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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6화
2. 장마 (2)
“뭐 할까?”
“라면 먹는다며.”
“먹기 싫어졌어.”
내가 침대 끝에 앉자 놈은 슬금슬금 엉덩이걸음으로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팔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내 몸에서 비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놈의 옷에 냄새가 밸 것도, 놈이 비릿한 물 내음을 맡을 수도 있다는 것도 모두 나를 예민하게 하는 요소였다.
“생각보다 길다.”
놈이 셔츠의 소매를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셔츠는 팔꿈치를 덮는 정도의 길이였다. 놈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자꾸 피부가 닿았다. 습기를 머금어 축축한 피부가 닿는 게 싫었다.
“하지 마. 끈적거려.”
“난 그게 좋은데.”
“뭐라는 거야.”
이상한 소리 하고는. 놈을 피해 팔을 내 쪽으로 잡아당기자 억지로 몸을 붙이고 다가온다.
“오지 마, 더워.”
“안쪽은 더 하얗네.”
“…….”
놈이 갑작스레 던진 한마디에 나는 꾹 입을 다물었다. 내심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다. 애써 모르는 체하던 것을 정공법으로 찌르고 들어오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야, 임선우.”
놈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놈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장난기를 머금은 듯 아닌 듯, 미묘한 눈빛에 괜히 긴장했던 것도 같다. 대답 대신에 눈을 깜빡이자 놈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을 이어 갔다.
“키스하, 키스할래?”
그 질문에 딱히 선택지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말을 고르다가 나는 괜히 인상을 썼다. 이 상황이 못내 어색하고 민망해서 바꾸고 싶은 마음도 적잖이 있었다.
“……그거 때문에 집에 오라고 한 거야?”
“아니. 근데 지금 하면 딱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대답을 하고는, 놈은 불쑥 고개를 내밀어 내 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다. 놈의 혀가 입술 틈새를 두드리며 허락을 구했다. 괜한 심술에 모르는 체할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얕은 틈을 만들어 주자 그 작은 틈새로 놈의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키스는 금세 익숙해졌다. 처음 입을 맞출 때만 해도 또 이런 행위를 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나와 달리 놈은 틈만 나면 입을 맞추고 싶어 했다. 생각과 달리 더럽게 느껴지지도,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부드럽게 혀를 빨고 입 안을 간지럽히는 놈을 볼 때마다 얼마나 자주 해 봤기에 이렇게 능숙한가 싶었지만, 그걸 또 물어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아.”
잠깐 입술을 물리자 놈의 입에서 감탄성의 신음이 짧게 흘러나왔다. 미련이 남은 듯, 쪽 소리를 내며 짧게 입을 맞추곤 놈이 작게 웃었다.
“중독될 것 같아.”
언뜻 놈이 웃었던 것도 같았다. 놈의 눈을 피해, 이번에는 내가 벽의 장미를 셌다. 가볍게 입을 다물자 놈이 턱을 누르며 다시 입을 벌렸다. 조금 전보다 좀 더 성급하게 느껴지는 행위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한태경과 입을 맞추다 보면 종종 이런 일이 있었다. 때로는 괜히 서늘하기도 했고, 때로는 너무 뜨겁게 속이 들끓어 당황스러웠다.
자꾸 놈이 몸을 바싹 붙여 왔다. 놈이 품은 뜨끈한 열기가 자꾸 내게 전해져서 후덥지근해졌다. 몸을 자꾸 뒤로 물리고 물리다 보니 어느샌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매트리스의 탄력으로 가볍게 몸이 튕겼지만 그뿐이었다. 놀란 마음에 눈을 떴다가 놈과 눈이 마주쳤다.
“…….”
한태경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순간 미묘한 감정이 섞여 올라왔다. 팔에 닿은 여름 이불의 마른 감촉과 내가 입고 있는 한태경의 옷, 방금까지 입을 맞추고 있던 정황이 머릿속에서 섞이며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는 순간 놈의 어깨를 밀쳤다.
“아아아. 아파.”
“안 아프면서.”
놈은 내 말에 삐죽 웃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나서도 이상하리만치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쩐지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놈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어색해졌다.
“역시 집이 훨씬 좋다.”
“…….”
놈은 쓸데없는 소리만 했다. 평소라면 노려보기라도 했겠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그럴 기운이 없었다. 손에 힘이 쭉 빠져서 나는 그냥 하얗게 드러난 무릎만 쳐다보았다. 우르릉. 또다시 창밖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 어쩐지 나를 꾸짖는 기분이라 괜히 찔끔 겁이 났다.
“야.”
“……왜.”
“비 많이 올 것 같아.”
놈의 말에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마철인 줄은 알았지만 작정하고 쏟아붓는 모습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이렇게 많이 올 줄 알았으면 아까 그냥 집에 가는 거였는데……. 어차피 옷이 젖을 거라면 굳이 놈의 집에 들르지 않아도 되었다.
“큰일이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되잖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놈이 대수롭지 않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번에는 놈을 쳐다봤다. 한태경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하고는 하품을 했다. 잠을 자다니. 오늘 처음 집에 방문했는데 갑자기 하룻밤을 신세 지는 건 실례였다. 게다가 부모님께 허락도 안 받았고, 아직 한태경네 아버지 얼굴도 못 뵈었다.
“집에 갈 거야.”
“비 많이 오는데? 저렇게 쏟아지는데? 바람도 장난 아니야.”
집에 가겠다는 내 말에 놈이 과장되게 눈을 뜨고는 밖을 가리켰다. 바깥 날씨를 생각하니 스스로 한 말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얼굴을 들이밀며 묻는 놈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 날씨에 굳이 비를 뚫고 집에 가는 건 너무…… 힘든 일 같았다. 어쩐지 자신감이 없어져 고개를 갸웃거리다 작게 끄덕이자 놈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부모님께 허락도 안 받았잖아.”
“전화하면 되잖아. 우리 아버지 지방 가 계셔. 당분간 일 때문에 못 올라와.”
“…….”
그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너무 할 말이 없는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놈의 시선을 피해 밖을 쳐다봤다. 지나칠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다. 분명 일기 예보는 이 정도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기상청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만한 게 못 되었다. 나처럼 일기 예보를 많이 신경 쓰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중요한 일일진대 어째 잘 맞는 날이 드문 기분이었다.
“전화기 갖다 줄까?”
내가 창밖을 한참 쳐다보자 놈이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대답 대신 고개를 젓자 놈 역시 밖을 쳐다보았다.
“좀 기다려 보고.”
어차피 믿지 못할 기상 예보라면 차라리 좀 더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뭐 해?”
“공부.”
말없이 앉아 있다가 가방에서 교과서와 공책을 꺼냈다. 수행 평가가 많은 주간이었다. 과목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간이 평가와 검사에 정신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은 집에 가서 쉬고 한숨 돌리다가 수행 평가를 준비할 즈음이었지만, 집에 가지 못하니 여기서라도 해야 했다.
“책상 써도 돼?”
침대는 힘을 주면 자꾸 아래로 꺼져서 글씨를 쓰기 힘들었다. 놈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침대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 내일은 문학, 그다음 날은 영어. 하필 주요 과목이 모여 있어 바쁜 참이다.
“너 공부도 해?”
어느 순간 놈이 책상에 기대어 있었다. 참 이상한 질문이다. 공부도 하냐니. 학생이 공부 말고 특별히 할 일이 뭐가 있다는 건지. 이해 안 되는 표정으로 놈을 올려다보자 놈은 새삼 신기해하며 나를 쳐다봤다.
“나 공부하는 애 처음 봐.”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주변에는 공부하는 애 없어서.”
“…….”
그 말에 오랜만에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나도 모르게 이상한 표정을 짓자 놈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문득 생각나서 놈의 책상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책상은 그저 학생이란 구색 맞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사용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고등학교 문제집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보지 마, 민망해.”
“몇 등급인데?”
“뭐가?”
“모의고사. 그건 볼 거 아냐.”
“몰라. 찍고 자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나는 성적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문득 놈이 내게 혀를 차며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내가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니라, 내가 놈을 가르쳐야 할 판이었다. 괜한 막막함에 한숨이 나왔다. 놈은 드물게도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릴 땐 잘했어.”
“그게 언젠데?”
“한 열 살 때?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쯤 되면 인문계 고등학교에 온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할 말을 잃고 샤프만 만지작거리자 놈이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수업은 들어.”
“…….”
“가끔 빠지긴 하는데.”
“수업도 빠져?”
“안 빠져 봤어?”
내 말에 놈은 퍽 놀란 눈치였다. 어떻게 수업을 한 번도 안 빠지고 다 듣지? 중얼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어떻게 수업을 빠질 수가 있지. 매번 빠진 자리는 확인하는데. 저 반에 들어가는 선생들은 관심을 안 보이나.
“그럼 수행 평가는?”
“그게 뭔데.”
“…….”
그냥 말하지 말자. 자꾸 대화가 막히는 게 짜증 나서 그냥 놈을 무시하고 공책을 뒤적거렸다. 한태경은 내가 말없이 글씨를 쓰는 걸 쳐다봤다. 의외로 귀찮게 하지도 않았다. 가끔 자세를 바꾸느라 뒤척이는 게 전부였다. 놈은 한참 내가 글씨를 쓰는 걸 쳐다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게 그거지?”
한태경의 손에는 문학 교과서가 있었다. 사실 이게 한태경의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름이 쓰여 있지도, 사용한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펴 보기는 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담임이 뭐라고 하는 것 같던데.”
“너네 담임 문학이야?”
“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담임이 문학인 반을 떠올렸다. 2학년은 12반까지 있었다. 그중 여덟 반이 이과였고 네 반이 문과였다. 그리고 문학이 담임인 반은…….
“너 문과야?”
“어.”
문학이 담임인 반은 한 반뿐이었다. 그것도 문과. 이과인 나와는 아예 계열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내가 놈을 아예 몰랐나. 문과는 우리와 층도 다르게 쓰고 수업하는 내용도 달라서 어쩐지 낯설었다.
“친한 애가 문과 간대서 그냥 썼어.”
“…….”
굳이 문과를 선택한 이유조차 너무 놈다운 것이었다.
“이거 가지고 뭐 해야 하나 보지? 담임이 뭐라고 하긴 하던데.”
“시험 봐.”
“기말고사? 아직 아니잖아. 그 정도는 알아.”
“수행 평가라고 했잖아.”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니 짜증이 났다. 놈은 씨익 웃고 말았다. 수행 평가가 뭔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놈은 갑자기 아, 하고 작게 탄식하더니 눈을 반짝였다.
“수행 평가 내일만 하고 끝이야?”
“다음 주까지는 몰아칠걸. 문과는 잘 모르겠는데. 문학이야 공통 과목이라지만.”
“그럼 기말고사는 언제고?”
“7월 초?”
“오.”
놈은 혼자 중얼거리면서 손가락으로 뭔가를 세더니 퍽 반가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우리 집에서 공부하면 되겠다.”
“뭐를?”
“수행 평가도 준비해야 되고 기말고사 공부도 어차피 할 거잖아. 그러면 우리 집에서 하면 되지 않아?”
놈은 말을 꺼내 놓고 무척 자랑스러운 듯 보였다. 좋은 생각을 낸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었지만 또 틀린 말도 아니었다. 계열이 다른데 같이 공부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긴 하지만.
“나보다는 같이 문과 간 친구랑 하는 게 나을 텐데…….”
좀 전에 한태경을 문과로 이끌었다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것을 떠올리며 말을 꺼냈다.
“아아, 걔.”
놈은 눈썹을 찡긋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걔랑 하는 건 도움이 하나도 안 돼.”
이상하게 놈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랑 사이가 틀어졌나. 한참 동안 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놈은 곧장 웃어 보였다.
“왜 쳐다봤어? 잘생겨서?”
“미친놈.”
내가 욕을 하자 놈이 웃었다. 실없는 놈이었다.
***
미친 듯이 쏟아지던 비는 저녁이 되자 멈추었다. 아까 놈이 했던 말처럼 라면을 끓여 먹고 내가 사 온 오렌지 주스를 나누어 먹으며 일일연속극을 보다 보니 비가 그쳤다. 10시까지도 내내 쏟아지면 진짜 자고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터였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덜 마른 교복을 종이봉투에 넣어 챙기자 놈이 퍽 아쉬운 얼굴을 했다.
“자고 가지.”
“내일 학교 가야 해.”
“우리 집에서 바로 가면 되잖아.”
“…….”
놈과의 대화는 주제가 무엇이든 ‘우리 집에서 자고 가지’로 귀결되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가방을 챙겨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놈이 따라 나왔다.
“어두운데 혼자 다니면 위험해.”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그래도 위험해. 막 깡패들이 돈 뺏고 그런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놈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하곤 따라 나왔다. 반팔, 반바지에 슬리퍼를 지익지익 끌고 나와선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껄렁해 보이는 게 복도에서 다른 학생을 두드려 패다가 정학 먹었던 날이랑 겹쳐 보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지금처럼 웃는 게 또 색달라 보였다.
“나 쳐다보면서 무슨 생각 했어?”
“아무 생각 안 했는데.”
“잘생겼다는 생각?”
“…….”
정말 이럴 때는 재수 없어서 꼴도 보기 싫었다. 대꾸할 힘도 없어 앞만 쳐다보는데 그제야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아파트는 13층이 다였지만 엘리베이터가 워낙 느려 지겨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문이 열리는 속도조차 느렸다. 나를 보고 싱글싱글 웃는 놈을 무시하고 재빨리 안에 타서 닫힘 버튼을 눌렀다.
꼴도 보기 싫은데 콱 걸어 내려오라지. 그러나 느려 터진 엘리베이터 탓에 놈은 한발 먼저 나를 따라 들어왔다. 초를 셀 수 있을 정도로 느린 속도로 문이 닫히자마자 놈이 내 책가방을 가져갔다.
“내가 메고 갈 건데…….”
가져가지 말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놈이 내게 입을 맞추었다. 건조해서 까슬해진 입술이 내 입술을 물고 가볍게 위아래를 빨았다. 조금 전에 먹었던 라면이 언뜻 떠올라 놈을 밀어 내자 내 팔을 잡아당겨 몸을 가깝게 붙여 왔다. 잠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벽에 부딪혔다. 쿵 소리가 나자 놈이 나를 끌어당기며 내 어깨를 감쌌다.
“다쳤어?”
“너 때문이잖아.”
“그럼 자고 가.”
“지랄.”
이 순간까지 자고 가란 소리를 하는 놈 때문에 반사적으로 욕이 나왔다. 놈은 쪽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 내일 쉬는 날이었으면 자고 갔을 텐데.”
“아니거든.”
“왜. 아까는 학교 때문에 못 자고 간다며.”
내가 그런 말을 했나. 생각이 나지 않아 인상을 쓰자 놈이 키득거리며 코끝에도 입을 맞추었다. 턱을 당기는 것만으로 아주 쉽게 내 코에 놈의 입술이 닿았다. 이럴 때마다 새삼 놈과 나의 키 차이가 느껴지곤 했다. 놈은 뺨에 입술을 댄 상태로 내 허리께를 쓰다듬었다. 얇은 티셔츠 위로 살을 더듬는 느낌이 무척이나 생경했다. 한태경은 은근한 열기를 품고 있어 손가락이 닿은 곳에서는 홧홧한 느낌이 올라왔다.
“으…….”
쪽. 한참이나 뺨에 비벼지던 입술이 끈적한 소리를 내며 느리게 떨어졌다. 그동안 한태경의 손가락은 내 허리를 거꾸로 더듬어 올랐을 뿐이었다.
“내 옷 입고 있으니까 좋다.”
작게 신음을 흘리며 속삭이는 말에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다. 그래 봤자 지하상가 같은 데서 파는 티셔츠일 뿐이었다. 나에게는 조금 크지만. 다른 점이라면 이게 한태경의 옷이라는 것뿐이었다. 한참 만에 1층에 도착하자 놈은 퍽 아쉬운 얼굴을 했다. 집에 가는 길이 유독 짧았다.
***
어머니는 유독 늦게 돌아온 나를 보고 무척 놀라신 눈치였지만, 내가 한태경의 옷을 입고 가자 친구가 생긴 거냐며 내심 기뻐했다. 다 젖은 교복을 세탁소에 맡기고 놈의 옷을 세탁한 후에 고맙다는 인사를 잊으면 안 된다는 말도 해 주었다. 친구랑 맛있는 걸 사 먹으라며 내게 용돈을 챙겨 주시기까지 했다. 고등학생 두 명이 군것질을 하기엔 터무니없이 큰돈이지만 받아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아, 안 하던 공부하려니까 머리에 쥐 날 것 같아.”
점심시간마다 암묵적으로 옥상에서 모이던 약속은 장마가 길어지며 자연스레 깨졌다. 해가 나오려나 싶은 날에는 어김없이 비가 더욱 쏟아졌고, 혹은 오전 내내 쏟아지다가 집에 갈 즈음에야 겨우 해가 나곤 했다.
점심시간 한 시간이 꽤 길다는 걸 느끼며 묘한 허기짐에 괴로워지는 빈도수가 늘어날 무렵, 나는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주머니가 지난밤에 미리 해 두신 반찬을 어머니가 아침에 싸 주시면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혼자 먹곤 했다. 혼자 먹는 밥은 익숙했지만 이상하게 어색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뭔데.”
“법 얘기. 어려워.”
그러다 보니 학교가 끝나고 놈의 집에 가는 날이 늘었다. 몇 번은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놈은 이제는 먼저 가서 집을 정리하고 나를 맞아 주었다. 그 때문인지 놈의 집에 갈 때마다 조금씩 깨끗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놈이 읽던 교과서를 가져갔다. 형법과 민법, 그리고 우리나라의 항소 제도 따위에 대한 설명이라 특별히 어려울 건 없어 보였지만 한태경은 어렵다며 투덜거렸다.
“그냥 외워.”
“말이 쉽지.”
내 말에 한태경이 중얼댔다. 놈의 집에 가는 횟수가 늘어나고 내가 가장 처음 한 일은 집에서 입던 옷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내가 보란 듯이 옷을 챙겨 오자 놈은 새삼 인상을 쓰며 내내 투덜거렸다.
어찌어찌 수행 평가를 잘 넘겼지만, 기말고사 공부는 영 쉽지 않은지 머리가 아프다며 공부하다 말고 갑자기 엎드려서 자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말로는 수행 평가 인쇄지에 이름 말고 다른 걸 써 본 게 처음이라고 했는데, 의외로 또 성적은 나쁘지 않은지 처음으로 선생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말도 했다.
“야.”
앉은뱅이책상에 코를 박고 엎드려 있던 놈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이마 한가운데에 빨갛게 자국이 남아 있어서 보기에 웃겼다. 책상 아래에는 아까 시켜 먹었던 피자 두 판이 박스째로 뒹굴고 있었다. 한 판은 놈이 거의 다 먹었고, 나는 고작 두세 조각을 먹었다. 어머니가 주신 용돈은 대부분 이렇게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데 쓰이곤 했다.
“왜.”
“심심한데 키스할래?”
이번에는 내 표정이 이상해질 차례였다. 한태경은 꼭 저런 느끼한 말을 했다. 처음에는 며칠에 한 번 키스를 하자고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매일매일 그 짓을 했고, 또다시 세 보니 어느 날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지금이야 질문을 해 왔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놈은 꾸물꾸물 내 옆으로 다가와 뺨이나 눈가부터 입술로 더듬어 대기 시작해서 입을 맞추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싫어.”
“아, 또.”
싱글싱글 웃으며 입을 내밀던 놈을 밀어 내자 팍 인상을 썼다. 지금은 공부 중이었고, 어쨌거나 나는 성적을 꽤 신경 쓰는 편이었다. 놈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입술을 내밀었다. 또 밀어 버렸지만.
“아, 공부할 맛 안 나. 나 살면서 이렇게 공부 열심히 하는 거 처음인데.”
“…….”
가끔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 때면 난감함을 느끼곤 했다. 공부가 처음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인지, 놈은 종종 내가 상식으로 여기는 것들을 몰라 질문하곤 했다. 특히 영어의 경우는 아주 기본적인 단어조차 잘 모르기도 했다. 일부러 나 때문에 앞에 앉아 공부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 실로 대견한 일이었다.
“머리 깨져서 죽어 버릴 것 같아.”
“…….”
진심을 담은 놈의 말에 양심이 은근히 따끔거렸다.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괴고 창밖을 쳐다보는 놈을 흘끔거리다가 나는 꽤 오랫동안 고민했던 말을 꺼냈다.
“그거 다 외우면.”
“뭐가?”
“다 외우면 하자.”
“뭐를?”
“…….”
“키스?”
너무나 자연스럽게 키스를 입에 담는 놈과 달리 나는 아직 좀, 어색했다. 못 들은 척 책만 보는데 놈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있던 놈이 갑자기 자세를 잡고 앉아 교과서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10분만 기다려.”
미쳤나 봐, 진짜.
2. 장마 (2)
“뭐 할까?”
“라면 먹는다며.”
“먹기 싫어졌어.”
내가 침대 끝에 앉자 놈은 슬금슬금 엉덩이걸음으로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팔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내 몸에서 비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놈의 옷에 냄새가 밸 것도, 놈이 비릿한 물 내음을 맡을 수도 있다는 것도 모두 나를 예민하게 하는 요소였다.
“생각보다 길다.”
놈이 셔츠의 소매를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셔츠는 팔꿈치를 덮는 정도의 길이였다. 놈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자꾸 피부가 닿았다. 습기를 머금어 축축한 피부가 닿는 게 싫었다.
“하지 마. 끈적거려.”
“난 그게 좋은데.”
“뭐라는 거야.”
이상한 소리 하고는. 놈을 피해 팔을 내 쪽으로 잡아당기자 억지로 몸을 붙이고 다가온다.
“오지 마, 더워.”
“안쪽은 더 하얗네.”
“…….”
놈이 갑작스레 던진 한마디에 나는 꾹 입을 다물었다. 내심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다. 애써 모르는 체하던 것을 정공법으로 찌르고 들어오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야, 임선우.”
놈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놈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장난기를 머금은 듯 아닌 듯, 미묘한 눈빛에 괜히 긴장했던 것도 같다. 대답 대신에 눈을 깜빡이자 놈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을 이어 갔다.
“키스하, 키스할래?”
그 질문에 딱히 선택지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말을 고르다가 나는 괜히 인상을 썼다. 이 상황이 못내 어색하고 민망해서 바꾸고 싶은 마음도 적잖이 있었다.
“……그거 때문에 집에 오라고 한 거야?”
“아니. 근데 지금 하면 딱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대답을 하고는, 놈은 불쑥 고개를 내밀어 내 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다. 놈의 혀가 입술 틈새를 두드리며 허락을 구했다. 괜한 심술에 모르는 체할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얕은 틈을 만들어 주자 그 작은 틈새로 놈의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키스는 금세 익숙해졌다. 처음 입을 맞출 때만 해도 또 이런 행위를 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나와 달리 놈은 틈만 나면 입을 맞추고 싶어 했다. 생각과 달리 더럽게 느껴지지도,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부드럽게 혀를 빨고 입 안을 간지럽히는 놈을 볼 때마다 얼마나 자주 해 봤기에 이렇게 능숙한가 싶었지만, 그걸 또 물어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아.”
잠깐 입술을 물리자 놈의 입에서 감탄성의 신음이 짧게 흘러나왔다. 미련이 남은 듯, 쪽 소리를 내며 짧게 입을 맞추곤 놈이 작게 웃었다.
“중독될 것 같아.”
언뜻 놈이 웃었던 것도 같았다. 놈의 눈을 피해, 이번에는 내가 벽의 장미를 셌다. 가볍게 입을 다물자 놈이 턱을 누르며 다시 입을 벌렸다. 조금 전보다 좀 더 성급하게 느껴지는 행위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한태경과 입을 맞추다 보면 종종 이런 일이 있었다. 때로는 괜히 서늘하기도 했고, 때로는 너무 뜨겁게 속이 들끓어 당황스러웠다.
자꾸 놈이 몸을 바싹 붙여 왔다. 놈이 품은 뜨끈한 열기가 자꾸 내게 전해져서 후덥지근해졌다. 몸을 자꾸 뒤로 물리고 물리다 보니 어느샌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매트리스의 탄력으로 가볍게 몸이 튕겼지만 그뿐이었다. 놀란 마음에 눈을 떴다가 놈과 눈이 마주쳤다.
“…….”
한태경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순간 미묘한 감정이 섞여 올라왔다. 팔에 닿은 여름 이불의 마른 감촉과 내가 입고 있는 한태경의 옷, 방금까지 입을 맞추고 있던 정황이 머릿속에서 섞이며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는 순간 놈의 어깨를 밀쳤다.
“아아아. 아파.”
“안 아프면서.”
놈은 내 말에 삐죽 웃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나서도 이상하리만치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쩐지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놈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어색해졌다.
“역시 집이 훨씬 좋다.”
“…….”
놈은 쓸데없는 소리만 했다. 평소라면 노려보기라도 했겠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그럴 기운이 없었다. 손에 힘이 쭉 빠져서 나는 그냥 하얗게 드러난 무릎만 쳐다보았다. 우르릉. 또다시 창밖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 어쩐지 나를 꾸짖는 기분이라 괜히 찔끔 겁이 났다.
“야.”
“……왜.”
“비 많이 올 것 같아.”
놈의 말에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마철인 줄은 알았지만 작정하고 쏟아붓는 모습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이렇게 많이 올 줄 알았으면 아까 그냥 집에 가는 거였는데……. 어차피 옷이 젖을 거라면 굳이 놈의 집에 들르지 않아도 되었다.
“큰일이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되잖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놈이 대수롭지 않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번에는 놈을 쳐다봤다. 한태경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하고는 하품을 했다. 잠을 자다니. 오늘 처음 집에 방문했는데 갑자기 하룻밤을 신세 지는 건 실례였다. 게다가 부모님께 허락도 안 받았고, 아직 한태경네 아버지 얼굴도 못 뵈었다.
“집에 갈 거야.”
“비 많이 오는데? 저렇게 쏟아지는데? 바람도 장난 아니야.”
집에 가겠다는 내 말에 놈이 과장되게 눈을 뜨고는 밖을 가리켰다. 바깥 날씨를 생각하니 스스로 한 말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얼굴을 들이밀며 묻는 놈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 날씨에 굳이 비를 뚫고 집에 가는 건 너무…… 힘든 일 같았다. 어쩐지 자신감이 없어져 고개를 갸웃거리다 작게 끄덕이자 놈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부모님께 허락도 안 받았잖아.”
“전화하면 되잖아. 우리 아버지 지방 가 계셔. 당분간 일 때문에 못 올라와.”
“…….”
그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너무 할 말이 없는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놈의 시선을 피해 밖을 쳐다봤다. 지나칠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다. 분명 일기 예보는 이 정도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기상청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만한 게 못 되었다. 나처럼 일기 예보를 많이 신경 쓰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중요한 일일진대 어째 잘 맞는 날이 드문 기분이었다.
“전화기 갖다 줄까?”
내가 창밖을 한참 쳐다보자 놈이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대답 대신 고개를 젓자 놈 역시 밖을 쳐다보았다.
“좀 기다려 보고.”
어차피 믿지 못할 기상 예보라면 차라리 좀 더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뭐 해?”
“공부.”
말없이 앉아 있다가 가방에서 교과서와 공책을 꺼냈다. 수행 평가가 많은 주간이었다. 과목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간이 평가와 검사에 정신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은 집에 가서 쉬고 한숨 돌리다가 수행 평가를 준비할 즈음이었지만, 집에 가지 못하니 여기서라도 해야 했다.
“책상 써도 돼?”
침대는 힘을 주면 자꾸 아래로 꺼져서 글씨를 쓰기 힘들었다. 놈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침대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 내일은 문학, 그다음 날은 영어. 하필 주요 과목이 모여 있어 바쁜 참이다.
“너 공부도 해?”
어느 순간 놈이 책상에 기대어 있었다. 참 이상한 질문이다. 공부도 하냐니. 학생이 공부 말고 특별히 할 일이 뭐가 있다는 건지. 이해 안 되는 표정으로 놈을 올려다보자 놈은 새삼 신기해하며 나를 쳐다봤다.
“나 공부하는 애 처음 봐.”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주변에는 공부하는 애 없어서.”
“…….”
그 말에 오랜만에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나도 모르게 이상한 표정을 짓자 놈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문득 생각나서 놈의 책상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책상은 그저 학생이란 구색 맞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사용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고등학교 문제집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보지 마, 민망해.”
“몇 등급인데?”
“뭐가?”
“모의고사. 그건 볼 거 아냐.”
“몰라. 찍고 자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나는 성적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문득 놈이 내게 혀를 차며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내가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니라, 내가 놈을 가르쳐야 할 판이었다. 괜한 막막함에 한숨이 나왔다. 놈은 드물게도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릴 땐 잘했어.”
“그게 언젠데?”
“한 열 살 때?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쯤 되면 인문계 고등학교에 온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할 말을 잃고 샤프만 만지작거리자 놈이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수업은 들어.”
“…….”
“가끔 빠지긴 하는데.”
“수업도 빠져?”
“안 빠져 봤어?”
내 말에 놈은 퍽 놀란 눈치였다. 어떻게 수업을 한 번도 안 빠지고 다 듣지? 중얼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어떻게 수업을 빠질 수가 있지. 매번 빠진 자리는 확인하는데. 저 반에 들어가는 선생들은 관심을 안 보이나.
“그럼 수행 평가는?”
“그게 뭔데.”
“…….”
그냥 말하지 말자. 자꾸 대화가 막히는 게 짜증 나서 그냥 놈을 무시하고 공책을 뒤적거렸다. 한태경은 내가 말없이 글씨를 쓰는 걸 쳐다봤다. 의외로 귀찮게 하지도 않았다. 가끔 자세를 바꾸느라 뒤척이는 게 전부였다. 놈은 한참 내가 글씨를 쓰는 걸 쳐다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게 그거지?”
한태경의 손에는 문학 교과서가 있었다. 사실 이게 한태경의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름이 쓰여 있지도, 사용한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펴 보기는 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담임이 뭐라고 하는 것 같던데.”
“너네 담임 문학이야?”
“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담임이 문학인 반을 떠올렸다. 2학년은 12반까지 있었다. 그중 여덟 반이 이과였고 네 반이 문과였다. 그리고 문학이 담임인 반은…….
“너 문과야?”
“어.”
문학이 담임인 반은 한 반뿐이었다. 그것도 문과. 이과인 나와는 아예 계열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내가 놈을 아예 몰랐나. 문과는 우리와 층도 다르게 쓰고 수업하는 내용도 달라서 어쩐지 낯설었다.
“친한 애가 문과 간대서 그냥 썼어.”
“…….”
굳이 문과를 선택한 이유조차 너무 놈다운 것이었다.
“이거 가지고 뭐 해야 하나 보지? 담임이 뭐라고 하긴 하던데.”
“시험 봐.”
“기말고사? 아직 아니잖아. 그 정도는 알아.”
“수행 평가라고 했잖아.”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니 짜증이 났다. 놈은 씨익 웃고 말았다. 수행 평가가 뭔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놈은 갑자기 아, 하고 작게 탄식하더니 눈을 반짝였다.
“수행 평가 내일만 하고 끝이야?”
“다음 주까지는 몰아칠걸. 문과는 잘 모르겠는데. 문학이야 공통 과목이라지만.”
“그럼 기말고사는 언제고?”
“7월 초?”
“오.”
놈은 혼자 중얼거리면서 손가락으로 뭔가를 세더니 퍽 반가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우리 집에서 공부하면 되겠다.”
“뭐를?”
“수행 평가도 준비해야 되고 기말고사 공부도 어차피 할 거잖아. 그러면 우리 집에서 하면 되지 않아?”
놈은 말을 꺼내 놓고 무척 자랑스러운 듯 보였다. 좋은 생각을 낸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었지만 또 틀린 말도 아니었다. 계열이 다른데 같이 공부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긴 하지만.
“나보다는 같이 문과 간 친구랑 하는 게 나을 텐데…….”
좀 전에 한태경을 문과로 이끌었다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것을 떠올리며 말을 꺼냈다.
“아아, 걔.”
놈은 눈썹을 찡긋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걔랑 하는 건 도움이 하나도 안 돼.”
이상하게 놈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랑 사이가 틀어졌나. 한참 동안 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놈은 곧장 웃어 보였다.
“왜 쳐다봤어? 잘생겨서?”
“미친놈.”
내가 욕을 하자 놈이 웃었다. 실없는 놈이었다.
***
미친 듯이 쏟아지던 비는 저녁이 되자 멈추었다. 아까 놈이 했던 말처럼 라면을 끓여 먹고 내가 사 온 오렌지 주스를 나누어 먹으며 일일연속극을 보다 보니 비가 그쳤다. 10시까지도 내내 쏟아지면 진짜 자고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터였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덜 마른 교복을 종이봉투에 넣어 챙기자 놈이 퍽 아쉬운 얼굴을 했다.
“자고 가지.”
“내일 학교 가야 해.”
“우리 집에서 바로 가면 되잖아.”
“…….”
놈과의 대화는 주제가 무엇이든 ‘우리 집에서 자고 가지’로 귀결되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가방을 챙겨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놈이 따라 나왔다.
“어두운데 혼자 다니면 위험해.”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그래도 위험해. 막 깡패들이 돈 뺏고 그런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놈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하곤 따라 나왔다. 반팔, 반바지에 슬리퍼를 지익지익 끌고 나와선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껄렁해 보이는 게 복도에서 다른 학생을 두드려 패다가 정학 먹었던 날이랑 겹쳐 보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지금처럼 웃는 게 또 색달라 보였다.
“나 쳐다보면서 무슨 생각 했어?”
“아무 생각 안 했는데.”
“잘생겼다는 생각?”
“…….”
정말 이럴 때는 재수 없어서 꼴도 보기 싫었다. 대꾸할 힘도 없어 앞만 쳐다보는데 그제야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아파트는 13층이 다였지만 엘리베이터가 워낙 느려 지겨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문이 열리는 속도조차 느렸다. 나를 보고 싱글싱글 웃는 놈을 무시하고 재빨리 안에 타서 닫힘 버튼을 눌렀다.
꼴도 보기 싫은데 콱 걸어 내려오라지. 그러나 느려 터진 엘리베이터 탓에 놈은 한발 먼저 나를 따라 들어왔다. 초를 셀 수 있을 정도로 느린 속도로 문이 닫히자마자 놈이 내 책가방을 가져갔다.
“내가 메고 갈 건데…….”
가져가지 말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놈이 내게 입을 맞추었다. 건조해서 까슬해진 입술이 내 입술을 물고 가볍게 위아래를 빨았다. 조금 전에 먹었던 라면이 언뜻 떠올라 놈을 밀어 내자 내 팔을 잡아당겨 몸을 가깝게 붙여 왔다. 잠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벽에 부딪혔다. 쿵 소리가 나자 놈이 나를 끌어당기며 내 어깨를 감쌌다.
“다쳤어?”
“너 때문이잖아.”
“그럼 자고 가.”
“지랄.”
이 순간까지 자고 가란 소리를 하는 놈 때문에 반사적으로 욕이 나왔다. 놈은 쪽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 내일 쉬는 날이었으면 자고 갔을 텐데.”
“아니거든.”
“왜. 아까는 학교 때문에 못 자고 간다며.”
내가 그런 말을 했나. 생각이 나지 않아 인상을 쓰자 놈이 키득거리며 코끝에도 입을 맞추었다. 턱을 당기는 것만으로 아주 쉽게 내 코에 놈의 입술이 닿았다. 이럴 때마다 새삼 놈과 나의 키 차이가 느껴지곤 했다. 놈은 뺨에 입술을 댄 상태로 내 허리께를 쓰다듬었다. 얇은 티셔츠 위로 살을 더듬는 느낌이 무척이나 생경했다. 한태경은 은근한 열기를 품고 있어 손가락이 닿은 곳에서는 홧홧한 느낌이 올라왔다.
“으…….”
쪽. 한참이나 뺨에 비벼지던 입술이 끈적한 소리를 내며 느리게 떨어졌다. 그동안 한태경의 손가락은 내 허리를 거꾸로 더듬어 올랐을 뿐이었다.
“내 옷 입고 있으니까 좋다.”
작게 신음을 흘리며 속삭이는 말에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다. 그래 봤자 지하상가 같은 데서 파는 티셔츠일 뿐이었다. 나에게는 조금 크지만. 다른 점이라면 이게 한태경의 옷이라는 것뿐이었다. 한참 만에 1층에 도착하자 놈은 퍽 아쉬운 얼굴을 했다. 집에 가는 길이 유독 짧았다.
***
어머니는 유독 늦게 돌아온 나를 보고 무척 놀라신 눈치였지만, 내가 한태경의 옷을 입고 가자 친구가 생긴 거냐며 내심 기뻐했다. 다 젖은 교복을 세탁소에 맡기고 놈의 옷을 세탁한 후에 고맙다는 인사를 잊으면 안 된다는 말도 해 주었다. 친구랑 맛있는 걸 사 먹으라며 내게 용돈을 챙겨 주시기까지 했다. 고등학생 두 명이 군것질을 하기엔 터무니없이 큰돈이지만 받아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아, 안 하던 공부하려니까 머리에 쥐 날 것 같아.”
점심시간마다 암묵적으로 옥상에서 모이던 약속은 장마가 길어지며 자연스레 깨졌다. 해가 나오려나 싶은 날에는 어김없이 비가 더욱 쏟아졌고, 혹은 오전 내내 쏟아지다가 집에 갈 즈음에야 겨우 해가 나곤 했다.
점심시간 한 시간이 꽤 길다는 걸 느끼며 묘한 허기짐에 괴로워지는 빈도수가 늘어날 무렵, 나는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주머니가 지난밤에 미리 해 두신 반찬을 어머니가 아침에 싸 주시면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혼자 먹곤 했다. 혼자 먹는 밥은 익숙했지만 이상하게 어색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뭔데.”
“법 얘기. 어려워.”
그러다 보니 학교가 끝나고 놈의 집에 가는 날이 늘었다. 몇 번은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놈은 이제는 먼저 가서 집을 정리하고 나를 맞아 주었다. 그 때문인지 놈의 집에 갈 때마다 조금씩 깨끗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놈이 읽던 교과서를 가져갔다. 형법과 민법, 그리고 우리나라의 항소 제도 따위에 대한 설명이라 특별히 어려울 건 없어 보였지만 한태경은 어렵다며 투덜거렸다.
“그냥 외워.”
“말이 쉽지.”
내 말에 한태경이 중얼댔다. 놈의 집에 가는 횟수가 늘어나고 내가 가장 처음 한 일은 집에서 입던 옷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내가 보란 듯이 옷을 챙겨 오자 놈은 새삼 인상을 쓰며 내내 투덜거렸다.
어찌어찌 수행 평가를 잘 넘겼지만, 기말고사 공부는 영 쉽지 않은지 머리가 아프다며 공부하다 말고 갑자기 엎드려서 자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말로는 수행 평가 인쇄지에 이름 말고 다른 걸 써 본 게 처음이라고 했는데, 의외로 또 성적은 나쁘지 않은지 처음으로 선생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말도 했다.
“야.”
앉은뱅이책상에 코를 박고 엎드려 있던 놈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이마 한가운데에 빨갛게 자국이 남아 있어서 보기에 웃겼다. 책상 아래에는 아까 시켜 먹었던 피자 두 판이 박스째로 뒹굴고 있었다. 한 판은 놈이 거의 다 먹었고, 나는 고작 두세 조각을 먹었다. 어머니가 주신 용돈은 대부분 이렇게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데 쓰이곤 했다.
“왜.”
“심심한데 키스할래?”
이번에는 내 표정이 이상해질 차례였다. 한태경은 꼭 저런 느끼한 말을 했다. 처음에는 며칠에 한 번 키스를 하자고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매일매일 그 짓을 했고, 또다시 세 보니 어느 날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지금이야 질문을 해 왔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놈은 꾸물꾸물 내 옆으로 다가와 뺨이나 눈가부터 입술로 더듬어 대기 시작해서 입을 맞추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싫어.”
“아, 또.”
싱글싱글 웃으며 입을 내밀던 놈을 밀어 내자 팍 인상을 썼다. 지금은 공부 중이었고, 어쨌거나 나는 성적을 꽤 신경 쓰는 편이었다. 놈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입술을 내밀었다. 또 밀어 버렸지만.
“아, 공부할 맛 안 나. 나 살면서 이렇게 공부 열심히 하는 거 처음인데.”
“…….”
가끔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 때면 난감함을 느끼곤 했다. 공부가 처음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인지, 놈은 종종 내가 상식으로 여기는 것들을 몰라 질문하곤 했다. 특히 영어의 경우는 아주 기본적인 단어조차 잘 모르기도 했다. 일부러 나 때문에 앞에 앉아 공부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 실로 대견한 일이었다.
“머리 깨져서 죽어 버릴 것 같아.”
“…….”
진심을 담은 놈의 말에 양심이 은근히 따끔거렸다.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괴고 창밖을 쳐다보는 놈을 흘끔거리다가 나는 꽤 오랫동안 고민했던 말을 꺼냈다.
“그거 다 외우면.”
“뭐가?”
“다 외우면 하자.”
“뭐를?”
“…….”
“키스?”
너무나 자연스럽게 키스를 입에 담는 놈과 달리 나는 아직 좀, 어색했다. 못 들은 척 책만 보는데 놈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있던 놈이 갑자기 자세를 잡고 앉아 교과서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10분만 기다려.”
미쳤나 봐,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