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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 *



10일 뒤.

보존과학센터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정혁의 걸음이 초조했다. 살이 빠져 조금 더 날카로워진 턱선과 잔뜩 굳은 입매가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지금으로선…….”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던 정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대꾸를 했다.

“아뇨. 반드시 처리합니다. 네.”

정중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통화를 마무리한 정혁이 고개를 들었다.

「보존과학연구실」

물끄러미 표찰을 바라보던 정혁이 심호흡을 하며 노크를 했다.

―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던 서진이 고개를 들며 몸을 세웠다.

“오셨어요?”

서진이 살짝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했다. 굳은 얼굴의 정혁도 조용히 목례를 했다.

관련 전문가 토론을 마쳤다는 소리에 부리나케 달려온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아파트 공사 재개 여부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어떻게 따낸 개발 허가인데. 7개월간 꼬박 매달렸던 프로젝트를 떠올리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일단 예비 조사를 끝내고 보존 처리를 위한 부식생성물 제거 작업에 들어간 상태예요. 오랜 시간 땅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부식과 손상이…….”

“저기, 그러니까…….”

다급히 말을 끊은 정혁이 난감한 듯 이마를 문지르다 물었다.

“전에 종의 조형 양식이 신라 시대의 것으로 보인다고 하셨는데. 혹시 성분 분석 결과도…….”

발견된 종이 납형법(蠟型法)으로 제작이 되었다든지 따위의 설명을 늘어놓으려던 서진이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정혁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빛이 대번 어두워졌다.

무겁게 흐르는 침묵에 그녀가 흐음,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에 쥔 종이로 시선을 내리고는 적혀 있는 것을 읽어 내려갔다.

“진평왕유자(眞平王有子). 진평왕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말, 들어 보셨어요?”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 넋을 빼고 있던 정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타명석가(他名釋迦). 이름이 석가라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그가 고개를 젓자 서진이 말을 이었다.

“모르시는 게 당연해요.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니까.”

그게 이 종과 무슨 상관이냐는 듯 그가 바라봤다. 당면한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별 상관 없는 이야기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느냔 표정이었다.

“선덕여왕, 아시죠?”

하지만 그의 기분 따윈 관심 없다는 듯 물어 온 서진의 질문에 정혁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평왕이 선덕여왕의 아버지니까, 선덕여왕의 남동생이 되겠네요.”

정혁이 씰룩 미간을 좁혔다.

“잠깐.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어 딸인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거 아니었나요?”

“맞아요, 신라 최초의 여왕. 그런데 이 종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보면 진평왕에게 석가라는 아들이 있었다네요?”

그가 뜻밖이라는 얼굴을 하자 서진이 덧붙였다.

“사실, 계비인 승만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있었지만 일찍 죽었다는 기록이 있긴 해요. 학계에선 위작 논란이 있긴 하지만.”

피곤한 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정혁이 대꾸했다.

“낳자마자 바로 죽기라도 한 모양이죠.”

“그런데 이 종엔 그가 스무 살 되던 해에 죽었다고 되어 있네요. 그것도 종과 함께.”

그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종과 함께라니. 이게 무슨 에밀레종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그의 물음에 서진이 쥐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종에서 인 성분이 나왔어요.”

하. 아직 넘지도 못한 산 앞에 또 다른 산을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정혁이 숨을 들이쉬며 서류를 받아 들었다.

“막상 아기를 넣었다고 전해지는 에밀레종에서도 검출되지 않은 인이 바로 이 종에서는 나왔다는 거죠.”

빠직, 하고 머릿속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이마를 짚은 정혁이 망연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위로 ‘공사 중단’이란 네 음절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런 정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진이 입술을 움직였다.

“알아요, 그 심정.”

담담하게 뱉은 서진의 말에 정혁이 어이없단 얼굴로 물었다.

“안다고요? 뭘? 7개월간 기획해서 드디어 진행되던 공사가 그깟 종 하나 때문에 멈췄습니다. 이태리 연수고 뭐고, 모든 게 올 스톱이란 말입니다!”

“발굴 조사는 이뤄져야 해요.”

“역사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을 허비할 순 없습니다.”

“역사가 뭔데요?”

“역사는 그냥 기록입니다, 승자의 기록. 진평왕의 아들이 살았든 죽었든, 내 눈엔 역사에 기록조차 되지 못한 패자일 뿐이라구요.”

“패자의 진실은 그냥 묻혀야 한다?”

절제 못한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그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대꾸했다.

“눈으로 보지 못한 모든 것들은 책에 적힌 대로, 들리는 대로, 그냥 그런가 보다 믿는 겁니다.”

이채를 띤 눈으로 정혁을 바라보던 서진이 단정하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슬프네요.”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 정혁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응시하던 서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한 번쯤은…….”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운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들어 보고 싶지 않나요? 기록되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를.”



1


신라의 도읍. 천년 궁성(宮城)에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들었다. 잎사귀는 온통 연둣빛으로 물들었고,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은 저마다의 색을 뽐내며 아찔한 향을 흩날리고 있었다.

천명과 덕만. 진평왕의 두 딸도 궁 안을 물들인 봄의 가운데에 있었다.

사락.

바닥에 끌리는 고운 치맛단 안에서 툭, 발길질을 한 덕만이 눈에 닿는 꽃 한 송이를 손으로 건들며 입술을 삐죽였다. 사신들을 위해 베푼 연회장에서 아바마마께 조롱하듯 건넸다던 그들의 말을 떠올린 탓이다.

‘이토록 맛난 음식과 아름다운 여인들이 넘쳐 나는데, 어찌 왕께서는 왕위를 이을 후사가 없는지. 황제 폐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사신 주제에 감히 그딴 말을 지껄이다니.”

덕만의 중얼거림에 황급히 주변을 살핀 천명이 바짝 다가와 소리를 낮췄다.

“쉿! 누가 들을까 겁난다.”

“들으라지. 일개 사신 따위에 신라의 공주가 겁을 내? 언닌 그런 소릴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소?”

“사신이라도 당에서 보낸 이들이니 이웃국의 사신과는…….”

“당이 아니라 당 할아버지가 보냈어도 사신은 사신일 뿐이요.”

그러고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뭐? 황제 폐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누가 자기들더러 걱정해 달랬나? 대체 이 신국(神國)을 얼마나 얕봤으면 그딴 망발을 했을까.”

제 앞이었다면 당장 상을 뒤엎었을 텐데 아바마마는 사람 좋은 얼굴로 그저 허허 웃기만 하셨다 한다. 그것이 더더욱 그녀를 화나게 하는 이유다.

“왕은 하늘이 점지해 주시는 것이야. 욕심을 부린다고 취할 수 있느냐.”

담담한 얼굴로 타이르는 천명의 말에 덕만이 뾰족하게 눈썹을 세웠다.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왕자가 없으면 아바마마의 혈육지친(血肉之親)인 우리가 왕위를 잇는 건 당연한 건데.”

“순리를 따르잔 말이다. 그리될 일이라면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그리될 터이니.”

“부처님 같은 소리. 대체 욕심이란 게 있긴 하오?”

“나라고 욕심이 없을까. 다만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으니 하나를 가지고 나면 또 다른 것들을 바라게 될까 두려울 뿐이야.”

덕만이 천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언니는 그 하나도 가지지 못한다면 어찌할 건데?”

덕만의 물음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천명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 모든 걸 다 포기하겠지.”

“언니가 원하는 그 하나라는 게…… 설마, 왕위?”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덕만을 향해 천명이 방싯 미소를 지었다.

“비밀.”



* * *



같은 시각, 왕후전.

조용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얼굴과 달리 손가락에 끼워진 청옥 지환(指環)을 바쁘게 돌리는 마야의 손끝엔 초조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러고도 지워지지 않는 긴장감에 쥐었다 폈다,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마마, 소인 안으로 들어도 될는지요.

퍼뜩 고개를 돌린 마야가 서둘러 의자에 몸을 앉히며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들라.”

마야가 명하자 조용히 문이 열렸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핀 시녀가 빠르게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 알아보았느냐?”

마야가 바짝 몸을 세우며 물었다. 시녀가 바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마마.”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들려오는 말이 없었다. 꿀꺽, 침을 삼킨 마야가 눈짓하자 잠시 머뭇대던 시녀가 큰 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회임을 하신 것이, 확실하다 합니다.”

마야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그래? 알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목소리에 낙담이 어리고 말았다. 황급히 고개를 털어 낸 마야가 피하듯 시선을 내렸다.

“마마.”

말끝에 묻어난 습기를 애써 모른 척한 마야가 시녀를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어찌 그러느냐.”

“미천한 소인의 마음도 이리 혼노(惛怓)한데…….”

“시끄럽다.”

재빨리 시녀의 말을 잘라 낸 마야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을 뱉었다.

“내 지금 신궁으로 갈 터이니 채비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