집을 골라 왔다. 공부를 안 해 본 것치곤 놈은 이해력도, 암기력도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공부할 만한 책이 교과서뿐이라 내 것을 사는 김에 겸사겸사 사 왔다.
나는 입술을 희생해 공부 시간을 확보했다. 처음에는 입술뿐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놈은 내 몸을 여기저기 더듬어 댔다. 처음에는 셔츠 위로 만지는 것에 그쳤는데 이제는 맨살을 주물거렸다. 이제 와서 제지하는 것도 이상해 보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 씨발 좋아 보인다.”
“이 새끼 살찐 거 봐. 자숙하랬더니 놀다 왔네.”
그 때문에 박상식의 존재를 자연스레 잊어버렸다. 어쩐지 아침부터 의자가 망가져서 나는 1층까지 내려가서 새 의자를 가져와야 했다. 놈은 다른 애들과 시답잖은 말을 한두 마디씩 주고받았다.
“씨발, 재수 없이 걸려서 좆뱅이나 치고 왔네.”
근황을 묻는 반 아이의 말에 놈이 상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재수 없게 걸렸다는 그 말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빤했다. 나는 놈이 무슨 말을 하건 말건 내 일을 했다. 그놈의 말에 일일이 반응을 보이며 재미나게 굴었다면 놈이 바짝 약이 올라 내 카메라를 박살 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은근하게 시선이 내게로 와 박혔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담임은 오랜만에 돌아온 놈에게 사고 치지 말라며 훈계를 했고 박상식을 비롯한 반 아이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놈은 이를 갈았다. 그 의도는 명백한 것이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쉬는 시간마다 놈은 몇 번 내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트집을 잡고 싶은데 좀체 잡을 것이 없어 못마땅한 눈치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급식실로 뛰어나간 후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보온 도시락에 담긴 국이나 반찬은 아주 약간 식을 뿐 먹기에 나쁘지 않았다.
“우리 선우 도시락 싸 가지고 다니네.”
한껏 꾸며 낸 놈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입만 어설프게 웃고 있었다. 박상식이 내 책상 다리를 걷어찼다. 꺼내 놓은 반찬이 한 번 흔들릴 뿐 다행히 흘리지는 않았다.
“이 새끼는 눈깔만 시퍼래 가지고.”
놈이 쓸데없는 시비를 걸어왔다. 징계를 받은 건 알았는데, 뭘 했는지는 몰랐다. 놈이 없는 동안 내 얼굴의 멍이 가라앉고 붓기가 빠졌다. 아버지가 아마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며 알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게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씨팔,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좆같이 고생을 하다 왔는데.”
“어이, 박상식.”
놈이 막 내게 울분을 토하려는 찰나, 앞문에서 누가 어슬렁거리며 들어왔다. 다름 아닌 한태경이었다. 놈과 내 사이에는 학교에서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굳이 아는 척을 할 이유는 없었다.
“어, 오랜만이다.”
“학교 언제 왔어?”
막 내게 분노를 쏟아 내려던 박상식은 얼떨떨한 얼굴로 한태경에게 인사했다. 둘이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애써 모르는 척하며 젓가락을 움직였다. 한태경은 교복 안에 티셔츠를 하나 입고 단추를 풀어 헤친 채로 돌아다녔다. 어슬렁어슬렁 교실 안으로 들어오자 내 앞에 있던 박상식이 주춤거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웬일이야?”
“그냥. 궁금해서.”
한태경이 빈 의자에 대충 걸터앉으며 짧게 대답하자 박상식이 아아, 하고 작게 신음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한태경과 달리 박상식은 앉아 있지도, 서 있지도 못하고 뻘쭘하게 주변만 둘러보았다. 자연스레 한태경 앞에서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선 모습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왜, 왜 왔는데?”
“지나가다 너 보여서.”
“아아, 그래.”
박상식은 놈이 어색한 듯 굴었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짧아 대화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교실에는 나를 제외하고도 한두 명이 더 남아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이 둘의 대화에 흥미가 있는지 흘끔거렸다. 나는 시선을 반찬에 둔 채로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하아. 이 한숨은 한태경의 것이었다. 공부를 하다 보면 한태경은 내 앞에서 한숨을 수시로 쉬었다.
“오랜만에 학교 왔다면서 여전히 좆같네.”
“어? 아.”
가벼운 타격음이 들렸다. 한태경이 주먹으로 박상식을 툭 건드린 모양이었다.
“왜?”
“아니. 아니야.”
때린 건 한태경인데 아무렇지 않은 척은 박상식이 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박상식이 뒷짐을 진 채로 서 있자 한태경이 박상식의 배를 툭툭 건드렸다. 처음에는 뒤로 밀려나던 박상식은 배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즈음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기력이 없는지, 놈은 아랫입술을 물고 버티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한태경.”
“아, 한태경?”
배를 치는 주먹의 힘이 점점 실리더니 무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박상식이 목소리를 낮추고 한태경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귀에 거슬린 듯, 오히려 놈이 박상식의 말을 따라 하자 박상식은 난감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입을 다물었다.
“왜. 오랜만에 학교 왔더니 좆같아?”
“아아니, 그게 아니고.”
“미쳤네, 이 새끼.”
어느 순간 한태경이 벌떡 일어났다. 박상식도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한태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태경만큼 큰 애는 학교에서도 거의 없었다. 한태경이 박상식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 녀석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아아, 왜 그래 너. 내가 뭐 잘못했어?”
“그냥, 얼굴이 좆같아.”
“뭐를, 아악!”
갑작스러운 비명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창가로 내몰린 박상식에게 한태경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그 직전이었다.
“작게 말해, 작게. 어?”
“흐읍, 흐으, 그러니까 왜…….”
“좆같다니까.”
한태경이 이유 없이 피식 웃으며 대답을 해 주었다. 누가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었다. 특히 구타를 당하고 있는 박상식에게는 특히. 오랜만에 학교를 왔다는 이유로 맞고 있는 것이었다.
구타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일찌감치 식사를 하러 간 애들이 돌아올 때까지 박상식은 신명 나게 맞았다. 웃으면서 교실로 뛰어 들어왔던 반 아이들은 한태경이 발길질을 하는 걸 보고는 숙연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야.”
“…….”
“무시하냐? 대답 못 해?”
“어어어!”
“잘해라. 어?”
“아, 알겠어.”
근 20분 넘게 이유 없이 맞은 박상식이 후다닥 대답하자 한태경이 잘하라며 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날도 더운데 비위도 좋네. 한태경은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서서 뒷문으로 걸어갔다. 잠깐 사이에 시선이 마주쳤다. 여전히 굳은 얼굴로, 한태경은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
“……한태경 왜 온 거야?”
“모르지, 그냥 갑자기 와서 존나 패던데.”
한태경이 지나간 자리에는 웅성거림만 남았다. 한껏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박상식의 위신은 반나절 만에 바닥으로 추락했고,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반 아이들은 서로서로에게 ‘박상식이 한태경에게 왜 맞았는가?’를 두고 토론했다. 다만 그걸 이야기하는 것도 그리 당당하고 시끌벅적하진 못해서 은밀히, 마치 비밀이라도 되는 양 질문하곤 했다.
“걍 얼굴이 좆같다 그랬다던데.”
“박상식이 좀 좆같긴 하지.”
보통 대화의 끝은 박상식에 대한 가벼운 무시였다. 한태경의 등장은 그런 의미였다. 이 무리 안에 형성된 서열과 힘의 논리를 철저히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동시에 박상식의 존재를 밟아 버리는 것. 새삼 한태경이 속한 위치가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놀랍게도,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을 입에 담던 누구도 한태경이 왜 박상식을 때렸으며, 그 정당방위 여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박상식이 잘못했네.”
“그 새끼가 문제네, 좆같아서 그런 거라며.”
그저 아이들은 박상식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할 뿐이었다. 가십거리로서 박상식은 별 화제가 되지 않는 편이었지만 한태경이 끼자 조금 달라졌다. 새삼 신기했다.
“왜 자꾸 쳐다봐?”
박상식은 화를 내며 몇 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게 끝이었다. 퉁퉁 부은 얼굴로 오후 수업을 들었는데, 선생들이 들어올 때마다 박상식에게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고 물어봤다. 정작 박상식은 가만히 있는데 다른 애들이 나서서 ‘친구와 싸웠다’고 하자 선생들은 하나같이 혀를 차며 이제 학교에 나온 애가 벌써 친구랑 쌈박질을 하면 어떻게 하냐며 박상식을 타박했다. 그러다 학교 진짜 잘릴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내자 박상식은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짜증을 삭였다.
“아니야.”
“왜? 볼수록 잘생겼어?”
“미친놈.”
어째 한태경의 레퍼토리는 달라지는 법도 없는지, 꽤 심각한 얼굴로 영어 교과서를 들여다보는 놈의 얼굴을 흘끔거리다가 들키고야 말았다. 갑자기 우리 반에 왜 왔냐고 물으려다가 내심 속이 시원해서 이유 따위 무슨 상관이 있겠나 싶었다.
놈은 감자튀김 세 개를 한꺼번에 입 안에 욱여넣었다. 저런 짓을 할 때는 좀 모자라 보이는데, 주먹은 되게 센가 보다. 그런 것치곤 나름 얌전하게 앉아서 공부를 하는 것도 꽤 신기했다. 공부해 본 적 없다는 말이 진짜인 것도 같았다.
“영어 짜증 난다. 한국말이나 잘하면 됐지, 뭘.”
“잘해 두면 좋아. 편하고.”
“영어 잘해?”
“어릴 때 잠깐 살아서.”
“오오.”
그건 또 몰랐네. 놈이 또 감자튀김을 잔뜩 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어릴 때 살다 온 것이 양분이 되어 나는 영어 공부에 특별히 시간을 쏟지 않는 편이었다. 놈은 한참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히죽 웃었다.
“그럼 해외여행 갈 때 걱정 안 해도 되겠네.”
“뭐를?”
“너 영어 잘한다며.”
“……근데 왜.”
네가 걱정을 안 하는데……. 질문을 하는 게 멍청해 보여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가끔 놈은 상상을 초월할 말은 꺼내곤 했는데 대체로 내가 생각해 본 적 없거나 연상하기 어려운 것들이라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이상하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선풍기의 풍력을 세게 올리고 나는 얼른 책에 집중했다. 감자튀김을 먹는 소리가 묘하게 거슬렸다.
***
“끝.”
예정된 시각의 20분 일찍 놈이 책을 덮었다. 사다 준 문제집을 곧잘 풀기에 거짓말인 줄 알았더니 정답률도 꽤 높은 편이었다. 놈은 책상에 엎어져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언제 다 풀어?”
“기다려.”
“기다리기 힘들어.”
머리가 워낙 백지라 그런 건가, 놈은 배운 걸 잘 흡수했다. 앞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를 무시한 채 내 책에 집중했지만 놈의 시선이 자꾸 신경 쓰였다.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비가 그치더라도 하늘은 늘 어두컴컴하고 눅눅하고 거센 바람이 불어 항상 비의 위험이 도사렸다.
놈의 집에 가져다 둔 내 티셔츠는 꽤 많아졌다. 지난번, 우연히 해가 났던 날 놈과 함께 빨래를 돌렸다. 세탁기 안에서 한데 뭉쳐 엉킨 놈과 내 옷을 털어 말리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멍청하게 내가 입을 옷도 생각하지 않고 다 빨아 버려서 놈의 옷을 빌려 입어야 했는데, 한태경은 그날따라 내게 유독 엉겨 왔다.
“임선우.”
“왜.”
“힘들다니까.”
“참아, 아직 안 끝났어. 아, 하지 마.”
본격적인 시험 기간이었다. 수행 평가가 완전히 끝나고 모든 과목이 시험 범위를 맞추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다. 놈의 발끝이 내 종아리를 긁었다. 놈은 열이 많은 편이었다. 둘이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 반드시 선풍기가 필요한 이유였다.
“더워.”
놈의 다리를 걷어차며 짜증을 냈더니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째 점점 공부를 끝내는 시간이 빨라지는 것 같아 지난번에 박박 우기고 우겨서 분량을 늘렸는데도 끝나는 시간은 비슷했다. 책상 아래로 놈이 내 발목을 더듬었다. 짜증을 부리며 몸을 밀어 내다가 어째 시간만 버릴 것 같아 그냥 놔두었더니 마치 장난감인 양 내 다리를 더듬거렸다.
“하지 마, 거기는.”
발목과 발등을 배회하던 손이 어느샌가 종아리를 두드리더니 종내에는 무릎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하지 말라고 낮게 경고하자 놈이 무릎 뒤쪽으로 손을 넣어 움푹 파인 곳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신기하네.”
“뭐가.”
“털도 별로 없는 것 같아서.”
“…….”
자꾸 꼼꼼하게 만져 댄다 싶었더니 저딴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털이 없진 않았다. ……적은 건 사실이지만.
그나마 있는 털도 색이 옅어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 봤자 솜털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아.”
“왜?”
“아냐.”
놈이 갑자기 탄성을 내뱉기에 반사적으로 물었더니 놈이 아니라며 대답을 했다. 별일 아닌가 싶어 다시 수학 문제에 집중했다. 놈은 즐거운 생각이 난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릎까지 올라왔던 손이 다시 발로 내려갔다. 발등뿐만 아니라 발바닥을 만지려 들기에 더러울 것 같아 몸을 뒤로 물렸다.
놈의 방해 덕분에 예정 시간보다 더 늦어졌다.
“10분이나 늦었어.”
“너 때문이거든?”
볼멘소리를 하는 놈에게 화를 내자 놈이 히죽 웃었다. 우리 집까지 가는 시간을 생각해 학습 시간을 정해 두었는데 늦어지면 놈은 불만을 터뜨렸다. 키스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맨날 물고 빠는 게 내 입술인데 저러고 싶을까. 놈이 앉은뱅이책상을 접어 정리하는 동안 나는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겼다.
“가자, 읏.”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는데, 한태경이 내 몸을 밀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로 뒷걸음질을 쳐 한태경의 침대에 걸터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놈은 내 어깨를 더듬어 가방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특별히 조심해야 할 건 없지만 내 물건을 던지니 신경은 쓰였다.
“왜 던져?”
“눕히고 싶어서.”
그러고는 정말로 내 몸을 뒤로 눕히곤 입을 맞추었다. 교복이 구겨질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갈아입지도 않는 거였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나는 그새 놈과의 키스가 익숙해졌다. 이게 과연 좋은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놈이 혀를 내 입 안에 집어넣고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내 혀를 잡아끄는 것에 이제는 제법 어울릴 수 있게 됐다. 깊이 혀뿌리까지 자극하며 여기저기 입 안을 간질이는 놈을 보고 있으면 명치께가 제법 뜨거워졌다.
놈이 내 위를 올라타며 아까 내내 더듬었던 무릎을 만졌다. 한쪽 다리를 제 허리에 감게 하고는 내 가슴께부터 허리, 엉덩이 라인을 손으로 훑었다. 내가 허락한 건 입술뿐인데 놈은 은근히 그 영역을 잘도 넓혀 갔다.
“왜 이런 건 입어 가지고.”
놈이 꼭 잠겨 있는 소매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투덜거렸다. 내가 긴소매밖에 못 입는 걸 빤히 알면서 하는 소리였다. 놈은 단추를 풀려는 듯 몇 번 시도하다가 쉽게 되지 않자 금세 포기하고는 허리께로 손을 옮겼다.
“아……!”
“왜?”
“하지 마.”
놈이 은근한 손길로 허리를 쓸어 올리면 소름이 돋았다. 움찔 몸을 떨며 놈의 팔을 밀어 내려고 하면 놈은 고집스럽게 허리를 더듬거렸다. 간지러운 듯, 묘한 기분에 하지 말라고 놈을 몇 번이나 말렸지만 이럴 때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교복 짜증 나.”
“맨날 입는 게 교복이면서.”
“여긴 학교가 아니잖아.”
놈이 투덜거리면서 내 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내 눈치를 살피더니 목덜미 안쪽에도 입을 맞추었다. 하얀 피부에 놈의 까슬한 입술이 닿으면 붉게 달아올랐다. 놈은 그 변화를 보는 걸 무척 좋아했다.
“다 벗었으면 좋겠는데.”
“변태 새끼.”
“이제 알았어?”
놈이 이렇게 나오면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웃으며 넘겼지만 놈의 말이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라는 건 종종 실감하곤 했다. 애초에 집에 갈 때 이렇게 열심히 교복을 챙겨 입은 것도, 한태경이 자꾸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그런 거였다. 요즘도 가끔 옷 갈아입을 타이밍을 놓치면 놈이 티셔츠 안쪽으로 맨 허리를 마구 더듬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