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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2화)
1장 내 직장은 어딘가?(2)


“아, 이건…….”
낯선 중년 남성, 아니, 아직은 청년으로 보일지도 모르지. 어쨌든 낯선 사내의 등장에 어린 신관들은 당황한 듯 들어 올렸던 주먹과 다리를 내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마 자신들의 행동이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나쁜 것이라는 걸 알기는 아는 모양이다.
오랜 용병 생활을 하면서 이미 식어 버릴 대로 식어 버린 심장이지만, 오늘만큼은 뭔가 타오를 것도 같았다. 대체 기사니 신관이니 하는 것들은 어찌 남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행동이 이렇게 천지 차이들이란 말인가.
아직은 남을 생각하기보단 자신만을 생각할 나이일 테고, 어린 나이에 신관복을 입은 걸 보아 원래는 어디 부잣집 도련님이거나 지방 귀족의 자제일 테니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저 가벼운 오락거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기인 것이다.
“그 신관복을 보니 자비와 사랑의 신 에나리스 님을 따르는 분들이시군요?”
내가 은근히 옆에 매고 있는 칼을 보이며 말하자, 어린 신관들은 겁을 먹은 것인지 주춤했다. 이곳은 길에서 벗어난 한적한 숲 속. 잘못하면 이번엔 그들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듯했다.
“하, 하지만 형제님, 그는 흑마법사입니다.”
아까 구제 어쩌고 하던 녀석이 넉살 좋게도 형제라며 내게 말을 걸었다. 그 뻔뻔함에 짜증과 함께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환멸로 속이 울렁일 것만 같았다.
대체 흑마법사가 어떻단 말인가. 이들은 일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극악무도하고 심심하면 인간을 제물로 쓰는 그런 자들이 아니다. 그저 빛의 신 네비스 님 대신, 어둠의 신 베카드 님을 믿는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단지 흑마법사란 이유만으로 어린 소년들이 할아버지를 때려도 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다른 곳은 어떨지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흑마법에 대한 제지가 없습니다만, 사제님께서는 무슨 권리로 이분을 ‘구제’하시겠다는 것인지요?”
이번에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에 감정을 실었더니, 겁을 먹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말문이 막힌 건지 더 이상 그들은 말이 없었다.
“다행히 자비와 사랑의 신 에나리스 님을 모시는 분들이시니, 더 이상 심한 짓은 하지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이제 이분은 그냥 놔두고 신관님들께서 가시던 길을 가시지요. 충분히 ‘구제’하신 것 같으니까요.”
그들은 내 구제라는 말에 몸을 움찔하고는 이내 곧 발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약간 움츠러든 듯한 그들의 뒷모습이 마치 잘못을 들킨 어린아이의 모습같이 보여, 그나마 아까까지의 짜증과 경멸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만약 저들이 더 자라고 자신들이 가진 특권의 맛을 깨달았을 때도 저런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지만, 신전의 위세를 등에 업고 큰소리치는 대신 이런 약간의 위협에도 겁을 먹고 잘못을 인정하는 이상 그래도 아직은 그저 몰라서 그러는 어린아이들인 것이다.
“후, 그래 봤자 곧 커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약자를 괴롭히겠지. 그리고 그때는 이 정도 위협으로는 안 될 테고…….”
어쨌건 떠나가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고, 쓰러져 계시는 어르신께 다가갔다.
다행히 가까이서 보니 어르신의 상태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큰 상처도 없었고, 호흡도 정상이었다. 단지 실신을 하셨다는 것과 자잘한 상처들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 보였다.
이 정도라면 지금 가진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치료가 가능할 듯 보였기에 품속에서 약초와 붕대를 꺼내 옆에 놓았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어느새 내 뒤에 조금 전 옆에서 동료들을 필사적으로 말리던 작은 신관이 와서 서 있었다.
“헉, 헉, 아무래도 불안해서요.”
신관복에 가려서 잘 몰랐는데 가까이서 본 그는 굉장히 어렸다. 조금 전 다른 신관들이 이제 한 17, 18세 정도로 보이는 데 반해 그는 14세도 안 되어 보였다. 말 그대로 소년이었다.
“잠깐만 비켜 주시겠어요?”
갑작스런 부탁에 엉겁결에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러자 어린 신관은 조용히 어르신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두 손을 어르신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왠지 눈에 익은 그 일련의 동작에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를 때쯤 그의 손에서 작은 빛이 일더니 어르신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신성 치료, 신을 모시는 신관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가지고 있다는 능력.
하지만 소년은 그 힘에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듯 눈동자에는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가 있었고, 이마에는 벌써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오히려 자기가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데, 때마침 치료가 끝난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허락된 힘은 여기까지인지 소년은 손을 거두었다.
“이분은 우리에게 마법을 사용하시지 않았어요. 사실 말리고 싶었지만, 부끄럽게도 저한테는 그 애들을 말릴 힘이 없어요. 아저씨께서 때마침 나타나 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저씨라. 그렇군. 역시 나도 아저씨로 보일 그 정도의 나이가 된 것인가.
소년은 소매로 흥건해진 이마의 땀을 한 번 훔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세히 보니 단지 어린 것만이 아니라 꽤 잘생긴 미소년이었다. 특히 금물을 부은 듯한 황금색 머리카락.
신 또한 아름다움을 좋아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아니, 저 정도의 외모를 내려 줄 테니 자신을 따르라는 뜻일까?
“죄송해요. 뭘 놔두고 왔다 하고 온 거라, 제가 안 가면 저 아이들이 또 올 테니 먼저 가 볼게요. 죄송하지만 이분을 부탁드려요.”
소년은 내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몸을 돌려 다른 신관들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중간에 두어 번 넘어지지만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귀여운 아이군그래.”
“그래요. 귀엽……. 헉! 어르신, 언제 깨어나셨어요?”
가볍게 맞장구를 치려던 나는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에 서 있는 흑마법사 어르신의 모습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신성 마법이라지만 이건 효과가 너무 빠른 게 아닌가!
“뭘 놀라고 그러나, 젊은이. 난 원래부터 멀쩡했어.”
로브 끝자락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내는 어르신의 모습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그, 그래도 조금 전에는 실신을…….”
“아, 그거? 내가 이 나이 먹고 그 아이들이랑 손을 섞을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기절한 척한 거야. 아직은 어려서 그렇게 하고 있으면 적당히 하고 지나가거든. 뭐 상처야 내가 직접 마법으로 치료하면 되니까.”
“아, 아까의 비명은요?”
“지나가는 누가 와서 도와주지 않을까 하고 지른 거지 뭐.”
이 어르신, 고단수였다.
어르신은 천천히 자신의 비뚤어진 모자를 바로 세우더니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 손을 마주 잡고는 가볍게 흔드셨다.
“뭐 다행히 내 선택이 옳았군. 젊은이같이 좋은 사람이 때마침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너무나도 태연히 말하는 어르신의 모습은 한순간에 조금 전 내가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무엇 때문에 걱정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하늘 끝 저 멀리로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어휴…….”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어르신의 복장에 대해서는 한마디를 해야 했다. 이번이야 다행히도 꼬맹이 신관들이었지만, 저런 복장으로 나다니시다가 성기사단 같은 것들한테 잘못 걸렸다가는 그 순간 즉결 처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르신, 흑마법사라는 직업에 자부심이 높으신 건 이해하겠는데, 그런 차림으로 돌아다니시는 건 좀…….”
“아, 이거? 그게 말이야. 흑마법사 길드 총지부에서 좀 전에 모임이 있었거든. 뭐, 모임이라 봤자 모인 건 나까지 여덟 명 정도였지만.”
흑마법사 길드 총지부?!
아마 지금 나는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흑마법사 길드 총지부라니!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어르신은 마치 동네 술집 이야기하듯 그 이름을 내뱉었지만, 그것은 결코 가벼운 이름이 아니다.
보통 흑마법사 길드라면, 지역에 따라 그 위세가 달라지는 법이니 그 이름값이 굉장히 가벼운 곳도 있다. 특히 신성 제국에 위치한 흑마법사 길드는 위세는커녕 길드원들조차 찾지 않는 유령 저택으로 유명하니 말이다.
그러나 총지부는 다르다.
총지부의 위치는 흑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비밀리에 전해지는 극비로,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지만 예전 스승님 말씀대로라면 그 위치는 이 중간계가 아닌 마계이며 그 특성상 출입을 허락받은 자들은 궁극의 흑마법사를 상징하는 ‘파멸’이란 칭호를 가진 자들뿐이라 한다. 그리고 그 말은……!
“서, 설마 파멸의 마도사라는 칭호를 가진 분이십니까?”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대체 말이 되는가. 파멸의 마도사란 분이 어떻게 이렇게 동네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인상일 수 있는가.
애초부터 파멸이란 칭호가 무엇인가! 궁극의 흑마법사, 흑마법에 관해서라면 인간으로서는 끝을 보았다고 말해지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칭호로, 어떤 지방에서는 용사 이야기에 마왕보다 무서운 존재로 묘사되기도 하는 그런 존재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어르신이 내 물음에 반색하며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오! 자네도 흑마도와 인연이 있었는가? 그 칭호는 흑마법사, 그것도 보통은 꽤 나이 있는 흑마법사들만 아는 것인데 말이야. 그래, 내가 바로 ‘파멸의 현자’ 하먼 보로스라네.”
“하하……. 뭐 저도 일단 흑마법사라면 흑마법사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뭐 살아온 삶의 특성상 흑마법사뿐이 아니라 웬만한 직업 이름은 다 가져다 붙일 수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옆집 할아버지 같은 파멸의 마도사님은 내가 흑마법과 인연이 있다는 것에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호오, 그리 큰 마력은 안 느껴졌는데 같은 길을 걷는 후학이었구먼. 그래, 누구한테 배웠지?”
“예, 엔타 카일리라는 분께…….”
그러고 보니 그분은 자신의 칭호가 뭔지 끝까지 알려 주지 않으셨지.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처음 배울 때부터 칭호에 관한 부분은 스승님답지 않게 묘하게 대충 건너뛰었어. ‘파멸’이란 칭호에 대해 설명할 때 보충 설명을 청하지 않았다면, 칭호 부분은 거의 백지나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르니까.
“아, 그 녀석의 제자였는가? 크크, 40년 전만 해도 우쭐해서는 드래곤과 결판을 내겠다며 찾아갔던 무대포 같은 녀석이었지. 뭐 그때 된통 심하게 당해서 좀 정신을 차렸지만 말이야.”
드, 드래곤? 물론 스승님이 좀 막무가내인 건 어느 정도 느꼈지만, 설마 그 정도였을 줄이야…….
“이야, 그럼 이거 우리 둘의 사이도 각별하구먼. 그래, 보답을 해야겠군. 혹시 뭔가 필요한 거 있는가?”
순간, 분명히 내 눈은 반짝였을 것이다.
아아, 너무 그렇게 보지 마라. 이십 년 가까이 힘들게 살다 보면 보답이나, 사례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부터 내가 그렇게 사례를 따지는 사람은 아니지만, 상대가 너무 거물이었다.
파멸이란 그 칭호가 가지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전 세계에 있는 흑마법사들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과 함께 마계의 10대 마왕과 계약의 인을 맺은 그들의 영향력은 제국의 황제와도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다.
“아, 그러니까…….”
머리는 필사적으로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어디 소문으로나 듣던 기연이란 것이 아닌가! 아니, 기연으로는 모자라다. 이것은 그야말로 행복 보장이다!
제자로 삼아 달라고 부탁해도, 설사 마법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스승의 이름을 등에 업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다. 또 사례금을 달라고 부탁해도, 적어도 몇 년은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명색이 파멸의 현자가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현실이 될 수 있는 망상 속을 뛰어다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었다.
“그냥, 안정적인 일자리가 있다면 소개시켜 주십시오.”
솔직히 별로 한 것도 없으면서 뭔가 대단한 보상을 원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아니었다.
막말로 그냥 어린애들 겁 좀 준 것밖에 더 있는가. 그냥 흑마법사 지부들 중 어디 한 곳에 잡일꾼으로라도 소개서를 써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일 것이다. 파멸의 마도사의 소개서. 그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특혜 아니겠는가.
“호오, 일자리? 그것뿐인가?”
어르신은 내 뜻밖의 행동이 재밌다는 듯 웃고 계셨다.
“뭐 한 일도 없는데요, 뭘. 그냥 숙식이 해결되는 일자리 하나만 소개해 주십시오.”
“그래? 크크, 자네 운이 좋군. 마침 딱 좋은 자리가 있지.”
어르신은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시더니 품속에서 검은빛의 양피지를 꺼내서 넘겨주셨다. 생전 처음 보는 검은색 양피지는 뭔가 좀 이상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가벼운 마음으로 양피지를 펼쳤다.
양피지 속 내용은 검은색 바탕과 대비되는 흰색으로 적혀 있었다.

―급구―
중간계(인간계) 베네크 지역.
마계 서열 21위의 푸른 지혜의 마왕 소속 영지의 백색마궁에서 업무를 도와줄 사람을 구함.
임금은 차후 상의 후에 결정.
숙식 제공.

이것이 양피지에 적혀 있는 내용의 전부였다.
그냥 흑마도사 지부일 거란 내 예상을 뛰어넘어도 심하게 뛰어넘어 버린 마왕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