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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3화)
1장 내 직장은 어딘가?(3)
손에 든 양피지가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며 옆에서 웃고 계시는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저, 저기…….”
“응? 왜? 숙식 해결되고 좋잖아?”
“그, 그래도 마왕성이잖아요.”
“마왕성이 어때서?”
마치 마왕성이 무슨 음식점 이름인 듯 태평하게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순간 말을 잃었다. 아니, 한순간이지만 나조차도 고개를 끄덕이며 마왕성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해 버릴 뻔했다.
하지만 사나이 카지한,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그, 그게 뭐가 어떻다는 게 아니고…….”
“마왕성이라고 다 몬스터만 있는 건 아니야. 거기다 요즘 워낙 일자리가 귀하고, 인간계에 영지를 가진 마왕들은 천계, 마계에서 두 번 실시하는 자격 심사를 거치고 오시는 분들이라 대부분 인간에게 관대한 분들이거든. 뭐, 초대의 분들은 말이지.”
마왕이 관대해 봤자 아니겠는가.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무시무시한 마왕 앞에 부복해 있다가 조그마한 실수를 한 벌로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리는 내 모습이. 거기다 ‘초대의 분들은’이란 말도 수상하다. 그러면 두 번째, 세 번째들은 어떻단 말인가.
아니, 그것뿐만 아니다. 듣기로는 마왕성에는 용사랍시고 찾아오는 놈들이 꽤 많다고 들었는데, 일단 마왕을 상대하겠다고 오는 놈들이니 미친놈 아니면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진짜’인 놈들일 것이다. 난 안정된 직업을 원하는 거지, 용사의 칼에 단칼에 죽어 버리는 단역을 원하는 게 아니다.
“저…… 저는 그냥 사양하겠…….”
정중히 사과하고 양피지를 돌려 드리려는데 어르신의 지팡이 끝에서 검은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나도 알고 있는 마법의 시전 과정이었다. 자, 저게 뭐더라. 천천히 예전의 경험을 되살려 생각해 보면, 저것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 보기도 전에 내 발 밑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기억이 나 버렸다.
그래, 이것을 어떻게 잊겠는가. 이게 바로 내가 흑마법사 스승님을 떠날 때 당했던 마지막 마법. 상대를 원하는 위치까지 안전하게 ‘배달’하는 다크 홀!
검은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내 귓가에 어르신의 마지막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후후후! 일단 가 보게나. 내가 설마 은인에게 위험한 자리를 추천하겠는가. 혹시 아나? 나중에 마왕군 총사령관 자리라도 받을지?”
“크아악!”
나는 그렇게, 끝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져 갔다. 부디 그 마왕이란 분께서 무례하게 대뜸 찾아왔다고 불덩이부터 안 날리길 빌고 또 빌면서 말이다.
2장 마왕성 도착(1)
이 세상은 크게 네 가지의 세계로 나눠지는데, 중간계와 정령계, 천계, 마계가 그것들이었다.
천계와 마계는 각각 빛의 네비스 님과 어둠의 신 베카드 님이 창조하신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세계로, 누구나 잘 알듯이 천계와 마계 두 세계는 철천지 원수지간이다.
빛의 신 네비스 님과 어둠의 신 베카드 님은 사실은 사이좋은 형제인데 반해, 그분들의 직계 피조물인 마족과 천족은 어째서 그리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것인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이지만, 듣기로는 초대 마왕과 초대 천왕의 트러블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세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정령계는 다른 세 개의 세계들과는 전혀 다른 독립적 세계로, 정령 이외의 어떤 자도 들어갈 수 없고 정령 또한 계약에 의한 부름이 아니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곳이 정령계이다. 하지만 반대로 어느 곳이건 간에 계약만 맺는다면 이어질 수 있는 곳이 정령계로,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간계. 이곳은 마계와 천계, 정령계 모두와 이어져 있는 곳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가장 많은 종류의 기운과 다양한 생명을 가진 이곳은 빛과 어둠, 정령의 가호와 저주가 공존하는 곳으로 정령계는 보통 정령사들을 다리로, 천계는 신전을 다리로 두어 이어져 있는 반면, 마계는 조금 특별하게 이어져 있다.
바로 마계를 다스리는 마왕들 중 5명의 마왕이 직접 인간계로 파견되어서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간계에서의 빛과 어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며, 계약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이 중간계에 나타나는 마족이나 마물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잘 다스리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중간계로 오는 다섯 명의 마왕은 각자 다른 다섯 개의 지역에 자신의 영지와 성을 부여받고 살아가는데, 그렇게 된다면 영지를 다스리는 것과는 별개로 가끔 찾아오는 용사라는 존재들을 일일이 상대해야 한다. 이것은 천계에서 내린 일종의 심술로, 직접적인 통치를 허락하되 대신 용사들의 공격으로 분풀이를 대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귀찮음이 있어도 마왕들은 인간계로 파견되길 간절히 희망한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마계와는 다르게 인간계로 내려온다면 마왕의 자리를 세습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보통 마왕의 자리를 얻는 방법은 두 가지로, 마계 정규 마왕 자격 심사를 거치는 것과 현재 마왕인 자와의 결투에서 정당하게 승리를 거두는 것이지만, 인간계로 파견만 된다면 자신의 자식에게 그 명호와 능력, 그리고 왕좌를 세습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거기다 이렇게 되면 다른 마족과의 결투에 의한 자리 찬탈의 가능성도 사라지게 된다.
물론, 용사라는 존재들이 귀찮기야 하지만, 사실 마계의 마왕이란 자가 인간에게 그리 쉽게 지겠는가. 마왕이란 어떤 자들인가. 그 철저한 마왕 자격 심사를 거치고 어둠의 신 베카드 님께 직접 힘을 하사받은 자들이 아닌가. 거기다 설사 진다 할지라도 인간의 힘으로 마족의 영혼을 소멸시키는 것은 무리라 나중에 가서 결국 베카드 님의 힘에 의해 부활하니 걱정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마왕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바라는 인간계로의 파견을 허락 받은 푸른 지혜의 마왕 소속 영지의 마왕성인 백색마궁은 지금 너무도 조용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누나, 그러지 말고 나랑 나가서 놀자.”
백색마궁의 중심인 알현실의 마왕좌에는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흑발의 소녀가 앉아 있었고, 그런 소녀의 옆에는 소녀보다 어려 보이는 흑발의 소년이 소녀에게 장난을 걸고 있었다.
“안 된다고 했지, 엘런?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서 푸른 지혜의 마왕이 되었어. 그러니 내 책무를 다해야 해.”
“치, 그래 봤자 예산 부족으로 일꾼 하나 없는 마왕성이잖아. 맡을 책무도 없으면서.”
푸른 지혜의 마왕 샨다미크리온 폰 레쉬람. 그는 얼마 전 길고 긴 800년의 수명을 마치고 조용한 안식에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자연히 그의 딸인 엘레나 폰 레쉬람과 아들 엘런 폰 레쉬람에게 세습되었다.
하지만 생각하지도 못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푸른 지혜의 마왕이라고 불리던 그였지만, 인간계 특별 마계법에 의한 유산 상속 시 신청해야 할 서류들에 대한 것들을 깜빡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막대한 유산은 마계의 중앙 정부로 모두 환원되었고, 그의 아이들은 일꾼 한 명 부릴 수 없는 신세에 처한 것이다. 비록 마왕이라지만, 이곳은 중간계.
중간계에서 부하를 부리려면 적당한 임금은 당연한 것이었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용사란 족속들을 상대로 생사의 결투를 벌이며 무전 봉사할 몬스터나 마족은 없는 것이다.
이곳이 마계라면 용사 걱정도 없고 하니 마왕의 권위를 내세우며 마계 소속 영지에서 일꾼을 보충하면 되겠지만, 이곳은 중간계. 중간계 특별 마계법에 의해 마왕의 권위로 무전 봉사를 시키는 것은 불법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 백색마궁에 소속되어 있던 몬스터들과 마족, 그리고 일꾼들은 이미 모두 마계로 돌아가 버렸고, 이제 이 마왕성에 남은 자라고는 푸른 지혜의 마왕이란 명호를 세습 받은 장녀 엘레나 폰 레쉬람과 그의 동생 엘런 폰 레쉬람뿐이었다.
“누나, 놀자. 으응?”
엘레나는 철없는 동생의 말에 가슴이 아파 왔다. 언제나 자상하고 매사에 부족함이 없던 아버지였지만, 유산 상속에 관한 일을 깜빡하다니……. 청소부 하나 고용할 돈도 없는 이 상황에서 앞으로 어떻게 이 영지를 다스려 나갈지 앞이 막막할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석이나 귀금속 화폐 같은 것들을 제외한 성이나 예술품, 생활품들 같은 다른 물건들은 별다른 조항 없이도 그대로 상속되기 때문에 성 전체가 그림 한 장, 책상 하나 없이 텅 비어 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누나, 그러지 말고 나가 놀자. 어차피 이름뿐인 마왕이잖아. 솔직히 이 영지에 있던 마물들이랑 마족들은 다 마계로 돌아갔는데 관리할 게 뭐 있어?”
“엘런, 그래도 아버지가 물려주신 일이야. 어떻게 해서든…….”
엘레나는 갑작스레 느껴지는 흑마법의 기운에 급히 말을 끊었다.
그리고 한순간이었지만, 유산에 대한 마계 중앙 회의소의 결정이 번복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또한 잠시나마 가져 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앞에 나타난 건 마계 중앙 회의소의 사자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이었다.
“으아악!”
허공에서 열린 다크 홀에서 떨어진 사람은 지금 막 ‘배달’된 따끈따끈한 카지한이었다. 카지한은 바닥과의 충돌 때 받은 충격이 그리 작지 않은지 온몸이 아파 왔지만, 자신이 ‘배달’된 곳이 어딘지 생각하고는 재빨리 일어섰다.
“이야, 누나. 누가 왔어!”
엘런은 오랜만에 보는 타인의 모습에 흥미로운 듯 소리쳤다. 하지만 엘레나는 그러지 못했다. 분명 흑마법의 기운이었지만, 찾아온 상대의 의도가 호의적이지만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흥분한 동생을 진정시키며 낯선 방문자에게 물었다.
“인간이여, 여기는 무슨 용건으로 온 것인가요?”
“아, 저기, 여기가 푸른 지혜의 마왕님의 성인 백색마궁이 맞나요?”
카지한은 예상하던 무섭게 생긴 마왕과 흉악한 몬스터들 대신, 어리게만 보이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에 그 어르신이 자신을 잘못 보냈다고 생각했다.
마왕성에 소년과 소녀라니?
인질이나 제물들을 가둬 놓는 지하 감옥도 아닌 이런 곳에 저런 소년과 소녀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흑마법사 할아버지의 마법은 정확하게 성공했다.
“맞습니다. 이곳이 바로 백색마궁입니다. 그런데 무슨 용건이신지요, 인간이여?”
카지한은 한순간 가졌던 희망이 무너지자,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신이 받았던 검은 양피지를 꺼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아. 그, 그게, 이걸 보고…….”
카지한은 일단 자신이 넘겨받았던 검은 양피지를 펼쳐서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 양피지에 반응을 보인 것은 뜻밖에 마왕의 자리를 물려받은 장녀 엘레나가 아닌 엘런 쪽이었다.
“아! 내가 낸 전단지! 전단지를 읽고 온 거구나!”
“엘런? 전단지라니?”
엘레나는 왠지 불안한 기운이 자신이 휘감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누나에게 동생은 너무도 해맑게 웃으며 대답한다.
“아, 내가 얼마 전에 흑마법사 총지부에 사람을 구한다는 전단지를 보냈었거든.”
천진난만한 동생의 말. 그녀는 동생의 철없는 행동에 말문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월급을 줄 예산도 없는데 사람을 구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 그것 좀 제가 볼 수 있을까요?”
그녀 나름대로는 당황했다는 것을 최대한 숨기며 말한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누가 보더라도 당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어쨌건 카지한은 소녀의 부탁에 흔쾌히 들고 있던 양피지를 넘겼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크게 심호흡을 해 마음을 다잡은 뒤에야 손에 든 양피지를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점점 양피지 아래로 향함에 따라, 처음 카지한이 그 양피지의 내용을 보았던 때처럼, 양피지를 잡은 소녀의 두 손이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소녀의 모습에, 보고 있던 카지한은 상황에 맞지 않는 동질감을 느꼈다.
“후우…….”
내용을 다 읽은 것인지 소녀는 검은 양피지에서 시선을 떼고 앞에 서 있는 카지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옆에서 그 큰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동생을 조심스럽게 타일렀다. 꽤나 마음을 진정시킨 것인지, 그녀의 동요는 처음에 비한다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엘런,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 어떻게 해.”
“그래도 누나가 안 놀아 주니까 심심했단 말이야.”
“하아…….”
소녀는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잡았다. 하지만 동생을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내용을 보니 나름대로 상황을 고려해서 정확한 언급은 하지 않았고, 또 말은 그래도 동생의 그런 행동이 자신을 생각해서 한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애꿎은 양피지를 구겨서는 옆에 떨어뜨렸다. 일단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현재의 상황을 들키지 않고 어떻게 이 방문자를 무사히 돌려보낼까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