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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 *
연못을 향해 뒷짐을 지고 선 진평의 두 걸음 옆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선 진현의 모습이 보인다. 진평의 옆에 응당 도열해 있어야 할 시녀들과 환수(宦竪)들은 그의 명(命)에 따라 중문 너머 멀찍이 걸음을 물린 채다.
적막에 잠긴 연못가.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만이 두 사람 곁을 고요히 맴돌다 사라진다.
“상대등의 나이가 올해 어찌 되는가?”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진평의 입술이 나직한 음성을 뱉어 냈다.
“서른이옵니다.”
“자네도 후사가 늦구먼.”
잠시 더 침묵을 지키던 진평이 천천히 몸을 돌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현.”
그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폐하! 어찌 신의 이름을…….”
“이곳에 뭐라 흉볼 사람도 없지 않은가. 이미 눈치 볼 나이도 지났고.”
진평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지어졌다.
“내 나이 어느새 서른아홉.”
그가 한숨처럼 중얼거리곤 소매 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이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불쑥 내밀어진 그것에 진현의 눈가가 갸름해졌다. 금으로 띠를 두른 나무 목패(木牌). 그곳엔 한자로 釋迦(석가)라고 적혀 있었다.
진현이 한동안 그것을 응시하자 진평이 덧붙였다.
“아들을 낳으면 붙여 주려고 했던 이름이네.”
얼핏 일그러진 진현의 얼굴에 애처로움이 깃들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진현이 입술을 달싹이던 순간,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린 진평이 연못을 향해 휘익, 그것을 집어 던졌다.
“폐하!”
크게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목패가 퐁당 소리를 내며 연못 아래로 가라앉았다. 놀란 진현이 다급히 연못으로 뛰어가려 하자 진평이 고개를 저으며 그를 말렸다.
“놔두시게.”
움직임을 멈춘 진현이 진평을 돌아보았다. 황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자신과 달리 짙은 체념에 젖은 진평의 얼굴은 오히려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겐, 부질없는 것이니.”
담담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굳은 듯 더 이상 걸음을 떼지 못한 진현이 연못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금씩 파문이 잦아들고 있는 목패의 흔적이 그의 눈동자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 * *
“아, 따분해.”
침상 위에 뉜 몸을 이리저리 비틀던 덕만이 천장을 바라보며 팔다리를 대자로 뻗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모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시란 일장 설교를 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래 봤자 금세 한 귀로 흘러나올 것을.
끄응, 머리를 짚은 유모가 손에 쥐고 있던 바느질감을 내려놓으며 덕만을 바라봤다.
“그러시길래 애초에 왕자마마로 태어나셨으면 나가서 활도 쏘고 말도 타고, 좀 좋으십니까?”
쫓아다니면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저나, 매일같이 제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공주님이나 모두가 못할 짓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왕 인심 쓰시는 김에 왕자님으로 점지를 해 주시든가, 아님 공주님 성격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눌러두었던 불만들이 이리 툭 튀어나오고 만다.
“안 그래도 좀 쑤셔 죽겠는데!”
발딱 몸을 일으킨 덕만이 유모를 바라보며 미간을 모았다.
“그놈의 남자, 남자, 남자 타령. 치마를 입고도 얼마든지 말을 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툴툴거리던 덕만의 눈이 갑자기 반짝, 빛을 발했다. 그 눈빛에 유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으어, 공주님? 공주님 그런 눈빛 하실 때마다 쇤네 가슴이…….”
쪼그라듭니다!
“만일 폐하께서 아시는 날엔 쇤네 목숨은 오늘로 끝입니다요.”
연신 주변을 살피며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던 유모가 덕만의 옆에 바짝 붙은 채 작게 속삭였다.
머루알처럼 까만 눈을 반짝이며 덕만이 향한 곳은 화랑들이 평소 무예 수련을 하는 연무장이었다. 궁 밖에 자리한 그곳엔 활쏘기를 하는 사대(射臺)와 창과 검을 겨룰 수 있는 창검술장, 평소 마상 무예를 연마하다가도 가끔 편을 갈라 축국(蹴鞠)을 하는 너른 공지(空地)가 광활히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마침 연무(硏武)를 쉬는 시간이었는지, 마른 먼지만 날린 채 텅 비어 있었다. 어쩐지 조금 김이 빠진 느낌에 덕만이 흐음, 숨을 내쉬었다.
“자, 다 둘러보신 것 같은데 그만 가시지요.”
유모의 재촉에 그녀가 눈썹을 모았다.
“보긴 뭘 봤다고.”
“더 계셔 무얼 하시게요.”
“뭐가 있어야 생각이라도 할 게 아니냐.”
“그러니 그만 가시자는 겁니다. 막말로 검술을 배우실 것도 아니고.”
“못 할 건 뭔데?”
유모가 기막힌 얼굴로 입을 쩍 벌리자 연무장을 두리번대며 덕만이 말했다.
“사내 타령을 하려거든 그만두어라. 나라를 위함에 남녀가 어디 있다고.”
그때, 누군가 매어 놓고 간 말 한 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총총걸음을 옮기던 덕만이 거추장스러운 치맛단을 휙 들어 올리곤 매여 있는 말을 향해 겅중겅중 달음박질을 쳤다.
“아이고, 공주마마!”
체통 없이 달리시면 아니 된다니까요!
퉁퉁한 몸집을 이끌고 뒤뚱뒤뚱 덕만의 뒤를 쫓던 유모는 채 뒷말을 잇지 못한 채 휘둥그레 눈을 키워야만 했다. 쓰다듬듯 갈기를 어루만지던 덕만이 겁도 없이 냉큼 말 위로 올라탔기 때문이다.
“헉!”
심장 안으로 커다란 주먹이 턱, 박히는 기분에 유모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아니 되옵니다, 손을 뻗는 순간 거칠게 투레질을 하던 말의 묶어 놓았던 매듭이 툭 풀려 버렸다.
히힝!
낯선 이의 등장에 가뜩이나 예민해진 말이 이내 자유로워진 제 상태를 느낀 듯 빠르게 땅을 박차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전혀 대비를 않고 있던 덕만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으악, 공주마마!”
유모의 비명이 너른 연무장 위로 울려 퍼졌다. 이어 벌어질 끔찍한 상황을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듯 유모가 질끈 눈을 감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하늘이시여.
제 목숨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이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공주마마 손에 능지처참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이곳까지 오시는 것을 막았을 텐데.
다그닥 다그닥.
순간 겹쳐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그녀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시야에 건장한 사내 하나가 빠르게 말을 몰아 덕만의 뒤를 쫓는 모습이 들어왔다.
주저앉아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 유모가 어느새 조그만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망연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난생처음 말 위에 올랐단 기쁨을 맛본 것도 잠시, 어느새 달리는 말의 고삐를 잡고 있던 덕만은 본능적으로 몸을 바짝 낮춘 채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겁이 나는 한편 정체 모를 해방감에 얼굴 위로 스치는 바람만큼이나 시원한 기분이 가슴속을 꿰뚫으며 들어섰다.
그나저나 말을 세우는 방법이나 알아두고 오를 것을.
손등의 관절이 하얗게 도드라질 만큼 바짝 고삐를 말아 쥔 덕만이 씰룩 미간을 찡그리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에 담을 틈도 없이 빠르게 사라지는 주변 경관이 앞을 향해 미친 듯 질주하고 있는 말의 속도를 말해 주고 있었다.
“아우, 좀 서 봐!”
답답한 마음에 크게 외쳐 보지만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말이 그녀의 청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멈출 생각 없이 달리는 말의 기세를 보니 배짱 좋게 올랐던 그녀도 슬슬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야!”
덜컥 겁이 난 덕만이 쥐고 있던 고삐를 바짝 당기며 다시 소리쳤다.
“그리 소리를 지르시면 아니 됩니다.”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덕만이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쫓아왔는지 말을 탄 사내가 뒤따르고 있었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이지요.”
거리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을 보니 제가 타고 있는 말만큼이나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능숙하게 말을 몰며 타이르듯 말을 건네는 남자는 말투나 표정에 전혀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고삐는 가볍게. 절대 당기지 마시고, 지그시 주먹을 쥐듯. 고삐를 그리 바짝 당기시면 빨리 가잔 소리로 알아들을 겝니다.”
말은 쉽지.
“이렇게 빨리 달리는데!”
“소리 지르지 마시고.”
허허.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입을 꾹 다문 덕만이 힐긋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붙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체를 그리 바짝 숙이시면 말은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상체는 똑바로 세우시고, 고삐 잡은 손은 그리 높게 올리시면 안 됩니다.”
아깐 고삐를 바짝 당기지 말라더니. 구시렁대면서도 그의 말대로 따르자 아까보다 조금 속도가 줄어드는 듯했다.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상체를 조금 뒤로 하시고.”
워.
달래듯 말에게 소리를 낸 남자가 손을 뻗어 고삐를 잡았다. 얼핏 보니 고삐를 조였다 풀어 주기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이제 발꿈치를 충분히 내리시고, 양다리를 말에 밀착시키십시오.”
덕만이 그의 지시에 따르는 사이, 그가 재차 워워 소리를 내며 고삐를 조정했다. 그러자 믿기지 않게도 말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하아.”
꼿꼿이 세우고 있던 허리가 툭, 하고 무너졌다. 노래졌던 하늘이 다시 푸르게 보이는 걸 보니 조금씩 제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간사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이깟 말 한 필 제대로 다루질 못해 그 위에 납작 엎드려 있었나, 생각하니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에잇!”
짜증 실린 발길이 말의 옆구리를 툭, 건드리자 히힝, 하고 투레질을 한 말이 갑자기 번쩍 앞발을 들어 올렸다.
“어?”
순식간에 중심을 잃은 덕만의 몸이 휙 꺾이며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뭐야. 이대로 죽는 건가, 싶으면서도 손에 쥔 고삐를 생명 줄인 양 꼭 움켜쥐었다.
빠르게 몸을 날린 사내가 가까스로 덕만의 허리를 잡았으나 그보다 먼저 발목이 땅에 꽂혔다.
“앗!”
둔탁한 통증에 그녀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가 잡아 준 덕에 직접 닿는 충격은 감소했지만 떨어지는 순간 아무래도 발목을 접질린 모양이었다.
* * *
연못을 향해 뒷짐을 지고 선 진평의 두 걸음 옆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선 진현의 모습이 보인다. 진평의 옆에 응당 도열해 있어야 할 시녀들과 환수(宦竪)들은 그의 명(命)에 따라 중문 너머 멀찍이 걸음을 물린 채다.
적막에 잠긴 연못가.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만이 두 사람 곁을 고요히 맴돌다 사라진다.
“상대등의 나이가 올해 어찌 되는가?”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진평의 입술이 나직한 음성을 뱉어 냈다.
“서른이옵니다.”
“자네도 후사가 늦구먼.”
잠시 더 침묵을 지키던 진평이 천천히 몸을 돌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현.”
그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폐하! 어찌 신의 이름을…….”
“이곳에 뭐라 흉볼 사람도 없지 않은가. 이미 눈치 볼 나이도 지났고.”
진평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지어졌다.
“내 나이 어느새 서른아홉.”
그가 한숨처럼 중얼거리곤 소매 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이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불쑥 내밀어진 그것에 진현의 눈가가 갸름해졌다. 금으로 띠를 두른 나무 목패(木牌). 그곳엔 한자로 釋迦(석가)라고 적혀 있었다.
진현이 한동안 그것을 응시하자 진평이 덧붙였다.
“아들을 낳으면 붙여 주려고 했던 이름이네.”
얼핏 일그러진 진현의 얼굴에 애처로움이 깃들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진현이 입술을 달싹이던 순간,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린 진평이 연못을 향해 휘익, 그것을 집어 던졌다.
“폐하!”
크게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목패가 퐁당 소리를 내며 연못 아래로 가라앉았다. 놀란 진현이 다급히 연못으로 뛰어가려 하자 진평이 고개를 저으며 그를 말렸다.
“놔두시게.”
움직임을 멈춘 진현이 진평을 돌아보았다. 황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자신과 달리 짙은 체념에 젖은 진평의 얼굴은 오히려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겐, 부질없는 것이니.”
담담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굳은 듯 더 이상 걸음을 떼지 못한 진현이 연못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금씩 파문이 잦아들고 있는 목패의 흔적이 그의 눈동자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 * *
“아, 따분해.”
침상 위에 뉜 몸을 이리저리 비틀던 덕만이 천장을 바라보며 팔다리를 대자로 뻗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모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시란 일장 설교를 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래 봤자 금세 한 귀로 흘러나올 것을.
끄응, 머리를 짚은 유모가 손에 쥐고 있던 바느질감을 내려놓으며 덕만을 바라봤다.
“그러시길래 애초에 왕자마마로 태어나셨으면 나가서 활도 쏘고 말도 타고, 좀 좋으십니까?”
쫓아다니면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저나, 매일같이 제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공주님이나 모두가 못할 짓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왕 인심 쓰시는 김에 왕자님으로 점지를 해 주시든가, 아님 공주님 성격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눌러두었던 불만들이 이리 툭 튀어나오고 만다.
“안 그래도 좀 쑤셔 죽겠는데!”
발딱 몸을 일으킨 덕만이 유모를 바라보며 미간을 모았다.
“그놈의 남자, 남자, 남자 타령. 치마를 입고도 얼마든지 말을 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툴툴거리던 덕만의 눈이 갑자기 반짝, 빛을 발했다. 그 눈빛에 유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으어, 공주님? 공주님 그런 눈빛 하실 때마다 쇤네 가슴이…….”
쪼그라듭니다!
“만일 폐하께서 아시는 날엔 쇤네 목숨은 오늘로 끝입니다요.”
연신 주변을 살피며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던 유모가 덕만의 옆에 바짝 붙은 채 작게 속삭였다.
머루알처럼 까만 눈을 반짝이며 덕만이 향한 곳은 화랑들이 평소 무예 수련을 하는 연무장이었다. 궁 밖에 자리한 그곳엔 활쏘기를 하는 사대(射臺)와 창과 검을 겨룰 수 있는 창검술장, 평소 마상 무예를 연마하다가도 가끔 편을 갈라 축국(蹴鞠)을 하는 너른 공지(空地)가 광활히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마침 연무(硏武)를 쉬는 시간이었는지, 마른 먼지만 날린 채 텅 비어 있었다. 어쩐지 조금 김이 빠진 느낌에 덕만이 흐음, 숨을 내쉬었다.
“자, 다 둘러보신 것 같은데 그만 가시지요.”
유모의 재촉에 그녀가 눈썹을 모았다.
“보긴 뭘 봤다고.”
“더 계셔 무얼 하시게요.”
“뭐가 있어야 생각이라도 할 게 아니냐.”
“그러니 그만 가시자는 겁니다. 막말로 검술을 배우실 것도 아니고.”
“못 할 건 뭔데?”
유모가 기막힌 얼굴로 입을 쩍 벌리자 연무장을 두리번대며 덕만이 말했다.
“사내 타령을 하려거든 그만두어라. 나라를 위함에 남녀가 어디 있다고.”
그때, 누군가 매어 놓고 간 말 한 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총총걸음을 옮기던 덕만이 거추장스러운 치맛단을 휙 들어 올리곤 매여 있는 말을 향해 겅중겅중 달음박질을 쳤다.
“아이고, 공주마마!”
체통 없이 달리시면 아니 된다니까요!
퉁퉁한 몸집을 이끌고 뒤뚱뒤뚱 덕만의 뒤를 쫓던 유모는 채 뒷말을 잇지 못한 채 휘둥그레 눈을 키워야만 했다. 쓰다듬듯 갈기를 어루만지던 덕만이 겁도 없이 냉큼 말 위로 올라탔기 때문이다.
“헉!”
심장 안으로 커다란 주먹이 턱, 박히는 기분에 유모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아니 되옵니다, 손을 뻗는 순간 거칠게 투레질을 하던 말의 묶어 놓았던 매듭이 툭 풀려 버렸다.
히힝!
낯선 이의 등장에 가뜩이나 예민해진 말이 이내 자유로워진 제 상태를 느낀 듯 빠르게 땅을 박차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전혀 대비를 않고 있던 덕만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으악, 공주마마!”
유모의 비명이 너른 연무장 위로 울려 퍼졌다. 이어 벌어질 끔찍한 상황을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듯 유모가 질끈 눈을 감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하늘이시여.
제 목숨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이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공주마마 손에 능지처참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이곳까지 오시는 것을 막았을 텐데.
다그닥 다그닥.
순간 겹쳐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그녀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시야에 건장한 사내 하나가 빠르게 말을 몰아 덕만의 뒤를 쫓는 모습이 들어왔다.
주저앉아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 유모가 어느새 조그만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망연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난생처음 말 위에 올랐단 기쁨을 맛본 것도 잠시, 어느새 달리는 말의 고삐를 잡고 있던 덕만은 본능적으로 몸을 바짝 낮춘 채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겁이 나는 한편 정체 모를 해방감에 얼굴 위로 스치는 바람만큼이나 시원한 기분이 가슴속을 꿰뚫으며 들어섰다.
그나저나 말을 세우는 방법이나 알아두고 오를 것을.
손등의 관절이 하얗게 도드라질 만큼 바짝 고삐를 말아 쥔 덕만이 씰룩 미간을 찡그리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에 담을 틈도 없이 빠르게 사라지는 주변 경관이 앞을 향해 미친 듯 질주하고 있는 말의 속도를 말해 주고 있었다.
“아우, 좀 서 봐!”
답답한 마음에 크게 외쳐 보지만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말이 그녀의 청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멈출 생각 없이 달리는 말의 기세를 보니 배짱 좋게 올랐던 그녀도 슬슬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야!”
덜컥 겁이 난 덕만이 쥐고 있던 고삐를 바짝 당기며 다시 소리쳤다.
“그리 소리를 지르시면 아니 됩니다.”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덕만이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쫓아왔는지 말을 탄 사내가 뒤따르고 있었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이지요.”
거리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을 보니 제가 타고 있는 말만큼이나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능숙하게 말을 몰며 타이르듯 말을 건네는 남자는 말투나 표정에 전혀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고삐는 가볍게. 절대 당기지 마시고, 지그시 주먹을 쥐듯. 고삐를 그리 바짝 당기시면 빨리 가잔 소리로 알아들을 겝니다.”
말은 쉽지.
“이렇게 빨리 달리는데!”
“소리 지르지 마시고.”
허허.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입을 꾹 다문 덕만이 힐긋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붙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체를 그리 바짝 숙이시면 말은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상체는 똑바로 세우시고, 고삐 잡은 손은 그리 높게 올리시면 안 됩니다.”
아깐 고삐를 바짝 당기지 말라더니. 구시렁대면서도 그의 말대로 따르자 아까보다 조금 속도가 줄어드는 듯했다.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상체를 조금 뒤로 하시고.”
워.
달래듯 말에게 소리를 낸 남자가 손을 뻗어 고삐를 잡았다. 얼핏 보니 고삐를 조였다 풀어 주기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이제 발꿈치를 충분히 내리시고, 양다리를 말에 밀착시키십시오.”
덕만이 그의 지시에 따르는 사이, 그가 재차 워워 소리를 내며 고삐를 조정했다. 그러자 믿기지 않게도 말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하아.”
꼿꼿이 세우고 있던 허리가 툭, 하고 무너졌다. 노래졌던 하늘이 다시 푸르게 보이는 걸 보니 조금씩 제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간사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이깟 말 한 필 제대로 다루질 못해 그 위에 납작 엎드려 있었나, 생각하니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에잇!”
짜증 실린 발길이 말의 옆구리를 툭, 건드리자 히힝, 하고 투레질을 한 말이 갑자기 번쩍 앞발을 들어 올렸다.
“어?”
순식간에 중심을 잃은 덕만의 몸이 휙 꺾이며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뭐야. 이대로 죽는 건가, 싶으면서도 손에 쥔 고삐를 생명 줄인 양 꼭 움켜쥐었다.
빠르게 몸을 날린 사내가 가까스로 덕만의 허리를 잡았으나 그보다 먼저 발목이 땅에 꽂혔다.
“앗!”
둔탁한 통증에 그녀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가 잡아 준 덕에 직접 닿는 충격은 감소했지만 떨어지는 순간 아무래도 발목을 접질린 모양이었다.