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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5화

1. 초여름 (5)


***



가방을 들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우산을 꺼내려다가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될 대로 되라지. 햇빛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짜증이 났다. 저주에 걸린 동화 속 공주도 아니고 햇볕 하나에 절절매는 꼴이 한심했다. 남들 다 반팔에 반바지 입고 다니는 한여름에도 굳이 맞춤옷으로 긴팔에 긴바지, 늘 운동화나 신고 다니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짜증 나.”

거의 뛸 듯이 걸어가다가 우뚝 멈추어 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나를 스쳤다. 보지 않아도 내 몰골이 엉망인 줄 알고 있었다. 놈에게 맞은 곳이 퉁퉁 부어올랐다. 얼굴도, 옷도 모두 엉망일 것이다. 얼굴이 따끔거렸다. 해가 떨어지지 않은 탓이었다.

어느덧 놈이 사는 아파트 단지 앞이었다. 지난번에 이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줬던 것이 떠올랐다. 굳이 나를 쳐다보는 사람에게 먼저 시비를 걸고, 마치 선심 쓰듯 아이스크림을 사 주었던 것도 생각났다.

‘나 보고 싶다고 울면 안 돼.’

문득 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보고 싶기는 무슨. 한태경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참 잘했다. 나는 놈이 준 사진을 내다 버릴까 하다가 실례라고 생각해 어쩔 수 없이 가지고 다녔다.

놈을 떠올리니 갑자기 더 화가 났다. 개자식. 왜 사람을 때려서 학교도 못 나오고 난리인지. 마치 슈퍼가 놈인 양 나는 도망치듯 지나쳤다. 꼭 이 근처 어디선가 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 근처에 있었다면 우리가 벌써 몇 번은 만났을 것이다.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하교했고, 놈은 그 시간을 잘 알고 있으니까.

“개자식.”

나는 놈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사진을 줄 거였으면 차라리 얼굴이나 비추든가. 박상식에게 걷어채인 허벅지가 욱신거렸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놈을 떠올리니 속이 울렁거렸다. 울컥 솟구치는 감정을 억지로 억눌렀다. 이미 몰골이 말이 아닌데, 여기서 울기까지 하면 꼴이 아주 볼만할 것이다. 걷는 데에만 집중한 탓에 금세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나를 보고 걱정하며 호들갑을 떨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팠다.

“야. 임선우.”

막 벨을 누르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익숙한 음성이 가벼운 어조로 나를 불렀다.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한태경이 서 있었다. 놈은 이상한 무늬가 그려진 검은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놈의 사복 차림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놈은 맞은편 집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다가 내가 돌아보자 웃으며 다가왔다.

“나 안 보고 싶었어?”

개자식.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내게 다가오던 놈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퍽 심각해진 얼굴로 놈은 재빠르게 내 모습을 여기저기 훑었다.

“너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놈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그 순간, 억눌렀던 감정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왔다. 나는 주먹을 쥐고 놈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그냥, 아무렇게나 손이 닿는 대로 있는 힘껏 놈을 때렸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야, 잠깐, 너 왜, 갑자기……!”

“너는 왜!”

한태경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팔에 몇 번은 스치듯 맞아 놈이 작게 신음하는 것도 들렸다. 허둥지둥 뒷걸음질을 치며 맞아 주다가 도무지 견디지 못하겠는지 내 팔을 잡아챘다.

셔츠 한 겹 너머로 느껴지는 놈의 체온이 뜨거웠다. 그리고 놈은 나보다 훨씬 단단하고, 악력이 강했다. 놈이 나를 막아서자 나도 모를 말을 내질렀다. 알 수 없는 설움이 터져 나왔다. 놈에게 잡힌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굳어 있던 놈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너는 왜, 왜 학교에, 왜…….”

“어?”

“개새끼, 왜 학교를 안 나와서, 왜, 왜 나를…….”

왜 나를 혼자 내버려 둬. 왜 내가 이런 짓을 당하게 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 놈에게 화를 내려다가, 그게 모두 분풀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네가 학교에 있었으면, 내가 너를, 한태경을 만났더라면.

“너 울어?”

나는 놈의 말에, 그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울고 있었다. 얻어터져서 뜨겁게 열이 오른 뺨에 뜨끈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온 힘을 다해 뻗었던 주먹에는 어느새 힘이 풀려 있었다. 놈이 손의 힘을 풀자 내 팔이 맥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하자 놈이 내게 손을 뻗어 왔다.

“꺼져.”

내 어깨를 잡으려는 놈의 팔을 밀어 냈지만, 우스울 정도로 내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놈은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곤 내 몸을 잡아챘다. 등을 감싸는 놈의 팔을 벗어나려고 한참 실랑이를 벌였지만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짓이었다.

“임선우.”

놈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눈물이 차올라 희뿌연 시선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놈은, 놈은 달랐다. 전에 본 적 없는 차분한 눈빛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언뜻 부드러운 듯한 그 표정에 잔뜩 약이 올라 화를 냈던 것이 이상하리만치 누그러졌다. 잔뜩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있던 머릿속이 어느샌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나를 복잡하게 했던 그 모든 게 부드럽게 녹아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놈이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내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고, 사진을 쥐여 주고, 내 우산을 들었던 손이다. 놈은 그 손으로 무척 조심스럽게 내 뺨을 더듬었다. 투박하고 뜨거운 손이 퉁퉁 부은 얼굴에 닿았다. 놈은 내 이름을 부르고 한참이나 있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눈앞에서 울렁이는 것이 보였다.

“나 보고 싶었어?”

한참 만에 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 고작 하고 싶은 말이 그것뿐이라니. 그러나 우습게도 그 말에 씩씩거리던 호흡이 가라앉고, 그동안 꽉 막혀 있던 명치가 풀어졌다.

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축축하게 젖은 눈썹으로 뜨거운 것이 닿았다. 한태경의 입술은 딱 그만큼 뜨거웠다. 까끌까끌한 입술에 눈가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등을 넘어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놈의 손이 건반을 두드리듯 옆구리를 만지작거렸다. 한참 만에 떨어진 놈이 슬며시 고개를 비틀어 내게 입을 맞추었다. 놈은 내 턱을 매만져 꾹 다물린 입술을 벌렸다. 부드럽게 파고드는 혀의 감촉에 전신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놈의 등을 끌어안았다. 한껏 강해진 놈의 체취에 괜시리 혼곤해졌다.

“이리 와.”

놈이 나를 안은 채로 끌어당겼다. 담장 아래, 얕게 깔린 그늘에 나를 몰아넣고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놈이 속삭였다.

“내가 보고 싶었어?”

퍽 집착적인 질문에 아마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던 것 같다.

“미친 새끼.”

나도 모르게 툭 내뱉은 욕지거리에 놈이 키득거리며 뺨에 입술을 부볐다.

“넌 긍정의 표현을 이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

“뭐래.”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며 쏘아 주려는데 놈이 다시 내 입술을 틀어막았다. 나는 놈의 등을 끌어안았다. 얕은 그늘은 놈까지 가려 주지 못한 듯, 등이 무척 뜨끈거렸다.

“난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뭐라는 거야…….”

놈의 헛소리에 나도 모르게 조금 웃었던 것 같다.

“웃으니까 더 예쁘네.”

“미친놈.”

“좋다는 거지?”

“…….”



나쁘지 않았다.



2. 장마 (1)


쨍하니 해가 내리쬐기만 할 줄 알았는데, 주말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갑자기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때부터 장대비가 쏟아졌다. 지나가는 소나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그날 온종일 무시무시한 비가 쏟아지더니 이른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기상 예보가 나왔다.

어머니는 내 몰골을 보고 무척 놀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들이 흠씬 맞고 들어왔는데 놀라지 않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늦게 퇴근을 하고 돌아온 아버지 역시 나를 보고 혀를 찼다. 사회적 평판이 대단한 아버지 덕분에 학교에서 봐주는 편의가 컸다. 한여름에도 길기만 한 내 교복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였다. 학교에 갔을 때 박상식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징계를 받았다고 했다. 폭력위원회가 열려서 꽤 심각한 지경까지 갔다는 말도 들었다.

“웬일이냐, 진짜.”

“그렇게 따지면 임선우는 뭐야?”

놈이 한 행위를 잘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혼자서만 처벌을 받은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아이들이 종종 있었다. 의심 어린 눈초리가 종종 나를 스쳐 지나갔지만, 평소 행실이 달랐던 점을 근거로 들며 알아서 납득하곤 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못했던 것은 늘 박상식과 붙어 다니던 녀석이었다. 놈은 내게 몇 번 시비를 걸었으나 반 아이들 중 누구도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자 종내에는 툴툴거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비가 안 그치네.”

한태경이 무서우리만치 장대비를 쏟아 내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장마의 장점은 선크림을 덜 신경 써도 된다는 점이고, 단점은 옥상에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놈은 옥상 문간에 서서 중얼거렸다. 종일 내리는 비가 지겨울 정도였지만 앞으로 최소 일주일 이상은 더 이어질 예정이었다. 놈은 안쪽에 하늘이 그려진 우산을 펴 든 채로 시큰둥하게 밖을 쳐다보았다. 비가 오는 줄 알면서 굳이 옥상에 오는 것도 우스웠다.

“바닥에 물 튄다.”

내가 다가가자 놈이 나에게 우산을 기울여 주었다.

“어깨에 다 맞아. 가까이 와.”

놈이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내가 문득 올려다보자 놈이 으쓱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놈의 배려 덕분에 비가 오는 점심마다 옥상에 올라왔어도 셔츠가 젖은 적은 없었다. 아침마다 구석구석 꼼꼼하게 선크림을 바르는 수고는 덜었지만, 소매가 긴 셔츠 탓에 습기가 차는 점이 싫었다.

“나 내려갈래.”

“왜?”

앉아서 쉴 수도 없는 옥상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내려가겠다고 말하자 놈이 물었다. 이상한 질문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내려가겠다고 생각할 텐데……. 별말 없이 노려보자 놈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아, 하고 말을 꺼냈다.

“우리 집 갈래?”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별 희한한 말을 하는 놈에게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하자 한태경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 갔다.

“원래 친해지면 서로 집에도 놀러 가고 그러는 거지. 너 나 어디 사는지도 모르잖아.”

꽤 그럴듯하게 들린다. 매번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놈과 달리, 나는 놈이 아파트에 산다는 것밖에 몰랐다. 몇 동 몇 호에 사는지 전혀 알려 주지 않아 나는 놈이 말한 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즉, 놈이 실제로는 아파트에 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비와서 점심때도 아무것도 못 하고 학교 끝나고 집 갈 때도 우산 쓰고 가기 바쁘잖아. 우리 집 올래? 너 다른 애들 집에 놀러 간 적 있어?”

“…….”

놈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서로 왕래를 할 정도로 친한 친구가 특별히 없었다. 어쩐지 어깨가 처지는 기분에 멍하니 난간만 쳐다보는데 옆에서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우리 집 올래?”

난간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 번도 친구네 집에 놀러 가 본 적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내가 한태경을 집에 초대해도 좋을 것이고. 부모님은 아마 깜짝 놀라시겠지만, 싫어하시진 않겠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놈이 내 어깨를 도닥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



중앙 계단 앞에 서서 비가 내리는 걸 쳐다보았다. 점심시간에도 꽤나 쏟아진다고 생각했는데 수업이 끝나자 마치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더욱 어마어마한 양의 비가 쏟아졌다. 놈은 먼저 집에 갔다. 손님 초대를 했으니 먼저 가서 정리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놈은 친절하게 내게 주소를 알려 주고, 비교적 구석진 곳에 있다는 아파트 동의 위치까지 자세히 말해 주었다.

‘처음 오는 거라 길 잃을 것 같으면 내가 슈퍼 앞으로 마중 나갈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하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초행길이라도 설마 그렇게까지 길을 못 찾을까 싶었다. 그래 봤자 한태경은 나보다 고작 십여 분 정도 빨리 집에 갔을 뿐이다.

“…….”

나는 놈이 알려 준 주소로 걸음을 옮겼다. 2동 1103호. 1동 뒤에 숨어 있다는 건물을 찾으려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슈퍼가 눈에 걸렸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더라.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오랜만이라 사소한 예절도 헷갈렸다.

나는 슈퍼 앞에 진열된 선물 세트를 보고 망설이다가 가장 무난해 보이는 주스 세트를 골라 들었다. 과하게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일까 봐 괜히 초조해졌다. 상자가 젖지 않도록 우산을 기울이다가, 선물 세트를 가리고도 충분히 남을 공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우산 안이 원래 이렇게 넓었던가. 새삼스러웠다.

헤매는 것 없이 놈의 집을 단번에 찾아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어진 지 10년이 조금 넘은 아파트는 적당히 사용감이 있었다. 최근에 페인트칠을 다시 해서 외양이 오래된 감은 없었으나 엘리베이터나 계단, 내부 시설은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11층 3호. 놈의 집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가 벨을 눌렀다. 단음의 멜로디가 낯설었다. 누구냐는 질문도 없이 놈은 곧장 문을 열었다.

“잘 찾아왔어?”

반바지에 회색 티셔츠를 입은 놈이 웃으며 물었다. 부모님이 아닌 누군가가 나를 맞아 주는 것이 영 어색해 잠시 쭈뼛거리다가 들어갔다. 어쩐지 손에 들고 있는 선물 세트를 감춰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어디서 났어?”

“선물.”

“나 주려고 산 거야?”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놈이 피식 웃으며 선물 세트를 내 손에서 가져갔다. 상자에 그려진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집에 놀러 온다고 이런 거 사 오는 건 처음 보네.”

어쩐지 친구를 사귄 적 없는 내 과거를 들킨 것 같은 기분에 서둘러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한태경이 사는 집은 우리 집보다 작았다. 우리 집이 큰 편이겠지만,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작고 이것저것 늘어놔서 너저분해 보였다.

“치운다고 치웠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

놈이 멋쩍은 얼굴로 말하며 주방에 들어가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너도 하나 줘?”

“아니.”

한태경이 상자에서 병 주스를 하나하나 꺼내어 냉장고에 넣는 사이, 나는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덩그러니 놓인 TV 주변에는 별다른 장식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찍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가족사진 하나와 누구인지 알 것 같은 어린아이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몇 개 있었다.

“그거 나 초등학교 땐가.”

지금보다 좀 더 까맣고, 젖살이 오른 얼굴로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어린 한태경이 나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너는 이 나이에도 이랬구나. 사진을 하나하나 구경하고 몸을 일으켰다. 굳게 닫힌 방은 출입 금지 구역인 것 같고,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방은 창고인지 이것저것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문이 반쯤 열린 방은…….

“거기가 내 방이야.”

놈의 말을 허락으로 받아들이고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한태경의 방은 평범했다. 옷장에, 책상에, 침대 하나. 그리고 침대에는 방금 벗은 듯한 교복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아, 잠깐만.”

놈은 후다닥 들어와서는 교복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어 옷장에 쑤셔 넣었다.

“깜빡했어.”

변명조의 말을 하며 또 멋쩍게 웃었다. 놈은 내게 다가와 평소처럼 가방을 가지고 갔다. 책상에는 중학생용 문제집이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유리 아래에는 중학교 때 찍은 단체 사진 한 장과 다른 친구 한 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뭐 봐?”

“사진.”

“아아, 이거.”

한태경은 가볍게 손끝으로 사진을 두드리며 내 친구, 라고 답해 주었다.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찍은 사진은 사진 속 친구와 한태경의 사이를 대충 짐작케 했다. 하지만 이런 애는 본 적이 없는데……. 한태경이 친구와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그래 봤자 한 번뿐이지만 말이다. 놈은 손끝으로 친구의 얼굴을 문지르면서 씨익 웃었다.

“배 안 고파?”

밥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인데……. 고프지 않다고 말하려다가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은 또 한 번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물었다.

“라면 먹고 갈래?”

“…….”

라면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떤 기대감이 가득 담긴 시선에 나는 눈만 멀뚱거릴 뿐이었다. 라면이 먹고 싶은가.

“너 먹고 싶으면 먹어. 나는 상관없어.”

그러나 놈은 내 대답에 퍽 실망스러운 눈빛이었다. 라면이 먹고 싶은 게 아니었나. 놈은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널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될지 고민이 많다.”

놈의 말에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누군가한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정도로 성적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오히려 성적도 좋고 목표 대학도 꽤 높았다. 한태경은 도대체 성적이 얼마나 좋기에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내 반응에 놈은 혼자 키득거리며 웃었다.

“젖어서 찝찝하지 않아? 내 옷 빌려줄까?”

놈은 옷장을 뒤지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어 축축 처지는 교복이 영 거슬리던 참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놈은 나를 한번 훑고는 바지와 셔츠를 꺼냈다. 놈은 빨간색 라운드 티에 운동복처럼 생긴 반바지를 꺼내 주었다.

“작년에 입던 건데 너한테도 맞을 거야.”

나 역시 그리 작지 않은 편이었지만, 한태경은 상당히 컸다. 멀리서 보면 사람들 틈에서 우둑하니 튀어나온 한태경만 보였다. 게다가 덩치도 어지간히 큰 편이라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면 어떤 위압감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소매 단추를 풀어 옷을 벗으려다가 시선이 느껴졌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왜?”

“음? 왜?”

“뭘 봐.”

“응? 난 벽지에 그려진 장미를 세고 있었는데?”

“…….”

놈은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헛소리 같았지만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같은 남잔데 굳이 가리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보여 줄 생각으로 벗는 것도 아니지 않나. 애써 시선을 무시하려 노력하며 교복 셔츠를 벗었다. 셔츠 안에는 민소매 티셔츠 하나뿐이었다.

“오오.”

그리고 또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이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장 씩 웃어 보였다.

“장미가 예뻐서.”

놈은 벽의 장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평범한 장미였다. 나는 놈을 한번 쏘아보곤 민소매 셔츠까지 마저 벗고 놈이 준 옷을 뒤집어 입었다. 생각보다 옷이 컸다. 체격이 큰 편이라 어깨나 소매 길이가 꽤 길었다. 바지를 갈아입으려다가 놈을 쳐다봤다. 이번에는 은근슬쩍 고개를 돌린다.

한태경이 고개를 돌린 틈을 타 재빨리 바지를 갈아입었다. 바짓단이 피부에 달라붙어 쉽지 않았지만 최선은 다했다. 놈이 준 반바지의 길이가 긴 건 둘째 치고 허리가 조금 남았다. 일어서서 바지를 추켜올리며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새삼 황당했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옷 갈아입는 걸 일일이 신경 써야 하는지. 옷을 갈아입고 서자 놈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갑자기 창밖에서 천둥이 치며 시야가 번쩍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