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왕성 근무기 1권
마왕성에 의탁
마왕성 근무기 1권(1화)
작가서문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이 적힌 글이 나온다는 사실이 참 묘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란 모두 각자의 시각을 지니기에,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결국 내 눈으로, 타인의 눈 뒤에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내가 타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타인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함은 자만이고, 타인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것은 교만이겠지요.
타인을 이해시키려 함은 어리광이고, 타인을 외면하는 것은 슬픈 일이겠지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뭔가 거창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은, 감히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저, 하나의 이야기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공유되는 하나의 경험으로써 존재하기를 바라며 말입니다.
물론, 이 경험에 대한 느낀 점이나 생각들은 모두 각자의 것이겠지요.
[모든 선택은 그 자신의 것. 그리고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선택하는 것 또한 그 자신.]
그 뜻대로 하시길.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부모님, 구자형 선생님, 차영길 선생님, 보현보살님, 양옥분 여사님, 김선임 여사님, 문윤애 이모, 이제전 이모부, 문영배·문영재·문영훈 삼촌, 은주 누나와 자형, 윤주 누나, 국상이 형, 동준이 형, 수원이 누나, 수능 쳤다던 동주, 친구들인 진규, 민수, 정민. 진우, 창현, 영환, 석환, 승중, 상일, 교수님들, 대학 동기들과 선배님들, 개성고 사물놀이 선후배님들, 게임길드 [소울마스터] 길드원님들, Mcwizard 님. 미곰 형, 부산일검 님, 문피아에 댓글을 달아 주신 모든 분들, 그리고 부족한 글에 관심을 보여 주신 뿔미디어 관계자 분들과 독자님들께.
머리 숙여 합장.
김지환
프롤로그
음? 내 직업이 뭐냐고? 글쎄, 남한테 말하기가 좀 그렇군.
뭐? 범죄자냐고? 글쎄, 어떻게 말하면 그럴 수도 있겠어.
응? 아냐, 지금은 잠깐 휴가 나온 거고. 곧 돌아가야 하지.
어? 상사가 있냐고? 물론 있지. 어여쁜 꼬마 아가씨랑 귀여운 도련님.
아, 위에 범죄자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궁금해?
사실은 난 그냥 집사 겸 경비원 겸 보모 겸 심부름꾼이야.
월급? 글쎄. 아직까지는 못 받았어. 나중에 준대.
뭐 그래도 숙식은 해결해 주니까 괜찮아.
뭐라고? 아, 궁금하니까 빨리 정확하게 말해 보라고?
그래, 그래. 말해 주지. 마왕성에서 일하고, 거기 마왕이 내 고용주다.
1장 내 직장은 어딘가?(1)
한가로운 오후,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다음 마을로 향하는 숲길을 걷고 있었다. 다행히 하늘은 먹구름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맑았다. 크기도 작은 숲, 거기다 길 또한 하나라서 잃을 염려도 없었다.
길이 하나라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닌다는 뜻으로, 몬스터가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날이 잘 선 롱 소드 한 자루와 작은 돈주머니도 허리에 잘 매달려 있었으며, 옷은 오랜 떠돌이 생활에도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나름대로 깨끗해 보였다.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이 떠돌이 생활을 했더라?
아, 그래! 그때부터였지. 생각해 보니, 내 인생도 그리 평범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 이름은 카지한 렐 제르네오.
데베크 지역,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물론 호화스런 저택에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 것 대신 지금의 이 처량한 내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짐작할 것이다. 정실에서가 아닌, 하녀와 하룻밤의 쾌락에 의해서 낳아진 반쪽짜리, 속어로 말한다면 ‘잡종’ 귀족이다. 만약 제대로 된 귀족이었다면 아무리 서열상 제일 끝이라도 나름 꽤 편하게 살고 있을 테니까.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는 말이다. 왜 ‘일반적으로’라는 단서가 붙는지는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도록 하고. 어쨌든, 반쪽짜리 귀족이라고 하면 여기저기에서 많은 비화를 기대하지만, 내게 그런 것 따위는 없다.
물론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비화라고 할 만큼 특별하지 않다는 뜻일 뿐. 누구나 불행 속에서 살아가며 고난이나 비극은 그저 일상인데, 어떻게 비화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나의 아버지란 사람은 말만 첩이고 아들이지, 돈은커녕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필수품조차 잘 보내 주지 않던 자였다. 물론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렸던 내게도 중요치 않았고, 지금의 내게도 중요치 않다.
뭐,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가 글을 쓰고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쯤 그가 보내 준 몇 명의 선생들에게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들 눈이 의식되었는지, 반쪽짜리이지만 그것도 귀족이라고 가문의 품위와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게, 나중에 선생에게 전해 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그의 아버지로서의 말이었다.
사실상 우리는 버림받은 거나 다름없었기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우리를 잊지 않았다는 증거라며 아주 기뻐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거기다 그러한 교육들을 받는 것이 자신의 아들만은 언젠가 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라 믿었는지, 어머니는 당장 내일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인데도 선생들이 오는 날이면 공부하는 데 배가 든든해야 한다며 자신의 몫까지 내게 식사를 양보하셨다.
그렇게 평범한 유년기를 보내던 중 내가 이제 숲에서 토끼를 사냥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성에서 나온 의사의 말로는 힘든 생활로 건강이 워낙 안 좋아져 있었고, 원래부터 가지고 계시던 지병이 악화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 정실이었던 영주 부인의 질투로 독살 당하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평소에는 싸구려 빵이랑 과일 몇 개만 보내오던 성에서 그날은 웬일인지 포도주라는 것을 보내 주었으니까.
어쩌면 영주 부인은 내가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다음 날 침대에 누워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이었다.
그 후 나는 어머니와 같이 살던 오두막에 혼자 살게 되었다. 늘 오던 선생들도 이후로는 대부분 발길을 끊어 버려서 꽤나 외롭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뭐 가볍게나마 배웠던 검술을 연습하거나, 발길을 끊어 버린 선생들 중 문학 선생이 심심하면 읽으라 던져 주고 간 낡고 찢어진 수많은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종이 위에 적혀진 글과 사람 간의 대화란 천지 차이인 것이었다. 한창 사람 간의 관계를 배워 나가야 할 청소년 시기에는 더욱더 말이다.
어쨌건 내가 좀 더 커서 내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할 때쯤 되자 이웃나라에서 공격을 해 와서 영지는 망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혹은 어렸을 때 보았는데 기억이 안 나는 아버지란 작자는 죽었다. 물론 얼굴도 본 적 없는 형제들도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뭐 다행이라면, 나라는 놈이 이미 오래전에 성 쪽의 기록에서 완전히 지워져 있었던 덕분에 영지를 빠져나오는 데 별 무리가 없었다는 점과 짐이라고 있는 거라고는 검 한 자루와 마음에 들었던 책 몇 권뿐이라서 도망치기에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 좋은 기억이라곤 별로 없는 그곳을 벗어난 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참 많은 일을 겪었다. 강도에 폭력, 어떨 때는 노예로 잡혀 갈 뻔도 했고, 전쟁터에서 검을 들기도 했다.
물론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떠돌아다니다 보면 재밌고 특이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어떨 때는 그들의 제자가 되어 몇 가지의 재주를 배울 수도 있었다. 그 덕분에 나중에는 ‘잡학왕 카지한’이라고 용병 부대에서 가볍게나마 이름도 날릴 수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여러 가지 것들을 배웠다고는 해도 결국 어느 한 가지를 제대로 배운 놈한테는 안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잡학왕이란 이름을 가지고는 있어도 그것은 이도 저도 아닌 불완전함을 미화시킨 것뿐. 그저 풋내기들이나 동네 건달들이라면 쉽게 상대하겠지만 ‘진짜’한테는 안 되는 것이다.
어쨌건 용병 부대에 있다 보니 가끔 그런 ‘진짜’를 만나는 일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내 목숨 부지를 위해 도망 다녔다. 당연한 것 아닌가. 내 목숨이 우선이고, 돈으로 왔다 갔다 하는 용병 인생, 그런 의리 챙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 단장 눈 밖에 나서 쫓겨나고, 그 이후로 3년간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다행히 배웠던 수많은 재주들 중 몇 개는 돈벌이에 꽤나 도움이 되어서 하루 먹고 자는 것은 그리 힘든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안정성이었다.
내 나이 벌써 32세였다. 어머니가 나를 낳았을 때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나이다. 내 어머니가 그랬듯이, 이제 슬슬 죽음 또한 생각해야 되는 시기란 거다.
물론 32세라면 아직 젊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나 어찌 사람이 자연히 늙어 죽기만 할까. 막말로 내가 이렇게 지나가다 몬스터의 습격이나 도적의 습격, 혹은 불의의 사고로 거동이 힘들어질 가능성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아마 당장 굶어 죽을 것이다. 친척은커녕 믿을 만한 친구조차 이 세상에 없으니. 아니, 어쩌면 굶주림을 못 이겨 자결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지금 나는 안정성 있는 직업을 원하고 있다. 하다못해 제대로 돈만 준다면 영주의 농노라도 할 의향이 있다. 솔직히 요즘은 워낙 세상이 좋아져서 농노도 그저 직업 농사꾼 정도로 여겨지고 대우받고 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역시 어디에서도 나를 원하는 데가 없다는 것이다.
“어휴, 나도 참 처량하다.”
“크아악!”
그렇게 내가 내 신세를 한탄하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발이 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는 아니지만, 설사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찌 사람의 비명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겠는가. 일단 먼저 상황 정도는 살펴본 다음에 구해 주든 무시하든 하면 될 것 아닌가.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곳은 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거기다 마치 시간 차라도 두고 지르는 듯, 비명 소리가 몇 초 간격으로 계속 들려오고 있었기에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비명 소리를 따라 달려간 그곳에는 딱 보기에도 흑마법사처럼 생긴 검은 로브에 해골 지팡이, 거기다 마녀 모자 같은 걸 뒤집어쓴 어르신이 손자뻘로 보이는 네다섯 명의 어린 신관들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고 계셨다.
“저, 저기, 그만두세요. 그 사람이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있던 신관 하나가 다른 이들을 필사적으로 말려 보려 하고 있었지만, 그는 다른 신관들에 비해 체격도 작았으며 다른 이들은 재미있는 오락거리를 포기할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엘리얼! 조용히 해! 흑마법사는 악이야! 비록 이 베네크 지역에서는 그리 큰 제지를 받지 않는다 해도 심한 지역에서는 보는 즉시 사형이라고!”
“그럼! 신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들이 특별히 이 악을 구제하고자 이렇게 구원을 내리고 있잖아. 이 사람도 사실은 고마워하고 있을 거라고!”
네놈들이면 고마워하겠냐? 뭐 어쨌건 일단 상황 파악은 끝났다. 다행히 몬스터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고, 사람들 시선이니 명예니 엄청 신경 쓰는 신관, 거기다 어린 신관들이니, 굳이 모른 척 넘어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무엇을 하시고 계신지요?”
일부러 지금 막 도착했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한창 구타를 하고 있는 신관들을 향해 다가섰다. 웬만하면 무시하고 내 갈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내가 모셨던 수많은 스승님들 중에는 흑마법사 또한 있었기에 차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나이도 지긋하신 어르신 아닌가. 그런 분이 손자뻘 되는 놈들한테 맞고 있는 걸 보고 넘길 만큼 내가 도덕성이 없는 놈은 아니다.
마왕성에 의탁
마왕성 근무기 1권(1화)
작가서문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이 적힌 글이 나온다는 사실이 참 묘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란 모두 각자의 시각을 지니기에,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결국 내 눈으로, 타인의 눈 뒤에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내가 타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타인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함은 자만이고, 타인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것은 교만이겠지요.
타인을 이해시키려 함은 어리광이고, 타인을 외면하는 것은 슬픈 일이겠지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뭔가 거창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은, 감히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저, 하나의 이야기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공유되는 하나의 경험으로써 존재하기를 바라며 말입니다.
물론, 이 경험에 대한 느낀 점이나 생각들은 모두 각자의 것이겠지요.
[모든 선택은 그 자신의 것. 그리고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선택하는 것 또한 그 자신.]
그 뜻대로 하시길.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부모님, 구자형 선생님, 차영길 선생님, 보현보살님, 양옥분 여사님, 김선임 여사님, 문윤애 이모, 이제전 이모부, 문영배·문영재·문영훈 삼촌, 은주 누나와 자형, 윤주 누나, 국상이 형, 동준이 형, 수원이 누나, 수능 쳤다던 동주, 친구들인 진규, 민수, 정민. 진우, 창현, 영환, 석환, 승중, 상일, 교수님들, 대학 동기들과 선배님들, 개성고 사물놀이 선후배님들, 게임길드 [소울마스터] 길드원님들, Mcwizard 님. 미곰 형, 부산일검 님, 문피아에 댓글을 달아 주신 모든 분들, 그리고 부족한 글에 관심을 보여 주신 뿔미디어 관계자 분들과 독자님들께.
머리 숙여 합장.
김지환
프롤로그
음? 내 직업이 뭐냐고? 글쎄, 남한테 말하기가 좀 그렇군.
뭐? 범죄자냐고? 글쎄, 어떻게 말하면 그럴 수도 있겠어.
응? 아냐, 지금은 잠깐 휴가 나온 거고. 곧 돌아가야 하지.
어? 상사가 있냐고? 물론 있지. 어여쁜 꼬마 아가씨랑 귀여운 도련님.
아, 위에 범죄자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궁금해?
사실은 난 그냥 집사 겸 경비원 겸 보모 겸 심부름꾼이야.
월급? 글쎄. 아직까지는 못 받았어. 나중에 준대.
뭐 그래도 숙식은 해결해 주니까 괜찮아.
뭐라고? 아, 궁금하니까 빨리 정확하게 말해 보라고?
그래, 그래. 말해 주지. 마왕성에서 일하고, 거기 마왕이 내 고용주다.
1장 내 직장은 어딘가?(1)
한가로운 오후,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다음 마을로 향하는 숲길을 걷고 있었다. 다행히 하늘은 먹구름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맑았다. 크기도 작은 숲, 거기다 길 또한 하나라서 잃을 염려도 없었다.
길이 하나라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닌다는 뜻으로, 몬스터가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날이 잘 선 롱 소드 한 자루와 작은 돈주머니도 허리에 잘 매달려 있었으며, 옷은 오랜 떠돌이 생활에도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나름대로 깨끗해 보였다.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이 떠돌이 생활을 했더라?
아, 그래! 그때부터였지. 생각해 보니, 내 인생도 그리 평범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 이름은 카지한 렐 제르네오.
데베크 지역,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물론 호화스런 저택에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 것 대신 지금의 이 처량한 내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짐작할 것이다. 정실에서가 아닌, 하녀와 하룻밤의 쾌락에 의해서 낳아진 반쪽짜리, 속어로 말한다면 ‘잡종’ 귀족이다. 만약 제대로 된 귀족이었다면 아무리 서열상 제일 끝이라도 나름 꽤 편하게 살고 있을 테니까.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는 말이다. 왜 ‘일반적으로’라는 단서가 붙는지는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도록 하고. 어쨌든, 반쪽짜리 귀족이라고 하면 여기저기에서 많은 비화를 기대하지만, 내게 그런 것 따위는 없다.
물론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비화라고 할 만큼 특별하지 않다는 뜻일 뿐. 누구나 불행 속에서 살아가며 고난이나 비극은 그저 일상인데, 어떻게 비화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나의 아버지란 사람은 말만 첩이고 아들이지, 돈은커녕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필수품조차 잘 보내 주지 않던 자였다. 물론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렸던 내게도 중요치 않았고, 지금의 내게도 중요치 않다.
뭐,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가 글을 쓰고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쯤 그가 보내 준 몇 명의 선생들에게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들 눈이 의식되었는지, 반쪽짜리이지만 그것도 귀족이라고 가문의 품위와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게, 나중에 선생에게 전해 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그의 아버지로서의 말이었다.
사실상 우리는 버림받은 거나 다름없었기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우리를 잊지 않았다는 증거라며 아주 기뻐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거기다 그러한 교육들을 받는 것이 자신의 아들만은 언젠가 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라 믿었는지, 어머니는 당장 내일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인데도 선생들이 오는 날이면 공부하는 데 배가 든든해야 한다며 자신의 몫까지 내게 식사를 양보하셨다.
그렇게 평범한 유년기를 보내던 중 내가 이제 숲에서 토끼를 사냥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성에서 나온 의사의 말로는 힘든 생활로 건강이 워낙 안 좋아져 있었고, 원래부터 가지고 계시던 지병이 악화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 정실이었던 영주 부인의 질투로 독살 당하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평소에는 싸구려 빵이랑 과일 몇 개만 보내오던 성에서 그날은 웬일인지 포도주라는 것을 보내 주었으니까.
어쩌면 영주 부인은 내가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다음 날 침대에 누워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이었다.
그 후 나는 어머니와 같이 살던 오두막에 혼자 살게 되었다. 늘 오던 선생들도 이후로는 대부분 발길을 끊어 버려서 꽤나 외롭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뭐 가볍게나마 배웠던 검술을 연습하거나, 발길을 끊어 버린 선생들 중 문학 선생이 심심하면 읽으라 던져 주고 간 낡고 찢어진 수많은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종이 위에 적혀진 글과 사람 간의 대화란 천지 차이인 것이었다. 한창 사람 간의 관계를 배워 나가야 할 청소년 시기에는 더욱더 말이다.
어쨌건 내가 좀 더 커서 내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할 때쯤 되자 이웃나라에서 공격을 해 와서 영지는 망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혹은 어렸을 때 보았는데 기억이 안 나는 아버지란 작자는 죽었다. 물론 얼굴도 본 적 없는 형제들도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뭐 다행이라면, 나라는 놈이 이미 오래전에 성 쪽의 기록에서 완전히 지워져 있었던 덕분에 영지를 빠져나오는 데 별 무리가 없었다는 점과 짐이라고 있는 거라고는 검 한 자루와 마음에 들었던 책 몇 권뿐이라서 도망치기에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 좋은 기억이라곤 별로 없는 그곳을 벗어난 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참 많은 일을 겪었다. 강도에 폭력, 어떨 때는 노예로 잡혀 갈 뻔도 했고, 전쟁터에서 검을 들기도 했다.
물론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떠돌아다니다 보면 재밌고 특이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어떨 때는 그들의 제자가 되어 몇 가지의 재주를 배울 수도 있었다. 그 덕분에 나중에는 ‘잡학왕 카지한’이라고 용병 부대에서 가볍게나마 이름도 날릴 수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여러 가지 것들을 배웠다고는 해도 결국 어느 한 가지를 제대로 배운 놈한테는 안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잡학왕이란 이름을 가지고는 있어도 그것은 이도 저도 아닌 불완전함을 미화시킨 것뿐. 그저 풋내기들이나 동네 건달들이라면 쉽게 상대하겠지만 ‘진짜’한테는 안 되는 것이다.
어쨌건 용병 부대에 있다 보니 가끔 그런 ‘진짜’를 만나는 일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내 목숨 부지를 위해 도망 다녔다. 당연한 것 아닌가. 내 목숨이 우선이고, 돈으로 왔다 갔다 하는 용병 인생, 그런 의리 챙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 단장 눈 밖에 나서 쫓겨나고, 그 이후로 3년간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다행히 배웠던 수많은 재주들 중 몇 개는 돈벌이에 꽤나 도움이 되어서 하루 먹고 자는 것은 그리 힘든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안정성이었다.
내 나이 벌써 32세였다. 어머니가 나를 낳았을 때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나이다. 내 어머니가 그랬듯이, 이제 슬슬 죽음 또한 생각해야 되는 시기란 거다.
물론 32세라면 아직 젊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나 어찌 사람이 자연히 늙어 죽기만 할까. 막말로 내가 이렇게 지나가다 몬스터의 습격이나 도적의 습격, 혹은 불의의 사고로 거동이 힘들어질 가능성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아마 당장 굶어 죽을 것이다. 친척은커녕 믿을 만한 친구조차 이 세상에 없으니. 아니, 어쩌면 굶주림을 못 이겨 자결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지금 나는 안정성 있는 직업을 원하고 있다. 하다못해 제대로 돈만 준다면 영주의 농노라도 할 의향이 있다. 솔직히 요즘은 워낙 세상이 좋아져서 농노도 그저 직업 농사꾼 정도로 여겨지고 대우받고 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역시 어디에서도 나를 원하는 데가 없다는 것이다.
“어휴, 나도 참 처량하다.”
“크아악!”
그렇게 내가 내 신세를 한탄하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발이 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는 아니지만, 설사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찌 사람의 비명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겠는가. 일단 먼저 상황 정도는 살펴본 다음에 구해 주든 무시하든 하면 될 것 아닌가.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곳은 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거기다 마치 시간 차라도 두고 지르는 듯, 비명 소리가 몇 초 간격으로 계속 들려오고 있었기에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비명 소리를 따라 달려간 그곳에는 딱 보기에도 흑마법사처럼 생긴 검은 로브에 해골 지팡이, 거기다 마녀 모자 같은 걸 뒤집어쓴 어르신이 손자뻘로 보이는 네다섯 명의 어린 신관들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고 계셨다.
“저, 저기, 그만두세요. 그 사람이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있던 신관 하나가 다른 이들을 필사적으로 말려 보려 하고 있었지만, 그는 다른 신관들에 비해 체격도 작았으며 다른 이들은 재미있는 오락거리를 포기할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엘리얼! 조용히 해! 흑마법사는 악이야! 비록 이 베네크 지역에서는 그리 큰 제지를 받지 않는다 해도 심한 지역에서는 보는 즉시 사형이라고!”
“그럼! 신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들이 특별히 이 악을 구제하고자 이렇게 구원을 내리고 있잖아. 이 사람도 사실은 고마워하고 있을 거라고!”
네놈들이면 고마워하겠냐? 뭐 어쨌건 일단 상황 파악은 끝났다. 다행히 몬스터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고, 사람들 시선이니 명예니 엄청 신경 쓰는 신관, 거기다 어린 신관들이니, 굳이 모른 척 넘어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무엇을 하시고 계신지요?”
일부러 지금 막 도착했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한창 구타를 하고 있는 신관들을 향해 다가섰다. 웬만하면 무시하고 내 갈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내가 모셨던 수많은 스승님들 중에는 흑마법사 또한 있었기에 차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나이도 지긋하신 어르신 아닌가. 그런 분이 손자뻘 되는 놈들한테 맞고 있는 걸 보고 넘길 만큼 내가 도덕성이 없는 놈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