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바람에 새긴 꽃
들어가기에 앞서
신라 26대 왕인 진평왕은 정비인 마야 사이에서 천명과 덕만, 두 딸을 두었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역사서마다 장녀와 차녀에 대한 기록이 다르고, 딸이 하나 더 있어 그 딸이 선화공주라는 기록도 전해진다.)
화랑세기 13세(世) 용춘공전(龍春公傳)을 보면 승만황후(진평왕의 계비)가 아들을 낳아 선덕의 지위를 대신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그 아들이 일찍 죽어 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時僧滿皇后○○生子 欲代善德之位而夭傷)
이에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다.
이 글은 “만약 진평왕의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이란 가정하에 쓰인 이야기로 일부 기록에 작가의 상상이 더해져 창조된 픽션임을 미리 밝힙니다.
(글의 모티브가 된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진평왕의 아내를 ‘황후’로 기록하였으나, 글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위해 ‘황후’가 아닌 ‘왕후’로 표기하였습니다.)
1화
<1부>
프롤로그
〈천년의 고도 경주에 들어서는 꿈의 아파트 - 명인건설 그린빌〉
신축 공사장 주위를 둘러친 안전 펜스 위로 곧 들어서게 될 자사 아파트의 광고 문구가 선명히 떠 있다. 건축 자재들과 함께 각종 기계들이 즐비한 펜스 너머 공사장 안에선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우웅, 척. 흙을 떠낼 때마다 포클레인이 커다란 굉음을 만들었다.
텅!
한창 땅을 파던 중, 갑자기 들려온 둔탁한 금속음에 레버 조작을 멈춘 기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소리로 봐선 나무뿌리나 바위는 아닌 듯했다. 목을 쭉 빼 살폈지만 정확한 것은 아무래도 내려가 직접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귀찮게.”
목덜미를 긁적인 기사가 운전석에서 훌쩍 몸을 내리곤 방금 들려온 소음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짜증 실린 얼굴로 삐죽 고개를 내려 구덩이를 바라보던 기사의 눈이 묘하게 흐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헉!”
한 발 두 발 뒷걸음질을 치던 그가 ‘소장님!’을 외치며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삑. 삐리리.
도어 록이 해제되는 전자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리자 한 몸인 듯 뒤엉킨 한 쌍의 남녀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가쁘게 들어섰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다급히 여자를 벽으로 몰아붙인 정혁이 그녀의 입술을 삼킬 듯 베어 물곤 낮게 신음을 흘렸다.
“흐음.”
입술을 붙인 채 팔을 움직여 재킷을 벗어 던진 그가 여자의 뒷머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좀 더 집요하게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하아. 나, 자기 못 보낼 것 같은데……. 어쩌지?”
타액과 숨결만이 오가는 은밀한 공간 속. 입술을 떼어 낸 여자가 잔뜩 흐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입술 끝을 당겨 매력적인 미소를 그려 낸 정혁이 그녀의 허리와 등을 감싸 안아 들며 침실을 향해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렀다.
Rrrrr. Rrrrr.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던 찰나 들려온 휴대전화 벨 소리에 그가 슬쩍 미간을 찡그리며 거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열망에 젖은 눈으로 정혁을 바라보던 여자가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며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무시해.”
달콤한 목소리로 여자가 속삭였다.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유혹하듯 정혁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여자가 툭툭, 남은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느릿한 손길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사는 명백했다. 원초적 욕망이 그에 반응하듯 꿈틀거렸다.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정혁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느긋이 입술을 겹쳤다. 혀를 얽으며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를 손끝으로 쓸자 겹친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입 안을 깊숙이 헤집은 혀가 여린 점막을 뜨겁게 훑고 지나갔다. 달콤한 타액을 삼키며 얽힌 혀를 거칠게 비벼 대자 허리 아래가 견딜 수 없이 뻐근해졌다.
하지만 벨 소리는 끊길 생각이 없다는 듯 집요하게 울려 댔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뒤통수가 당겼다.
“젠장.”
낮게 욕설을 뱉어 낸 그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여자의 시선이 따라왔다.
“무시하라니까?”
여자의 채근에 잠시 갈등이 일었지만, 역시나 확인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잠깐 확인만 하고 올게. 혹시 현장에 일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
“토요일이잖아.”
여자의 투정 어린 목소리에 허리를 굽힌 정혁이 촉,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다시 몸을 세웠다.
“너한테만 집중하려면.”
자신을 달래기 위해 던진, 그저 듣기 좋은 소리란 걸 알면서도 입술에 걸리는 미소는 어쩔 수 없다.
흠. 밉지 않게 눈을 흘긴 여자가 빨리 확인하고 오라는 듯 손짓하자 그가 몸을 돌려 거실로 나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재킷을 주워 든 정혁이 안주머니를 뒤져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발신 번호를 확인하는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빠르게 액정을 그은 그가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대자 박 팀장님? 하고 운을 뗀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보고했다. 한 손을 허리에 짚은 채 다다다 쏟아지는 소리를 듣고 있던 정혁이 번쩍 고개를 들며 눈을 키웠다.
“뭐?”
“저 앞에서 세워 주시면 됩니다.”
현장 근처에 다다른 것을 확인한 정혁이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서울역에서 가장 빨리 출발하는 기차를 탔는데도 시간이 이렇게나 지체가 되어 버렸다. 차를 몰고 왔다면 지금도 혼잡한 주말 고속 도로에 갇혀 있을 것이 뻔했다.
택시에서 내린 정혁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문화재 발굴 중’이란 팻말과 함께 주변에 드리운 라인이었다. 한창 아파트 터파기 공사를 하고 있어야 할 건설 장비들은 그대로 멈춘 채였고, 트라울(Trowel. 모종삽 모양의 발굴 도구)과 브러쉬 등을 쥔 발굴 인부들의 바쁜 움직임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하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허탈한 숨이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엄청난 규모에 그는 그저 멍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 유적지가 넘쳐 나 도시 자체가 지붕 없는 노천 박물관이라 불리는 것도, 땅을 파기만 하면 유물이 나오는 바람에 개발이 어렵기로 유명한 도시라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적어도 제가 기획한 프로젝트와는 상관없는 일일 거라 자신했기에 맞닥뜨린 충격은 너무도 컸다.
“혹시 명인건설에서 나오신…….”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정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파란 니트릴 장갑을 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현장 담당자인 모양이었다.
“아.”
정혁이 곧 익숙한 손길로 명함을 꺼내 건넸다.
“명인건설 기획2팀 팀장 박정혁입니다.”
명함을 건넨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빠르게 장갑을 벗어 그것을 받아 든 여자가 시선을 맞추며 자신을 소개했다.
“명함 가진 게 없네요. 경북문화재연구소 김서진입니다.”
문화재란 단어에 정혁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찰나에 스친 감정을 놓치지 않고 읽어 낸 서진이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달갑진 않으시겠죠.”
달가울 리가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색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대꾸를 하는 대신 그가 말을 돌렸다.
“근데 저건…….”
그의 시선이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 크레인이 움직이고 있는 그곳엔 누가 봐도 종의 형태를 하고 있는 물체가 거대한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보고를 받을 때만 해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전달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과장되고 부풀려진 부분도 많았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타종 행사 때나 볼 법한 커다란 범종이었다. 그저 조금 골치가 아프겠구나, 정도로 끝날 일은 결코 아닌 듯싶었다.
그러니까, 이게 왜 하필 이곳 아파트 공사장에 묻혀 있는 거냐고!
“공사는, 바로 재개될 수 있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서진이 알면서 왜 모르는 척하느냔 눈으로 바라보았다.
“중단하시고 매장 문화재 발견 신고서부터 작성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말문이 막힌 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즉각 공사를 중단시켜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의 입장에선 공사 지연에 따른 손해나 추가적인 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유물인지 아닌지 일단 성분 분석부터 하면 안 됩니까? 비파괴 검사는 성분 분석 결과를 바로 알 수 있는 걸로 아는데. 금속 유물이니까 XRF(X-ray Flourescence Spectrometry. X선 형광분석법) 같은.”
“대신 데이터의 정확성은 떨어지죠. 말씀하신 XRF뿐만 아니라 XRD(X-ray Diffraction. X선 회절분석법), 그리고 유물 수습 중에 얻은 시료들로 파괴 분석을 할 예정이에요. 동시에 자문회의를 구성해 관련 전문가 토론도 거쳐야겠죠.”
들려온 답에 그가 거친 손길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서진을 따라 움직이며 다급히 물었다.
“시일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걸음을 멈춘 서진이 정혁을 돌아봤다.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말하던 서진의 눈매가 일순 갸름해졌다.
“무척 바쁘신가 보네요.”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그가 눈썹을 휘는 순간, 쭉 뻗어 온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단추, 밀렸어요.”
그가 고개를 내리자 한 칸씩 밀린 채 잠겨 있는 단추가 눈에 들어왔다.
하.
입술 끝에 허탈한 웃음을 머금은 그가 질끈 눈을 감았다.
들어가기에 앞서
신라 26대 왕인 진평왕은 정비인 마야 사이에서 천명과 덕만, 두 딸을 두었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역사서마다 장녀와 차녀에 대한 기록이 다르고, 딸이 하나 더 있어 그 딸이 선화공주라는 기록도 전해진다.)
화랑세기 13세(世) 용춘공전(龍春公傳)을 보면 승만황후(진평왕의 계비)가 아들을 낳아 선덕의 지위를 대신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그 아들이 일찍 죽어 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時僧滿皇后○○生子 欲代善德之位而夭傷)
이에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다.
이 글은 “만약 진평왕의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이란 가정하에 쓰인 이야기로 일부 기록에 작가의 상상이 더해져 창조된 픽션임을 미리 밝힙니다.
(글의 모티브가 된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진평왕의 아내를 ‘황후’로 기록하였으나, 글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위해 ‘황후’가 아닌 ‘왕후’로 표기하였습니다.)
1화
<1부>
프롤로그
〈천년의 고도 경주에 들어서는 꿈의 아파트 - 명인건설 그린빌〉
신축 공사장 주위를 둘러친 안전 펜스 위로 곧 들어서게 될 자사 아파트의 광고 문구가 선명히 떠 있다. 건축 자재들과 함께 각종 기계들이 즐비한 펜스 너머 공사장 안에선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우웅, 척. 흙을 떠낼 때마다 포클레인이 커다란 굉음을 만들었다.
텅!
한창 땅을 파던 중, 갑자기 들려온 둔탁한 금속음에 레버 조작을 멈춘 기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소리로 봐선 나무뿌리나 바위는 아닌 듯했다. 목을 쭉 빼 살폈지만 정확한 것은 아무래도 내려가 직접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귀찮게.”
목덜미를 긁적인 기사가 운전석에서 훌쩍 몸을 내리곤 방금 들려온 소음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짜증 실린 얼굴로 삐죽 고개를 내려 구덩이를 바라보던 기사의 눈이 묘하게 흐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헉!”
한 발 두 발 뒷걸음질을 치던 그가 ‘소장님!’을 외치며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삑. 삐리리.
도어 록이 해제되는 전자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리자 한 몸인 듯 뒤엉킨 한 쌍의 남녀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가쁘게 들어섰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다급히 여자를 벽으로 몰아붙인 정혁이 그녀의 입술을 삼킬 듯 베어 물곤 낮게 신음을 흘렸다.
“흐음.”
입술을 붙인 채 팔을 움직여 재킷을 벗어 던진 그가 여자의 뒷머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좀 더 집요하게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하아. 나, 자기 못 보낼 것 같은데……. 어쩌지?”
타액과 숨결만이 오가는 은밀한 공간 속. 입술을 떼어 낸 여자가 잔뜩 흐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입술 끝을 당겨 매력적인 미소를 그려 낸 정혁이 그녀의 허리와 등을 감싸 안아 들며 침실을 향해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렀다.
Rrrrr. Rrrrr.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던 찰나 들려온 휴대전화 벨 소리에 그가 슬쩍 미간을 찡그리며 거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열망에 젖은 눈으로 정혁을 바라보던 여자가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며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무시해.”
달콤한 목소리로 여자가 속삭였다.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유혹하듯 정혁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여자가 툭툭, 남은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느릿한 손길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사는 명백했다. 원초적 욕망이 그에 반응하듯 꿈틀거렸다.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정혁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느긋이 입술을 겹쳤다. 혀를 얽으며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를 손끝으로 쓸자 겹친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입 안을 깊숙이 헤집은 혀가 여린 점막을 뜨겁게 훑고 지나갔다. 달콤한 타액을 삼키며 얽힌 혀를 거칠게 비벼 대자 허리 아래가 견딜 수 없이 뻐근해졌다.
하지만 벨 소리는 끊길 생각이 없다는 듯 집요하게 울려 댔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뒤통수가 당겼다.
“젠장.”
낮게 욕설을 뱉어 낸 그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여자의 시선이 따라왔다.
“무시하라니까?”
여자의 채근에 잠시 갈등이 일었지만, 역시나 확인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잠깐 확인만 하고 올게. 혹시 현장에 일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
“토요일이잖아.”
여자의 투정 어린 목소리에 허리를 굽힌 정혁이 촉,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다시 몸을 세웠다.
“너한테만 집중하려면.”
자신을 달래기 위해 던진, 그저 듣기 좋은 소리란 걸 알면서도 입술에 걸리는 미소는 어쩔 수 없다.
흠. 밉지 않게 눈을 흘긴 여자가 빨리 확인하고 오라는 듯 손짓하자 그가 몸을 돌려 거실로 나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재킷을 주워 든 정혁이 안주머니를 뒤져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발신 번호를 확인하는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빠르게 액정을 그은 그가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대자 박 팀장님? 하고 운을 뗀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보고했다. 한 손을 허리에 짚은 채 다다다 쏟아지는 소리를 듣고 있던 정혁이 번쩍 고개를 들며 눈을 키웠다.
“뭐?”
“저 앞에서 세워 주시면 됩니다.”
현장 근처에 다다른 것을 확인한 정혁이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서울역에서 가장 빨리 출발하는 기차를 탔는데도 시간이 이렇게나 지체가 되어 버렸다. 차를 몰고 왔다면 지금도 혼잡한 주말 고속 도로에 갇혀 있을 것이 뻔했다.
택시에서 내린 정혁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문화재 발굴 중’이란 팻말과 함께 주변에 드리운 라인이었다. 한창 아파트 터파기 공사를 하고 있어야 할 건설 장비들은 그대로 멈춘 채였고, 트라울(Trowel. 모종삽 모양의 발굴 도구)과 브러쉬 등을 쥔 발굴 인부들의 바쁜 움직임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하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허탈한 숨이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엄청난 규모에 그는 그저 멍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 유적지가 넘쳐 나 도시 자체가 지붕 없는 노천 박물관이라 불리는 것도, 땅을 파기만 하면 유물이 나오는 바람에 개발이 어렵기로 유명한 도시라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적어도 제가 기획한 프로젝트와는 상관없는 일일 거라 자신했기에 맞닥뜨린 충격은 너무도 컸다.
“혹시 명인건설에서 나오신…….”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정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파란 니트릴 장갑을 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현장 담당자인 모양이었다.
“아.”
정혁이 곧 익숙한 손길로 명함을 꺼내 건넸다.
“명인건설 기획2팀 팀장 박정혁입니다.”
명함을 건넨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빠르게 장갑을 벗어 그것을 받아 든 여자가 시선을 맞추며 자신을 소개했다.
“명함 가진 게 없네요. 경북문화재연구소 김서진입니다.”
문화재란 단어에 정혁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찰나에 스친 감정을 놓치지 않고 읽어 낸 서진이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달갑진 않으시겠죠.”
달가울 리가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색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대꾸를 하는 대신 그가 말을 돌렸다.
“근데 저건…….”
그의 시선이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 크레인이 움직이고 있는 그곳엔 누가 봐도 종의 형태를 하고 있는 물체가 거대한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보고를 받을 때만 해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전달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과장되고 부풀려진 부분도 많았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타종 행사 때나 볼 법한 커다란 범종이었다. 그저 조금 골치가 아프겠구나, 정도로 끝날 일은 결코 아닌 듯싶었다.
그러니까, 이게 왜 하필 이곳 아파트 공사장에 묻혀 있는 거냐고!
“공사는, 바로 재개될 수 있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서진이 알면서 왜 모르는 척하느냔 눈으로 바라보았다.
“중단하시고 매장 문화재 발견 신고서부터 작성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말문이 막힌 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즉각 공사를 중단시켜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의 입장에선 공사 지연에 따른 손해나 추가적인 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유물인지 아닌지 일단 성분 분석부터 하면 안 됩니까? 비파괴 검사는 성분 분석 결과를 바로 알 수 있는 걸로 아는데. 금속 유물이니까 XRF(X-ray Flourescence Spectrometry. X선 형광분석법) 같은.”
“대신 데이터의 정확성은 떨어지죠. 말씀하신 XRF뿐만 아니라 XRD(X-ray Diffraction. X선 회절분석법), 그리고 유물 수습 중에 얻은 시료들로 파괴 분석을 할 예정이에요. 동시에 자문회의를 구성해 관련 전문가 토론도 거쳐야겠죠.”
들려온 답에 그가 거친 손길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서진을 따라 움직이며 다급히 물었다.
“시일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걸음을 멈춘 서진이 정혁을 돌아봤다.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말하던 서진의 눈매가 일순 갸름해졌다.
“무척 바쁘신가 보네요.”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그가 눈썹을 휘는 순간, 쭉 뻗어 온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단추, 밀렸어요.”
그가 고개를 내리자 한 칸씩 밀린 채 잠겨 있는 단추가 눈에 들어왔다.
하.
입술 끝에 허탈한 웃음을 머금은 그가 질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