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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4화)
2장 마왕성 도착(2)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시고 싶죠?”
“음, 뭐든 상관은 없습니다.”
“뭘 잘하시는데요?”
“그냥, 이것저것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엘레나는 카지한의 성의 없는 대답에 겨우 한숨 놓이는 듯했다. 내용을 들어 보니 자격 미달이라고 돌려보내도 그리 큰 반발을 할 것 같진 않을 듯했다.
진짜 채용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면 저런 식으로는 대답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분명 자신이 잘하는 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까지 부풀려서는 아주 자세하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아니, 하다못해 성의 정도는 보였을 것이다. 물론 설사 그랬다 할지라도 채용되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카지한에게 이만 돌아가라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저기 죄송하지만…….”
“근데, 사실은 지금 우리가 예산이 없어요.”
엘레나는 너무도 솔직한 동생의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해서 내뱉었던 말조차 채 끝마치지 못했다. 자신이 왜 채용하지도 않을 거면서 그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했겠는가. 그것은 지금의 비참한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것을 저 동생은 한마디로 수포로 되돌린 것이다.
이제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푸른 지혜의 마왕은 알거지다’라는 치욕스런 소문이 중간계와 마계 전체에 퍼지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예?”
“그게, 얼마 전에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깜빡하셔서 유산을 하나도 상속 못 받았거든요. 그래서 월급을 못 줘요. 그래서 지금 이 성에 있는 건 누나랑 나뿐이고요.”
그녀는 동생의 입을 당장이라도 막고 싶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그녀는 부디 남자가 자신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크게 소문을 내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물론 여기서 그냥 입막음을 해 버리는 방법도 있긴 있었지만, 그건 그녀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정 이야기를 다 듣고서 보인 그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외였다.
“하아…….”
카지한은 한 번 크게 한숨을 쉬고는 뭔가를 생각하듯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더니, 자신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소녀를 향해 말했다.
“그럼, 숙식도 제공 안 되는 겁니까?”
“네?”
“아뇨. 식량은 식량 창고에 많고, 방도 남아돌아서 숙식은 해결 가능해요.”
“월급은 그럼 나중에 돈 생기면 주실 수는 있는 거고요?”
“네, 일단 돈이 생기면 드릴게요.”
엘레나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하고 있는 동생과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어서 계속해서 동생을 향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 비해 이쪽에서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서는 이미 채용은 확실시된 지 오래였고, 벌써 업무 부여 단계까지 가 있었다.
“뭐, 그럼 좋습니다. 제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 되지요?”
“자, 잠깐만요!”
너무도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엘레나가 자신도 모르게 지른 외침에, 채용 문제 이후에 업무 부여에 대한 심각한(?) 논의 중이던 두 남자는 그 모습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왜 그러느냐는 의문을 담은 두 개의 시선이 엘레나를 향했다.
“그, 그러니까…… 무보수로 일하겠다는 말인가요?”
“돈 생기면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맞아! 돈 생기면 줘야지. 안 그래, 누나?”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게 임금 지급 문제를 넘겨 버리는 카지한과 당연하다는 듯 그것에 동조하는 동생의 모습에 엘레나는 오히려 자신이 멍청한 질문을 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대체 뭐가 문제인가?’라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남자를 보며 엘레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가까스로 그녀가 꺼낸 말은 이미 오래전에 기정사실화 되어 버린 일에 대한 재확인 정도였다.
“아, 아니 그건 그렇지만, 진짜로 여기서 일하겠다고요?”
“뭐,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숙식도 해결해 준다고 하고, 특별히 지금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예, 여기서 일하고 싶은데요?”
엘레나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이백 년 동안 아버지를 모시던 자들조차 돈이 없다니까 등을 돌리고 마계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그런데 돈이 생길 때까지 무보수로 일하겠다니, 그녀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저, 근데 두 분 중 누가 마왕님이시지요?”
“누나요!”
엘런이 커다란 목소리로 답했다. 카지한은 대충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아직도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를 향해 정중하게 말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푸른 지혜의 마왕, 음, 성함이?”
“에, 엘레나 폰 레쉬람이요.”
엘레나는 얼떨결에 자신의 이름을 대답했다.
“전 엘런이에요! 엘런 폰 레쉬람.”
순진한 소년의 모습에 카지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그의 한쪽 무릎이 천천히 접혀졌다. 어느새 그의 몸은 어렸을 적 딱 한 번 배웠을 뿐인 기사의 맹세를 흉내 내고 있었다.
“엘레나 폰 레쉬람 님, 엘런 폰 레쉬람 님. 이 카지한 렐 제르네오, 앞으로 두 분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검이 된다거나, 충성의 계약은 건너뛰었다. 그는 기사가 아니고 용병이며, 이것은 귀속이 아니라 고용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떠돌이 카지한과 마왕 두 남매의 마왕성 생활이 시작되었다.



마왕성에서 살게 된 지 며칠이란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이 넓은 마왕성의 구조를 대강이나마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내 직책에 대한 적당한 명칭 찾기’ 다음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것은 바로 ‘마왕 보좌관’으로서 어떻게 하면 이 마왕성을 다시 재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특별히 성이 부서진 건 아니지만, 예산이라곤 동전 하나 없는 마왕성이 제대로 된 마왕성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거기다 당장 돈이 궁한 것은 아니지만, 마왕성이 빨리 복구되어야 월급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까 마왕의 기본 요건은 힘, 성, 군대 이 세 가지였지, 아마?”
어릴 적에 읽었던 용사 이야기에서의 마왕들은 항상 강력한 힘을 가졌으며, 음산한 성에 살았고, 수백 수천에 이르는 강력한 부하들을 거느렸다.
물론 용사들한테 모두 단칼에 죽어 버렸지만. 자, 그럼 마지막 부분은 잊어버리고…….
어쨌건 지금 현재 가장 시급한 일은 군대였다. 일단 부하들이 있어야 세금을 걷는다든지 침략을 한다든지 기타 잡다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마왕이 혹은 내가 혼자 세금 거둔다고 그 넓은 영지를 전부 돌아다닐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뭐, 일단 성은 있고, 마왕이니까 아무리 소녀의 모습이라곤 해도 특별히 약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는 건데……. 마왕이 저런 가냘픈 소녀라니, 뭐가 안 맞잖아.”
“뭐가 안 맞아?”
한참을 사념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온갖 악의 본거지라 칭해지는 마왕성이란 장소에서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라는 것은, 분명 꽤나 무서울 법도 한 상황이다.
하지만 유령이나 몬스터는커녕 생명체라고는 나까지 포함해서 세 명밖에 없는 이 마왕성에서, 그것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저렇게 귀여운 목소리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굳이 뒤를 돌아볼 필요 없이 나는 이미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이 마왕성에서의 서열상 2위이자, 마왕의 동생인 엘런 폰 레쉬람.
뒤를 돌아보자, 역시나 엘런이 순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혼잣말입니다. 사실은 앞으로의 마왕성 재건을 위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에이, 그런 건 무시하고 나랑 놀자! 카지한.”
자신이 마왕자라는 것을 인식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이제 마왕의 동생이지.
어쨌건 골치 아픈 것들 따위는 무시한 채, 그저 자신의 생각만을 솔직하게 내보이는 엘런의 그런 모습은 어린아이 특유의 순진함과 순수함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내게도 자식이 생긴다면 이런 느낌일까? 분명 서열상 내 상사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너무도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지금은 엘런과 놀아 주고 있을 순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나는 이 마왕성을 살릴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지 않은가.
“엘런 님, 아무리 그래도 제 월급이 달려 있는데 무시할 순 없잖습니까.”
“우……. 그럼 나랑은 언제 놀아 줄 건데?”
“나중에 놀아 드릴게요.”
정중한 거절의 말에 엘런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바로 저 표정, 정식 채용 후 지금까지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저 표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을 포기했던가. 예를 들어 화초에 물 주기라든지, 침실 정리라든지, 저녁 식사라든지……. 그러니 오늘만큼은 무너질 수 없었다.
“그런 표정을 하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치사해. 카지한의 업무에는 내 보모 역할도 포함되어 있잖아!”
“하지만 저한테는 그것 말고도 몇 백 가지나 되는 역할이 포함되어 있거든요.”
말이 보좌관이지, 보모에 경비원에 청소원에 세무 담당에 잡일 담당에 정원사에 작전참모에 정보원에…….
따지고 보면 마왕성 유일한 병사이자 하인인 내가 해야 할 임무란 것은 엄청나게 많았다. 마왕만이 할 수 있는 특정한 일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전부 내 몫이니 말이다.
그렇게 겨우 엘런을 달래 놓고 내가 향한 곳은 지하 쓰레기장, 아니, 정확히는 요리 후에 남은 동물의 뼈들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였다. 여기저기 거미줄이 쳐져 있는 것이 꽤나 청소를 안 한 듯 보였다.
하긴 청소부 없이 꽤나 오래 지냈던 것 같고, 명색이 마왕의 혈통인데 직접 청소를 할 리가 만무했다. 물론 청소부가 따로 있다고 해도 이런 외진 곳까지 청소할지는 잘 모르는 일이지만.
“치, 나 떼어 놓고 온 데가 겨우 여기야?”
나를 따라온 건지, 어느새 엘런이 내 뒤에 서 있었다.
“여긴 왜 온 거야? 배고프면 식당으로 가야지.”
어린 엘런은 내가 배가 고파서 이곳에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게 말입니다, 일단 이 마왕성을 운영하려면 잡일꾼이 필요하잖습니까. 그렇다고 제가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돈도 없는데 다른 사람을 고용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응, 그래. 근데?”
“여기서 잡일꾼을 만드는 것이지요.”
나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엘런을 뒤로한 채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삐걱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안쪽에서 나와 엘런을 반긴 것은 그 높이가 내 두 배는 족히 될 것 같은, 동물 뼈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이었다.
“이야! 많다!”
아마 엘런도 여기는 처음이었나 보다. 하긴 척 보기에도 고생 같은 건 모를 천진난만한 소년에다가 얼마 전까지는 마왕자, 지금은 마왕의 동생인데 일종의 쓰레기 창고인 이런 곳에 올 일이 있었겠는가. 어쨌건 나는 소기의 목적을 위해 두 손을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엘런 님. 잘 보세요.”
뭘 하는지 궁금하다는 듯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는 엘런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인을 맺어 나갔다.
이것이 내가 흑마법사 스승님께 배운 것들 중 하나인 네크로맨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